2008년 9월 27일에 시행한 선관위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문1. 아래의 도자기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가 )
( 나 )
① ㈎에 사용된 기법은 나전수법에서 시작하였으며 원 간섭기 이후 퇴조하였다.
② ㈏는 민간에까지 널리 사용되었고 다채로운 안료를 사용하였다.
③ ㈎에서 ㈏로의 변화는 고려의 독창적 상감기법이 개발된 성과였다.
④ ㈎에서 ㈏로 변화한 것은 ㈏가 순백의 고상함을 풍겨 선비들의 취향과 어울렸기 때문이다.
정답 - 1번
해설
지문의 ㈎는 상감청자의 일종인 청자상감운학무늬매병이고, ㈏는 분청사기의 일종인 분청사기조화어문편병이다. 목칠공예에서 조개껍질을 집어넣는 나전수법이 금속공예에서 은사(銀絲)를 집어넣는 입사수법으로 발전하고, 도자기에서 그릇 표면을 파낸 자리에 백토, 흑토를 메워 무늬를 내는 상감법으로 발전하였다.
상감청자는 12세기 중엽에 고려의 독창적 상감법이 개발되어 자기에 활용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강화도에 도읍한 13세기 중엽까지 주류를 이루었으나, 원 간섭기 이후에 퇴조해 갔다.
분청사기는 청자에 백토의 분을 칠한 것으로 고려 말에 나타나 조선초기까지 유행하였으나, 16세기부터 세련된 백자가 본격으로 생산되면서 점차 생산이 줄어들었다.
②는 조선후기의 청화백자, 철화백자, 진사백자와 관련이 있다.
④는 16세기의 백자와 관련이 있다.
해설
지문의 ㈎는 상감청자의 일종인 청자상감운학무늬매병이고, ㈏는 분청사기의 일종인 분청사기조화어문편병이다. 목칠공예에서 조개껍질을 집어넣는 나전수법이 금속공예에서 은사(銀絲)를 집어넣는 입사수법으로 발전하고, 도자기에서 그릇 표면을 파낸 자리에 백토, 흑토를 메워 무늬를 내는 상감법으로 발전하였다.
상감청자는 12세기 중엽에 고려의 독창적 상감법이 개발되어 자기에 활용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강화도에 도읍한 13세기 중엽까지 주류를 이루었으나, 원 간섭기 이후에 퇴조해 갔다.
분청사기는 청자에 백토의 분을 칠한 것으로 고려 말에 나타나 조선초기까지 유행하였으나, 16세기부터 세련된 백자가 본격으로 생산되면서 점차 생산이 줄어들었다.
②는 조선후기의 청화백자, 철화백자, 진사백자와 관련이 있다.
④는 16세기의 백자와 관련이 있다.
문2.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미륵신앙이 성행하면서 미륵반가사유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② 상원사 종, 성덕대왕 신종 등 범종이 많이 주조되었다.
③ 팔각원당형을 기본형으로 하는 승탑과 승려의 일대기를 새긴 탑비가 유행하였다.
④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쌓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이 완성되었다.
정답 - 1번
해설
신라에서는 통일 이전이나 통일 이후에 미륵신앙이 성행하였다고 볼 수는 있으나 미륵반가사유상(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다.
해설
신라에서는 통일 이전이나 통일 이후에 미륵신앙이 성행하였다고 볼 수는 있으나 미륵반가사유상(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다.
문3. 아래에서 언급하고 있는 행위자(들)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 일본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해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헌납할 당시의 화폐단위로 10만원 이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자 * 고등문관 이상의 관리, 헌병, 경찰 또는 판사, 검사, 사법관리로서 우리 민족구성원을 감금, 고문, 학대하는 등 탄압에 적극 앞장선 행위자 * 학병, 지원병, 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으로 선전,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자 |
② 만주 등지에서 기업이나 공장 경영을 하기도 하였다.
③ 흥남에 대규모 질소비료공장을 설립하였다.
④ 일제의 경찰이나 밀정이 되어 민족운동을 탄압하였다.
정답 - 3번
해설
지문은 2003년 8월 14일에 김희선 의원 등 16대 국회의원 155명의 발의에 의해 2004년 3월 2일에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안'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 법안은 여야 간의 조정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손질을 거쳐 2004년 12월 29일에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명칭으로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따라서 지문의 내용은 친일파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③은 일제가 일본자본의 침투를 촉진시키기 위해 회사령을 철폐하여 회사의 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계출제)로 바꾼 결과이다. 즉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은 친일파가 아니라 일본인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해설
지문은 2003년 8월 14일에 김희선 의원 등 16대 국회의원 155명의 발의에 의해 2004년 3월 2일에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안'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 법안은 여야 간의 조정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손질을 거쳐 2004년 12월 29일에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명칭으로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따라서 지문의 내용은 친일파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③은 일제가 일본자본의 침투를 촉진시키기 위해 회사령을 철폐하여 회사의 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계출제)로 바꾼 결과이다. 즉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은 친일파가 아니라 일본인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문4. 다음의 내용 중에서 갑오개혁에 따른 변화가 아닌 것으로만 묶인 것은?
ㄱ. 왕실과 일반 행정이 제도적으로 분리되게 되었다. ㄴ. 공노비가 해방되고 노비세습제가 철폐되었다. ㄷ. 은본위 화폐제도와 조세의 금납화가 실시되었다. ㄹ. 행정권과 사법권이 분리되어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ㅁ. 군비의 강화를 위하여 5군영이 다시 설치되었다. |
② ㄴ, ㅁ
③ ㄷ, ㄹ
④ ㄹ, ㅁ
정답 - 2번
해설
지문에 있는 ㄴ의 공노비는 순조 때(1801년) 일부(대부분, 내수사 등 중앙관청의 노비)가 해방되고 나머지 공노비와 사노비는 갑오개혁 때(1894년) 해방되었으나, 노비세습제는 1886년에 철폐되었다.
갑오개혁은 당시 가장 절실한 과제였던 군사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ㅁ의 군비강화와는 관련이 없다.
5군영은 개항 이후 정부의 개화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1881년에 2영(무위영, 장어영)으로 개편되었다가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이 일시 집권하면서 삼군부와 함께 다시 설치된 적이 있었다.
해설
지문에 있는 ㄴ의 공노비는 순조 때(1801년) 일부(대부분, 내수사 등 중앙관청의 노비)가 해방되고 나머지 공노비와 사노비는 갑오개혁 때(1894년) 해방되었으나, 노비세습제는 1886년에 철폐되었다.
갑오개혁은 당시 가장 절실한 과제였던 군사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ㅁ의 군비강화와는 관련이 없다.
5군영은 개항 이후 정부의 개화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1881년에 2영(무위영, 장어영)으로 개편되었다가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이 일시 집권하면서 삼군부와 함께 다시 설치된 적이 있었다.
문5. 다음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통일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공식대화기구인 남북조절위원회의 구성 * 남북한 정권 모두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장기집권체제의 구축 * 남북회담용 직통전화의 가설 * 북한에 대한 호칭을 괴뢰에서 북한으로 변경 |
② 남북한 당국은 남북분단 이후 처음으로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3대 통일원칙을 담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③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였다.
④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우리 민족과 주변 강국간의 합의를 거쳐 해결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정답 - 2번
해설
지문에 있는 ‘남북조절위원회의 구성’, ‘직통전화의 가설’ 등을 통해서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이 없는 자주적․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민족 대단결을 도모한다는 7․4남북공동성명(1972년)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①의 닉슨 독트린은 1969년에 발표되고 1970년에 미국 의회에 제출되었다. 이후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켰으며, 주한 미군의 병력 감축을 결정하였다.
③은 1991년에 개최된 남북고위급회담과 관련이 있다.
해설
지문에 있는 ‘남북조절위원회의 구성’, ‘직통전화의 가설’ 등을 통해서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이 없는 자주적․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민족 대단결을 도모한다는 7․4남북공동성명(1972년)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①의 닉슨 독트린은 1969년에 발표되고 1970년에 미국 의회에 제출되었다. 이후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켰으며, 주한 미군의 병력 감축을 결정하였다.
③은 1991년에 개최된 남북고위급회담과 관련이 있다.
문6. 각 시대의 신분제도와 관련된 다음의 설명 중 옳은 것을 모두 고르면?
ㄱ. 신라 서원경 일대의 촌락문서에 의하면 전 주민 중 노비의 비율은 10%도 되지 않았다. ㄴ. 고려시대의 백정(白丁)은 천민(賤民)이었다. ㄷ. 조선 초에 외거노비가 주인에게서 받아 경작하는 토지 중 수확물을 자신이 갖는 것을 작개지(作介地)라 하였다. ㄹ. 1801년에는 내수사 노비를 비롯한 관노비를 해방함으로써, 관노비제도가 혁파되었다. |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ㄷ, ㄹ
정답 - 1번
해설
지문의 ㄱ에 있는 촌락문서(민정문서)를 보면 호구 43개에 총인구는 노비 25명을 포함하여 442명(남자 194명, 여자 248명)이며, 소 53마리, 말 61마리, 뽕나무 4249그루, 잣나무 230그루, 호두나무 338그루 등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ㄴ의 백정은 고려시대에는 천민이 아닌 농민(모든 농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 농민 중에서 특정한 직역을 갖지 않은 사람을 의미)이고, 조선시대에는 법적으로는 양인이고 현실적으로는 도살업에 종사는 천민이다.
ㄷ의 작개지는 외거노비가 주인에게 수확량을 모두 바치는 땅이고, 외거노비가 수확량을 가지는 땅은 사경지(私耕地)이다.
ㄹ의 관노비(공노비)는 1801년(순조)에 일부(내수사 등 중앙관청의 노비)가 해방되었으나 공․사노비제도는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해설
지문의 ㄱ에 있는 촌락문서(민정문서)를 보면 호구 43개에 총인구는 노비 25명을 포함하여 442명(남자 194명, 여자 248명)이며, 소 53마리, 말 61마리, 뽕나무 4249그루, 잣나무 230그루, 호두나무 338그루 등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ㄴ의 백정은 고려시대에는 천민이 아닌 농민(모든 농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 농민 중에서 특정한 직역을 갖지 않은 사람을 의미)이고, 조선시대에는 법적으로는 양인이고 현실적으로는 도살업에 종사는 천민이다.
ㄷ의 작개지는 외거노비가 주인에게 수확량을 모두 바치는 땅이고, 외거노비가 수확량을 가지는 땅은 사경지(私耕地)이다.
ㄹ의 관노비(공노비)는 1801년(순조)에 일부(내수사 등 중앙관청의 노비)가 해방되었으나 공․사노비제도는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문7. 문자(표기) 체계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기역’, ‘니은’은 『훈민정음』 용자례에서 비롯되었다.
② 향찰로 기록된 글은 문장 전체를 고유어 발음으로 읽을 수 있다.
③ 훈민정음의 초성(初聲) 글자들은 음성기관의 상형(象形)을 기본으로 삼아 만들어졌다.
④ 이두는 고구려에서 발생하여 신라에서 발달하였다.
정답 - 1번
해설
①의 훈민정음 용자례는 초성(初聲), 중성(中聲), 종성(終聲)으로 나누어 ᄀ, ㄴ, ㄷ, ㄹ, ㅁ 등의 자음과 ㅏ, ㅑ, ㅓ, ㅕ, ㅗ 등의 모음을 적어 놓고 그 쓰임새를 기록한 해설서이다. 그러다가 1527년에 최세진이 훈몽자회(訓蒙字會)를 지으면서 기역(其役), 니은(尼隱), 디귿(池末), 리을(梨乙), 미음(眉音), 아(阿), 야(也), 어(於), 여(余), 오(吾) 등의 표기가 시작되었다.
해설
①의 훈민정음 용자례는 초성(初聲), 중성(中聲), 종성(終聲)으로 나누어 ᄀ, ㄴ, ㄷ, ㄹ, ㅁ 등의 자음과 ㅏ, ㅑ, ㅓ, ㅕ, ㅗ 등의 모음을 적어 놓고 그 쓰임새를 기록한 해설서이다. 그러다가 1527년에 최세진이 훈몽자회(訓蒙字會)를 지으면서 기역(其役), 니은(尼隱), 디귿(池末), 리을(梨乙), 미음(眉音), 아(阿), 야(也), 어(於), 여(余), 오(吾) 등의 표기가 시작되었다.
문8. 근대에 설립된 학교들을 설립된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① 이화학당 - 육영공원 - 오산학교 - 경신학교
② 육영공원 - 배재학당 - 이화학당 - 동문학
③ 원산학사 - 배재학당 - 흥화학교 - 경신학교
④ 동문학 - 배재학당 - 흥화학교 - 오산학교
정답 - 4번
해설 -
해설 -
원산학사 | 1883년 | 최초의 근대사립학교 |
동문학 | 1883년 | 정부에서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해서 설립한 영어강습기관 |
배재학당 | 1886년 | ․1885년에 아펜젤러가 수업을 시작 ․고종이 1886년 6월에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간판을 하사 |
이화학당 | 1886년 | ․최초의 여성교육기관 ․1910년에 대학부를 설치 |
육영공원 | 1886년 | ․최초의 근대관립학교 ․헐버트, 길모어 등의 미국인 교사를 초빙 |
경신학교 | 1886년 | |
흥화학교 | 1895년 | ․민영환이 외국어와 선진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 ․심상과, 특별과, 양지과가 있었음 ․영어, 일어, 측량술의 강좌를 개설하였음 |
오산학교 | 1907년 | 이승훈 등이 정주에 설립 |
문9. 다음에 제시된 사항들과 모두 관련된 인물은?
* 헤이그 특사 * 서전서숙 * 대한광복군정부 * 권업회 * 신한혁명당 |
② 이상설
③ 김원봉
④ 이동휘
정답 - 2번
해설
해설
서전서숙 | 1906년 | ․이상설 등이 간도의 용정에 설립 ․김약연이 명동학교로 개명 |
헤이그특사 | 1907년 |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이 을사조약의 무효를 밝혔음 |
권업회 | 1912년 | ․이상설, 이종덕 등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립 ․무장조직의 성격을 감추기 위해서 실업을 권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정함 |
대한광복군정부 | 1914년 | ․이상설을 정통령, 이동휘를 부통령으로 하는 군정부를 수립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립 |
신한혁명당 | 1915년 | 이상설,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박용만, 조소앙 등이 창립 |
문10. 1991년 12월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관계의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이 합의서에 포함된 내용이 아닌 것은?
① 남북간 군사훈련참관
② 남북간 상호불가침
③ 남북간 문화교류
④ 남북간 경제교류
정답 - 1번
해설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는 제1장 남북화해, 제2장 남북불가침, 제3장 남북교류․협력, 제4장 수정 및 발표 등 4부분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 제2장의 제12조와 제13조를 살펴보면 ‘대규모 부대이동과 군사연습의 통보 및 통제문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문제, 군인사교류 및 정보교환문제 등을 협의, 추진하고 군사당국자 사이에 직통 전화를 설치, 운영한다는 내용은 있으나 군사훈련의 참관에 대한 내용은 없다.
해설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는 제1장 남북화해, 제2장 남북불가침, 제3장 남북교류․협력, 제4장 수정 및 발표 등 4부분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 제2장의 제12조와 제13조를 살펴보면 ‘대규모 부대이동과 군사연습의 통보 및 통제문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문제, 군인사교류 및 정보교환문제 등을 협의, 추진하고 군사당국자 사이에 직통 전화를 설치, 운영한다는 내용은 있으나 군사훈련의 참관에 대한 내용은 없다.
문11. 다음은 향촌사회의 변화에 따른 향리의 시기별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시대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지방 사족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수령이 절대권을 갖는 지배체제 하에서 농민수탈을 일삼았다. ㄴ. 향촌의 실질적 지배층으로 향촌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도적이 위치에 있었다. ㄷ. 사족의 향촌자치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 수령의 행정실무를 보좌하는 세습적인 아전이 되었다. |
② ㄴ - ㄷ - ㄱ
③ ㄷ - ㄱ - ㄴ
④ ㄷ - ㄴ - ㄱ
정답 - 2번
해설
향리는 원래 나말여초 중소호족출신이었는데, 집권적 지배체제의 정비 과정을 통하여 주민과 직접 접촉하는 행정실무자가 되었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지문의 ㄱ은 세도정치 때를 포함한 조선후기, ㄴ은 고려시대, ㄷ은 조선전기와 관련이 있다.
※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향리 비교
▶ 공통점
- 신분과 향직의 세습
- 중간계층 ; 귀족X, 양반X
- 지방의 행정실무를 담당 (권한에는 차이가 있음)
▶ 차이점
(1) 고려시대 향리 (권한이 강함)
① 외역전을 보수로 받음
② 일품군의 지휘를 담당
③ 농민을 사적으로 지배할 수 있음
④ 자기의 권한과 책임 아래에 속현, 촌, 향, 소, 부곡의 행정실무를 담당
⑤ 호장, 부호장 등 상위 향리
㉠호족출신
㉡과거를 통해 귀족으로 성장
(현종의 주현공거법)
㉢지방(향촌)의 실질적 지배자
⑥ 병정, 창정, 호정 등 하위 향리는 말단행정직에 종사
(2) 조선시대 향리 (권한이 약함)
① 보수가 없음
② 군사지휘권이 없음
③ 향리와 토호에 의한 사적인 농민의 지배를 금지(농민이 향리와 토호의 지배로부터 독립)
④ 문과응시의 제한
⑤ 6방에 소속되어 수령을 보좌하는 세습적인 아전으로 격하
⑥ 조선후기에 수령의 권한이 강화되고 부농이 대두하면 권한이 커짐
⑦ 조선후기에 향리의 역사서인 연조귀감을 저술하여 향리와 사대부의 뿌리가 같음을 강조
해설
향리는 원래 나말여초 중소호족출신이었는데, 집권적 지배체제의 정비 과정을 통하여 주민과 직접 접촉하는 행정실무자가 되었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지문의 ㄱ은 세도정치 때를 포함한 조선후기, ㄴ은 고려시대, ㄷ은 조선전기와 관련이 있다.
※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향리 비교
▶ 공통점
- 신분과 향직의 세습
- 중간계층 ; 귀족X, 양반X
- 지방의 행정실무를 담당 (권한에는 차이가 있음)
▶ 차이점
(1) 고려시대 향리 (권한이 강함)
① 외역전을 보수로 받음
② 일품군의 지휘를 담당
③ 농민을 사적으로 지배할 수 있음
④ 자기의 권한과 책임 아래에 속현, 촌, 향, 소, 부곡의 행정실무를 담당
⑤ 호장, 부호장 등 상위 향리
㉠호족출신
㉡과거를 통해 귀족으로 성장
(현종의 주현공거법)
㉢지방(향촌)의 실질적 지배자
⑥ 병정, 창정, 호정 등 하위 향리는 말단행정직에 종사
(2) 조선시대 향리 (권한이 약함)
① 보수가 없음
② 군사지휘권이 없음
③ 향리와 토호에 의한 사적인 농민의 지배를 금지(농민이 향리와 토호의 지배로부터 독립)
④ 문과응시의 제한
⑤ 6방에 소속되어 수령을 보좌하는 세습적인 아전으로 격하
⑥ 조선후기에 수령의 권한이 강화되고 부농이 대두하면 권한이 커짐
⑦ 조선후기에 향리의 역사서인 연조귀감을 저술하여 향리와 사대부의 뿌리가 같음을 강조
문12. 다음에 있는 조선후기의 군사제도에 대한 설명 중 옳은 것으로만 묶은 것은?
ㄱ. 정규군 외에 서리, 잡학인, 노비 등을 소속시킨 일종의 예비군을 운영하였다. ㄴ. 중앙군은 궁궐과 서울을 수비하는 5위로 구성하여 문반관료가 지휘하게 하였다. ㄷ. 속오군의 훈련은 대체로 영장(營將)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ㄹ. 지방군은 주진군과 주현군으로 이루어졌다. ㅁ. 훈련도감의 살수는 장기간 근무를 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상비군이다. |
② ㄴ, ㄷ
③ ㄷ, ㅁ
④ ㄱ, ㄹ
정답 - 3번
해설
지문의 ㄱ은 조선전기의 잡색군과 관련이 있다. ㄴ은 조선전기, ㄹ은 고려시대에 해당된다.
해설
지문의 ㄱ은 조선전기의 잡색군과 관련이 있다. ㄴ은 조선전기, ㄹ은 고려시대에 해당된다.
문13. 통일신라시대의 토지제도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경덕왕 16년 녹읍제도의 부활은 귀족의 권한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② 신문왕 7년에 지급된 문무 관료전은 조․용․조의 수취가 가능한 토지였다.
③ 성덕왕 21년에 지급된 정전은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하였다.
④ 신문왕대 관료전을 지급한 것은 왕권강화정책의 일환이다.
정답 - 2번
해설
②의 조(租 : 조세)․용(庸 : 노동력)․조(調 : 특산물)는 통일신라 때 당의 체제를 도입한 것이다. 녹읍과 식읍은 조세와 공물을 징수하고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었으나 관료전은 수조권만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백성에 대한 노동력(용)을 징발할 수 없었다
해설
②의 조(租 : 조세)․용(庸 : 노동력)․조(調 : 특산물)는 통일신라 때 당의 체제를 도입한 것이다. 녹읍과 식읍은 조세와 공물을 징수하고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었으나 관료전은 수조권만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백성에 대한 노동력(용)을 징발할 수 없었다
문14. 조선시대에 전개된 일본과의 대외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여 국교를 재개하였다.
② 조선 초 일본인들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3개의 항구를 열어 제한적으로 교역을 허락하였다.
③ 세종대 이종무가 쓰시마 섬을 정벌하여 쓰시마 도주의 항복을 받았다.
④ 17세기 초부터 일본에 개항할 때까지 정기적으로 통신사를 통한 활발한 교류를 진행시켰다.
정답 - 4번
해설
④의 통신사는 조선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권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는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將軍)이 바뀔 때마다 요청을 하여 파견하였다. 통신사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파견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선조 때부터(1607년) 일본에 개항(강화도조약, 1876년)하기 이전인 순조 때까지(1811년) 12회(국교재개 이전인 유정을 포함하면 13회)에 걸쳐 파견하였다. 따라서 ‘일본에 개항할 때까지’와 ‘정기적’이라는 표현이 틀린 것이다.
해설
④의 통신사는 조선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권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는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將軍)이 바뀔 때마다 요청을 하여 파견하였다. 통신사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파견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선조 때부터(1607년) 일본에 개항(강화도조약, 1876년)하기 이전인 순조 때까지(1811년) 12회(국교재개 이전인 유정을 포함하면 13회)에 걸쳐 파견하였다. 따라서 ‘일본에 개항할 때까지’와 ‘정기적’이라는 표현이 틀린 것이다.
문15. 다음은 수공업자들의 경제생활을 나타낸 것이다. 시대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관영수공업이 발달하여 관청에 등록된 장인들은 의류, 활자, 화약, 무기 등을 제조하여 납품하였다. ㄴ. ‘소’에서는 금, 은, 철, 구리, 실, 각종 옷감, 종이, 먹 등을 생산하여 공물로 납부하였다. ㄷ. 상품화폐경제가 진전되면서 시장판매를 위한 수공업제품의 생산이 활발해졌다. |
② ㄴ - ㄱ - ㄷ
③ ㄷ - ㄴ - ㄱ
④ ㄴ - ㄷ - ㄱ
정답 - 2번
해설
지문에 있는 ㄱ은 조선전기와 관련이 있다. ㄴ의 소는 고려시대에 있었다(향과 부곡은 신라에도 있었음). ㄷ은 ‘상품화폐경제가 진전’을 통해서 조선후기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설
지문에 있는 ㄱ은 조선전기와 관련이 있다. ㄴ의 소는 고려시대에 있었다(향과 부곡은 신라에도 있었음). ㄷ은 ‘상품화폐경제가 진전’을 통해서 조선후기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16. 다음의 상황이 전개된 시기를 아래 연표에서 고르면?
(눌지 마립간) 18년 2월, 백제왕이 좋은 말 두 필을 보내왔다. 18년 9월, 백제왕이 다시 흰 매를 보내왔다. …… 39년 10월,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므로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 |
(가) - 371년(백제 평양성 공격) - (나) - 427년(고구려 평양천도) - (다) - 553년(신라 한강유역 확보) -(라) |
② ㈏
③ ㈐
④ ㈑
정답 - 3번
해설
지문에 있는 눌지 마립간(눌지왕)은 417년부터 458년까지 왕위에 있으면서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체결하였으며, 왕위계승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꾸었다. 지문에는 눌지 마립간 18년부터 기록되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해설
지문에 있는 눌지 마립간(눌지왕)은 417년부터 458년까지 왕위에 있으면서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체결하였으며, 왕위계승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꾸었다. 지문에는 눌지 마립간 18년부터 기록되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문17. 다음에 있는 역사서의 공통점으로 옳은 것은?
* 삼국유사 * 삼국사절요 * 제왕운기 * 해동역사 |
② 모두 기전체로 되어 있다.
③ 모두 고조선의 역사를 담고 있다.
④ 서술방식의 기원을 모두 자치통감에 두고 있다.
정답 - 3번
해설
④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송나라의 사마광에 의해서 편년체로 쓰여진 통사이다.
해설
삼국 유사 |
고려 충렬왕 | 기사본말체와 유사 | ․고대의 민간설화나 전래기록을 수록 ․단군신화를 수록 |
제왕 운기 |
고려 충렬왕 | 서사시 | ․우리나라의 역사를 단군에서부터 서술 ․발해를 기록 |
삼국사 절요 |
조선 성종 | 편년체 | ․삼국사기에 빠진 고조선사를 보완 ․삼국시대의 역사를 재정리 |
해동 역사 |
조선 순조 | 기전체 |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 기록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 |
문18. 다음 중 왕과 업적이 바르게 연결된 것은?
① 자비왕 - 주(州)와 군(郡)의 지방행정구역을 정리하고 우산국을 복속
② 무령왕 -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수복하고 일본에 불교를 전함
③ 법흥왕 -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태학의 설립 등으로 국가체제를 개혁
④ 장수왕 - 중국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고 남양만 일대까지 판도를 넓힘
정답 - 4번
해설
①은 신라 지증왕, ②는 백제 성왕과 관련이 있다. ③에 있는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은 고구려 소수림왕과 신라 법흥왕의 공통된 업적이지만, 태학의 설립은 고구려 소수림왕의 업적이다.
해설
①은 신라 지증왕, ②는 백제 성왕과 관련이 있다. ③에 있는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은 고구려 소수림왕과 신라 법흥왕의 공통된 업적이지만, 태학의 설립은 고구려 소수림왕의 업적이다.
문19. 다음은 어느 인물의 연보이다. ㈑에서 ㈒시기 사이의 저술로 옳지 않은 것은?
㈎ 22세(1363년) 봄에 충주목의 사록에 임명됨 ㈏ 30세(1371년) 신돈이 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개경으로 돌아옴 ㈐ 33세(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친원파 권신 이인임의 미움을 삼 ㈑ 34세(1375년) 명을 협공하기 위해 입국한 북원 사신의 목을 베겠다고 저항해 전라도 나주로 귀양감 ㈒ 42세(1383년) 함경도 함주막을 찾아가 이성계를 만나 혁명을 결의하고 김포로 돌아옴 |
② 금남잡영
③ 금남잡제
④ 불씨잡변
정답 - 4번
해설
지문에 있는 ‘북원 사신의 목을 베겠다’, ‘이성계를 만나 혁명을 결의’ 등을 통해서 정도전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도전은 성리학이 불교나 도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문답형식으로 깨우쳐 주는 심기이, 심문천답을 저술하였는데, 이를 조선의 건국(1392년) 이후 더욱 발전시켜 불씨잡변이라는 명저를 남겼다.
해설
지문에 있는 ‘북원 사신의 목을 베겠다’, ‘이성계를 만나 혁명을 결의’ 등을 통해서 정도전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도전은 성리학이 불교나 도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문답형식으로 깨우쳐 주는 심기이, 심문천답을 저술하였는데, 이를 조선의 건국(1392년) 이후 더욱 발전시켜 불씨잡변이라는 명저를 남겼다.
문20. 다음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농업경제와 관련된 제도들을 순서없이 열거한 것이다. 가장 많은 제도가 시행된 시대의 경제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단, 시대구분은 신라,고려,조선시대로 한다.)
전시과(田柴科), 연수유전답(烟受有田畓), 전정연립(田丁連立), 과전법(科田法), 직전법(職田法), 역분전(役分田), 공해전(公廨田) |
② 그 해의 퓽흉(작황)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을 두고 조세를 부과하였다.
③ 1년 경작 후 2년 휴한하는 농토의 등급을 재역(再易)이라고 지칭하였다.
④ 수리시설의 확장으로 수전농업이 발전하여 논이 크게 증가하고, 모내기(이앙법)가 널리 실시되었다.
정답 - 3번
해설
위의 설명을 살려보면 고려시대에 가장 많이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①은 신라, ④는 조선후기와 관련이 있다. ②는 조선전기에 시행된 연분 9등법에 대한 설명이다.
해설
연수유전답(정전) | 신라 | 백성(농민)에게 지급 |
역분전 | 고려 | 통일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지급 |
전시과 | 고려 | 전지와 시지를 지급 |
공해전 | 고려 | ․고려시대에는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지급 ․조선시대에는 중앙관청에 지급 |
전정연립 | 고려 | 직역을 그만 두어도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반납하지 않고 직역과 함께 세습되는 현상(경향) |
과전법 | 고려 | 고려 공양왕 때 시행되어 조선전기까지 이어짐 |
직전법 | 조선 | 수신전, 휼양전을 폐지하는 등 관료의 특권을 배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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