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0일에 시행한 사회복지직 9급 지방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문 1.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 사회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천군이 지배하는 소도라는 독립 영역을 두고, 죄인이 들어오더라도 잡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
② 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노비나 가축으로 변상하게 하였다.
③ 철이 많이 생산되어 교역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④ 매매혼의 일종인 민며느리제가 행하여졌다.
정답: ③ <해설> 문제는 초기 국가, 삼한에 관한 문제이다. 당시의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에 대한 정치, 사회, 문화적 특징에 대한 비교를 통해 쉽게 풀 수 있다. 자료분석 : 천군은 삼한 사회에 존재하던 제사장을 말한다. 이들이 당시의 정치적 지배자와 달리 독립 영역을 두었다는 점, 죄인이 이곳에 들어오면 왕이라도 잡아갈 수 없게 된다. 이 사료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삼한 사회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다스려졌던 제정분리 사회였다고 말한다. 삼한은 마한, 변화, 진한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한이 다수의 소국을 다스리는 형태의 연맹왕국이었다. ① 1책 12법의 내용으로 부여의 법이다. 대체로 고조선의 법과 비슷한 내용이나, 이 조항은 정확한 수치를 통해 법의 조향이 구체적으로 변화하였음을 보여준다. ② 동예의 책화에 관한 내용이다. ③ 철이 많이 나는 지역은 삼한 중 변한 지역이다. 이후 이곳에서 가야가 성장하고, 가야는 발전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왜, 백제, 낙랑(중국) 등을 연계하는 중계무역을 한다. ④ 옥저의 결혼제도이다. |
[정답] ③
[해설]
보기 지문은 초기철기시대 삼한에 대한 설명이다. 삼한은 제정분리의 사회로, 천군이라는 종교 지배자가 소도라는 지역을 지배하였다.
① 1책 12법 : 부여
② 책화 : 동예
③ 철 : 변한
④ 민며느리제 : 옥저이다.
삼한중 하나인 변한이 정답이다.
문 2.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일제는 1910년 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1912년 토지조사령을 공포하였다.
② 역둔토나 궁장토 등의 소유권은 조선왕실에게 귀속되었다.
③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여 소유권 및 지적(地籍)을 확정한다는 명분으로 실시하였다.
④ 토지조사사업과 병행하여 일본인 농업이민과 일본인 지주들이 증가했다.
정답: ② <해설> 토지조사사업은 자주 출제되는 문제이며, 문제의 난이도는 높게 출제된다는 점에서 정확하게 공부해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번 문제는 토지조사사업은 내용만 잘 정리해두었다면 어렵지 않다. 참고로 이전의 조선시대 토지제도 및 대한제국 양전사업, 이후에 농지개혁 등과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한다면, 문제를 풀 때 더욱 유리하다. ① 토지조사사업은 일제의 경제침탈정책 중 1910년대의 대표적인 사업이다. 1910년 토지조사국을 설치한 이래, 이를 총독부로 이관한 이후, 철저한 준비작업을 거친 후, 1912년 공포하여 1918년까지 진행하였다. ② 역둔토나 궁장토의 내용을 모르더라도 토지조사사업이 일제시대에 일어난 것을 안다면, 조선왕실에 토지 소유권을 준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궁장토 및 역둔토와 같은 왕실 및 대한 제국 정부의 토지는 모두 총독부 관할이 되었다. 이 내용은 대한제국이 실시한 양전, 지계사업의 내용이다. 근대적 토지소유권 제도를 성립시킴과 동시에 황실의 재정수입을 확보하고자 실시한 사업이다. 이 사업은 황실 소유의 토지 궁방전, 정부의 역둔토(역을 설치한 토지)가 많이 있던 충청도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 양전사업 과정에서 농민의 토지 다수 궁방전 등에 혼입, 탈입되어 황실·정부와 농민 사이에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③ 일제는 토지 측량을 통해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시켰다고 선전하였으나, 실제로는 토지세를 확실하게 거둘 기초와 토지 약탈에 목적이 있었다. 지적이란 국가가 토지에 대한 물리적 현황 및 법적 권리관계를 등록하여 보장해 주는 제도이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토지 소유권 및 재산의 가치 등이 등록된다. ‘근대적 토지 소유권’이란 이것을 포함하는 의미이다. ④ 일제가 토지 조사사업을 통해 획득한 토지는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 토지 회사 및 일본인에게 헐값에 넘겨졌기에 일본인의 농업 이민 및 지주들이 증가한다. |
[정답] ②
[해설]
무단통치기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설명이다.
② 국유지였던 궁방토나 역둔토 등과 소유불문명의 토지는 토지조사사업으로 소유권이 조선 총독부에 귀속되었다.
문 3. 조선 후기에 시행된 대동법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경기도에서 시범 실시된 이후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대 실시되었다.
② 대체로 토지 1결당 쌀 12두를 부과하였다.
③ 쌀 대신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할 수도 있었다.
④ 공물 조달이 선혜청에서 상평청으로 일원화되었다.
정답: ④ <해설> 조선후기 수취체제의 개편은 자주 출제 부분이기에 조세(영정법), 공납(대동법), 군역(군역법) 3가지의 내용을 모두 잘 정확히 정리해주어야 한다. 조선후기 경제 부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농민의 조세부담을 가장 줄여 준 대동법에 관한 내용이다. ① 대동법은 광해군 때 방납의 폐단을 막기 위해 경기도를 중심으로 실시하였으나, 양반 지주층의 반대로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데는 100년이나 걸렸다. 함경도와 평안도, 제주도는 제외되었는데, 영토가 척박하고, 군현별로도 사정이 달라 군현별 물종, 징수량을 달리하는 ‘상정법’을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② 대동법의 핵심은 공납을 전세화하였다는 것이다. 가호 별로 징수하던 토산물을 토지 결수에 따라 쌀 12두를 납부하게 함으로써 토지가 없는 농민은 과세부담에서 벗어났고, 토지가 있더라도 부담이 크게 줄었다. ③ 1결당 쌀 12두을 징수하되, 산간지역이나 불가피한 경우는 당시 화폐의 가치가 있던 포(삼베, 무명) 그리고 동전으로 납부할 수 있었다. 미, 포, 전으로 납부하였던 것이 대동법이다. ④ 대동법은 처음에 ‘선혜법’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그리고 대동법이 시행되는 6개의 도에 설치하여 선혜청을 두어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상평청은 물가조절기구이자 구휼기구였으나, 인조 때 선혜청에 흡수되었다. 각 기구의 기본 역할만 기억한다면 쉽게 잘못된 내용임을 파악할 수 있다. |
[정답] ④
[해설]
공납제도에서 방납과 대납의 폐단이 발생하자, 광해군때 대동법이 실행되었다. ④ 종전 궁방, 관청별로 무계획적으로 행해지던 공물 조달이 선혜청으로 일원화되었다. 조선시대 세금을 관리하는 전담기관으로서 선혜청 (宣惠廳)이 신설되었고, 여기서는 징수된 대동미를 물종에 따라 공인들에게 공물가로 지급하고 필요한 물품을 받아 각 궁방과 관청에 공급했다. 따라서 공물의 조달은 선혜청으로 일원화되었다.
문 4. 다음과 같은 강령을 내세운 세력이나 군대는?
○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라. ○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깨끗이 하라. |
② 이순신 지휘하의 수군
③ 이성계 휘하의 고려군
④ 최익현 의병 부대
정답: ① <해설> 분석 : 자료는 동학농민군의 4대강령의 일부 내용이다. 동학농민군은 고부농민봉기로 고부를 점령한 후 백산에서 격문을 발표하였고, 이어서 이 4대행동 강령을 선포한다. 이렇게 해서 더 커진 농민군은 호남 일대를 장악하고, 전주성까지 점령하기에 이른다. (1차농민봉기) 동학농민군은 관련된 사료를 통해 내용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강령 :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사상의 핵심은 사람이 곧 하늘이요, 모든 사람이 하늘처럼 존귀하다는 것이다. 동학이 사상을 그 시작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라. -> 충효를 바탕으로 ‘보국안민’(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함)을 강조하는 것도 동학의 중요한 사상이다. 보국안민은 동학농민운동의 핵심 사상이다. 동학은 유, 불, 선이 모두 근원을 하늘에 두기에 각각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은 버려서 만든 것이라 밝힌 바 있다.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깨끗이 하라. -> 동학농민운동은 반외세의 운동이었다. 이에 농민군은 일본군이 경복궁 점령하고, 내정 간섭을 하는 것에 (갑오개혁) 맞서 제2차농민봉기를 일으키는 것이다. ④ 최익현의 의병부대는 을사조약에 저항하는 반외세의 의병을 일으켰으나,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보국안민의 사회개혁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
[정답] ①
[해설]
보기 강령은 백산 봉기때 발표된 동학농민군의 4대명의이다. 고부민란에 대한 조사를 맡았던 안핵사 이용태의 동학교도 탄압으로, 전봉준이 창의문을 선포하고, 백산에서 농민군을 조직하여 봉기하였다. 이때 집결한 동군농민군의 규율을 잡고자 4대명의가 발표되었다.
문 5. 다음 인물들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 김굉필 |
② 정치활동의 목표를 부국강병과 민생치안에 두었다.
③ 공신으로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사람들이 많았다.
④ 향사례․향음주례의 보급, 사창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정답: ④ <해설> 자료 분석 : 15세기 말, 성종 때 김종직을 필두로 사림 세력이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하였음을 기억한다면, 이들 세력이 ‘사림’임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 대립하는 두 세력, 훈구와 사림의 특징을 구별하여 정리해두어야 한다. 자주 출제되는 문제이다. ① 훈구는 당시 집권세력으로 서울에 거주하여,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운 신하들로, 대를 이어 고위 관직을 차지한 세력이다. 반면, 사림은 향촌에 거주하며, 김종직을 필두로 주로 3사에서 언론과 학술을 담당하며 훈구에 맞섰다. ② 훈구는 중앙집권적 통치를 지향하였기에 부국강병과 민생치안을 강조, 사림은 향촌 자치를 통해 성리학적 도학 정치를 추구하였다. ③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운 세력들이다. ④ 향사례, 향음주례란 향촌의 유생들이 지역의 향교와 서원을 중심으로 예를 갖추어 술을 마시며, 잔치를 하는 행사이다. 사창제는 향촌에서 실시하는 민간 자치적 구휼제도이다(세종 때 처음 실시, 폐지를 반복하다가 흥선대원군 때 환곡이 폐지된 이후, 다시 실시). 이 모두는 향촌 자치와 관련된, 사림의 성리학적 정치가 구현된 내용이다. |
[정답] ④
[해설]
보기의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 김굉필은 사림파로, 성종이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을 중용하면서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하였다.
①, ②, ③은 훈구파에 대한 설명이다.
사림파는 근거지인 향촌을 장악하기 위해, 향사례․향음주례의 보급, 사창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문 6. <보기 1>의 조선 법전들이 편찬된 국왕대와 <보기 2>의 정치 상황을 바르게 연결한 것은?
<보기1>
ㄱ.경국대전 ㄴ.속대전
ㄷ.대전회통 ㄹ.대전통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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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2>
A.갑술환국 B.탕평정치
C.사림 등장 D.세도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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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ㄴ-B
③ ㄷ-C
④ ㄹ-A
정답: ② <해설> 자료분석 : 조선의 법전의 편찬 순서는 자주 제시되는 문제이다. 법전은 국가의 체제를 정비한다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제외하고 나머지 법전들은 모두 국왕의 왕권강화 및 체제정비를 목적으로 만들어 졌다. 그러므로 법전을 편찬한 왕들의 시대와 주요 업적을 잘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ㄱ : 경국대전 (성종 : 조선의 통치 제도를 성문화한 법전으로 보다 합리적인 국가 운영 체제 갖추게 됨=경국대전 체제를 이룩함) ㄴ : 속대전(영조, 탕평정치의 일환으로 국가의 체제 정비) ㄷ : 대전회통(고종, 흥선대원군 개혁정치의 일환) ㄹ : 대전통편(정조, 탕평정치의 일환으로 국가의 체제 정비) A: 갑술환국은 숙종 때의 일로써, 기사환국으로 서인세력을 축소시키고, 민씨를 폐비시킨 남인 세력(장희빈 세력)이 폐비 민씨 복위과정에서 실권하게 된 사건이다. 이 후, 노론과 소론이 갈라져 집권하게 된다. 숙종은 권력다툼으로 변질된 붕당을 다스리고자 탕평책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환국이 발생하면서 붕당의 공종 원리가 무너지고, 특정 붕당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B: 탕평정치는 붕당간의 극심한 대립으로 왕권까지 위협되는 상황 속에서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을 추진하여 붕당 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법전과 서적을 편찬하여 문물을 정비하고, 18세기 문예 부흥을 이끌었다. C: 성종 때는 김종직을 필두로 한 사림세력이 중앙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시켜, 세조이후 정권을 장악한 훈구세력과 대척시켰다. D: 정조 사후, 왕권이 약해지자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나타난다. 당시 고종이 즉위하였고, 그의 아버지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 세력을 약화시켜 정치 기강을 바로잡고,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 새로운 법전으로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② 영조는 탕평정책을 통해 붕당의 폐단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속대전, 속오례의,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여 문물을 정비하고, 문예를 부흥시켰다. (정답) |
[정답] ②
[해설]
ㄱ.경국대전 : 성종때 편찬완성,
ㄴ.속대전 : 영조때 김재로가 편찬,
ㄷ.대전회통 : 고종때 편찬,
ㄹ.대전통편 : 정조때 김치인이 편찬
A.갑술환국 : 숙종,
B.탕평정치 : 영조때 완론탕평책 실시,
C.사림 등장 : 성종때 김종직이 중앙정계 진출,
D.세도정치 : 19세기 순조즉위로 시작됨.
일치되는 지문은 ㄴ-B 이다.
문 7. 다음 조항이 포함된 조약과 직접 관련된 내용은?
제4관. 조선국 부산 초량진에는 일본국 공관이 있어 오랫동안 양국 인민의 통상 구역이 되어 있다. 이제 마땅히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을 혁파하고 새로 만든 조약에 의거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하도록 한다. 또한 조선국 정부는 따로 제5관에 기재된 2개의 항구를 열어 일본국 인민의 왕래 통상함을 들어주어야 한다. |
② 양화진 개방
③ 치외법권의 인정
④ 내지 통상 허용
정답: ③ <해설> 강화도조약에서 잘 다루지 않는 4관의 내용을 자료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다만 마지막에 언급된 부산 외의 2개의 항구에 관한 내용을 통해 강화도조약과 관련된 사실을 찾는 문제임을 간파해야한다. 자료 분석 :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의 내용이다. 조선과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부산 초량에 왜관을 신축하여 양국의 외교와 무역 업무를 보게 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무역 관례를 혁파하고, 차후 이루어지는 경제 조약 등을 통해 새롭게 할 것과 부산 항 이외에 2개의 항구를 개항해야한다는 내용이다. 부산항 이외에 2개의 내용을 통해 강화도 조약임을 추론할 수 있다. 이후 맺은 조일수호조규부록을 따라 부산에 이어 인천과 원산이 개항되었다. ① 곡물수출금지는 ‘방곡령’이다. 방곡령은 1883년 조일통상장정 개정 때의 내용으로 본래 무제한 유출할 수 있었던 조항을 개정한 것이다. 조선의 곡물을 1개월 전에 외교 담당 관청에 통고하면 일본으로의 곡물 수출을 지방관이 제한할 수 있었다. ②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관한 내용이다. 임오군란 이후 영향력이 커진 청은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 재확인 및 개항장을 비롯한 서울과 양화진에 상점을 개설하고, 내지(내륙) 통상을 보장받았다. 종래의 개항장 무역의 내륙무역으로 바뀌어 서울의 시전상인 등이 큰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지점이다. ③ 치외법권 조항은 강화도 조약에서 체결된 내용으로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이다. ④ ②와 같은 내용이다. |
[정답] ③
[해설]
보기 조항은 1876년 맺어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내용이다. 강화도조약은 우리가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조약으로, 조선의 주권을 침해 한 것이다. 치외법권(영사재판권)과 연해측량의 자유는 조선에게 불리한 불평등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① 곡물 수출 금지 : 방곡령으로, 1883년 개정된 조일통상장정의 내용이다. 천재 ·변란 등에 의한 식량부족의 우려가 있을 때 방곡령을 선포하는 조항(제37관)
② 양화진 개방과 ④ 내지 통상 허용 : 1882년 맺어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규정된 내용이다.
문 8. 다음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나타난 정치상의 변화가 아닌 것은?
진덕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에게 섭정하기를 청하였다. 알천이 한결같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은 늙고 이렇다할 만한 덕행도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은 이는 춘추공 만한 자가 없습니다. 실로 가히 빈곤하고 어려운 세상을 도울 영웅호걸입니다.” 마침내 (김춘추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김춘추는 세 번 사양하다가 부득이하게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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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이후 진골 출신도 왕이 될 수 있었다.
③ 국왕의 조언자 역할을 하는 상대등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④ 집사부 시랑직에 6두품 출신들이 진출하였다.
정답: ③ <해설> 먼저 자료의 내용을 통해 이 문제가 김춘추(무열왕)부터 시작된 신라 중대의 정치적 특징을 묻는 문제임을 파악하여야 한다. 왕의 계통이 바뀌었음과 신라 중대 전제왕권 강화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답을 찾을 수 있다. 문제를 파악해야 하고, 또한 다소 구체적인 보기 제시로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문제이다. 자료분석 진덕여왕이 죽고 왕위계승자가 없자, 신라 전통대로 고위 신하들이 귀족의 대표 상대등을 중심으로 화백회의를 열어 당시 상대등인 김알천에게 왕위를 주었다. 그러나 김춘추는 김유신의 도움을 받아 김알천을 물리치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한다. 삼국사기에서 언급된 여러 신하들이 김알천에게 왕위 섭정을 권하나 그가 김춘추에게 넘기고, 그가 세번 사양 끝에 부득이 왕위에 올랐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유교적 사관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일 뿐이다. ① 김춘추는 진골 출신으로 이후 신라의 왕위는 무열왕(김춘추)계가 차지하게 된다. 진덕여왕을 끝으로 종래 신라의 왕위 계통인 성골골품은 소멸한다. ② 신라 중대는 진골 무열왕계통으로 바뀐다. ③ 화백회의의 결정을 무시하고 왕위를 차지한 신라 중대의 정치는 전제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귀족회의의 수장인 상대등의 권한은 약화시킬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왕의 명령을 수행하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중시)의 권한이 강화된다. ④ 집사부 시랑에서 시랑은 차관직으로 6두품, 5두품 세력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전제왕권 강화 과정에서 종래의 진골귀족세력이 약화되면서 소외되었던 6두품이 뛰어난 유학적 실력을 바탕으로 왕의 정치적 조언자 혹은 행정실무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정답] ③
[해설]
보기는 마지막 성골왕이었던 진덕여왕 사후, 진골로써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김춘추 즉위의 대한 설명이다. 김춘추는 왕위에 올라 무열왕이 되었으며, <삼국사기>의 구분에 의하면 무열왕때부터가 신라 중대이다. 중대는 전제왕권의 시기로 왕권이 강력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진골귀족의 대표자였던 상대등이 약화되었고, 국왕을 보좌하였던, 집사부의 시중과 6두품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문 9. 20세기 초 사회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신극 운동이 일어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② 외국의 역사서 혹은 문학작품들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③ 찬송가 등이 보급되면서 서양의 근대 음악이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④ 기독교계에서는 영적 각성 운동으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정답: ① <해설> 20세기 초반 근대문물의 수용으로 달라진 사회 문화적 현상에 대한 내용을 찾는 것이다. 1910년~20,30년대까지 일어난 변화상을 모두 다룰 수 있기에 시대가 아닌 내용의 사실 여부에 초점을 두고 문제를 풀어야 한다. 다소 지엽적인 사실을 묻고 있기도 하나, 알고 있는 내용의 사실 여부를 잘 판단한다면 좀 더 정답에 가깝게 갈 수 있다. ① 신극운동은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이르기까지 유학생과 지식을 중심으로 토월회와 극예술 연구회 등을 창설하여 서양식 연극을 연구하고 공연하는 활동을 하였다. 근대 문물과 사상의 수용으로 변화하는 사회상을 표현하는 사회개혁적 성격이 농후하다. 개량주의적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민족의식 고취와는 거리가 멀다. 신극운동의 성격을 잘 기억해둘 것. ② 크리스트교의 포교와 함께 성경과 천로역정 등의 번역 그리고 걸리버 여행기, 이솝우화, 로빈슨 표류기 등이 번역된다. 역사서에 있어서는 신채호가 외국의 흥망사를 다룬 베트남 망국사, 미국 독립사, 이태리 건국 삼걸전 등의 역사서를 번역하여 학교의 교재로 쓰기도 하였다. ③ 개신교 개통의 교회와 학교에서는 찬송가가 널리 보급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서양식 악곡에 우리말 가사를 붙여 부를 노래인 창가가 널리 유행하였다. ④ 개신교계에서는 1907년 영성각성 부흥운동이 일어난다. 원산, 평양 등지에서 있었다.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 및 오순절 성령강림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
[정답] ①
[해설]
신극은 문명개화에 매몰되어 민족 의식을 드높이기보다는 친일로 가는 경향이 짙었다. 출처 - 한국근현대사교과서(금성)
② 한국근대의 첫 번역소설인 천로역정, 성경, 윤치호가 번역한 이솝이야기, 로빈슨 표류기, 걸리버 여행이 등이 있다. 현채의 월남망국사는 번역 역사서이다.
③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 선교의 수단으로 찬송가가 전파되었다.
④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 혹은 ‘성령 대부흥 운동’을 말한다.
문 10. 밑줄 친 ㉠∼㉣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정조는 ㉠준론탕평을 추진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을 제거하였다. 이어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남인 계열 인물을 중용하였고, ㉢규장각을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또한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허락하는 ㉣통공정책을 실시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였다. |
② ㉡-대표적 인물은 채제공, 이가환, 정약용 등이었다.
③ ㉢-본래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기구로 설치되었다.
④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의 금난전권이 철폐되었다.
정답: ④ <해설> 정조의 탕평정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묻고 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치는 변질된 붕당정치를 극복하고자 한 정책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출제 빈도도 높다. 두 왕의 정책을 정확히 비교하는 것이 중요한다. ① 탕평정치의 방법론을 묻는 질문으로, 영조는 당파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어느 당이듯 온건하고 타협적인 세력을 취하여 왕권에 순종하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반면, 정조의 준론탕평은 명분과 절의를 지키는 청류를 기준으로 당파의 시비를 명백히 가려 특권세력을 배제하고, 급진계열을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었다. ② 종래의 당파를 고수하는 노론 벽파와 달린 정조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남인 계열과 소론 계열이 시파를 형성하여 대립하였다. 정조를 따르는 대표적인 남인 세력은 체제공, 이가환, 정약용이 맞다. ③ 규장이란 왕의 글과 시문이란 뜻으로 규장각은 역대 임금의 글과 책을 수집하여 보관하는 왕실도서관으로 설립한 것이 맞다. 정조는 이러한 종래의 기능과 더불어 이를 강력한 정치기구로 육성하고자 비서실 기능을 부여하고, 과거 시험과 관료 교육까지 담당하게 한다. ④ 정조의 통공정책은 신해통공이라고 부르는데, 육의전을 제외하고 일반 시전의 금난전권을 철폐하여 자유상업정책을 어느 정도 보장하였다. 종래에 난전을 금지한 정책을 실시한 이유는 시전상인의 상업활동을 보호함으로써 국가 재정에 차질을 없애고자 함이었으나, 이들이 점차 독점적인 도고로 성장하고, 심지어 특권 정치 세력(노론)과 결탁하여 특권 도고가 됨으로써 상업활동의 발전을 저해하자 종래의 기능을 일부 수행한 육의전을 제외하고, 나머지 일반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것이다. |
[정답] ④
[해설]
㉣ 정조때 채제공의 건의로 실행된 신해통공(1791)은 국가의 필수품을 담당하는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이 철폐된 것으로, 상업의 독점권을 폐지하여, 자유상업체제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문 11. 한국의 기전체 역사서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역사가와 그 저술로 옳은 것은?
① 유지기의 '사통'
② 사마천의 '사기'
③ 사마광의 '자치통감'
④ 주희의 '통감강목'
정답: ② <해설> 역사 서술 방식의 하나로서 본기(本紀)·열전(列傳)·지(志)·연표(年表) 등으로 분야사로 구성하는 역사 서술 체재를 말한다. 사마천의 ‘사기’ 에서 비롯되어 한국의 역대 왕조에서 역사 서술의 기본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대표적인 저서로 삼국사기와 고려사가 있다. ① 중국의 역사 사학 이론을 정리한 책으로 기전체, 편년체 등의 체례를 정리한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③ 일기식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록하는 편년체 서술 방식으로 대표적인 한국의 역사서로는 왕조실록,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조선왕조실록이 있다. ④ 줄거리 기사를 큰 글씨로 구체적 서술은 작은 글씨로 쓰는 강목체로서 한국의 대표적 저서는 동사강목이다. |
[정답] ②
사마천은 '사기'에서, 본기, 세자, 열전, 지, 표로 구성된 기전체 체제를 만들어 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대표적이다.
① 유지기의 '사통' : 유지기는 당나라 역사가로, 사통은 중국의 사학(史學) 이론과 사학비평의 고전이다.
③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편년체, ④ 주희의 '통감강목'은 강목체이다.
문 12. 고려시대 백성의 생활상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부모의 유산은 일반적으로 자녀에게 골고루 분배되었다.
② 농민은 향도와 같은 공동체 조직을 결성하고 있었다.
③ 흉년이 되면 의창에서 곡식을 빌릴 수 있었다.
④ 향약에 의해 마을 질서를 자체적으로 유지하였다.
정답: ④ <해설> ① 남녀간 차별 없이 부모의 유산이 골고루 분배되었다. ② 향도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재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불교적 신앙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불교적 성격을 바탕으로 민간신앙이 포함된 형태의 향촌공동체적 활동을 하였다. 불교행사 및 지역의 회음 및 장례부조와 관련된 활동들이다. 조선시대에는 16세기에 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향약에 흡수되었다가, 조선후기 공동노동조직인 두레를 중심으로 향촌사회가 발전하면서 향도가 사라지게 된다. ③ 고려 성종 때 구휼기관으로 만들어졌고 조선시대까지 유지되었다. ④ 향약은 조선시대 사림들이 중심이 되어 유교 윤리를 향촌에까지 보급하여 백성을 교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한 것이다. 조광조가 유향소의 대체로 향약의 실시를 주장하였었고, 사림이 정권을 잡은 후에 마을 단위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황과 이이때에 조선의 실정에 맞는 향약이 보급된다. |
[정답] ④
[해설]
④ 향약은 조선시대에 실시되었다. 중종때 조광조가 향약보급운동을 펼쳤지만, 기묘사화로 실패하였다가, 선조때 이황과 이이에 의해 보급되었다.
① 고려시대는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시기로, 재산이 균등상속되었다.
② 향도는 고려시대 전기에는 불교신앙조직이었다, 후기에는 단순한 농민공동조직으로 변모하게 된다.
③ 태조때 설치했던 구휼기관이었던 흑창이, 성종때 의창으로 변화하였다.
문 13. (가), (나)의 밑줄친 ‘이들’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 정부는 종로에 상가를 만들어 이들로 하여금 독점 영업을 하게하고 세금을 거두었다. (나) 정부는 이들을 공장안에 등록시켜 서울과 지방의 각급 관청에 소속하게 하고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제조하게 하였다. |
② (가)는 16세기 중엽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③ (나)는 부역으로 동원되어 물품을 만들었다.
④ (가), (나)의 활동은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정답: ② <해설> 조선전기 국가에 의해 운영된 상업(시전)과 관영수공업에 관한 내용으로, 시전과 관영수공업의 운영 방식을 자료를 통해 파악한 후, 각각의 역할을 파악해야 한다. 자료분석 : (가)는 시전을 말하는 것으로 시전은 궁중과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대가로 그 물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가진 어용상인이다. 금난전권의 행사가 이를 보장하는데, 이것은 독점판매권을 가진 그들의 상품을 다른 상인이 파는 행위를 막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나)는 관영수공업의 장인들을 말한다. 관영수공업의 운영방식을 설명한 것이다. ② 16세기 중엽 이후 농업생산력 발전으로 상업이 발달하여 장시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리고 (가), (나)의 활동도 이 시기에 통제가 완화되어 간다. 이에 종래의 시전의 독점적 특권은 자유상업체제로 변화하여 가고(신해통공, 정조) 관영수공업은 몰락하고, 민간 수공업체제로 바뀌어간다. ③ 장인을 공장안에 등록하여 관청에 소속되어 물품을 제조하고 바친다는 것은 부역노동을 통해 물품을 제조한다는 개념이다. 조선후기에는 대동법으로 공인의 활동으로 관영수공업이 몰락하게 된다. 그리하여 장인세를 내고 활동하는 민간 수공업자가 증가하게 된다. ④ 조선전기에는 농본억상 정책에 의해 상공업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통제하였다. |
[정답] ②
[해설]
(가) 조선시대 관허상인이었던 “시전상인” (나) 조선시대 관청수공업에 소속되었던 “수공업자(장인)” 들이다.
② 16세기 중엽 전국으로 확대되었다는 내용은 장시(시장)과 관련된 내용이다.
문 14.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편찬된 조선 후기의 역사서는?
○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 우리 역사의 독자적인 정통론을 세워 이를 체계화하였다. ○ 역사사실을 치밀하게 고증하여 고증 사학의 토대를 쌓았다. |
② 해동역사
③ 동사강목
④ 연려실기술
정답: ③ <해설> 조선후기 국학이 발전하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서가 많이 편찬된다. 조선후기 역사서는 자주 출제되는 문제이기에 각 서적의 저자와 특징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자료분석 :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책은 동사강목과 해동역사이다. 그러나 민족사의 독자적 정통성을 내새워 서술한 책은 안정복의 동사강목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으로서 기자조선-마한-통일신라-고려로 연결되는 독자적 정통론을 세워 비정통과 구별하여 서술하였다. 또한, 이 책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삼국사기, 고려사 등 총 43종의 서적과 17종 중국서적 등 광범위한 자료들을 참고, 비교, 검토하는 철저한 고증을 통해 연구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를 강과 목의 형식으로 실증적으로 정리한 강목체의 조선후기 대표적 역사서이다. ① 동국통감 : 조선전기 서거정 등이 왕명(세조)을 받아 서술한 역사책이다.(성종 때 완성) 신라 초 ~ 고려말까지를 다루는 편년체의 통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역사서가 없기에 중국의 <자치통감>에 준하여 서술하였다. ② 해동역사 : 조선후기 실학자 한치윤의 역사서로서 고대에서 고려까지의 왕조를 기전체로 정리한 역사서이다. 객관적인 서술을 위하여 중국사서 523종과 일본사서 22종, 한국의 기본서 550여종에서 한국 관계 기사를 모조리 발췌하여 기사의 잘못된 곳을 바로잡고, 자신의 의견까지 곁들인 실증적 역사서이다. ③ 연려실기술 : 실학자 이긍익은 조선 태조부터 숙종까지의 왕대의 중요 사건과 당쟁을 기사본말체(사건 중심으로 서술)로 편찬한 역사서이다. 공정성을 위하여 저자의 사견이 없고, 400여종의 책을 참고하여 각 조항마다 출전을 밝히는 등 실증적 연구태도를 보였다. |
[정답] ③
[해설]
안정복의 동사강목은 우리 역사의 정통성을 체계화 하는 “삼한정통론”을 주장하였다.
문 15. 우리나라 불교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신라 말에는 실천 수행을 통하여 마음 속에 내재된 깨달음을 얻는다는 선종 불교가 널리 확산되었다.
② 고구려 불교를 계승한 발해의 불교는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③ 고려에서 대장경을 간행했다는 것은 불교의 교리 체계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④ 호족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고려왕조는 정책적으로 선종을 우대하고 교종을 억제하였다.
정답: ④ <해설> 신라 말부터 고려의 불교에 대한 내용이다. 불교가 중요한 사상이었던 이 시대 불교에 관한 사실 여부를 파악하는 문제이다. ① 신라 말 진골 귀족의 왕위 쟁탈전과 지나친 향락과 모순 속에서 이들과 연결된 교종 불교의 권위를 부정하는 선종 불교가 성행한다. 경전에만 치중하여 관념화된 교종과 달리 선종은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강조하였고, 당시 지방 호족의 사상적 뒷받침 역할을 하여 신라 말 고려 초 사회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② 발해의 불교는 동시대의 신라 불교와 마찬가지로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③ 대장경은 부처의 말씀(경)과 가르침(율), 고승들의 연구서(논) 3장을 일컫는 것으로 대장경을 간행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경 정리 사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려에서는 초조대장경, 재조(팔만)대장경 등이 거란 및 몽고의 격퇴를 염원하면서 각각 판각되었기에 호국불교의 산물이기도 하다. ④ 고려는 교종(5교)과 선종(9산)이 양립, 대척하였고 고려 중기에는 의천(천태종)의 교관겸수, 고려후기에는 지눌(조계종)의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바탕으로 한 교선일치운동이 있었다. |
[정답] ④
[해설]
④ 고려왕조는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특히 왕실의 종파였던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 5교를 통합하고, 선종마저 통합하려 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광종때 균여와 숙종때 의천의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다.
문 16. 조선 후기 미술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김정희는 우리의 정서와 개성을 추구하는 단아한 글씨의 동국진체를 완성하였다.
② 강세황은 서양화 기법을 반영하여 사물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③ 신윤복은 도시인의 풍류생활과 부녀자의 풍속을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④ 정선은 바위산을 선으로 묘사하고, 흙산을 묵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활용하였다.
정답: ① <해설> 조선 후기 미술과 서예에서는 보기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다양한 특징이 나타나기 때문에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① 김정희는 당시 성리학자들의 맹목적 비난을 받았음에도 독창적인 글씨체인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동국진체는 조선후기 이광사가 완성한 글씨체이다. ② 강세황은 조선후기 화가로 원근법 등의 서양화법을 도입하였다. ③ 신윤복과 김홍도는 풍속화를 남겨 조선후기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전해준다. 김홍도가 일반 생활상을 그린 반면, 신윤복은 풍류와 부녀자의 풍속을 그렸다. ④ 정선은 우리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진경산수화를 개척하였는데, 자연에 대한 심도있는 관찰로 선과 묵으로 묘사하는 자유로운 필묵법을 개발하였다. |
[정답] ①
[해설]
김정희는 조선후기 추사체로 유명하였다. 동국진체는 이광사가 완성하였다.
문 17. 4․19혁명 전후 한국 정치의 전개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장면 정권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했으나 군사정변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②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후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③ 총선거 결과 민주당의 윤보선과 장면이 각각 대통령과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다.
④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이 공무원과 관변단체를 동원하여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정답: ① <해설> ① 장면내각은 군비 축소를 통해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을 마련하였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5.16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이후, 수립된 박정희 정부는 이 계획에 기초하여 제 1차 경제개발계획을 실한다. ② 이승만 하야 후, 허정을 수반으로 한 과도정부가 수립되었고, 여기서 새 헌법 제정에 나서 내각 책임제 개헌이 이뤄졌다. ③ 새 헌법에 따른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하여 윤보선, 장면이 각각 대통령, 국무총리가 되었다. ④ 제 4 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거의 당선이 확실시 된 자유당 이승만은 부통령으로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공무, 마을 이장, 경찰, 정치 깡패까지 동원하여 부정을 저질렀다. |
[정답] ①
[해설]
장면 정권은 5개년 계획안을 작성하여 추진하려고 하였으나 정치불안으로 시행하지 못하였다. 박정희 군사정부에 의해서 1961년 7월 경제재건 5개년계획이 발표되면서,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문 18. 19세기 조선 사회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홍경래의 난은 서북 지방의 몰락 양반과 영세농민, 중소 상인, 광산노동자 등이 참여하였다.
② 진주농민항쟁은 봉기 세력이 유계춘의 지도 아래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③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는 이 시기에 한글로 번역되어 천주교의 유포에 기여하였다.
④ 서울의 중인들은 상소를 통해 통청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답: ③ <해설> 19세기 조선 사회의 민란 및 새로운 사상, 신분제의 붕괴와 관련된 내용이다. ①, ② 19세기 평안도의 홍경래의 난(181, ①)과 진주민란(186, ②)은 대표적인 민란이다. 진주민란을 기점으로 3남 지방을 위시한 전국 각지에 농민 봉기가 일어난다. 모두 맞는 내용이다. ③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는 17세기 이수광이 소개 한 이래 실학자 이익 등이 서학에 관심을 갖는 과정에서 읽고, 논평하기 시작하다 18세기에는 이벽, 정약용, 이승훈 등이 여기에 담긴 천주교 교리 등을 이해, 소화하여 천주교 신앙에 도달하여 천주교 신앙 실천 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 18세기 조선천주교회 창설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한자로 엮어졌기에 일반대중과는 가까이 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18세기 중엽 천주실의의 한글 번역 고서본이 많이 발견되어 있다. 19세기가 아님으로 오답. ④ 18, 19세기에는 서얼(중인) 등이 상소를 통해 서얼통운동(청요직 요구)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18세기 정조 때 박제가, 이덕무 등이 규장각 검서관에 등용된다. 그리고 19세기 신해통공(=허통)(185) 상소를 청요직 허통이 완전히 이루어졌다. 기술관 중심의 상층 중인세력은 이에 자극을 받아 1850년(19세기 중엽) 신분상승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연합상소를 하여 통청운동을 벌였으나, 성과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역관, 의관 등의 기술직 중인들이다. 한편 서울의 아전 출신의 중인세력들은 위항문학 등의 문예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세를 넓혀나갔다. |
[정답] ③
[해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는 한자로 엮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가까이 하기 어려웠다. 이에 따라 한글 번역본이 나왔는데, 한글로 번역되는 시기는, 18세기 중엽이다.
문 19.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3․1운동을 계기로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되었다.
② 본국과의 연락을 위해 연통제를 실시하였다.
③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표방하였다.
④ 기관지로서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정답: ③ <해설> ① 3.1운동을 계기로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필요성에서 각 지역에서 임시정부 수립이 이루어진다. 이 때 수립된 한성정부, 상해정부, 연해주 정부를 통합하여 상하이를 지역 기반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다. ② 국내 비밀행정조직망 연통제를 통해 임시정부 문서 전달 및 군자금 조달이 이루어졌다. ③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1년 건국강령을 수립하는데 여기에서 ‘자유주의’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만든다. 후에 이 두 사상은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의 바탕이 된다. 삼균주의는 정치(민주공화정), 경제(전국의 토지와 대생산기관 국유화), 교육의 균등(의무교육)을 말하는 것이다. ④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족의 독립운동 상황을 보도하여 민족의식을 드높이고자 하였다. 독립협회의 ‘독립신문’과 이름이 같다. |
[정답] ③
[해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발표된 임시헌장에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표방하였다.
문 20. 1952년에 통과된 발췌개헌안의 핵심 내용은?
① 대통령 간선제 실시
② 내각책임제 실시
③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철폐
④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제
정답: ④ <해설> 한국전쟁 직전 5.30선거에서 참패를 한 이승만은 전쟁 후, 자유당을 조직하고 재집권을 모색하지만 대통령 간선제로는 재선이 안 될 것을 예상하고,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양원제,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제)을 만들어 국회에서 기립 표결을 붙여 통과시킨다. 이는 민주 국민당의 내각책임제와 상하 양원제 안을 발췌, 절충한 안이다. 이로서 대통령직선제가 실시되어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① 제헌헌법, 유신헌법과 8차 헌법(전두환 추진)이 대통령 간선제의 형태이다. ② 4.19 혁명 후의 3차 개헌(허정 과도 정부)에서 실시되었다. ③ 2차(사사오입 개헌) 이승만이 종신 집권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실시되었다. |
[정답] ④
[해설]
1950년 2대 국회의원선거(5. 30총선거)에서 이승만계열이 패배하자, 이승만은 초대 헌법(간선제)으로는 국회에서 당선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개헌을 통해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려하였다. 한국전쟁기간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부산정치파동(1952. 5)을 일으켜, 야당의원을 체포, 감금하였으며, 결국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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