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5일에 시행한 경찰직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다음 자료의 (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미수기언』에 이르기를 “삼척에 매향안(埋香岸)이 있는데, ‘충선왕 2년(1310)에 향나무 2백 50그루를 묻었다.’고 하였다. …(중략)… 여기에서 (가)라는 이름이 시작되었는데, 후에 이들이 상여를 메었다.”고 하였다. …(중략)… 이들이 모일 때 승려와 속인이 마구 섞여 무리를 이루었다고 하니 (가)의 시초는 불교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성호사설』) |
㉠ 이들은 수선사 결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 향촌의 풍속 교화를 위해 향안을 작성하였다. ㉢ 불상·석탑 건립과 같은 불사(佛事)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 향음주례를 주관하여 결속을 강화하였다. ㉤ 이 조직에서 상여를 메는 사람인 상두꾼이 유래하였다. |
② ㉡, ㉣
③ ㉢, ㉣
④ ㉢, ㉤
* 고려, 조선의 농민 공동 조직 향도
농민은 일상 의례와 공동 노동 등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공동체 조직의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신앙 조직이었던 향도였다.불교 신앙의 하나로, 미륵을 만나 구원받고자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는 활동인 매향(香徒) 활동을 하는 무리인 향도는 매향 활동을 하면서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불상, 석탑을 만들거나 절을 지을 때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후기에 이르러 점차 신앙적인 향도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조직되는 향도로 변모되어 마을 노역, 혼례와 상장례, 민속 신앙과 관련된 마을 제사 등 공동체 생활을 주도하는 농민 조직으로 발전해 갔다.
조선 시대에도 계속 이어져 와 주로 상을 당하였을 때에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 서로 돕는 역할을 하였다. 상여를 메는 사람인 상두꾼도 향도에서 유래하였다.
㉠ 무신 집권(1170) 이후의 사회 변동기를 지나며 불교계에서도 본연의 자세 확립을 주창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인 결사 운동이 일어났다. 지눌(1158~1210)은 명리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였다. 그는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개혁 운동인 수선사 결사를 제창하였다(본래 1190년 대구 팔공산 거조사에서 결성한 정혜결사에서 유래). 송광사(1200년 순천 송광산 길상사로 이전, 길상사가 1205년 최씨정권에 의해 송광사가 수선사로 사액됨)에 중심을 둔 수선사 결사 운동은 개혁적인 승려들과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 , ㉣ 조선 시대 향촌 사회에서 지주로 농민을 지배하던 계층은 사족(士族)이었다. 사족은 향안을 작성하고 향규를 제정하였다. 향안은 향촌 사회의 지배층인 지방 사족의 명단으로, 임진왜란 전후의 시기에 각 군현마다 보편적으로 작성되었다. 향안에 이름이 오른 사족은 그들의 총회인 향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고 지방민을 통제하였는데, 이들 향회의 운영 규칙이 향규였다.
또한 이들은 서원을 세웠다. 서원은 이름난 선비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였고, 유생이 한 자리에 모여 학문을 닦고 연구함으로써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하였는데, 봄·가을로 향음 주례를 지냈고, 인재를 모아 학문도 가르쳤다.
농민은 일상 의례와 공동 노동 등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공동체 조직의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신앙 조직이었던 향도였다.불교 신앙의 하나로, 미륵을 만나 구원받고자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는 활동인 매향(香徒) 활동을 하는 무리인 향도는 매향 활동을 하면서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불상, 석탑을 만들거나 절을 지을 때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후기에 이르러 점차 신앙적인 향도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조직되는 향도로 변모되어 마을 노역, 혼례와 상장례, 민속 신앙과 관련된 마을 제사 등 공동체 생활을 주도하는 농민 조직으로 발전해 갔다.
조선 시대에도 계속 이어져 와 주로 상을 당하였을 때에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 서로 돕는 역할을 하였다. 상여를 메는 사람인 상두꾼도 향도에서 유래하였다.
㉠ 무신 집권(1170) 이후의 사회 변동기를 지나며 불교계에서도 본연의 자세 확립을 주창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인 결사 운동이 일어났다. 지눌(1158~1210)은 명리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였다. 그는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개혁 운동인 수선사 결사를 제창하였다(본래 1190년 대구 팔공산 거조사에서 결성한 정혜결사에서 유래). 송광사(1200년 순천 송광산 길상사로 이전, 길상사가 1205년 최씨정권에 의해 송광사가 수선사로 사액됨)에 중심을 둔 수선사 결사 운동은 개혁적인 승려들과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 , ㉣ 조선 시대 향촌 사회에서 지주로 농민을 지배하던 계층은 사족(士族)이었다. 사족은 향안을 작성하고 향규를 제정하였다. 향안은 향촌 사회의 지배층인 지방 사족의 명단으로, 임진왜란 전후의 시기에 각 군현마다 보편적으로 작성되었다. 향안에 이름이 오른 사족은 그들의 총회인 향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고 지방민을 통제하였는데, 이들 향회의 운영 규칙이 향규였다.
또한 이들은 서원을 세웠다. 서원은 이름난 선비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였고, 유생이 한 자리에 모여 학문을 닦고 연구함으로써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하였는데, 봄·가을로 향음 주례를 지냈고, 인재를 모아 학문도 가르쳤다.
2. 다음 자료에 등장하는 ‘설계두’란 인물이 속한 신분 계층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설계두가 하루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자기 뜻을 말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을 쓰는 데 먼저 골품을 따진다. 정말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다 하더라도 크게 될 수 없다.”(『삼국사기』) |
① 왕권의 전제화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김흠돌이 이 신분 출신이었다.
② 신라 하대에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③ 『화랑세기』를 저술한 한산주의 도독 김대문이 이 신분 출신이었다.
④ 고려 성종 때에는 이들 출신의 유학자들이 국정을 주도하며 유교 정치를 펼쳤다.
* 6두품에 대하여
6두품은 관직 진출에 한계(6등급 아찬이 상한선)가 있어 중앙과 지방의 장관직에 오를 수 없어 득난(得難)이라 불리웠다. 그러나 학문적 식견과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국왕을 보좌하면서 정치적 진출을 활발히 하였다. 특히 중대에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진골 귀족 세력은 약화되었고 반면에, 진골 귀족 세력에 눌려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6두품 세력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다. 이들은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왕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하거나 행정 실무를 맡아 보았다.
유학자는 6두품 출신이 많았다. 통일 신라 초에 활약한 강수는 외교 문서를 잘 지은 문장가로 유명하였다. 설총은 유교 경전에 조예가 깊었고, 이두를 정리하여 한문 교육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하지만, 신분의 제약으로(관직 상한선 6등급) 인하여 중앙 관청의 우두머리나 지방의 장관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다.
하대에는 당에 유학하였다가 돌아온 6두품 출신의 일부 유학생과 선종 승려 등은 신라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최치원).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반신라 세력화: 최승우-후백제, 최언위-고려).
고려 초기 성종 때에는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이 국정을 주도하면서 유교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성종은 즉위 후 국가의 오랜 폐단을 없애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하여 중앙의 5 품 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그 동안의 정치에 대한 비판과 정책을 건의하는 글을 올리게 하였는데, 이 때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려 유교의 진흥과 과도한 재정 낭비를 가져오는 불교 행사의 억제를 요구하고, 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5 대 왕의 치적에 대한 잘잘못을 평가하여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수용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① 신문왕(681~692)의 왕권의 전제화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다 숙청된 김흠돌은 자세한 가계 내력을 알 수 없으나 왕의 장인인 것을 볼 때 진골 출신인 것이 확실시 된다.
② 신라 하대에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작한 세력은 호족이다.
③ 삼국 통일 직후의 대표적 문장가인 한산주 총독 김대문은 화랑의 전기를 모은 화랑세기, 유명한 승려의 전기를 모은 고승전, 한산주 지방의 지리지인 한산기 등을 지었다. 그의 저서는 신라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그가 한 주의 장관직에 오른 것을 볼 때 진골 출신임을 알 수 있다.
6두품은 관직 진출에 한계(6등급 아찬이 상한선)가 있어 중앙과 지방의 장관직에 오를 수 없어 득난(得難)이라 불리웠다. 그러나 학문적 식견과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국왕을 보좌하면서 정치적 진출을 활발히 하였다. 특히 중대에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진골 귀족 세력은 약화되었고 반면에, 진골 귀족 세력에 눌려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6두품 세력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다. 이들은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왕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하거나 행정 실무를 맡아 보았다.
유학자는 6두품 출신이 많았다. 통일 신라 초에 활약한 강수는 외교 문서를 잘 지은 문장가로 유명하였다. 설총은 유교 경전에 조예가 깊었고, 이두를 정리하여 한문 교육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하지만, 신분의 제약으로(관직 상한선 6등급) 인하여 중앙 관청의 우두머리나 지방의 장관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다.
하대에는 당에 유학하였다가 돌아온 6두품 출신의 일부 유학생과 선종 승려 등은 신라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최치원).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반신라 세력화: 최승우-후백제, 최언위-고려).
고려 초기 성종 때에는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이 국정을 주도하면서 유교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성종은 즉위 후 국가의 오랜 폐단을 없애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하여 중앙의 5 품 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그 동안의 정치에 대한 비판과 정책을 건의하는 글을 올리게 하였는데, 이 때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려 유교의 진흥과 과도한 재정 낭비를 가져오는 불교 행사의 억제를 요구하고, 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5 대 왕의 치적에 대한 잘잘못을 평가하여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수용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① 신문왕(681~692)의 왕권의 전제화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다 숙청된 김흠돌은 자세한 가계 내력을 알 수 없으나 왕의 장인인 것을 볼 때 진골 출신인 것이 확실시 된다.
② 신라 하대에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작한 세력은 호족이다.
③ 삼국 통일 직후의 대표적 문장가인 한산주 총독 김대문은 화랑의 전기를 모은 화랑세기, 유명한 승려의 전기를 모은 고승전, 한산주 지방의 지리지인 한산기 등을 지었다. 그의 저서는 신라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그가 한 주의 장관직에 오른 것을 볼 때 진골 출신임을 알 수 있다.
3. 지주의 토지소유 개혁과 농민들의 공동노동을 주요 내용으로 했던 정약용의 토지제도 개혁안은 ?
① 공전제
② 한전제
③ 여전제
④ 대동제
* 정약용의 여전제
18세기 전반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은 농촌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추구 하였다. 이 실학자들을 경세치용 학파라고도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농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7세기 후반에 활약한 유형원으로, 일생 동안 농촌에 묻혀 살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유형원은 토지를 국가에서 소유하고 관리하는 공전제(公田制) 하에서 관리, 선비, 농민등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토지를 재분배하고, 조세와 병역도 조정하자고 주장하하는 균전론(均田論)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농업 중심 개혁론을 더욱 발전시키고 이를 대표하는 사람은 18 세기 전반에 주로 활약한 이익이었다. 그는 유형원의 실학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 내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제도 개혁론으로 한 가정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한 다음, 영업전은 법으로 매매를 금지하고, 나머지 토지만 매매를 허용하자고 주장하는 한전론限田論)을 주장하였다.
이익의 실학 사상을 계승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한 최대의 학자인 정약용은 토지 제도의 개혁론으로 산과 강을 지세 기준으로 구역을 획정한 마을 단위인 여(呂) 단위로 여장의 지휘 하에 주민들이 공동경작하여 생산의 1/10세를 국가에 내고 여장의 녹봉을 떼어준 후 나머지를 노동날짜에 따라 나누어주자는 여전제(閭田制)를 처음에 내세웠다가 후에 정전제(井田制, 사전 8결과, 공전 1결)를 현실에 맞게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④ 대동제(大同祭)는 마을이나 단체 구성원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축제이다.
18세기 전반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은 농촌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추구 하였다. 이 실학자들을 경세치용 학파라고도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농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7세기 후반에 활약한 유형원으로, 일생 동안 농촌에 묻혀 살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유형원은 토지를 국가에서 소유하고 관리하는 공전제(公田制) 하에서 관리, 선비, 농민등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토지를 재분배하고, 조세와 병역도 조정하자고 주장하하는 균전론(均田論)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농업 중심 개혁론을 더욱 발전시키고 이를 대표하는 사람은 18 세기 전반에 주로 활약한 이익이었다. 그는 유형원의 실학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 내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제도 개혁론으로 한 가정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한 다음, 영업전은 법으로 매매를 금지하고, 나머지 토지만 매매를 허용하자고 주장하는 한전론限田論)을 주장하였다.
이익의 실학 사상을 계승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한 최대의 학자인 정약용은 토지 제도의 개혁론으로 산과 강을 지세 기준으로 구역을 획정한 마을 단위인 여(呂) 단위로 여장의 지휘 하에 주민들이 공동경작하여 생산의 1/10세를 국가에 내고 여장의 녹봉을 떼어준 후 나머지를 노동날짜에 따라 나누어주자는 여전제(閭田制)를 처음에 내세웠다가 후에 정전제(井田制, 사전 8결과, 공전 1결)를 현실에 맞게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④ 대동제(大同祭)는 마을이나 단체 구성원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축제이다.
4. 해외 독립운동 기지와 관련되어 다음에서 설명하고 있는 지역은?
․대한광복군정부가 수립되었다. ․권업회(勸業會)가 조직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이후 대한국민의회가 결성되어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
② 북간도
③ 밀산부
④ 미주
* 해외의 독립운동 기지 중 연해주 지역
연해주: 많은 동포들이 이주해 살고 있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1910년 6월과 8월 유인석, 이범윤 등이 중심이 되어 13도 의군과 성명회(聲鳴會)가 설립되었으나 동년 9월 대일 관계 악화를 우려한 러시아의 압력으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1911년 독립운동 기지인 신한촌과 이를 기반으로 자치조직인 권업회(勸業會) 설립되어 독립운동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고 학교와 도서관을 설치하였으며,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간하였으나, 이 역시 대일 관계 악화를 우려한 러시아의 압력으로 해체되었다.
이상설과 이동휘 등은 1914년 대한 광복군 정부를 조직하여 군사 활동을 준비하였으나, 일제와의 관계 악화를 꺼린 러시아가 독립군의 무장 활동을 탄압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활동은 어려웠다. 이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연해주에서는 전로한족대표자회의(1917)가 설립되어 한인신보 등을 간행하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다, 3·1 운동 직후 임시 정부 형태의 대한 국민 의회(1919.3)로 발전하였다. 한편, 이동휘 등에 의해 한인 사회당(1918)이 조직되어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 운동이 등장하게 되었다.
② 북간도: 19세기 후반 이후 우리 민족이 많이 이주하여 주민의 80%를 차지할 정도였고, 일찍부터 용정촌, 명동촌 등 많은 한인 집단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를 중심으로 애국지사들은 간민회 등 자치 단체를 만들어 동포 사회를 이끌어 가면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간민회는 민족 교육과 한인들의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여 북간도 한인 사회의 형성과 단결에 크게 기여하였다.또, 서전서숙(이상설), 명동 학교(김약연) 등 민족 학교를 세워 철저한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북간도로 거점을 옮긴 대종교에서도 중광단이란 무장 독립 단체를 만들고 사관 양성소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중광단은 3·1 운동 이후 북로 군정서로 발전하였다.
③ 밀산부: 러시아와 만주의 접경 도시인 밀산에는 이상설, 이승희 등에 의해 독립운동 기지인 한흥동이 건설되었다
④ 미주: 동포 사회를 중심으로 대한인 국민회(1910)가 조직되어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동포 사회의 결속과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인 국민회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실정을 세계에 알리고 독립을 호소할 것을 결의하였다.
연해주: 많은 동포들이 이주해 살고 있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1910년 6월과 8월 유인석, 이범윤 등이 중심이 되어 13도 의군과 성명회(聲鳴會)가 설립되었으나 동년 9월 대일 관계 악화를 우려한 러시아의 압력으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1911년 독립운동 기지인 신한촌과 이를 기반으로 자치조직인 권업회(勸業會) 설립되어 독립운동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고 학교와 도서관을 설치하였으며,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간하였으나, 이 역시 대일 관계 악화를 우려한 러시아의 압력으로 해체되었다.
이상설과 이동휘 등은 1914년 대한 광복군 정부를 조직하여 군사 활동을 준비하였으나, 일제와의 관계 악화를 꺼린 러시아가 독립군의 무장 활동을 탄압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활동은 어려웠다. 이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연해주에서는 전로한족대표자회의(1917)가 설립되어 한인신보 등을 간행하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다, 3·1 운동 직후 임시 정부 형태의 대한 국민 의회(1919.3)로 발전하였다. 한편, 이동휘 등에 의해 한인 사회당(1918)이 조직되어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 운동이 등장하게 되었다.
② 북간도: 19세기 후반 이후 우리 민족이 많이 이주하여 주민의 80%를 차지할 정도였고, 일찍부터 용정촌, 명동촌 등 많은 한인 집단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를 중심으로 애국지사들은 간민회 등 자치 단체를 만들어 동포 사회를 이끌어 가면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간민회는 민족 교육과 한인들의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여 북간도 한인 사회의 형성과 단결에 크게 기여하였다.또, 서전서숙(이상설), 명동 학교(김약연) 등 민족 학교를 세워 철저한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북간도로 거점을 옮긴 대종교에서도 중광단이란 무장 독립 단체를 만들고 사관 양성소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중광단은 3·1 운동 이후 북로 군정서로 발전하였다.
③ 밀산부: 러시아와 만주의 접경 도시인 밀산에는 이상설, 이승희 등에 의해 독립운동 기지인 한흥동이 건설되었다
④ 미주: 동포 사회를 중심으로 대한인 국민회(1910)가 조직되어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동포 사회의 결속과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인 국민회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실정을 세계에 알리고 독립을 호소할 것을 결의하였다.
5. 우리나라 고대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설명으로 거리가 먼 것은?
① 신화적 권위에 바탕을 둔 지배이데올로기는 혈연에 근거한 폐쇄적 신분제도의 형성을 뒷받침하였다.
② 강화된 왕권의식은 역대 왕의 업적과 권위를 강조하는 역사편찬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③ 평등과 윤회 사상을 지닌 불교는 민간에서 적극 수용하여 민중불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④ 불교의 사회적 역할이 증대하는 과정은 율령제의 기능이 확대되는 것과 궤를 같이하였다.
* 고대사회의 이데올로기
① 우리나라 고대 건국 설화는 대부분 난생(卵生), 천강(天降) 설화의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신화적 권위에 바탕을 둔 지배 이데올로기는 범접할 수 없는 혈연에 근거한 폐쇄적 신분제도의 형성을 뒷받침하였다.
② 고대에는 학문이 점차 발달하고 중앙 집권적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각국의 전성기 왕들은 왕의 업적과 권위를 강조하기 위하여 역사편찬을 하였다. 수의 침략을 물리친 고구려 영양왕 때에 이문진은 국초에 편찬되었던 유기를 간추려 신집 5권을 편찬하였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때 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사서는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③ 고대 초기의 불교는 왕권과 밀착되어 성행하였다. 신라에서는 사람의 행위에 따라 업보를 받는다는 업설과,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 미륵불이 후일 화랑으로 현신하여 나타나 이상적인 불국토를 건설한다는 미륵불 신앙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왕실, 귀족 중심의 불교는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활약한 원효에 의해 일반 민중에게도 널리 보급되었다. 원효는 서방 정토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외치기만 해도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아미타 신앙(정토종)을 자신이 직접 전도하며 불교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④ 삼국은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과 지방 세력의 통합에 힘쓰던 4세기에 불교를 수용하였다. 이는 율령 체제와 함께 새로운 국가체제의 정신 확립에 기여하고 강화된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사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① 우리나라 고대 건국 설화는 대부분 난생(卵生), 천강(天降) 설화의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신화적 권위에 바탕을 둔 지배 이데올로기는 범접할 수 없는 혈연에 근거한 폐쇄적 신분제도의 형성을 뒷받침하였다.
② 고대에는 학문이 점차 발달하고 중앙 집권적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각국의 전성기 왕들은 왕의 업적과 권위를 강조하기 위하여 역사편찬을 하였다. 수의 침략을 물리친 고구려 영양왕 때에 이문진은 국초에 편찬되었던 유기를 간추려 신집 5권을 편찬하였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때 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사서는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③ 고대 초기의 불교는 왕권과 밀착되어 성행하였다. 신라에서는 사람의 행위에 따라 업보를 받는다는 업설과,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 미륵불이 후일 화랑으로 현신하여 나타나 이상적인 불국토를 건설한다는 미륵불 신앙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왕실, 귀족 중심의 불교는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활약한 원효에 의해 일반 민중에게도 널리 보급되었다. 원효는 서방 정토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외치기만 해도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아미타 신앙(정토종)을 자신이 직접 전도하며 불교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④ 삼국은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과 지방 세력의 통합에 힘쓰던 4세기에 불교를 수용하였다. 이는 율령 체제와 함께 새로운 국가체제의 정신 확립에 기여하고 강화된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사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6. 고려·조선시대의 문화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국자감 내에 9재학당을 설치하여 귀족 자제들을 전문적으로 육성하였다.
② 의천은 백련사를 중심으로 정토신앙과 염불수행을 강조하며 불교 쇄신운동을 전개하였다.
③ 상감청자는 맑은 비색, 우아한 곡선과 함께 12세기 후반 고려청자의 세련된 미를 보여준다.
④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은 우리나라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나타내는 진경산수화를 개척하였다.
* 고려·조선시대의 문화
① 고려 문종 때 최충이 세운 9재 학당은, 사학 12도 중에서 가장 번성하여 명성이 높았다. 최충이 사망한 후 그의 시호인 문헌을 이름으로 붙였다(문헌 공도). 사학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이 과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국자감의 관학 교육은 위축되었다. 이에 정부는 관학 진흥을 위한 여러 시책을 추진하였다. 예종 때에는 국자감을 재정비하여 전문 강좌인 7재(유학 6재+무학재)를 설치하였다.
② 지눌(1158~1210)과 비슷한 시기에 요세(1163~1245)는 백성의 신앙적 욕구를 고려하여 강진 만덕사(백련사)에서 백련 결사를 제창하였다. 자신의 행동을 진정으로 참회하는 법화 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 결사 역시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고, 수선사와 양립하며 고려 후기 불교계를 이끌었다.
의천(1055~1101)은 교선 통합을 위하여 흥왕사를 근거지로 삼아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 하려 하였으며, 또 선종을 통합하기 위하여 국청사를 창건하여 천태종을 창시하였고, 이를 뒷받침할 사상적 바탕으로 의천은 이론의 연마와 실천을 아울러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제창하였다.
③ 12세기 중엽에 고려의 독창적 기법인 상감법(그릇 표면을 파낸 자리에 백토, 흑토를 메워 무늬를 내는 방법)이 개발되어 자기에 활용되었다. 상감청자는 무늬를 훨씬 다양하고 화려하게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청자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즉, 기존의 신비한 색인 비색 청자에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매병에서 볼 수 있듯이 우아한 선맵시가 더하여 그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상감청자는 강화도에 도읍한 13세기 중엽까지 주류를 이루었으나, 원 간섭기 이후에는 퇴조해 갔다.
④ 15세기 화원 출신인 안견은 역대 화가들의 기법을 체득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 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몽유도원도는 자연스러운 현실 세계와 환상적인 이상 세계를 능숙하게 처리하고 대각선적인 운동감을 활용하여 구현한 걸작이다.
진경 산수화를 개척한 화가는 18세기에 활약한 정선으로, 그는 서울 근교와 강원도의 명승지를 두루 답사하여 그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 정선은 대표작인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에서 바위산은 선으로 묘사하고, 흙산은 묵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① 고려 문종 때 최충이 세운 9재 학당은, 사학 12도 중에서 가장 번성하여 명성이 높았다. 최충이 사망한 후 그의 시호인 문헌을 이름으로 붙였다(문헌 공도). 사학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이 과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국자감의 관학 교육은 위축되었다. 이에 정부는 관학 진흥을 위한 여러 시책을 추진하였다. 예종 때에는 국자감을 재정비하여 전문 강좌인 7재(유학 6재+무학재)를 설치하였다.
② 지눌(1158~1210)과 비슷한 시기에 요세(1163~1245)는 백성의 신앙적 욕구를 고려하여 강진 만덕사(백련사)에서 백련 결사를 제창하였다. 자신의 행동을 진정으로 참회하는 법화 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 결사 역시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고, 수선사와 양립하며 고려 후기 불교계를 이끌었다.
의천(1055~1101)은 교선 통합을 위하여 흥왕사를 근거지로 삼아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 하려 하였으며, 또 선종을 통합하기 위하여 국청사를 창건하여 천태종을 창시하였고, 이를 뒷받침할 사상적 바탕으로 의천은 이론의 연마와 실천을 아울러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제창하였다.
③ 12세기 중엽에 고려의 독창적 기법인 상감법(그릇 표면을 파낸 자리에 백토, 흑토를 메워 무늬를 내는 방법)이 개발되어 자기에 활용되었다. 상감청자는 무늬를 훨씬 다양하고 화려하게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청자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즉, 기존의 신비한 색인 비색 청자에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매병에서 볼 수 있듯이 우아한 선맵시가 더하여 그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상감청자는 강화도에 도읍한 13세기 중엽까지 주류를 이루었으나, 원 간섭기 이후에는 퇴조해 갔다.
④ 15세기 화원 출신인 안견은 역대 화가들의 기법을 체득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 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몽유도원도는 자연스러운 현실 세계와 환상적인 이상 세계를 능숙하게 처리하고 대각선적인 운동감을 활용하여 구현한 걸작이다.
진경 산수화를 개척한 화가는 18세기에 활약한 정선으로, 그는 서울 근교와 강원도의 명승지를 두루 답사하여 그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 정선은 대표작인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에서 바위산은 선으로 묘사하고, 흙산은 묵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7. 발해의 대외활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신라와의 국경지대에 발해관이 설치되었다.
② 8세기 말 이후로는 신라 및 당과의 관계가 호전되었다.
③ 2대 무왕 때 발해 해군이 당나라의 산동(산둥)지방을 공격하였다.
④ 발해는 8~9세기에 걸쳐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 발해의 대외활동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698~719)은 건국 초기라 가급적 당과 충돌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713년 당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봉작을 받았다.
그러나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719~737)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732). 또,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일본과는 무왕 때(727) 이래로 8~9세기에 매우 빈번히 사신을 교유하고 무역을 행였는데 이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문왕(737~793)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특히 당과 교류가 활발하여 해로와 육로 모두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는데, 당은 산둥 반도의 덩저우에 발해관을 설치하고 발해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또한 이 때 발해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기었는데, 이는 이러한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발해는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 대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818~830)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10 세기 초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고, 발해 내부에서도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926).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698~719)은 건국 초기라 가급적 당과 충돌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713년 당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봉작을 받았다.
그러나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719~737)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732). 또,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일본과는 무왕 때(727) 이래로 8~9세기에 매우 빈번히 사신을 교유하고 무역을 행였는데 이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문왕(737~793)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특히 당과 교류가 활발하여 해로와 육로 모두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는데, 당은 산둥 반도의 덩저우에 발해관을 설치하고 발해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또한 이 때 발해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기었는데, 이는 이러한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발해는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 대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818~830)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10 세기 초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고, 발해 내부에서도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926).
8. 다음 책의 저자들이 공통으로 주장한 바는?
『우서』 『열하일기』 『의산문답』 |
②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
③ 선비들도 농사를 지어 사농일치의 기풍을 일으켜야 한다.
④ 양인과 천인이라는 신분질서를 타파해야 한다.
* 중상적 실학자(북학파)들의 공통된 주장
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가 나타났다.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 학파 또는 북학파라고도 한다.
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1694~1755)이었다. 그는 우서를 저술하여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북학파의 실학 사상은 18세기 후반에 담헌일기, 의산문답을 저술한 홍대용(1731~1783), 열하일기를 저술한 박지원(1737~1805), 북학의를 저술한 박제가(1750~1805) 등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홍대용은 청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기술의 혁신과 문벌 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
박지원은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 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의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리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박지원의 실학 사상은 그의 제자 박제가에 의하여 더욱 확충되었다. 박제가는 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는 상공업의 발달, 청과의 통상 강화, 수레와 선박의 이용등을 역설하였다. 또,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①, ③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의 중농적 실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각각 균전론, 한전론, 여전제.정전제를 주장하였다. 특히 유형원은 사농일치에 따라 관리, 선비, 농민등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토지를 재분배하고, 조세와 병역도 조정하자고 주장하는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양반 문벌 제도, 과거 제도, 노비 제도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④ 중농, 중상 공히 실학자들은 당시 신분제도의 모순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능력보다는 문벌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양반이 아닌 서얼 노비들은 차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신분간의 차별에 대해 그들은 조선역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특유하게 형성된 인습으로 바라보았다. 즉, 인간의 본질적 평등에 관해서는 인정을 하였지만 신분간의 위계질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중상학자들은 양반들이 빈궁해도 다른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고, 놀고 먹는 무리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지만(홍대용), 신분제 자체를 폐지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가 나타났다.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 학파 또는 북학파라고도 한다.
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1694~1755)이었다. 그는 우서를 저술하여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북학파의 실학 사상은 18세기 후반에 담헌일기, 의산문답을 저술한 홍대용(1731~1783), 열하일기를 저술한 박지원(1737~1805), 북학의를 저술한 박제가(1750~1805) 등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홍대용은 청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기술의 혁신과 문벌 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
박지원은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 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의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리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박지원의 실학 사상은 그의 제자 박제가에 의하여 더욱 확충되었다. 박제가는 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는 상공업의 발달, 청과의 통상 강화, 수레와 선박의 이용등을 역설하였다. 또,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①, ③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의 중농적 실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각각 균전론, 한전론, 여전제.정전제를 주장하였다. 특히 유형원은 사농일치에 따라 관리, 선비, 농민등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토지를 재분배하고, 조세와 병역도 조정하자고 주장하는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양반 문벌 제도, 과거 제도, 노비 제도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④ 중농, 중상 공히 실학자들은 당시 신분제도의 모순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능력보다는 문벌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양반이 아닌 서얼 노비들은 차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신분간의 차별에 대해 그들은 조선역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특유하게 형성된 인습으로 바라보았다. 즉, 인간의 본질적 평등에 관해서는 인정을 하였지만 신분간의 위계질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특히 중상학자들은 양반들이 빈궁해도 다른 생업에 종사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고, 놀고 먹는 무리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지만(홍대용), 신분제 자체를 폐지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9. 다음 글은 위만 조선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정리한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극복하고, 위만 조선이 단군 조선을 계승한 우리의 역사임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울 수 있는 사실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역대의 역사가들은 위만이 연나라에서 망명하였다는 점 때문에 그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제는 한국사의 자주성을 부정하고 타율성을 강조하기 위해 위만 조선을 중국의 식민 정권으로 간주하였다. |
② 위만 조선은 적극적으로 철기 문화를 수용하였다.
③ 위만 정권에서 높은 지위에 오른 토착 고조선인들이 많았다.
④ 위만은 입국할 때에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 위만 조선이 단군 조선을 계승한 근거
중국이 전국 시대 이후로 혼란에 휩싸이면서 유이민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왔다. 고조선은 그들을 받아들여 서쪽 지역에 살게 하였다. 그 뒤, 진·한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유이민 집단이 이주해 왔다. 그 중에서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는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갔다. 그 후,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 내고 스스로 왕이되었다(기원전 194).
찬탈 형식이고 유이민 세력이기에 위만의 고조선 계승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면도 있다. 그러나 위만은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에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고, 왕이 된 뒤에도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고, 그의 정권에는 토착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았다. 따라서, 위만의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중국 한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철기의 사용은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을 더욱 융성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다.
중국이 전국 시대 이후로 혼란에 휩싸이면서 유이민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왔다. 고조선은 그들을 받아들여 서쪽 지역에 살게 하였다. 그 뒤, 진·한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유이민 집단이 이주해 왔다. 그 중에서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는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갔다. 그 후,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 내고 스스로 왕이되었다(기원전 194).
찬탈 형식이고 유이민 세력이기에 위만의 고조선 계승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면도 있다. 그러나 위만은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에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고, 왕이 된 뒤에도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고, 그의 정권에는 토착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았다. 따라서, 위만의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중국 한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철기의 사용은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을 더욱 융성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다.
10. 조선후기 정치 상황에 대한 설명 중 옳은 것은?
① 인조반정 이후 효종이 즉위하기까지에는 북학사상(北學思想)이 팽배하였다.
② 현종 대에는 두 번에 걸친 예송논쟁이 일어나 서인이 모두 승리하였다.
③ 숙종 대에는 당쟁이 치열해 지면서 환국이 일어났다.
④ 정조 대에는 신해통공을 실시하여 시전상인들의 이권을 강화하였다.
* 조선 후기 정치 상황
① 인조반정(1623)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이로 인하여 정묘.병자 2차례의 호란을 겪고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고 효종(1649~1659) 때에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청의 최전성기인 건륭제 때인 18세기 후반에는, 청을 견학한 서울 노론의 일부 사람들이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자는 북학론을 주장하였다.
② 예송 논쟁은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 효종의 사망 시(기해 예송)와 1674년 효종 비의 사망 시(갑인 예송)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 때 인조의 계비 자의 대비의 복제가 쟁점이 되었다.
서인(송시열, 송준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설(기해)과 9개월(갑인)설을 주장하였고, 남인(허목, 허적, 윤휴, 윤선도)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설(기해)과 1년설(갑인)을 각각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기해 예송에서는 서인이 승리하였지만, 갑인 예송에서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③ 숙종(1674~1720) 때에 이르러 붕당정치가 더욱 치열해져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되어 정국이 급격하게 전환하는 환국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대두되었다. 처음에는 서인과 남인이 격렬하게 대립하였으며, 나중에는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노론과 소론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④ 1791년(정조 15) 육의전 이외의 시전상인들의 전매 특권(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 조치가 이루어져 사상인(私商人)의 자유로운 상행위가 보장되었다.
① 인조반정(1623)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이로 인하여 정묘.병자 2차례의 호란을 겪고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고 효종(1649~1659) 때에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청의 최전성기인 건륭제 때인 18세기 후반에는, 청을 견학한 서울 노론의 일부 사람들이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자는 북학론을 주장하였다.
② 예송 논쟁은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 효종의 사망 시(기해 예송)와 1674년 효종 비의 사망 시(갑인 예송)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 때 인조의 계비 자의 대비의 복제가 쟁점이 되었다.
서인(송시열, 송준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설(기해)과 9개월(갑인)설을 주장하였고, 남인(허목, 허적, 윤휴, 윤선도)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설(기해)과 1년설(갑인)을 각각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기해 예송에서는 서인이 승리하였지만, 갑인 예송에서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③ 숙종(1674~1720) 때에 이르러 붕당정치가 더욱 치열해져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되어 정국이 급격하게 전환하는 환국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대두되었다. 처음에는 서인과 남인이 격렬하게 대립하였으며, 나중에는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노론과 소론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④ 1791년(정조 15) 육의전 이외의 시전상인들의 전매 특권(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 조치가 이루어져 사상인(私商人)의 자유로운 상행위가 보장되었다.
11. 다음의 사실이 나타났던 당시 농촌 사회의 모습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농민들은 모내기법을 확대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다. |
② 농민들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③ 쌀의 수요가 늘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해졌다.
④ 소작농들은 보리농사를 선호하지 않았다.
* 모내기법(이앙법)이 유행한 조선 후기의 농업 상황
조선 후기에 농민들은 모내기법을 확대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다. 이모작이 널리 행해지면서 보리 재배가 확대되었고, 논에서의 보리 농사는 대체로 소작료의 수취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작농들은 보리 농사를 선호하였다.농민은 농업을 경영하는 방식도 변화시켰다.
모내기법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을 덜 수 있게 되자,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지주들도 직접 경작하는 토지를 넓혔지만, 자작농은 물론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하여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다. 이전보다 넓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 된 광작 농업으로 농가의 소득이 늘어나 부농이 될 수 있었다.
또,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다. 특히, 쌀의 상품화가 활발하였다. 쌀은 이 시기에 이르러 그 수요가 크게 늘어나 장시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었다. 쌀의 수요가 늘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하였다.
이러한 이앙법의 확산의 결과는 일부 농민이 소득을 증대시켜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토지를 잃고 몰락해 가는 농민도 증가하였다(소수의 부농과 대다수 농민의 몰락). 부세의 부담, 고리채의 이용, 관혼상제의 비용 부담 등으로 견딜 수 없게 된 가난한 농민은 헐값에 자신의 토지를 내놓았다. 양반 관료, 토호, 상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토지를 매입하였다.
조선 후기에 농민들은 모내기법을 확대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다. 이모작이 널리 행해지면서 보리 재배가 확대되었고, 논에서의 보리 농사는 대체로 소작료의 수취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작농들은 보리 농사를 선호하였다.농민은 농업을 경영하는 방식도 변화시켰다.
모내기법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을 덜 수 있게 되자,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지주들도 직접 경작하는 토지를 넓혔지만, 자작농은 물론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하여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다. 이전보다 넓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 된 광작 농업으로 농가의 소득이 늘어나 부농이 될 수 있었다.
또,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다. 특히, 쌀의 상품화가 활발하였다. 쌀은 이 시기에 이르러 그 수요가 크게 늘어나 장시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었다. 쌀의 수요가 늘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하였다.
이러한 이앙법의 확산의 결과는 일부 농민이 소득을 증대시켜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토지를 잃고 몰락해 가는 농민도 증가하였다(소수의 부농과 대다수 농민의 몰락). 부세의 부담, 고리채의 이용, 관혼상제의 비용 부담 등으로 견딜 수 없게 된 가난한 농민은 헐값에 자신의 토지를 내놓았다. 양반 관료, 토호, 상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토지를 매입하였다.
12. 고려시대의 다음 사건들을 시대순대로 나열한 것은?
㉠ 강감찬의 귀주 대첩 ㉡ 서희의 외교술로 강동 6주 획득 ㉢ 무신정권의 강화 천도 ㉣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지역 수복 ㉤ 윤관의 여진족 정벌과 동북 9성 수축 |
② ㉡ -- ㉠ -- ㉤ -- ㉢ -- ㉣
③ ㉠ -- ㉡ -- ㉤ -- ㉢ -- ㉣
④ ㉠ -- ㉡ -- ㉢ -- ㉤ -- ㉣
* 고려의 대외 항쟁 연대기
10세기 초에 통일 국가를 세운 거란(요)은 송과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고려를 침략하였다. 처음에는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다(993). 그러나 외교 담판에 나선 서희가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하는 대신,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994). 이후에도 거란은 고려와 송의 관계를 구실로 두 차례 더 침략해 왔으나, 고려는 이를 잘 막아 냈다. 특히, 강감찬은 거란이 세 번째 침략해 왔을 때, 살아 돌아간 거란의 군사가 겨우 수천에 이를 정도로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귀주 대첩, 1019).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계속 막아 내자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할 수 없었고, 송을 침략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와 송, 거란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북쪽 국경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12세기 초 부족의 통일을 이룬 여진족이 고려의 국경까지 남하하면서 고려군과 자주 충돌하였다. 고려는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한 다음(1104),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다(1107). 그러나 여진족은 그 후에 더욱 세력을 키워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금을 건국하였으며, 거란을 멸망시킨 뒤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다. 조정에서는 논란이 치열하게 일어났으나,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이 금과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1126).
13세기 초,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동북아 정세가 급격히 변하였다. 몽골이 금을 공격하고 북중국을 점령하자, 고려와 몽골의 접촉도 시작되었다. 고려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일삼던 몽골은, 고려를 방문했던 몽골 사신이 귀국길에 피살된 사건을 구실로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였다(1231). 이로부터 고려는 40여 년 동안 몽골과 전쟁을 벌였다. 무신 정권은 1232년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이 기간에 김윤후가 이끈 민병과 승군이 처인성(경기 용인)에서 몽골 장수 살리타(撒禮塔)의 군대를 물리치는 등 일반 민중의 항쟁이 이어졌다.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부곡 지역의 주민까지도 몽골에 대항하여 싸웠다. 고려 조정에서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득세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은 끝났다. 몽골은 고려를 완전 정복하겠다는 처음의 계획을 포기하고,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끈질긴 저항이 안겨 준 결과였다.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1270),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이들의 항쟁은 몽골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민중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몽골과 강화한 이후, 고려는 두 차례 실시된 원의 일본 원정에 군대와 물자의 제공을 강요받았다. 또, 철령 이북에 쌍성총관부, 자비령 이북에 동녕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라는 원의 통치 기구가 설립되어 넓은 영토를 빼앗기기도 하였다.
공민왕(1351~1374)은 원명교체기를 이용하여 반원 자주 정책을 펼쳤다. 먼저 기철로 대표되던 친원 세력을 숙청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였고, 이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원의 간섭으로 바뀌었던 관제를 복구하였으며, 몽골 풍속을 금지하였다. 또,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으며(1356), 더 나아가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다.
10세기 초에 통일 국가를 세운 거란(요)은 송과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고려를 침략하였다. 처음에는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다(993). 그러나 외교 담판에 나선 서희가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하는 대신,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994). 이후에도 거란은 고려와 송의 관계를 구실로 두 차례 더 침략해 왔으나, 고려는 이를 잘 막아 냈다. 특히, 강감찬은 거란이 세 번째 침략해 왔을 때, 살아 돌아간 거란의 군사가 겨우 수천에 이를 정도로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귀주 대첩, 1019).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계속 막아 내자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할 수 없었고, 송을 침략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와 송, 거란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북쪽 국경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12세기 초 부족의 통일을 이룬 여진족이 고려의 국경까지 남하하면서 고려군과 자주 충돌하였다. 고려는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한 다음(1104),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다(1107). 그러나 여진족은 그 후에 더욱 세력을 키워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금을 건국하였으며, 거란을 멸망시킨 뒤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다. 조정에서는 논란이 치열하게 일어났으나,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이 금과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1126).
13세기 초,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동북아 정세가 급격히 변하였다. 몽골이 금을 공격하고 북중국을 점령하자, 고려와 몽골의 접촉도 시작되었다. 고려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일삼던 몽골은, 고려를 방문했던 몽골 사신이 귀국길에 피살된 사건을 구실로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였다(1231). 이로부터 고려는 40여 년 동안 몽골과 전쟁을 벌였다. 무신 정권은 1232년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이 기간에 김윤후가 이끈 민병과 승군이 처인성(경기 용인)에서 몽골 장수 살리타(撒禮塔)의 군대를 물리치는 등 일반 민중의 항쟁이 이어졌다.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부곡 지역의 주민까지도 몽골에 대항하여 싸웠다. 고려 조정에서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득세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은 끝났다. 몽골은 고려를 완전 정복하겠다는 처음의 계획을 포기하고,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끈질긴 저항이 안겨 준 결과였다.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1270),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이들의 항쟁은 몽골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민중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몽골과 강화한 이후, 고려는 두 차례 실시된 원의 일본 원정에 군대와 물자의 제공을 강요받았다. 또, 철령 이북에 쌍성총관부, 자비령 이북에 동녕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라는 원의 통치 기구가 설립되어 넓은 영토를 빼앗기기도 하였다.
공민왕(1351~1374)은 원명교체기를 이용하여 반원 자주 정책을 펼쳤다. 먼저 기철로 대표되던 친원 세력을 숙청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였고, 이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원의 간섭으로 바뀌었던 관제를 복구하였으며, 몽골 풍속을 금지하였다. 또,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으며(1356), 더 나아가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다.
13. 삼국통일 후 후기 신라(통일신라)가 국가체제의 확대․정비와 관련하여 취한 조치에 해당하는 것은?
① 삼국통일 후 중국의 6전 조직을 그대로 모방하여 이부․호부․예부․병부․형부․공부를 두었다.
② 지방제도는 9주 5소경제도를 마련하였으나, 통일과정에서 강대한 위력을 발휘한 군사력을 확신하게 되었으므로 군사제도에는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③ 왕실은 불교식 왕명을 버리고 중국식 시호를 취하였지만, 국가제도의 측면에서는 종교적 이념에 따라 불교적인 제도들을 도입하였다.
④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보다 왕명에 의해 실제 정무를 처리하는 집사부(집사성)가 최고의 행정관부로 중요시되었고, 책임자인 시중의 권한이 보다 강화되었다.
* 통일신라의 국가체제 정비
통일 이후 신라는 강화된 경제력과 군사력을 토대로 왕권을 전제화하였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 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통일 신라는 중앙 집권 체제로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중앙의 정치 체제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하여 관료 기구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부 시중의 지위를 높였고, 그 아래에는 위화부를 비롯한 13부(병부, 조부, 예부, 승부, 영객부, 위화부, 창부, 공장부, 좌.우 이방부, 사정부, 선부, 사록관, 예작부)를 두고 행정 업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의 비리와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감찰 기구인 사정부를 두었고, 국립 대학인 국학도 설치하였다.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군사·행정상의 요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각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군사적 기능보다 행정적 기능을 강화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아래에는 군이나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그 아래의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또, 향, 부곡이라 불리는 특수 행정 구역도 있었다.한편,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하여 외사정을 파견하였고,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군사 조직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중앙군의 핵심은 9서당이었다. 서당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람은 물론 말갈족까지 포함하여 민족 융합을 꾀하기도 하였다. 지방군으로는 10정을 두었는데, 9주에 1정씩 배치하고, 북쪽 국경 지대인 한주(한산주)에는 2정을 두었다.
통일 이후 신라는 강화된 경제력과 군사력을 토대로 왕권을 전제화하였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 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통일 신라는 중앙 집권 체제로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중앙의 정치 체제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하여 관료 기구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부 시중의 지위를 높였고, 그 아래에는 위화부를 비롯한 13부(병부, 조부, 예부, 승부, 영객부, 위화부, 창부, 공장부, 좌.우 이방부, 사정부, 선부, 사록관, 예작부)를 두고 행정 업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의 비리와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감찰 기구인 사정부를 두었고, 국립 대학인 국학도 설치하였다.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군사·행정상의 요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각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군사적 기능보다 행정적 기능을 강화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아래에는 군이나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그 아래의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또, 향, 부곡이라 불리는 특수 행정 구역도 있었다.한편,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하여 외사정을 파견하였고,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군사 조직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중앙군의 핵심은 9서당이었다. 서당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람은 물론 말갈족까지 포함하여 민족 융합을 꾀하기도 하였다. 지방군으로는 10정을 두었는데, 9주에 1정씩 배치하고, 북쪽 국경 지대인 한주(한산주)에는 2정을 두었다.
14. 다음에서 설명하는 밑줄 친 ‘이것’은?
조선시대 16세 이상의 정남에게는 이것의 의무도 있었다. 이것은 가호를 기준으로 정남의 수를 고려하여 뽑아서 성, 왕릉, 저수지 등의 공사에 동원하였다. 성종 때에는 경작하는 토지 8결을 기준으로 한 사람씩 동원하고, 1년 중에 동원할 수 있는 날도 6일 이내로 제한하도록 규정을 바꾸었으나, 임의로 징발하는 경우도 많았다. |
② 요역
③ 환곡
④ 군역
* 조선의 수취 제도 중 요역
조선의 수취 제도에는 토지에 부과하는 조세, 집집마다 부과하는 공납, 호적에 등재된 정남에게 부과하는 군역과 요역 등이 있었으며, 이것이 국가 재정의 토대를 이루었다.
조세는 과전법의 경우에 수확량의 10분의 1을 내는데, 1결의 최대 생산량을 300 두로 정하고, 매년 풍흉을 조사하여 그 수확량에 따라 납부액을 조정하였다. 세종 때에 조세 제도를 좀더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전분6등법, 연분9등법으로 바꾸고, 조세 액수를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를 내도록 하였다.
공납은 고려처럼 각 지역의 토산물을 조사하여 중앙 관청에서 군현에 물품과 액수를 할당하면, 각 군현은 각 가호에 다시 할당하여 거두었다. 공물에는 각종의 수공업 제품과 광물, 수산물, 모피, 과실, 약재 등이 있었다. 그런데 공물의 생산량이 점차 감소하거나 생산지의 변화로 인하여 납부 기준에 맞는 품질과 수량을 맞추기 어려우면, 그 물품을 다른 곳에서 구입해다가 납부하였다. 이 때문에 공물은 전세보다 납부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 부담도 훨씬 컸다.
한편, 16세 이상의 정남에게는 군역과 요역의 의무가 있었다. 군역에는 일정 기간 군사 복무를 교대로 근무하는 정군과, 정군이 복무하는 데에 드는 비용을 보조하는 보인이 있었다. 양반, 서리, 향리 등은 관청에서 일하기 때문에 군역에 복무하지 않았다. 요역은 가호를 기준으로 정남의 수를 고려하여 뽑아서 성, 왕릉, 저수지등의 공사에 동원하였다. 성종 때에는 경작하는 토지 8 결을 기준으로 한 사람씩 동원하고, 1년 중에 동원할 수 있는 날도 6 일 이내로 제한하도록 규정을 바꾸었으나, 임의로 징발하는 경우도 많았다.
③ 환곡은 본래 봄에 관청의 곡식을 농민들에게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약간의 이자를 붙여서 거두어들이는 것이었다. 이자는 원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한 손실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관청의 경비를 마련하기위한 재원으로 사용되면서 세금처럼 되고 말았다.
조선의 수취 제도에는 토지에 부과하는 조세, 집집마다 부과하는 공납, 호적에 등재된 정남에게 부과하는 군역과 요역 등이 있었으며, 이것이 국가 재정의 토대를 이루었다.
조세는 과전법의 경우에 수확량의 10분의 1을 내는데, 1결의 최대 생산량을 300 두로 정하고, 매년 풍흉을 조사하여 그 수확량에 따라 납부액을 조정하였다. 세종 때에 조세 제도를 좀더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전분6등법, 연분9등법으로 바꾸고, 조세 액수를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를 내도록 하였다.
공납은 고려처럼 각 지역의 토산물을 조사하여 중앙 관청에서 군현에 물품과 액수를 할당하면, 각 군현은 각 가호에 다시 할당하여 거두었다. 공물에는 각종의 수공업 제품과 광물, 수산물, 모피, 과실, 약재 등이 있었다. 그런데 공물의 생산량이 점차 감소하거나 생산지의 변화로 인하여 납부 기준에 맞는 품질과 수량을 맞추기 어려우면, 그 물품을 다른 곳에서 구입해다가 납부하였다. 이 때문에 공물은 전세보다 납부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 부담도 훨씬 컸다.
한편, 16세 이상의 정남에게는 군역과 요역의 의무가 있었다. 군역에는 일정 기간 군사 복무를 교대로 근무하는 정군과, 정군이 복무하는 데에 드는 비용을 보조하는 보인이 있었다. 양반, 서리, 향리 등은 관청에서 일하기 때문에 군역에 복무하지 않았다. 요역은 가호를 기준으로 정남의 수를 고려하여 뽑아서 성, 왕릉, 저수지등의 공사에 동원하였다. 성종 때에는 경작하는 토지 8 결을 기준으로 한 사람씩 동원하고, 1년 중에 동원할 수 있는 날도 6 일 이내로 제한하도록 규정을 바꾸었으나, 임의로 징발하는 경우도 많았다.
③ 환곡은 본래 봄에 관청의 곡식을 농민들에게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약간의 이자를 붙여서 거두어들이는 것이었다. 이자는 원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한 손실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관청의 경비를 마련하기위한 재원으로 사용되면서 세금처럼 되고 말았다.
15. 신라의 문화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 맞지 않는 것은?
① 처용에 관한 일화나 서양인 모습의 무인상, 유리그릇과 같은 유물들은 신라가 바다 건너 서역과 활발히 교류했음을 말해 준다.
② 신라 귀족들은 현실의 희로애락을 솔직히 표현한 토우(土偶)를 만들어 무덤 속에 넣었다.
③ 신라인들은 불국토(佛國土)를 구현하기 위하여, 남산에 수많은 탑과 불상, 마애불을 조각하였다.
④ 삼국 통일 이전, 통일을 염원하는 신라인들은 각 지방에서 대단히 큰 거불(巨佛) 형태의 불상을 조성하였다.
* 신라의 문화
① 처용가의 주인공인 처용은 울산 앞바다에 동해 용왕의 아들로 나타났는데, 서역 상인으로 추정되며, 경주 계림로 황남대총(5세기) 98호 표형 고분 남분 출토 ‘유리로 된 그릇 도기’와 경주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금제감장보검, 경주 괘릉의 무사석 등은 서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② 가야와 신라고분에서는 토기 뚜껑이나 항아리 어깨 위에 붙여진 동물 또는 인물조각의 토우(土偶)들이 많이 발견된다. 대부분 死後세계에서도 생전과 같은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무덤에 넣은 부장품 중에서 발견되는데 개구리·뱀·새 등의 동물과 가야금 같은 악기를 뜯는 인물 또는 남녀의 성희장면 등을 꾸밈없이 보여준다
③ 삼국 중에서 불교를 늦게 받아들인 신라는 6세기 후반부터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황룡사를 세우고 장육존상을 모시는 등 활발하게 불교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으며 수도 경주의 남산에는 많은 절터와 마애불상이 남아 있어서 신라 불교 미술의 융성을 알려준다. 그 중에 비교적 이른 시기의 불상으로는 산의 동쪽에 위치한 탑곡의 상으로 암벽에 불상, 탑, 비천, 승려, 동물 등 다양한 내용의 불상군이 조각되어 있다. 조각 수법이 그다지 세련되지 않으며 세부 표현도 뚜렷이 보이지는 않으나 큰 암벽을 돌아가면서 부조된 것이 불국토를 상징하는 듯하다.
④ 고려 초기에는 활기차고 거대한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광주 춘궁리 철불 같은 대형 철불 뿐만 아니라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이나 안동 이천동 석불처럼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지역 특색이 잘 드러난 거대한 불상도 조성되었다.
① 처용가의 주인공인 처용은 울산 앞바다에 동해 용왕의 아들로 나타났는데, 서역 상인으로 추정되며, 경주 계림로 황남대총(5세기) 98호 표형 고분 남분 출토 ‘유리로 된 그릇 도기’와 경주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금제감장보검, 경주 괘릉의 무사석 등은 서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② 가야와 신라고분에서는 토기 뚜껑이나 항아리 어깨 위에 붙여진 동물 또는 인물조각의 토우(土偶)들이 많이 발견된다. 대부분 死後세계에서도 생전과 같은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무덤에 넣은 부장품 중에서 발견되는데 개구리·뱀·새 등의 동물과 가야금 같은 악기를 뜯는 인물 또는 남녀의 성희장면 등을 꾸밈없이 보여준다
③ 삼국 중에서 불교를 늦게 받아들인 신라는 6세기 후반부터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황룡사를 세우고 장육존상을 모시는 등 활발하게 불교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으며 수도 경주의 남산에는 많은 절터와 마애불상이 남아 있어서 신라 불교 미술의 융성을 알려준다. 그 중에 비교적 이른 시기의 불상으로는 산의 동쪽에 위치한 탑곡의 상으로 암벽에 불상, 탑, 비천, 승려, 동물 등 다양한 내용의 불상군이 조각되어 있다. 조각 수법이 그다지 세련되지 않으며 세부 표현도 뚜렷이 보이지는 않으나 큰 암벽을 돌아가면서 부조된 것이 불국토를 상징하는 듯하다.
④ 고려 초기에는 활기차고 거대한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광주 춘궁리 철불 같은 대형 철불 뿐만 아니라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이나 안동 이천동 석불처럼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지역 특색이 잘 드러난 거대한 불상도 조성되었다.
16. 해방 직후부터 대한민국 수립까지의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박헌영과 여운형이 연합하여 1947년 거대 좌익정당인 남조선노동당을 창당하였다.
② 38도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③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북한을 방문하여 남북협상을 추진하였다.
④ 미소공동위원회는 정부수립의 참여 단체에 대한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끝내 결렬되었다.
* 해방(1945.8.15.) 직후부터 대한민국 수립(1948.8.15.)까지의 상황
해방(1945.8.15)이 되자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이유로 미군과 소련군이 38도선 이남과 이북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미·소 냉전의 국제 질서 속에서 우리 민족은 우익과 좌익 세력으로 대립하였다.
좌우의 대립은 신탁 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격화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의 3국 외상 회의에서는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의 설치, 공동 위원회와 임시 정부는 최고 5년간의 신탁 통치 협정을 만들 것 등을 결정하였다. 이에, 신탁 통치에 반대한 우익과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안에 찬성한 좌익이 대립하게 되어, 결국 자주 독립의 통일 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채 민족 분단의 길로 가게 되었다.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으나(1차: 1946.3~5), 협의 대상이 될 정당과 사회 단체 선정 문제 등으로 결렬되었다(1946.5). 이런 가운데 이승만 등 우익 세력은 자신들의 노선을 중심으로 한 정부 수립을 추진하였고(1946.6: 정읍발언, 단정론), 중도 세력은 좌우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좌우 합작 운동을 추진하였다 (1946.7).
2차 미·소 공동 위원회도 1차와 같은 문제로 결렬되고(1947.10), 한반도 문제는 유엔에 이관되었다(1947.9).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 감시 아래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을 가결하였다. 소련이 이에 반대하자, 유엔 소총회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치르기로 하였다(1948.2).
분단을 우려한 김구, 김규식 등은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 등과 평양에서 남북 지도자 회의를 개최하였지만 실패하였다(1948. 4).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보통·비밀 선거인 5·10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다. 제헌 국회에서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민주 공화국 체제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1948. 8. 15).
한편 해방 직후 좌익들은 박헌영이 남한에서 조선 공산당을 재결성하였고(1945.9),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도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결성되었다(1945.10). 그러나 사실상의 정부가 먼저 북한에서 형성되자(19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구성), 상황은 바뀌어 북한에서 1946년 9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북조선 노동당 으로 개편되었다. 또한 1946년 11월에 박헌영 주도하에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결성되었다.
중도 좌익의 여운형은 1944년 비밀 단체 조선 건국 연맹을 조직하여 위원장에 취임하고,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8월 15일 해방되자 건국 연맹의 기반을 확대하여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초로 이 해 9월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 스스로 부주석이 되었으나 우익 진영의 반대를 받은 위에 미 점령군 당국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했다. 12월 (조선)인민당을 조직하였고, 이듬해 2월 29개의 좌익 단체를 규합하여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 의장단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으나 정책 노선이 명확하지 못해 조직을 장악하지 못했고 반대파 좌익세력에게 밀려 탈퇴하였다. 또,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하였다. 중도 우파인 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1946.7)하고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1946.10)하며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 한지근에 의하여 1947년 7월 암살되었다.
해방(1945.8.15)이 되자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이유로 미군과 소련군이 38도선 이남과 이북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미·소 냉전의 국제 질서 속에서 우리 민족은 우익과 좌익 세력으로 대립하였다.
좌우의 대립은 신탁 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격화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의 3국 외상 회의에서는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의 설치, 공동 위원회와 임시 정부는 최고 5년간의 신탁 통치 협정을 만들 것 등을 결정하였다. 이에, 신탁 통치에 반대한 우익과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안에 찬성한 좌익이 대립하게 되어, 결국 자주 독립의 통일 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채 민족 분단의 길로 가게 되었다.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으나(1차: 1946.3~5), 협의 대상이 될 정당과 사회 단체 선정 문제 등으로 결렬되었다(1946.5). 이런 가운데 이승만 등 우익 세력은 자신들의 노선을 중심으로 한 정부 수립을 추진하였고(1946.6: 정읍발언, 단정론), 중도 세력은 좌우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좌우 합작 운동을 추진하였다 (1946.7).
2차 미·소 공동 위원회도 1차와 같은 문제로 결렬되고(1947.10), 한반도 문제는 유엔에 이관되었다(1947.9).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 감시 아래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을 가결하였다. 소련이 이에 반대하자, 유엔 소총회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치르기로 하였다(1948.2).
분단을 우려한 김구, 김규식 등은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 등과 평양에서 남북 지도자 회의를 개최하였지만 실패하였다(1948. 4).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보통·비밀 선거인 5·10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다. 제헌 국회에서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민주 공화국 체제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1948. 8. 15).
한편 해방 직후 좌익들은 박헌영이 남한에서 조선 공산당을 재결성하였고(1945.9),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도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결성되었다(1945.10). 그러나 사실상의 정부가 먼저 북한에서 형성되자(19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구성), 상황은 바뀌어 북한에서 1946년 9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북조선 노동당 으로 개편되었다. 또한 1946년 11월에 박헌영 주도하에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결성되었다.
중도 좌익의 여운형은 1944년 비밀 단체 조선 건국 연맹을 조직하여 위원장에 취임하고,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8월 15일 해방되자 건국 연맹의 기반을 확대하여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초로 이 해 9월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 스스로 부주석이 되었으나 우익 진영의 반대를 받은 위에 미 점령군 당국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했다. 12월 (조선)인민당을 조직하였고, 이듬해 2월 29개의 좌익 단체를 규합하여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 의장단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으나 정책 노선이 명확하지 못해 조직을 장악하지 못했고 반대파 좌익세력에게 밀려 탈퇴하였다. 또,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하였다. 중도 우파인 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1946.7)하고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1946.10)하며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 한지근에 의하여 1947년 7월 암살되었다.
17. 다음 글은 최치원의 ‘난랑비서’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글에 포함되어 있는 사상과 관련이 있는 비문을 보기에서 고르면?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실로 이는 삼교(三敎)를 포함하고 뭇 백성들을 교화한다. 이를테면 들어와서는 집안에서 효를 행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함은 노나라 사구(司寇)의 가르침이고, 하였다고 자랑함이 없는 일을 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주나라 주사(柱史)의 뜻이며,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의 교화이다. |
㉠ 사택지적비 ㉡ 울진봉평비 ㉢ 임신서기석 ㉣ 중원고구려비 |
② ㉠, ㉢
③ ㉡, ㉣
④ ㉢, ㉣
* 최치원의 ‘난랑비서’에 나타난 사상(유교, 불교, 도교)
최치원(857~?)은 신라 말의 6두품 출신 유학자로 일찌기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고 관리 생활을 하며 ‘토황소격문’ 등을 써서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귀국하여 진성여왕 때에 개혁안 10여 조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은둔 생활을 하면서 뛰어난 문장과 저술을 남겼다(진감선사 비문, 난랑비 서문 등에서 유.불.도 혼합의 사상적 경향을 보임).
제시문의 “집안에서 효를 행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함은 노나라 사구(司寇)의 가르침”이라 했는데 이는 공자의 가르침을 말하고, “하였다고 자랑함이 없는 일을 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주나라 주사(柱史)의 뜻이며”에서 주나라 주사(柱史)는 노자를 말하며,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의 교화이다”에서 축건태자는 석가모니를 말한다.
㉠ 사택지적비(654): 백제 의자왕 때 활약했던 사택지적이 남긴 비로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원찰을 건립했다는 내용. 도교 사상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 울진 봉평비(524): 법흥왕이 울진에 순행하여 어떤 사건을 처리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신라왕과 신라 6부의 관계가 나타나 국왕도 6부의 일원으로 회의에 참여하였음이 나타났다.
㉢ 임신 서기석(611년, 진평왕 대 추정) 두 명의 화랑이 “忠道를 지키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나라가 편안치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忠道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3년 내에 시경, 상서, 예기, 춘추전(좌전)을 습득할 것을 맹세한다”라는 맹세의 글을 우리말식 문체로 기록한 것으로 당시의 화랑도 사상과 한자 사용, 유교 경전 공부에 대한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중원 고구려비: 충북 충주에 소재. 장수왕 69년(481) 경에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한반도 내에 있는 유일한 고구려 비석이다. 이를 통해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에 고려 대왕과 신라 매금왕(寐錦王)이 형제처럼 위아래로 화합하여 '수천'(守天)하자는 구절이 있다. 수천은 천도(天道) 또는 천제(天帝)의 뜻을 지켜나간다는 의미이다. 또 고구려왕이 남하하여 신라왕을 부른 뒤 신라왕과 그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종주국으로 자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857~?)은 신라 말의 6두품 출신 유학자로 일찌기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고 관리 생활을 하며 ‘토황소격문’ 등을 써서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귀국하여 진성여왕 때에 개혁안 10여 조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은둔 생활을 하면서 뛰어난 문장과 저술을 남겼다(진감선사 비문, 난랑비 서문 등에서 유.불.도 혼합의 사상적 경향을 보임).
제시문의 “집안에서 효를 행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함은 노나라 사구(司寇)의 가르침”이라 했는데 이는 공자의 가르침을 말하고, “하였다고 자랑함이 없는 일을 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주나라 주사(柱史)의 뜻이며”에서 주나라 주사(柱史)는 노자를 말하며,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의 교화이다”에서 축건태자는 석가모니를 말한다.
㉠ 사택지적비(654): 백제 의자왕 때 활약했던 사택지적이 남긴 비로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원찰을 건립했다는 내용. 도교 사상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 울진 봉평비(524): 법흥왕이 울진에 순행하여 어떤 사건을 처리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신라왕과 신라 6부의 관계가 나타나 국왕도 6부의 일원으로 회의에 참여하였음이 나타났다.
㉢ 임신 서기석(611년, 진평왕 대 추정) 두 명의 화랑이 “忠道를 지키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나라가 편안치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忠道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3년 내에 시경, 상서, 예기, 춘추전(좌전)을 습득할 것을 맹세한다”라는 맹세의 글을 우리말식 문체로 기록한 것으로 당시의 화랑도 사상과 한자 사용, 유교 경전 공부에 대한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중원 고구려비: 충북 충주에 소재. 장수왕 69년(481) 경에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한반도 내에 있는 유일한 고구려 비석이다. 이를 통해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에 고려 대왕과 신라 매금왕(寐錦王)이 형제처럼 위아래로 화합하여 '수천'(守天)하자는 구절이 있다. 수천은 천도(天道) 또는 천제(天帝)의 뜻을 지켜나간다는 의미이다. 또 고구려왕이 남하하여 신라왕을 부른 뒤 신라왕과 그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종주국으로 자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 객주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항목만을 고른 것은?
㉠ 경향 각지의 상품집산지에서 상품을 위탁받아 매매를 주선하였다. ㉡ 공납 물품의 대리 납품업자였다. ㉢ 숙박업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 고공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 창고업, 화물수송업, 금융업을 겸하는 중간상인이었다. |
② ㉠, ㉡, ㉣
③ ㉡, ㉢, ㉤
④ ㉢, ㉣, ㉤
* 조선 후기 포구에서 활약한 상인 객주
객주와 여각, 이 둘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특별히 구분한다면, 객주는 모든 상품을 취급하고, 여각은 소금과 어물을 취급했다고 하며, 또한 객주는 자본규모가 작고, 여각은 자본 규모가 컸다고 한다.
객주나 여각은 각 지방의 선상이 물화를 싣고 포구에 들어오면 그 상품의 매매를 중개하고, 부수적으로 운송, 보관, 숙박, 금융 등의 영업도 하였다. 객주와 여각은 지방의 큰 장시에도 있었다.
또한 이들은 정부에 바치는 금전도 취급하면서 정부의 보호도 받게 되었고 개항 초기 외국무역 담당자로 또는 상품위탁판매자로 대두하여 새로운 자본 계급으로 성장하였으나 1930년 이후 약화되어 갔다.
㉡ 조선 후기에 정부는 대동법 실시로 수납한 미곡, 포목, 전화(공가)를 공인(貢人)에게 지급하여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여 썼다. 즉 공인은 공납 물품의 대리 납품업자였다. 대동법 실시 이전에도 각 지방에서 관청에 바치는 공물을 중간에서 방납(防納)하는 상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방납 상인이 아닌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특권적인 조달상인이 공인이다
㉣ 고공(雇工)은 조선 후기 농민층의 분화로 토지가 없어 남의 집주인(雇主)에게 고용되어 품삯을 받고 일을 해주던 계층이다. 신분은 양인이었으므로 원칙적으로 국역의 의무를 졌으며 자신의 뜻대로 고용주의 집을 떠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용주에게 인신적 지배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객주와 여각, 이 둘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특별히 구분한다면, 객주는 모든 상품을 취급하고, 여각은 소금과 어물을 취급했다고 하며, 또한 객주는 자본규모가 작고, 여각은 자본 규모가 컸다고 한다.
객주나 여각은 각 지방의 선상이 물화를 싣고 포구에 들어오면 그 상품의 매매를 중개하고, 부수적으로 운송, 보관, 숙박, 금융 등의 영업도 하였다. 객주와 여각은 지방의 큰 장시에도 있었다.
또한 이들은 정부에 바치는 금전도 취급하면서 정부의 보호도 받게 되었고 개항 초기 외국무역 담당자로 또는 상품위탁판매자로 대두하여 새로운 자본 계급으로 성장하였으나 1930년 이후 약화되어 갔다.
㉡ 조선 후기에 정부는 대동법 실시로 수납한 미곡, 포목, 전화(공가)를 공인(貢人)에게 지급하여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여 썼다. 즉 공인은 공납 물품의 대리 납품업자였다. 대동법 실시 이전에도 각 지방에서 관청에 바치는 공물을 중간에서 방납(防納)하는 상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방납 상인이 아닌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특권적인 조달상인이 공인이다
㉣ 고공(雇工)은 조선 후기 농민층의 분화로 토지가 없어 남의 집주인(雇主)에게 고용되어 품삯을 받고 일을 해주던 계층이다. 신분은 양인이었으므로 원칙적으로 국역의 의무를 졌으며 자신의 뜻대로 고용주의 집을 떠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용주에게 인신적 지배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 일제침략기 국어 연구와 한글의 보급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조선어 학회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우리말 큰 사전의 편찬을 시도하였다.
②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제정하였다.
③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을 제정하여 우리말 쓰기를 권장하였다.
④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독립 운동 단체로 간주하여 강제로 해산시켰다.
* 일제 침략기의 국어 연구와 한글의 보급 운동을 한 조선어학회
3·1 운동 이후 임경재, 장지영 등의 주도로 조선어 연구회가 창립(1921)되면서 국어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한글 연구와 더불어 강습회를 열어 한글 보급에 노력하였다. 또,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을 제정하여 우리말 쓰기를 권장하였고, ‘한글’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한글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1931년에 조선어 연구회가 조선어 학회로 확대 개편되어 한글 강습 교재를 만들어 문맹 퇴치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며 더욱 활발한 한글 보급 활동이 전개되었다.
조선어 학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이었다(1933). 이를 바탕으로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려 하였지만,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었다(해방 이후인 1957년에 간행).
또한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독립 운동 단체로 간주하여 관련된 인사들을 체포하고, 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를 조선어 학회 사건(1942)이라 한다.
3·1 운동 이후 임경재, 장지영 등의 주도로 조선어 연구회가 창립(1921)되면서 국어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한글 연구와 더불어 강습회를 열어 한글 보급에 노력하였다. 또,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을 제정하여 우리말 쓰기를 권장하였고, ‘한글’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한글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1931년에 조선어 연구회가 조선어 학회로 확대 개편되어 한글 강습 교재를 만들어 문맹 퇴치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며 더욱 활발한 한글 보급 활동이 전개되었다.
조선어 학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이었다(1933). 이를 바탕으로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려 하였지만,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었다(해방 이후인 1957년에 간행).
또한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독립 운동 단체로 간주하여 관련된 인사들을 체포하고, 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를 조선어 학회 사건(1942)이라 한다.
20. 고구려 사회에 대해 옳게 설명한 것만 모은 것은?
㉠ 지배층의 혼인 풍습으로 형사취수제와 서옥제가 있었다. ㉡ 도둑질한 자는 12배를 물게 하였다. ㉢ 지배층은 왕족인 고씨, 부여씨와 8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 진대법을 실시하여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였다. |
② ㉡, ㉢, ㉣
③ ㉠, ㉡, ㉢
④ ㉠, ㉢, ㉣
* 고구려의 사회 모습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곳은 산간 지역으로 식량 생산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대외 정복 활동에 눈을 돌렸고, 사회 기풍도 씩씩하였다.
고구려에서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행한 형법은 매우 엄격하였다. 반역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에 다시 목을 베었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적에게 항복한 자나 전쟁에서 패한 자 역시 사형에 처하였고, 도둑질한 자는 12배를 물게 하였다.
정치를 주도하며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를 누린 계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하여 5부 출신의 귀족이었다. 이들은 그 지위를 세습하면서 높은 관직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나면 스스로 무장하여 앞장서서 적과 싸웠다. 고분 벽화에는 이들의 생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백성은 대부분 자영 농민으로서, 국가에 조세를 바치고 병역 의무를 지며 토목 공사에도 동원되었다. 이들의 생활은 불안정하여 흉년이 들거나 빚을 갚지 못하면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고국천왕 때 먹을거리가 모자란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였다(194). 이는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여 국가 재정과 국방력을 유지하고, 귀족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다.
고구려의 천민과 노비는 피정복민이거나 몰락한 평민이었다. 남의 소나 말을 죽인 자를 노비로 삼거나, 빚을 갚지 못한 자가 그 자식들을 노비로 만들어 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구려 지배층의 혼인 풍습으로는 형사취수제와 함께 서옥제가 있었다. 평민은 남녀 간의 자유로운 교제를 통하여 혼인했는데, 남자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다른 예물은 주지 않았다. 신부집에서 재물을 받았을 때에는 딸을 팔았다고 여겨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진씨, 해씨, 목씨, 사씨, 연씨, 협씨, 국씨, 백씨)의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곳은 산간 지역으로 식량 생산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대외 정복 활동에 눈을 돌렸고, 사회 기풍도 씩씩하였다.
고구려에서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행한 형법은 매우 엄격하였다. 반역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에 다시 목을 베었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적에게 항복한 자나 전쟁에서 패한 자 역시 사형에 처하였고, 도둑질한 자는 12배를 물게 하였다.
정치를 주도하며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를 누린 계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하여 5부 출신의 귀족이었다. 이들은 그 지위를 세습하면서 높은 관직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나면 스스로 무장하여 앞장서서 적과 싸웠다. 고분 벽화에는 이들의 생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백성은 대부분 자영 농민으로서, 국가에 조세를 바치고 병역 의무를 지며 토목 공사에도 동원되었다. 이들의 생활은 불안정하여 흉년이 들거나 빚을 갚지 못하면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고국천왕 때 먹을거리가 모자란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였다(194). 이는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여 국가 재정과 국방력을 유지하고, 귀족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다.
고구려의 천민과 노비는 피정복민이거나 몰락한 평민이었다. 남의 소나 말을 죽인 자를 노비로 삼거나, 빚을 갚지 못한 자가 그 자식들을 노비로 만들어 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구려 지배층의 혼인 풍습으로는 형사취수제와 함께 서옥제가 있었다. 평민은 남녀 간의 자유로운 교제를 통하여 혼인했는데, 남자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다른 예물은 주지 않았다. 신부집에서 재물을 받았을 때에는 딸을 팔았다고 여겨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진씨, 해씨, 목씨, 사씨, 연씨, 협씨, 국씨, 백씨)의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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