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5일에 시행한 경찰직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다음 보기에서 제시한 풍속을 가진 국가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
형벌은 엄격하고 각박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적몰(籍沒)하여 노비로 삼았다. 도둑질을 하면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를 배상하게 하였다. 남녀 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 투기하는 것을 더욱 미워하여 죽이고 나서 그 시체를 나라의 남산에 버려서 썩게 하였다. 친정집에서 (그 부인의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
② 송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여 농경과 목축이 성하였다.
③ 제천행사 기간 동안에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토의하고, 죄인을 재판하여 풀어주었다.
④ 서옥제(婿屋制)라는 데릴사위제 풍속이 있었다.
정답 ④
해설)
보기는 부여의 1책 12법에 대한 설명이다. 고대의 부족 사회 및 성읍 국가에서는 사회가 발전하면서 재산의 소유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법률이 발달하였다. 이것은 사회의 발달 정도를 알려 주기도 하지만, 지배 계급의 강력한 사회 질서 유지를 통한 국가 통제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엄격한 법률은 가끔은 보복적 성격도 있었다. 부여의 법률 역시 엄격한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1)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2) 절도자는 12배의 배상을 물린다.
3) 간음자는 사형에 처한다.
4) 부인이 질투하면 사형에 처하되, 그 시체는 산위에 버리며, 그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말을 바쳐야 한다.
위의 항목에서 두 번째 항목이 1책 12법이라고 칭하는데, 이와 같은 법은 당시 사회가 사유 재산을 엄격히 보호하였음을 입증해 준다.
① 부여에서는 왕이 죽었을 때 부장품 외에 산 사람을 함께 무덤에 묻는 '순장'을 실시하였다. 순장의 실시는 부여에서 왕권이 꽤 강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부여 사회가 노예제 사회였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평민은 순장의 대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② 부여는 송화강 유역의 넓은 평야 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농업과 목축이 성행하였다. 관리들의 칭호를 가축이름에서 딴 것은 목축이 성행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부여의 관리 칭호 : 마가, 우가, 구가, 저가=사출도)
③ 12월에 열리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는 농업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일종의 추수 감사제로서 부여 사회가 농업을 주업으로 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5월과 10월의 계절제 등도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진다.
부여의 영고는 매년 은나라 달력으로 정월(지금의 12월)에 온 국민이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춤을 추며 즐겼다. 또한 이 행사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문제들을 귀족들과 토의하였으며, 죄를 지은 자를 재판하여 죄수를 처형하기도 하고 석방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국가적 무속 신앙에 의한 축제행사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풍습 역시 고구려·옥저·동예·삼한 등 우리 겨레의 공통된 풍속이기도 하였다.
참고) 원삼국 시대 국가별 정리
정답: ④
해설: 상자 안은 진수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와 있는 부여의 4대 금법(살인, 절도, 간음, 투기)에 대한 설명이다. 부여는 결혼제도에 대하여 형사취수의 풍속이 있었다.
④ 데릴사위제는 고구려의 혼인풍습이다.
해설)
보기는 부여의 1책 12법에 대한 설명이다. 고대의 부족 사회 및 성읍 국가에서는 사회가 발전하면서 재산의 소유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법률이 발달하였다. 이것은 사회의 발달 정도를 알려 주기도 하지만, 지배 계급의 강력한 사회 질서 유지를 통한 국가 통제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엄격한 법률은 가끔은 보복적 성격도 있었다. 부여의 법률 역시 엄격한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1)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2) 절도자는 12배의 배상을 물린다.
3) 간음자는 사형에 처한다.
4) 부인이 질투하면 사형에 처하되, 그 시체는 산위에 버리며, 그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말을 바쳐야 한다.
위의 항목에서 두 번째 항목이 1책 12법이라고 칭하는데, 이와 같은 법은 당시 사회가 사유 재산을 엄격히 보호하였음을 입증해 준다.
① 부여에서는 왕이 죽었을 때 부장품 외에 산 사람을 함께 무덤에 묻는 '순장'을 실시하였다. 순장의 실시는 부여에서 왕권이 꽤 강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부여 사회가 노예제 사회였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평민은 순장의 대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② 부여는 송화강 유역의 넓은 평야 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농업과 목축이 성행하였다. 관리들의 칭호를 가축이름에서 딴 것은 목축이 성행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부여의 관리 칭호 : 마가, 우가, 구가, 저가=사출도)
③ 12월에 열리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는 농업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일종의 추수 감사제로서 부여 사회가 농업을 주업으로 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5월과 10월의 계절제 등도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진다.
부여의 영고는 매년 은나라 달력으로 정월(지금의 12월)에 온 국민이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춤을 추며 즐겼다. 또한 이 행사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문제들을 귀족들과 토의하였으며, 죄를 지은 자를 재판하여 죄수를 처형하기도 하고 석방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국가적 무속 신앙에 의한 축제행사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풍습 역시 고구려·옥저·동예·삼한 등 우리 겨레의 공통된 풍속이기도 하였다.
참고) 원삼국 시대 국가별 정리
구분 | 위치 | 정치 |
부여 | 만주 송화강 유역의 평야지대 | 5부족연맹체 |
고구려 | 압록강 지류 졸본(환인)지방 | 5부족 연맹체, 제가회의 |
옥저 | 함경도 함흥평야 | 왕이 없어 군장이 다스림. 고구려에 복속 |
동예 | 강원도 북부 | |
삼한 | 한강이남 | 소국연맹체, 제정분리, 목지국의 영도 |
구분 | 경제 | 풍속 |
부여 | 농경, 목축(반농반목) 특산물(말, 주옥, 모피) |
순장, 1책 12법 |
고구려 | 산악지대, 토지 척박 -약탈경제(부경) |
데릴사위제 우제점법 |
옥저 | 어물, 소금이 풍부 | 민며느리제 세골장(골장제) |
동예 | 농경과 어로의 발달 단궁, 과하마, 반어피 |
족외혼, 책화 |
삼한 | 농경이 발달(저수지) 변한지방의 철생산 |
두레(공동노동) |
구분 | 제천행사 | 정치적 변동 |
부여 | 12월 영고 | 고구려에 복속 |
고구려 | 10월 동맹 | 중앙집권국가로 성장 |
옥저 | 고구려에 복속 | |
동예 | 10월 무천 | |
삼한 | 5월 수릿날 10월 상달제 |
토착민과 유이민의 결합체 |
정답: ④
해설: 상자 안은 진수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와 있는 부여의 4대 금법(살인, 절도, 간음, 투기)에 대한 설명이다. 부여는 결혼제도에 대하여 형사취수의 풍속이 있었다.
④ 데릴사위제는 고구려의 혼인풍습이다.
2. 다음 보기의 내용을 통하여 공통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로 가장 적절한 것은?
㉠ 국학의 설치 ㉡ 독서삼품과의 시행 ㉢ 도당유학생의 파견 |
② 당과의 교류 확대
③ 귀족들의 왕권에 대한 견제 강화
④ 풍수지리사상의 유행
정답 ①
해설)
지문의 보기는 모두 통일신라의 유교진흥정책과 관련된 내용이다.
통일신라의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를 뒷받침해 준 것은 유교였다. 원래 신라는 삼국 중 유교문화의 영향이 가장 작았으나, 통일 후 고구려 백제의 유교문화를 받아들이고, 당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유교문화가 크게 성장하였다.
7세기 말 신문왕 682년에 국학(國學)이라는 유학교육기관을 세우고, 12등급에 해당하는 대사(大舍)이하의 하급귀족에서 입학자격을 주었다.
그 후 8세기 초 성덕왕때에는 당으로 공자 및 그 제자의 화상(畵像)을 들여 와 국학에 안치하였으며, 이어 8세기 중엽의 경덕왕때에는 국학을 태학(太學)이라 고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본격적으로 유학교육을 실시하였다.
태학에서는 <논어><효경>등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시><서><역경><좌전><예기>등 5경과 <문선>을 선택과목으로 가르쳤다.
그리하여 <예기>와 <주역>, <좌전>과 <시경>, 그리고 <서경>과 문선>을 선택하는 학생을 각각 3과로 나누어 가르쳤는데, 이것이 토대가 되어 8세기 말 원성왕 788년에 유교경전의 이해수준에 따라 관리를 임명하는 독서삼품과를 실시하게 되었다. 무술을 가지고 인재를 선발하던 시대가 끝나고 인문교양을 시험하여 관리를 뽑아쓰는 문치(文治)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국가의 유교진흥정책에 따라 유학과 한문학 소양이 높은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특히 골품제도의 폐쇄성에 반감을 가진 6두품 출신 가운데서 저명한 유학자가 많았다.
정답: ①
해설:
통일신라 국학에서는 논어, 효경 등 유학 과목을 교육하였다. 독서삼품과는 신라 하대 원성왕대에 실시한 관리 선발제도로서 유학 과목인 효경이 공통과목이었다. 유학이 발달한 당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선진 유학을 익히고 이를 보급하고자 하였다.
해설)
지문의 보기는 모두 통일신라의 유교진흥정책과 관련된 내용이다.
통일신라의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를 뒷받침해 준 것은 유교였다. 원래 신라는 삼국 중 유교문화의 영향이 가장 작았으나, 통일 후 고구려 백제의 유교문화를 받아들이고, 당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유교문화가 크게 성장하였다.
7세기 말 신문왕 682년에 국학(國學)이라는 유학교육기관을 세우고, 12등급에 해당하는 대사(大舍)이하의 하급귀족에서 입학자격을 주었다.
그 후 8세기 초 성덕왕때에는 당으로 공자 및 그 제자의 화상(畵像)을 들여 와 국학에 안치하였으며, 이어 8세기 중엽의 경덕왕때에는 국학을 태학(太學)이라 고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본격적으로 유학교육을 실시하였다.
태학에서는 <논어><효경>등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시><서><역경><좌전><예기>등 5경과 <문선>을 선택과목으로 가르쳤다.
그리하여 <예기>와 <주역>, <좌전>과 <시경>, 그리고 <서경>과 문선>을 선택하는 학생을 각각 3과로 나누어 가르쳤는데, 이것이 토대가 되어 8세기 말 원성왕 788년에 유교경전의 이해수준에 따라 관리를 임명하는 독서삼품과를 실시하게 되었다. 무술을 가지고 인재를 선발하던 시대가 끝나고 인문교양을 시험하여 관리를 뽑아쓰는 문치(文治)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국가의 유교진흥정책에 따라 유학과 한문학 소양이 높은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특히 골품제도의 폐쇄성에 반감을 가진 6두품 출신 가운데서 저명한 유학자가 많았다.
정답: ①
해설:
통일신라 국학에서는 논어, 효경 등 유학 과목을 교육하였다. 독서삼품과는 신라 하대 원성왕대에 실시한 관리 선발제도로서 유학 과목인 효경이 공통과목이었다. 유학이 발달한 당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선진 유학을 익히고 이를 보급하고자 하였다.
3. 다음 보기 중 발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모두 몇 개인가?
㉠ 발해의 주민은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발해는 당과 신라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 처음에는 북으로 돌궐, 남으로 일본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
② 2개
③ 3개
④ 4개
정답 ④
해설)
지문의 보기는 모두 발해에 대한 설명이다.
고구려 멸망 이후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 땅은 당의 안동 도호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계속 저항하였다.
㉠ 7 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발해의 건국으로 이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다. 발해는 영역을 확대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비록 그 영역에 말갈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지만,
㉢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실이라든지, 문화의 유사성으로 보아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다.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
㉡ 또,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문왕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발해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긴 것은 이러한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발해는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 대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10 세기 초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고, 발해 내부에서도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926).
정답: ④
해설:
㉠ 발해의 주민 구성은 주로 지배층이었던 고구려인과 피지배층인 말갈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발해는 당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 북으로 돌궐과 교류하였고 남으로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일본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문왕)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고려국왕 대흠무)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여 ‘해동성국’이라 불렸다.
해설)
지문의 보기는 모두 발해에 대한 설명이다.
고구려 멸망 이후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 땅은 당의 안동 도호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계속 저항하였다.
㉠ 7 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발해의 건국으로 이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다. 발해는 영역을 확대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비록 그 영역에 말갈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지만,
㉢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실이라든지, 문화의 유사성으로 보아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다.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
㉡ 또,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문왕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발해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긴 것은 이러한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발해는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 대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10 세기 초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고, 발해 내부에서도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926).
정답: ④
해설:
㉠ 발해의 주민 구성은 주로 지배층이었던 고구려인과 피지배층인 말갈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발해는 당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 북으로 돌궐과 교류하였고 남으로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일본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문왕)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고려국왕 대흠무)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여 ‘해동성국’이라 불렸다.
4. 다음 보기의 제도를 실시한 공통적인 목적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진대법의 실시 ㉡ 녹읍의 혁파 ㉢ 정전(丁田)의 지급 |
② 귀족의 경제 기반 확대
③ 농민의 경제 안정
④ 귀족 중심 관료체제의 운영 강화
정답 ③
해설)
㉠ 진대법은 고구려 고국천왕때 실시한 농민경제 안정책이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곳은 산간 지역으로 식량 생산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대외 정복 활동에 눈을 돌렸고, 사회 기풍도 씩씩하였다. 고구려 백성은 대부분 자영 농민으로서, 국가에 조세를 바치고 병역 의무를 지며 토목 공사에도 동원되었다. 이들의 생활은 불안정하여 흉년이 들거나 빚을 갚지 못하면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고국천왕 때 먹을거리가 모자란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이는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여 국가 재정과 국방력을 유지하고, 귀족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다.
㉡ 녹읍의 혁파 역시 통일신라 신문왕이 실시한 농민경제 안정책이다. 신문왕은 689년에는 관리의 녹봉으로 지급하던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해마다 세조(歲租)를 차등있게 지급하여 관리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녹읍은 지역의 농민을 지배하여 조세와 공물을 거두었고, 노동력을 동원하였기에 농민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따라서 녹읍의 폐지는 녹읍을 통한 관리들의 경제력 확대를 억제시킴으로써 전제왕권을 보다 강화할 수 있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또한 농민들의 생활도 안정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 신라는 토지 제도를 바꾸어 식읍을 제한하고 신문왕 때 녹읍도 폐지하였으며, 성덕왕 시절부터는 백성에게 모든 백성들에게 비로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는데, 정전은 정(丁)을 기준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지급한 토지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실제적으로 백성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영농민이 본래 소유하고 있던 토지에 대한 국가적 인정을 뜻하는 것으로서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 국가는 농민으로부터 많은 세를 거두어들임으로써 재정적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이전부터 시행해 오던 구휼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런 조치는 귀족에 대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고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정답: ③
해설:
㉠ 진대법의 실시는 왕권강화나 귀족세력과는 관련 없는 농민 안정책이다.
㉡ 녹읍의 혁파는 직접적으로는 국왕의 귀족세력에 대한 억압이나 간접적으로는 녹읍에서 담고있는 농민에 대한 노동력 동원권을 폐지함으로써 농민 생활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 정전(丁田)의 지급은 통일신라 성덕왕대에 농민들에게 토지를 지급함으로써 왕권강화를 도모하였지만 이를 통하여 농민의 경제기반을 안정화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따라서 공통점은 농민의 경제 안정이 되겠다. 만약 ㉠ 진대법의 실시가 없었다면 나머지 두 개의 공통점은 왕권 강화가 된다.
해설)
㉠ 진대법은 고구려 고국천왕때 실시한 농민경제 안정책이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곳은 산간 지역으로 식량 생산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대외 정복 활동에 눈을 돌렸고, 사회 기풍도 씩씩하였다. 고구려 백성은 대부분 자영 농민으로서, 국가에 조세를 바치고 병역 의무를 지며 토목 공사에도 동원되었다. 이들의 생활은 불안정하여 흉년이 들거나 빚을 갚지 못하면 노비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고국천왕 때 먹을거리가 모자란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이는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여 국가 재정과 국방력을 유지하고, 귀족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다.
㉡ 녹읍의 혁파 역시 통일신라 신문왕이 실시한 농민경제 안정책이다. 신문왕은 689년에는 관리의 녹봉으로 지급하던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해마다 세조(歲租)를 차등있게 지급하여 관리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녹읍은 지역의 농민을 지배하여 조세와 공물을 거두었고, 노동력을 동원하였기에 농민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따라서 녹읍의 폐지는 녹읍을 통한 관리들의 경제력 확대를 억제시킴으로써 전제왕권을 보다 강화할 수 있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또한 농민들의 생활도 안정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 신라는 토지 제도를 바꾸어 식읍을 제한하고 신문왕 때 녹읍도 폐지하였으며, 성덕왕 시절부터는 백성에게 모든 백성들에게 비로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는데, 정전은 정(丁)을 기준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지급한 토지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실제적으로 백성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영농민이 본래 소유하고 있던 토지에 대한 국가적 인정을 뜻하는 것으로서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 국가는 농민으로부터 많은 세를 거두어들임으로써 재정적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이전부터 시행해 오던 구휼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런 조치는 귀족에 대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고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정답: ③
해설:
㉠ 진대법의 실시는 왕권강화나 귀족세력과는 관련 없는 농민 안정책이다.
㉡ 녹읍의 혁파는 직접적으로는 국왕의 귀족세력에 대한 억압이나 간접적으로는 녹읍에서 담고있는 농민에 대한 노동력 동원권을 폐지함으로써 농민 생활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 정전(丁田)의 지급은 통일신라 성덕왕대에 농민들에게 토지를 지급함으로써 왕권강화를 도모하였지만 이를 통하여 농민의 경제기반을 안정화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따라서 공통점은 농민의 경제 안정이 되겠다. 만약 ㉠ 진대법의 실시가 없었다면 나머지 두 개의 공통점은 왕권 강화가 된다.
5. 다음 중 조선후기 심화된 국학연구의 성과물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이의봉의 『고금석림』에는 방언과 해외언어가 정리되어 있다.
② 이종휘의 『동사』는 일본 연구를 통해 고대사의 시야를 해외로 확장하는데 기여하였다.
③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고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④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최초로 100리척을 사용하여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 제작에 공헌하였다.
정답 ②
이종휘는 <동사>에서 고구려 역사 연구를,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발해사 연구를 심화하였다. 이들은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
일본 연구를 통해 고대사의 시야를 확장한 것은 한치윤의 <해동역사>이다. 한치윤은 500여 종의 중국 및 일본의 자료를 참고하여 <해동역사>를 편찬하였는데, 이는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였다.
해설)
① 조선 후기 이의봉은 <고금석림>을 편찬하여 우리의 방언과 산스크리트어·몽고어·일본어·만주어·타이어·거란어·퉁구스어 등 해외언어를 정리했는데 이 책을 편찬하는데 1,500여 책의 문헌을 참고하였다.
③ 이익의 제자인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하여 이익의 역사 의식을 계승하였다. 이 책은 고조선으로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우리 역사의 독자적 정통론을 세워 이를 체계화하였으며, 역사 사실들을 치밀하게 고증하여 고증 사학의 토대를 닦았다.
④ 국토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여 우수한 지리서가 편찬되고 정밀한 지도가 제작되었다. 역사 지리서로는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등이 나왔고, 인문 지리서로는 이중환의 택리지가 편찬되었다. 특히, 택리지는 각 지역의 자연 환경과 물산, 풍속, 인심 등을 서술하고, 어느 지역이 살기 좋은 곳인가를 논하였다.
중국으로부터 서양식 지도가 전해짐에 따라 정밀하고 과학적인 지도가 많이 제작되었고, 그 중에서도 정상기와 김정호가 만든 지도가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최초로 100리척을 사용하여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 제작에 공헌하였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산맥, 하천, 포구, 도로망의 표시가 정밀해지고, 거리를 알 수 있도록 10리마다 눈금이 표시되었으며, 목판으로 인쇄되었다.
정답: ②
해설:
국학연구 도서들의 나열로 언뜻 보면 어려워 보이지만, 유득공의 『발해고』와 이종휘의 『동사』는 발해와 고구려의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를 만주까지 넓히는 대륙사관이 나타나있다는 점은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알고 있는 쉬운 부분이다.
② 한치윤의 『해동역사』의 <일본고>에서는 일본 연구를 통해 고대사의 시야를 해외로 확장하는데 기여하였다.
이종휘는 <동사>에서 고구려 역사 연구를,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발해사 연구를 심화하였다. 이들은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
일본 연구를 통해 고대사의 시야를 확장한 것은 한치윤의 <해동역사>이다. 한치윤은 500여 종의 중국 및 일본의 자료를 참고하여 <해동역사>를 편찬하였는데, 이는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였다.
해설)
① 조선 후기 이의봉은 <고금석림>을 편찬하여 우리의 방언과 산스크리트어·몽고어·일본어·만주어·타이어·거란어·퉁구스어 등 해외언어를 정리했는데 이 책을 편찬하는데 1,500여 책의 문헌을 참고하였다.
③ 이익의 제자인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하여 이익의 역사 의식을 계승하였다. 이 책은 고조선으로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우리 역사의 독자적 정통론을 세워 이를 체계화하였으며, 역사 사실들을 치밀하게 고증하여 고증 사학의 토대를 닦았다.
④ 국토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여 우수한 지리서가 편찬되고 정밀한 지도가 제작되었다. 역사 지리서로는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등이 나왔고, 인문 지리서로는 이중환의 택리지가 편찬되었다. 특히, 택리지는 각 지역의 자연 환경과 물산, 풍속, 인심 등을 서술하고, 어느 지역이 살기 좋은 곳인가를 논하였다.
중국으로부터 서양식 지도가 전해짐에 따라 정밀하고 과학적인 지도가 많이 제작되었고, 그 중에서도 정상기와 김정호가 만든 지도가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최초로 100리척을 사용하여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 제작에 공헌하였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산맥, 하천, 포구, 도로망의 표시가 정밀해지고, 거리를 알 수 있도록 10리마다 눈금이 표시되었으며, 목판으로 인쇄되었다.
정답: ②
해설:
국학연구 도서들의 나열로 언뜻 보면 어려워 보이지만, 유득공의 『발해고』와 이종휘의 『동사』는 발해와 고구려의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를 만주까지 넓히는 대륙사관이 나타나있다는 점은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알고 있는 쉬운 부분이다.
② 한치윤의 『해동역사』의 <일본고>에서는 일본 연구를 통해 고대사의 시야를 해외로 확장하는데 기여하였다.
6. 다음 중 삼국시대 각국의 문화적 상호 영향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백제는 초기에 고구려의 영향으로 계단식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다.
② 많은 부장품을 남긴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은 고구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③ 일본의 석상신궁에 있는 칠지도는 백제 근초고왕이 일본왕에게 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④ 일본 나라시의 다카마쓰 고분에서 고구려 수산리 벽화고분의 영향을 받은 벽화가 발견되었다.
정답 ②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의 독자적인 무덤양식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지상이나 지하에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나무덧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에 흙으로 덮었다. 도굴이 어려워 많은 껴묻거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해설)
① 백제는 한강 유역에 있던 초기 한성 시기에 계단식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는데, 서울 석촌동에 일부가 남아 있다. 이는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이 고구려와 같은 계통이라는 건국 이야기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구려 장군총 (길림성 집안) : 옆의 큰 돌은 무덤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다
▲백제 계단식 돌무지무덤 (서울 송파 석촌동)
③ 칠지도는 근초고왕 근처(근초) 일본 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세기 후반에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칠지도는 강철로 만들고 금으로 글씨를 상감해 새겨 넣은 우수한 제품이다. 칠지도는 백제 제철 기술의 우수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④ 삼국의 문화는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고대 문화 성립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도 역시 일본 고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7세기 초에 담징은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을 전하였고, 호류사의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승려 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혜관은 불교 전파에 큰 공을 세웠다. 일본 나라 시에서 발견된 다카마쓰 고분 벽화가 고구려 수산리 벽화 고분과 흡사한 점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다.
정답: ②
해설: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의 독자적 양식이며 고구려는 주로 굴식돌방무덤을 많이 남겼다. 고구려의 굴식돌방무덤은 벽화가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며 무덤 특징상 부장품은 대부분 도굴되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의 독자적인 무덤양식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지상이나 지하에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나무덧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에 흙으로 덮었다. 도굴이 어려워 많은 껴묻거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 돌무지 덧널무덤
해설)
① 백제는 한강 유역에 있던 초기 한성 시기에 계단식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는데, 서울 석촌동에 일부가 남아 있다. 이는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이 고구려와 같은 계통이라는 건국 이야기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구려 장군총 (길림성 집안) : 옆의 큰 돌은 무덤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다
▲백제 계단식 돌무지무덤 (서울 송파 석촌동)
③ 칠지도는 근초고왕 근처(근초) 일본 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세기 후반에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칠지도는 강철로 만들고 금으로 글씨를 상감해 새겨 넣은 우수한 제품이다. 칠지도는 백제 제철 기술의 우수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④ 삼국의 문화는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고대 문화 성립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도 역시 일본 고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7세기 초에 담징은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을 전하였고, 호류사의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승려 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혜관은 불교 전파에 큰 공을 세웠다. 일본 나라 시에서 발견된 다카마쓰 고분 벽화가 고구려 수산리 벽화 고분과 흡사한 점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다.
▲수산리 고분 벽화 (평남 강서)
▲다카마쓰 고분 벽화 (일본 나라시)
정답: ②
해설: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의 독자적 양식이며 고구려는 주로 굴식돌방무덤을 많이 남겼다. 고구려의 굴식돌방무덤은 벽화가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며 무덤 특징상 부장품은 대부분 도굴되었다.
7. 다음 중 고려시대 정치기구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도병마사 : 왕명에 의해 귀족들의 죄를 다스리는 사법기관이었다.
② 중추원 :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③ 상서성 : 6부를 거느리고 정책의 집행을 담당하였다.
④ 정방 : 최씨 무신정권 때 최우가 설치하였으며, 인사행정을 관장하였다.
정답 ① 도병마사는 국방문제를 담당하는 국방기구였다.
해설)
고려의 통치 체제는 성종 때에 마련한 2 성 6 부제를 토대로 하였다. 고려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의 실정에 맞게 이를 조정하였다. 그리하여 최고 관서로서 중서문하성을 두었고,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③그리고 상서성은 실제 정무를 나누어 담당하는 6 부를 두고 정책의 집행을 담당하였다.
② 중추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고, 삼사는 송과는 달리, 단순히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만 맡았다.
①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 주는 관청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재신과 추밀이 함께 모여 회의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곳이다. 이러한 회의 기구의 존재는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나타내 준다.
한편, 재신과 추밀은 6 부를 비롯한 주요 관부의 최고직을 겸하여 중앙의 정치 운영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사대는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어사대의 관원은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함께 대간으로 불렸다. 대간은 비록 직위는 낮았지만, 왕이나 고위 관리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제약하여 정치운영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다.
④ 무신정권의 지도자 최우는 최충헌이 설치했던 교정도감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아버지가 문인들을 우대했던 것과 같이 자신도 더 많은 문인들을 우대하였다. 이때 최우는 자신의 집에 정방(政房)이라는 인사를 담당하는 기구와 문인 숙위소를 두어 많은 문인들을 끌어 모음으로서 문무 양반의 지지를 동시에 받는 권력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정답: ①
해설:
왕명에 의해 귀족들의 죄를 다스리는 사법기관은 조선시대의 의금부였다. 도병마사는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중추원의 추신으로 구성된 국가 의결기관으로 국방문제 등 중요정책을 결정하였다.
해설)
고려의 통치 체제는 성종 때에 마련한 2 성 6 부제를 토대로 하였다. 고려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의 실정에 맞게 이를 조정하였다. 그리하여 최고 관서로서 중서문하성을 두었고,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③그리고 상서성은 실제 정무를 나누어 담당하는 6 부를 두고 정책의 집행을 담당하였다.
② 중추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고, 삼사는 송과는 달리, 단순히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만 맡았다.
①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 주는 관청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재신과 추밀이 함께 모여 회의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곳이다. 이러한 회의 기구의 존재는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나타내 준다.
한편, 재신과 추밀은 6 부를 비롯한 주요 관부의 최고직을 겸하여 중앙의 정치 운영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사대는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어사대의 관원은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함께 대간으로 불렸다. 대간은 비록 직위는 낮았지만, 왕이나 고위 관리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제약하여 정치운영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다.
④ 무신정권의 지도자 최우는 최충헌이 설치했던 교정도감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아버지가 문인들을 우대했던 것과 같이 자신도 더 많은 문인들을 우대하였다. 이때 최우는 자신의 집에 정방(政房)이라는 인사를 담당하는 기구와 문인 숙위소를 두어 많은 문인들을 끌어 모음으로서 문무 양반의 지지를 동시에 받는 권력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정답: ①
해설:
왕명에 의해 귀족들의 죄를 다스리는 사법기관은 조선시대의 의금부였다. 도병마사는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중추원의 추신으로 구성된 국가 의결기관으로 국방문제 등 중요정책을 결정하였다.
8. 다음 중 고려시대 사회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
ⓛ 의창 :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기관이었다.
② 상평창 : 물가조절기관으로 개경과 서경, 12목에 설치되었다.
③ 제위보 : 기금을 마련한 뒤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기관이었다.
④ 대비원 : 구료기관으로 개경과 3경에 설치되었다.
정답 ④ 대비원은 고려 시대와 조선 초기 빈민 대상의 국가 구호기관이다. 개경에는 동쪽과 서쪽에 각각 하나씩 있어 동・서 대비원이라 했다.
해설)
고려 시대의 농민은 조세,잡역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부담을 졌다.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은 국가 안정에 필수적이었으므로, 국가에서는 이를 위하여 여러 사회 시책을 펼쳤다. 우선, 농번기에 잡역을 면제하여 농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자연 재해를 입은 농민에게는 그 피해 정도에 따라 조세와 부역을 감면해 주었다. 또, 고리대 때문에 농민이 몰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법으로 이자율을 정하여 이자가 빌린 곡식과 같은 액수가 되면 그 이상의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① 고려의 사회 제도 중에는 평시에 곡물을 비치하였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의창이 있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진대법과 유사한 것이었다. ② 또, 개경과 서경 및 각 12목에는 상평창을 두어 물가의 안정을 꾀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④ 가난한 백성이 의료 혜택을 받도록 개경에 동·서 대비원을 설치하여 환자 진료 및 빈민 구휼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혜민국을 두어 의약을 전담하게 하였다. 각종 재해가 발생 하였을 때, 구제도감이나 구급도감을 임시 기관으로 설치하여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 ⑤ 그리고 기금을 마련한 뒤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설치하였다.
정답: ④
해설:
대비원은 개경의 동서 두 곳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동서 대비원’이라 불렸다. 서경에도 대비원을 설치하였는데 그냥 대비원이라 불렸다. 고려 문종때 설치되었고 의료를 위주로 한 구제기관이었다. 3경은 개경, 서경, 남경을 말하며 개경과 3경에만 설치한 독특한 기관은 없었다.
해설)
고려 시대의 농민은 조세,잡역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부담을 졌다.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은 국가 안정에 필수적이었으므로, 국가에서는 이를 위하여 여러 사회 시책을 펼쳤다. 우선, 농번기에 잡역을 면제하여 농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자연 재해를 입은 농민에게는 그 피해 정도에 따라 조세와 부역을 감면해 주었다. 또, 고리대 때문에 농민이 몰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법으로 이자율을 정하여 이자가 빌린 곡식과 같은 액수가 되면 그 이상의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① 고려의 사회 제도 중에는 평시에 곡물을 비치하였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의창이 있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진대법과 유사한 것이었다. ② 또, 개경과 서경 및 각 12목에는 상평창을 두어 물가의 안정을 꾀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④ 가난한 백성이 의료 혜택을 받도록 개경에 동·서 대비원을 설치하여 환자 진료 및 빈민 구휼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혜민국을 두어 의약을 전담하게 하였다. 각종 재해가 발생 하였을 때, 구제도감이나 구급도감을 임시 기관으로 설치하여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 ⑤ 그리고 기금을 마련한 뒤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설치하였다.
정답: ④
해설:
대비원은 개경의 동서 두 곳에 설치하였기 때문에 ‘동서 대비원’이라 불렸다. 서경에도 대비원을 설치하였는데 그냥 대비원이라 불렸다. 고려 문종때 설치되었고 의료를 위주로 한 구제기관이었다. 3경은 개경, 서경, 남경을 말하며 개경과 3경에만 설치한 독특한 기관은 없었다.
9. 다음 보기와 관련된 조선시대 조직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경남 사천에서 발견된 사천 매향비는 향나무를 묻고 세운 것으로, 내세의 행운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② 향약
③ 향도
④ 동계
정답 ③ 향도(香徒) : 매향 활동을 하는 무리이다.
농민은 일상 의례와 공동 노동 등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공동체 조직의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신앙 조직이었던 향도였다. 향도는 매향 활동을 하면서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불상, 석탑을 만들거나 절을 지을 때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후기에 이르러 점차 신앙적인 향도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조직되는 향도로 변모되어 마을 노역, 혼례와 상장례, 민속 신앙과 관련된 마을 제사 등 공동체 생활을 주도하는 농민 조직으로 발전해 갔다.
매향은 불교 신앙의 하나로, 미륵을 만나 구원받고자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는 활동이다.
1387년에 향나무를 묻고 세운 것으로, 내세의 행운과 국태 민안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답: ③
해설:
향도(香徒)란 향나무를 심는(매장하는) 무리라는 뜻이다. 신라의 불교적 신앙결사에서 시작되었으며 마을 입구에 향나무를 매장하면 복이 깃든다는 믿음에서 삼국-고려-조선시대까지 면면이 이어졌다. 하층민의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풍속으로서 양반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농민은 일상 의례와 공동 노동 등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공동체 조직의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신앙 조직이었던 향도였다. 향도는 매향 활동을 하면서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불상, 석탑을 만들거나 절을 지을 때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후기에 이르러 점차 신앙적인 향도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조직되는 향도로 변모되어 마을 노역, 혼례와 상장례, 민속 신앙과 관련된 마을 제사 등 공동체 생활을 주도하는 농민 조직으로 발전해 갔다.
매향은 불교 신앙의 하나로, 미륵을 만나 구원받고자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는 활동이다.
▲ 사천 매향비 (경남 사천)
1387년에 향나무를 묻고 세운 것으로, 내세의 행운과 국태 민안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답: ③
해설:
향도(香徒)란 향나무를 심는(매장하는) 무리라는 뜻이다. 신라의 불교적 신앙결사에서 시작되었으며 마을 입구에 향나무를 매장하면 복이 깃든다는 믿음에서 삼국-고려-조선시대까지 면면이 이어졌다. 하층민의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풍속으로서 양반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10. 다음 보기의 시기와 관련된 사회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
근래 아전의 풍속이 나날이 변하여 하찮은 아전이 길에서 양반을 만나도 절을 하지 않으려 한다. 아전의 아들, 손자로서 아전의 역을 맡지 않은 자가 고을 안의 양반을 대할 때 맞먹듯이 너, 나 하며 자(字)를 부르고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목민심서』 |
② 양반은 촌락 단위보다는 군현 단위의 동약을 실시하였다.
③ 부농층은 종래의 재지 사족(在地士族)이 담당하던 정부의 부세제도에 적극 참여하였다.
④ 아버지가 노비라도 어머니가 양민이면 자식을 양민으로 삼는 법이 실시되었다.
정답 ②
정부는 사족지배체제의 동요에 따라 사족을 매개로 한 군현단위의 통제가 어렵게 되자, 지방관(수령)을 통하여 향촌사회를 직접 통제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어 갔다. 영조 때부터 탕평정치가 시행되고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수령을 통해 향촌사회를 직접 통제하기 위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정부는 수령의 권한과 면리제의 향촌통제기능을 강화하였고, 그 일환으로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지방지배에 관권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사족의 지배력을 능가하게 되었다 군현단위의 향약을 수령이 주관하면서 양반사족들은 동리단위로 내려가 동리단위의 동약⋅동계 등을 주도하고자 하였다.
해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양천제가 급속도로 무너졌다. 노비 스스로 도망하여 신분을 해방시키기도 하고, 국가는 군역대상자와 재정의 궁핍을 보충하기 위하여 노비를 단계적으로 해방시켜 주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군공을 세우거나 곡식을 바치는 자를 양인으로 풀어주고 속오군으로 편제하여 군역을 지우기도 했다.
① 또한 전란으로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납속책을 실시하고 공명첩을 발급함으로써, 서얼은 이를 이용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되게 된 것이다. 서얼은 본래 양반의 소생으로서 인구비중도 높았으나 서얼금고에 의해 전문 기술직 외에는 벼슬길이 막혀있었다. 그러나 서얼들 자신의 꾸준한 상소운동과 국가의 정책적 배려로 18세기 후반부터는 청요직으로의 허통(許通)이 이루어진 것이다.
④ 그리고 노비인구를 제도적으로 줄이기 위해 어머니가 비(婢)인 경우에만 그 자식을 노비로 만들고 나머지는 양인으로 되게 하는 노비종모법을 시행하였다.
정답: ②
해설:
상자 안은 정약용의 [목민심서] 내용으로서 조선 후기(18C말 - 19C초) 목민관의 지침서가 된 교재인데 특히 당시의 사회 상황을 담고 있다. 상자 안은 특히 양반 수의 증가로 양반 중심의 지배체제가 약화되고 신분제의 몰락을 지적한 글이다. 이러한 동약은 조선후기 사회분화가 심화되고 신분제가 동요하자 이전처럼 사족들 간의 결속만으로는 향촌사회를 통제, 운영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에 17세기 이후에는 상·하계로 나누어 전 주민을 구성원으로 하고 전통적인 농업관행인 두레의 기능까지 향약조직에 포섭하게 되었다. 동약의 규정에서도 일반민의 강제가입 규정, 각종 집회에서 신분과 적서(嫡庶)의 차별규정, 농민의 무단이주를 금하고, 계 활동을 통해 마을에 할당된 부세를 공동노력으로 조달하는 등의 내용이 강화되었다. 때문에 이후로는 동약보다 동계라는 말이 더 많이 쓰였는데 후대로 오면서 신분제가 붕괴됨에 따라 동계에는 상부상조적인 기능만이 남게 되었다.
② 동약(洞約)은 동계(洞契) 혹은 향약과 거의 비슷한 말로 쓰이는데 동(洞)이란 마을(촌)이란 뜻이므로 마을 단위로 양반들이 시행하였다는 뜻이다. 군현 단위는 중앙에서 지방에 수령을 파견하거나 지방을 세분할 때 쓰인 단위였다.
정부는 사족지배체제의 동요에 따라 사족을 매개로 한 군현단위의 통제가 어렵게 되자, 지방관(수령)을 통하여 향촌사회를 직접 통제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어 갔다. 영조 때부터 탕평정치가 시행되고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수령을 통해 향촌사회를 직접 통제하기 위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정부는 수령의 권한과 면리제의 향촌통제기능을 강화하였고, 그 일환으로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지방지배에 관권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사족의 지배력을 능가하게 되었다 군현단위의 향약을 수령이 주관하면서 양반사족들은 동리단위로 내려가 동리단위의 동약⋅동계 등을 주도하고자 하였다.
해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양천제가 급속도로 무너졌다. 노비 스스로 도망하여 신분을 해방시키기도 하고, 국가는 군역대상자와 재정의 궁핍을 보충하기 위하여 노비를 단계적으로 해방시켜 주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군공을 세우거나 곡식을 바치는 자를 양인으로 풀어주고 속오군으로 편제하여 군역을 지우기도 했다.
① 또한 전란으로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납속책을 실시하고 공명첩을 발급함으로써, 서얼은 이를 이용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되게 된 것이다. 서얼은 본래 양반의 소생으로서 인구비중도 높았으나 서얼금고에 의해 전문 기술직 외에는 벼슬길이 막혀있었다. 그러나 서얼들 자신의 꾸준한 상소운동과 국가의 정책적 배려로 18세기 후반부터는 청요직으로의 허통(許通)이 이루어진 것이다.
④ 그리고 노비인구를 제도적으로 줄이기 위해 어머니가 비(婢)인 경우에만 그 자식을 노비로 만들고 나머지는 양인으로 되게 하는 노비종모법을 시행하였다.
정답: ②
해설:
상자 안은 정약용의 [목민심서] 내용으로서 조선 후기(18C말 - 19C초) 목민관의 지침서가 된 교재인데 특히 당시의 사회 상황을 담고 있다. 상자 안은 특히 양반 수의 증가로 양반 중심의 지배체제가 약화되고 신분제의 몰락을 지적한 글이다. 이러한 동약은 조선후기 사회분화가 심화되고 신분제가 동요하자 이전처럼 사족들 간의 결속만으로는 향촌사회를 통제, 운영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에 17세기 이후에는 상·하계로 나누어 전 주민을 구성원으로 하고 전통적인 농업관행인 두레의 기능까지 향약조직에 포섭하게 되었다. 동약의 규정에서도 일반민의 강제가입 규정, 각종 집회에서 신분과 적서(嫡庶)의 차별규정, 농민의 무단이주를 금하고, 계 활동을 통해 마을에 할당된 부세를 공동노력으로 조달하는 등의 내용이 강화되었다. 때문에 이후로는 동약보다 동계라는 말이 더 많이 쓰였는데 후대로 오면서 신분제가 붕괴됨에 따라 동계에는 상부상조적인 기능만이 남게 되었다.
② 동약(洞約)은 동계(洞契) 혹은 향약과 거의 비슷한 말로 쓰이는데 동(洞)이란 마을(촌)이란 뜻이므로 마을 단위로 양반들이 시행하였다는 뜻이다. 군현 단위는 중앙에서 지방에 수령을 파견하거나 지방을 세분할 때 쓰인 단위였다.
11. 다음 중 조선후기 조세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대동법은 집집마다 부과하여 토산물을 징수하던 공물 납부 방식을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였다.
② 대동법은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시행되고 이어서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③ 인조대에 풍년이나 흉년에 따라 전세를 조절하는 영정법을 시행하였다.
④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켰다.
정답 ③
인조 때 연등9등법을 개선하여 영정법 실시하였다. 영정법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양란 이후 토지 황폐화로 인해 토지의 비옥도가 하향평준화, 절차의 복잡성에 인해 관리의 중간 착복 방지, 지주전호제 확대로 인해 토지의 소유권을 가진 양반관료들의 압력 등으로 인해 실시하였다. 영정법은 풍흉에 관계없이 1결(結)당 최하 4두(斗)씩 징수하고 흉년시에는 해당 지역 수령이 재해 보고를 하면 중앙에서 경차관을 파견하여 담험손실을 하여 조세를 감면해주는 제도이다.
해설)
대동법
왜란을 거친 후 국가 재정이 극도로 궁핍해지면서 수미법을 대동법이라 이름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② 광해군 즉위년에 이원인, 한백겸 등의 주장에 따라 경기도에 시행한 것이 그 첫 시도였다. 그 후 실시지역을 점차 확대하여 숙종 34년에는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실시되고, 이를 관할하는 관청으로 선혜청을 두었다.
① 이로써 종전의 상공(常貢)이 면제되는 대신에 대동미라는 이름으로 1결마다 미곡 12두[처음에는 16두]를 받았는데, 산간지방에서는 미곡대신에 포나 돈을 받기도 하였다. 국가는 선혜청에서 징수한 쌀, 포, 돈을 공인이라 불리는 특허상인에게 공가(貢價)로서 지불하여 관청수요품을 조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대동법 실시 이후 공인으로서 막대한 부를 축척한 자본가가 성장하고 화폐유통이 활발해졌으며, 공인의 주문에 따라 생산하는 수공업이 활기를 띠었다.
균역법
조선 후기 중앙군은 대체로 국가에서 급료를 지급하는 모병이었다. 모병의 경비는 양인이 바치는 군포에 의해서 충당되었다.
군포는 원칙적을 양인 이상의 장정수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국가는 군포의 총액을 미리 정해 놓고 이것을 마을 단위로 할당하여 부과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국가의 예산을 계획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이러한 방법이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각 마을은 실제 장정수보다 많은 군포를 연대책임으로 징수하는 경우가 있었다. 양역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노력은 일찍부터 있었으나 1750년 영조에 와서야 그 개선책이 마련되어 균역법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종래 16개월마다 받던 군포 2필을 12개월마다 1필로 감해주었다. 국가는 절감된 군포의 수업을 보충하기 위하여 종래 군역이 면제되었던 상층 양인에게도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는 대신 군포 1필을 부과시켰다.
④ 그리고 지주에게서 토지 1결마다 미곡 2두를 결작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또 종래 각 아문이나 궁방에서 받아들이던 어세·염세·선세를 균역청에서 관할하게 하였다.
정답: ③
해설:
인조대의 영정법은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4두로 고정한 수취제도를 시행하였다. 풍년이나 흉년에 따라 전세를 조절하는 수취제도는 그 이전인 세종대의 공법(수등이척법)을 말한다.
인조 때 연등9등법을 개선하여 영정법 실시하였다. 영정법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양란 이후 토지 황폐화로 인해 토지의 비옥도가 하향평준화, 절차의 복잡성에 인해 관리의 중간 착복 방지, 지주전호제 확대로 인해 토지의 소유권을 가진 양반관료들의 압력 등으로 인해 실시하였다. 영정법은 풍흉에 관계없이 1결(結)당 최하 4두(斗)씩 징수하고 흉년시에는 해당 지역 수령이 재해 보고를 하면 중앙에서 경차관을 파견하여 담험손실을 하여 조세를 감면해주는 제도이다.
해설)
대동법
왜란을 거친 후 국가 재정이 극도로 궁핍해지면서 수미법을 대동법이라 이름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② 광해군 즉위년에 이원인, 한백겸 등의 주장에 따라 경기도에 시행한 것이 그 첫 시도였다. 그 후 실시지역을 점차 확대하여 숙종 34년에는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실시되고, 이를 관할하는 관청으로 선혜청을 두었다.
① 이로써 종전의 상공(常貢)이 면제되는 대신에 대동미라는 이름으로 1결마다 미곡 12두[처음에는 16두]를 받았는데, 산간지방에서는 미곡대신에 포나 돈을 받기도 하였다. 국가는 선혜청에서 징수한 쌀, 포, 돈을 공인이라 불리는 특허상인에게 공가(貢價)로서 지불하여 관청수요품을 조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대동법 실시 이후 공인으로서 막대한 부를 축척한 자본가가 성장하고 화폐유통이 활발해졌으며, 공인의 주문에 따라 생산하는 수공업이 활기를 띠었다.
균역법
조선 후기 중앙군은 대체로 국가에서 급료를 지급하는 모병이었다. 모병의 경비는 양인이 바치는 군포에 의해서 충당되었다.
군포는 원칙적을 양인 이상의 장정수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국가는 군포의 총액을 미리 정해 놓고 이것을 마을 단위로 할당하여 부과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국가의 예산을 계획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이러한 방법이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각 마을은 실제 장정수보다 많은 군포를 연대책임으로 징수하는 경우가 있었다. 양역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노력은 일찍부터 있었으나 1750년 영조에 와서야 그 개선책이 마련되어 균역법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종래 16개월마다 받던 군포 2필을 12개월마다 1필로 감해주었다. 국가는 절감된 군포의 수업을 보충하기 위하여 종래 군역이 면제되었던 상층 양인에게도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는 대신 군포 1필을 부과시켰다.
④ 그리고 지주에게서 토지 1결마다 미곡 2두를 결작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또 종래 각 아문이나 궁방에서 받아들이던 어세·염세·선세를 균역청에서 관할하게 하였다.
정답: ③
해설:
인조대의 영정법은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4두로 고정한 수취제도를 시행하였다. 풍년이나 흉년에 따라 전세를 조절하는 수취제도는 그 이전인 세종대의 공법(수등이척법)을 말한다.
12. 다음 중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정책으로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의정부와 삼군부를 통합하고, 비변사의 기능을 확대하였다.
② 폐단이 심했던 환곡제를 개혁하여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③ 종래에 상민(常民)에게만 징수해 온 군포를 양반에게까지 확대·징수하였다.
④ 법치질서를 정비하기 위해 '대전회통(大典會通)'을 간행하였다.
정답 ① 흥선대원군은 관료 정치를 정상화시키기 위하여 세도정치의 중심기관이었던 비변사를 철폐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삼군부를 설치하여 군부의 위상을 높였다.
해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의 모순을 시정하고 부강한 왕조국가를 중흥시키려는 개혁을 실시하였다.
③ 국가의 재정수입을 늘리고 부세부담을 고르게 하는 방법으로써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양안에 빠져있는 은전을 등록시키고,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하여 평민에게만 받아 오던 군포를 동포, 또는 호포로 바꾸어 양반에게도 징수하였다.
② 또한 고리대로 변질된 환곡제를 상당부분 폐지하고, 면민(面民)들의 공동출자에 의해 운영되는 사창제를 실시하여 탐관오리와 토호의 중간수탈을 억제하였다.
④ 또 삼수병을 강화하고 중국을 통하여 서양의 화포기술을 도입하는 등 국방강화에 힘썼으며 <대전회통>,<육전조례>등을 편찬하여 통치규범을 재정비하였다.
대원군의 10년에 걸친 내정개혁은 굴절된 세도정치를 바로잡고 중앙집권체제를 안정시키고, 부국강병을 강화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정답: ①
해설:
흥선대원군은 대내적으로는 왕권강화정책과 수취체제 개선책(애민정책)으로 세도정치의 파행을 바로잡고 조선의 봉건질서를 수습하였다.
① 세도가들의 권력기반이었던 비변사를 혁파하고 삼군부와 의정부를 부활하여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다.
해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의 모순을 시정하고 부강한 왕조국가를 중흥시키려는 개혁을 실시하였다.
③ 국가의 재정수입을 늘리고 부세부담을 고르게 하는 방법으로써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양안에 빠져있는 은전을 등록시키고,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하여 평민에게만 받아 오던 군포를 동포, 또는 호포로 바꾸어 양반에게도 징수하였다.
② 또한 고리대로 변질된 환곡제를 상당부분 폐지하고, 면민(面民)들의 공동출자에 의해 운영되는 사창제를 실시하여 탐관오리와 토호의 중간수탈을 억제하였다.
④ 또 삼수병을 강화하고 중국을 통하여 서양의 화포기술을 도입하는 등 국방강화에 힘썼으며 <대전회통>,<육전조례>등을 편찬하여 통치규범을 재정비하였다.
대원군의 10년에 걸친 내정개혁은 굴절된 세도정치를 바로잡고 중앙집권체제를 안정시키고, 부국강병을 강화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정답: ①
해설:
흥선대원군은 대내적으로는 왕권강화정책과 수취체제 개선책(애민정책)으로 세도정치의 파행을 바로잡고 조선의 봉건질서를 수습하였다.
① 세도가들의 권력기반이었던 비변사를 혁파하고 삼군부와 의정부를 부활하여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다.
13. 다음 중 독립협회의 활동 및 광무개혁 내용에 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독립협회는 1898년에 대구, 평양 등지에 지회를 설립하고, 서울에서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개혁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산시켰다.
② 독립협회는 양전지계사업을 시행하여 농민의 토지소유권을 근대법적으로 인정하고 지주제를 점차 개혁하고자 하였다.
③ 광무정권은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를 공포하여 통치권을 국왕에게 집중시키되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적 기능을 갖도록 하였다.
④ 독립협회는 궁극적으로 군주제를 폐지하고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갖는 공화제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정답 ①
독립협회
독립협회는 한말 대표적인 대중계몽 사회단체로서 1896년 7월 2일 정부의 지원하에 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기념하여 독립문을 건립하고 독립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처음 발족하였다. 독립협회활동이 절정에 이른 것은 1898년 10월에 종로 광장에서 관민공동회를 개최했을 때이다. 각계각층이 모인 군중대회는 6가지 건의문을 채택하여 황제에게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헌의 6조로 불리는 건의문은 다음과 같다.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합심하여 황실의 번영과 황제의 권한을 튼튼히 할 것
2. 대한 제국의 이권에 대한 외국과의 계약이나 조약은 대신이 혼자 처리하지 말 것
3. 국가 재정의 수입과 지출을 공정하게 하고, 예산을 국민에게 알릴 것.
4. 중대한 범죄는 공판을 하고, 언론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5. 칙임관(고급 관리)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정할 것
6. 다른 항목의 규칙을 실시할 것(외국의 하원을 모방한 민회를 설치할 것 등)
이 건의문은 결국 전제 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꿀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1898년 이 건의문을 받아들여 시행할 것을 약속하고, ③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기 위하여 중추원 의원 (50명)의 절반을 독립협회 회원중에서 뽑고 나머지 절반은 관선으로 할 것을 제정 공포하였다.
그런데 개혁이 실천에 옮겨지기 전에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위하고 공화국을 건설하여 대통령에 박정양, 부통령에 윤치호, 그리고 각부 장관을 독립협회 회원이 차지한다는 보고가 황제에게 전달되었다.
이 보고는 뒷날 조병식의 무고로 판명되었지만, 황제폐위설에 놀란 고종은 독립협회의 혁파를 명령하였다. 독립협회 간의 구속과 협회 해산에 돌란 회원들과 일부 시민들은 경무창 앞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라는 대중집회를 열면서 정부조차에 항의했고 위기에 몰린 황제는 보부상단체인 황국협회를 동원하여 곤봉으로 만민공동회를 습격하고 강제 해산시켰다.
해설)
② 양전지계사업은 광무개혁의 경제정책이다.
광무개혁
1897년 성립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완전한 자주적 독립권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 러,일 전쟁이 일어난 1904년까지 열강의 세력균형기에 자주적으로 단행한 내정개혁이다.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지향하여 외세 의존적이고, 외국제도의 모방에서 비롯되었던 갑오개혁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권을 집중하는 데 목적을 두어 군제(軍制)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대적인 개편을 하였는데, 서울의 방비와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대, 시위대 ,호위대의 개편과 창설은 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전결(田結)의 정확한 파악을 위하여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여 양전사업을 실시하였으며, 지계제도를 채택하여 지계아문(地契衙門)에서 토지문권(土地文券)을 발급하였다.
④ 신민회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군주제를 부정하고 민주공화정을 이념으로 내세웠다. 민을 일깨워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신민회는 학교운동, 교육운동을 일으켰다.
정답: ①
해설:
② 양전지계사업은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③ 광무정권은 전제황권 중심의 개혁정치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중추원의 의회기능 개편은 수용할 수 없었다. 다만 독립협회가 이를 주장하여 고종의 허락까지 받아냈으나 끝내 시행되지는 않았다.
④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군주제 폐지가 아닌 군주제 인정을 기본으로 하는 가운데 민중의 정치참여를 주장하였다. 공화제를 처음 주장한 단체는 신민회였다.
독립협회
독립협회는 한말 대표적인 대중계몽 사회단체로서 1896년 7월 2일 정부의 지원하에 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기념하여 독립문을 건립하고 독립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처음 발족하였다. 독립협회활동이 절정에 이른 것은 1898년 10월에 종로 광장에서 관민공동회를 개최했을 때이다. 각계각층이 모인 군중대회는 6가지 건의문을 채택하여 황제에게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헌의 6조로 불리는 건의문은 다음과 같다.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합심하여 황실의 번영과 황제의 권한을 튼튼히 할 것
2. 대한 제국의 이권에 대한 외국과의 계약이나 조약은 대신이 혼자 처리하지 말 것
3. 국가 재정의 수입과 지출을 공정하게 하고, 예산을 국민에게 알릴 것.
4. 중대한 범죄는 공판을 하고, 언론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5. 칙임관(고급 관리)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정할 것
6. 다른 항목의 규칙을 실시할 것(외국의 하원을 모방한 민회를 설치할 것 등)
이 건의문은 결국 전제 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꿀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1898년 이 건의문을 받아들여 시행할 것을 약속하고, ③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기 위하여 중추원 의원 (50명)의 절반을 독립협회 회원중에서 뽑고 나머지 절반은 관선으로 할 것을 제정 공포하였다.
그런데 개혁이 실천에 옮겨지기 전에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위하고 공화국을 건설하여 대통령에 박정양, 부통령에 윤치호, 그리고 각부 장관을 독립협회 회원이 차지한다는 보고가 황제에게 전달되었다.
이 보고는 뒷날 조병식의 무고로 판명되었지만, 황제폐위설에 놀란 고종은 독립협회의 혁파를 명령하였다. 독립협회 간의 구속과 협회 해산에 돌란 회원들과 일부 시민들은 경무창 앞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라는 대중집회를 열면서 정부조차에 항의했고 위기에 몰린 황제는 보부상단체인 황국협회를 동원하여 곤봉으로 만민공동회를 습격하고 강제 해산시켰다.
해설)
② 양전지계사업은 광무개혁의 경제정책이다.
광무개혁
1897년 성립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완전한 자주적 독립권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 러,일 전쟁이 일어난 1904년까지 열강의 세력균형기에 자주적으로 단행한 내정개혁이다.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지향하여 외세 의존적이고, 외국제도의 모방에서 비롯되었던 갑오개혁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권을 집중하는 데 목적을 두어 군제(軍制)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대적인 개편을 하였는데, 서울의 방비와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대, 시위대 ,호위대의 개편과 창설은 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전결(田結)의 정확한 파악을 위하여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여 양전사업을 실시하였으며, 지계제도를 채택하여 지계아문(地契衙門)에서 토지문권(土地文券)을 발급하였다.
④ 신민회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군주제를 부정하고 민주공화정을 이념으로 내세웠다. 민을 일깨워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신민회는 학교운동, 교육운동을 일으켰다.
정답: ①
해설:
② 양전지계사업은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③ 광무정권은 전제황권 중심의 개혁정치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중추원의 의회기능 개편은 수용할 수 없었다. 다만 독립협회가 이를 주장하여 고종의 허락까지 받아냈으나 끝내 시행되지는 않았다.
④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군주제 폐지가 아닌 군주제 인정을 기본으로 하는 가운데 민중의 정치참여를 주장하였다. 공화제를 처음 주장한 단체는 신민회였다.
14. 다음 보기의 사건을 주도했던 세력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청나라에 대한 종속관계를 청산하고 인민 평등권의 내용과 능력에 따른 인재의 등용을 표방하였으며 행정 조직의 개편과 조세제도의 개혁을 모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던 사건으로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양반 지주층 일부가 중심이 되어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꾀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사건은 외세의 조선침략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농민들의 바람인 토지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
②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 아래 개혁정책을 수행하였다.
③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인해 와해되었다.
④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하여 국가 재정을 보충하자고 하였다.
정답 ④ 보기의 지문은 갑신정변에 대한 설명이다. 따라서 옳은 것은 ④이다.
갑신정변
갑신정변은 1884년에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가 근대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일으킨 정변이다. 비록 '3일 천하'로 끝났지만 이후 개혁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국이 조선 내정에 깊이 개입하면서 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각각 본보기로 하여 개혁을 추진했던 동도서기파와 급진개화파 사이에서 갈등이 증폭되었다. 특히 국가 재정의 위기를 둘러싸고 전개된 민씨정권과 급진개화파의 대립은 극에 이르렀다. 민씨정권을 대변하는 재정고문 뮐렌도르프가 악화(惡貨)를 주조할 것을 주장한 반면에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옥균의 차관 교섭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급진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급진개화파는 정국의 이러한 난관을 무력으로써 일거에 돌파하려 하였다. 더욱이 1884년 베트남을 두고 청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이었고 급기야는 8월에 청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자국군대 3,000명에서 절반을 철수하기에 이르자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지원을 입고 민씨정권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또한 일본도 급진개화파를 도와 조선 침략의 걸림돌이었던 청국과 민씨정권을 내몰고 조선에서 우위를 차지할 속셈으로 일본군대의 동원과 차관을 약속하였다.
1884년 10월 17일 급진개화파는 우정국 개설 피로연을 이용하여 민씨세력을 제거하는 일대 정변을 일으켰다.
해설)
① 1884년의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이 1896년 귀국하면서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사대외교의 표상인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당시 뜻있는 인사들에게 발의하였다. 독립문 건립은 오래도록 계속되어 온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당시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던 일본ㆍ러시아ㆍ서구열강들의 간섭으로부터 탈피하여 영구 독립을 이루기 위한 상징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그의 발의는 국민과 애국지사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으며, 1896년 6월에는 독립문 건립계획이 구체화되었다. 국왕의 동의를 얻고, 9월 6일에 독립문 건립을 서재필이 담당하도록 하고, 3,852원의 건립비용을 책정하였다. 이때 치욕의 영은문도 헐리고 그 뒤에 있던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獨立館)으로 바꾸었다.
② 대한 제국은 구본신참을 개혁 방향으로 정했으며, ‘대한국 국제’에서 대한 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 정치임과 황제권의 무한함을 강조하였다.
③ 1910년을 전후해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지역에서는 신민회(新民會)와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신문화운동을 통한 민족독립운동이 뿌리 깊게 전파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지역의 배일적 신문화운동을 뿌리 뽑기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잡힌 안명근 사건(安明根事件)을 확대·날조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 사건에 관여했다 하여 서북 지방의 배일 기독교인과 신민회원을 다수 체포한 것이 안악 사건(安岳事件)과 백오인 사건, 즉 신민회 사건이다.
정답: ④
해설:
인민평등권, 행정조직 개편, 근대화, 양반 지주층 일부가 중심 등의 표현은 갑신정변 당시 급진 개화파에 대한 설명이다. 당시 온건 개화파가 청에 종속되어 보수적인 개혁정치를 하는데 불만을 품고 일본에 연결되어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려고 하였다.
① 독립협회
② 광무정권
③ 신민회
갑신정변
갑신정변은 1884년에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가 근대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일으킨 정변이다. 비록 '3일 천하'로 끝났지만 이후 개혁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국이 조선 내정에 깊이 개입하면서 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각각 본보기로 하여 개혁을 추진했던 동도서기파와 급진개화파 사이에서 갈등이 증폭되었다. 특히 국가 재정의 위기를 둘러싸고 전개된 민씨정권과 급진개화파의 대립은 극에 이르렀다. 민씨정권을 대변하는 재정고문 뮐렌도르프가 악화(惡貨)를 주조할 것을 주장한 반면에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옥균의 차관 교섭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급진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급진개화파는 정국의 이러한 난관을 무력으로써 일거에 돌파하려 하였다. 더욱이 1884년 베트남을 두고 청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이었고 급기야는 8월에 청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자국군대 3,000명에서 절반을 철수하기에 이르자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지원을 입고 민씨정권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또한 일본도 급진개화파를 도와 조선 침략의 걸림돌이었던 청국과 민씨정권을 내몰고 조선에서 우위를 차지할 속셈으로 일본군대의 동원과 차관을 약속하였다.
1884년 10월 17일 급진개화파는 우정국 개설 피로연을 이용하여 민씨세력을 제거하는 일대 정변을 일으켰다.
해설)
① 1884년의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이 1896년 귀국하면서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사대외교의 표상인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당시 뜻있는 인사들에게 발의하였다. 독립문 건립은 오래도록 계속되어 온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당시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던 일본ㆍ러시아ㆍ서구열강들의 간섭으로부터 탈피하여 영구 독립을 이루기 위한 상징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그의 발의는 국민과 애국지사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으며, 1896년 6월에는 독립문 건립계획이 구체화되었다. 국왕의 동의를 얻고, 9월 6일에 독립문 건립을 서재필이 담당하도록 하고, 3,852원의 건립비용을 책정하였다. 이때 치욕의 영은문도 헐리고 그 뒤에 있던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獨立館)으로 바꾸었다.
② 대한 제국은 구본신참을 개혁 방향으로 정했으며, ‘대한국 국제’에서 대한 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 정치임과 황제권의 무한함을 강조하였다.
③ 1910년을 전후해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지역에서는 신민회(新民會)와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신문화운동을 통한 민족독립운동이 뿌리 깊게 전파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지역의 배일적 신문화운동을 뿌리 뽑기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잡힌 안명근 사건(安明根事件)을 확대·날조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 사건에 관여했다 하여 서북 지방의 배일 기독교인과 신민회원을 다수 체포한 것이 안악 사건(安岳事件)과 백오인 사건, 즉 신민회 사건이다.
정답: ④
해설:
인민평등권, 행정조직 개편, 근대화, 양반 지주층 일부가 중심 등의 표현은 갑신정변 당시 급진 개화파에 대한 설명이다. 당시 온건 개화파가 청에 종속되어 보수적인 개혁정치를 하는데 불만을 품고 일본에 연결되어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려고 하였다.
① 독립협회
② 광무정권
③ 신민회
15. 다음 중 3․1운동의 대내외적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1910년대 일제의 경제적 약탈과 사회적․정치적 억압으로 인해 일제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전 민족적으로 고조되었다.
②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 레닌은 자국 내 100여 개 이상의 소수민족에 대해 민족자결의 원칙을 선언하였다.
③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지구상의 모든 식민지 처리에 민족자결주의를 적용하자고 주창하였다.
④ 1919년 신한청년당에서는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다.
정답 ③
해설)
3·1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후 파리에서 개최된 강화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14개조의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이 중 식민지 민족의 해방을 촉구하는 민족 자결주의의 원칙이 포함되었다. 물론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된다는 한계가 있었다. 윌슨이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한 근본 목적은 독일과 같은 패전국의 식민지를 박탈함으로써 패전국을 응징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재기할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1차 대전의 승전국이었으므로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민족 자결주의의 원칙이 적용될 대상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3·1운동의 지도자들도 알고 있었으나, 민족 자결주의 선포 이후 그들은 세계적으로 고양된 약소 민족의 민족주의적 추세를 최대한 이용하려 하였다.
정답: ③
해설:
3·1운동의 대내외적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 구체적인 사실을 알고 있느냐 보다는 이러한 설명이 당시의 상황에 적합할 것인지를 묻는 문제이다. 즉 보기 ③은 대단한 과장법(‘지구상의 모든 식민지’)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도 필리핀 등 여러 나라를 식민지 지배하였기 때문에 자국의 이익을 빼앗기는 것은 원치 않았을 것이다. 세계 제1차 대전 후 패전국의 식민지를 독립시킴으로써 패전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미국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지구상의 모든 식민지 국가가 아닌 패전국의 식민지 국가의 독립을 표방한 것이었다.
해설)
3·1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후 파리에서 개최된 강화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14개조의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이 중 식민지 민족의 해방을 촉구하는 민족 자결주의의 원칙이 포함되었다. 물론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된다는 한계가 있었다. 윌슨이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한 근본 목적은 독일과 같은 패전국의 식민지를 박탈함으로써 패전국을 응징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재기할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1차 대전의 승전국이었으므로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민족 자결주의의 원칙이 적용될 대상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3·1운동의 지도자들도 알고 있었으나, 민족 자결주의 선포 이후 그들은 세계적으로 고양된 약소 민족의 민족주의적 추세를 최대한 이용하려 하였다.
정답: ③
해설:
3·1운동의 대내외적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 구체적인 사실을 알고 있느냐 보다는 이러한 설명이 당시의 상황에 적합할 것인지를 묻는 문제이다. 즉 보기 ③은 대단한 과장법(‘지구상의 모든 식민지’)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도 필리핀 등 여러 나라를 식민지 지배하였기 때문에 자국의 이익을 빼앗기는 것은 원치 않았을 것이다. 세계 제1차 대전 후 패전국의 식민지를 독립시킴으로써 패전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미국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지구상의 모든 식민지 국가가 아닌 패전국의 식민지 국가의 독립을 표방한 것이었다.
16. 다음 중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역사가와 그 업적이 가장 적절하게 짝지어진 것은?
① 신채호 : 1915년 근대적 역사인식에 입각한 최초의 한국근대사로 평가되는 『한국통사(韓國通史)』를 저술
② 박은식 :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역사는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주장
③ 백남운 : 한국사의 발전법칙성을 추구하는 사회경제사학을 통해, 식민사학의 정체성론(停滯性論)을 비판
④ 정인보 : “국가는 멸할 수 있어도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면서 역사를 국혼(國魂)과 국백(國魄)의 기록이라 주장
정답 ③
백남운은 세계사의 보편성에 바탕하여 우리 역사의 발전 과정을 체계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그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물인 <조선사회경제사>(1933년)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1937>)는 일제가 조작한 정체성론, 타율성론에 맞서 우리 역사의 보편적 발전 과정을 체계화한 귀중한 성과이다.
해설)
① 신채호는 1905년 무렵부터 국사 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1910년까지 각종의 영웅전과 더불어 근대 역사학의 기초를 다진 <독사신론>을 썼다. 그는 일제 강점으로 중국에 망명한 후에는 <조선사>,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저술하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자아성을 상실하고 사대주의의 노예성에 빠졌기 때문이라 했다. 그런데 사대주의 노예성은 고려 전기 '묘청의 난'에서 소위 국풍파(國風派)가 김부식 등 사대주의자들에게 패한 이후 활개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거의 고대사에 집중된 신채호의 역사 연구는 한국 고대사 연구의 기초를 다졌을 뿐만 아니라 민족 정신과 독립 사상을 높이는 데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② 박은식은 1915년 <한국통사(韓國痛史)> ,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등을 저술하여 일제의 국권 침탈 경위와 우리 민족의 피나는 독립 운동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그는 국가나 민족의 흥망은 민족 정신인 국혼(國魂)에 달려 있다고 보고, 나라가 망해도 역사가 담긴 국혼이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독립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같은 인식을 토대로 한 독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 일제는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④ 1930년대에는 신채호와 박은식의 역사 연구에 영향을 받아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등이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민족 정신과 민족의 얼을 지키는 일이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우리 민족을 보존하는 핵심이라 보고, 조선심, 조선말, 조선글, 조선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같은 조선학 운동은 역사 연구의 분야와 관심을 한국사 연구를 넘어 한국학 전반으로 확대시키며 발전해 갔다.
정답: ③
해설:
백남운의 사회경제사학은 인류역사의 보편적인 발전법칙을 한국사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한국사가 세계사와 같은 방향으로 단계적 발전을 하고 있다는(역사발전단계설) 것을 입증함으로써 식민사관(정체성론)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①, ④ 박은식
② 신채호
백남운은 세계사의 보편성에 바탕하여 우리 역사의 발전 과정을 체계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그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물인 <조선사회경제사>(1933년)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1937>)는 일제가 조작한 정체성론, 타율성론에 맞서 우리 역사의 보편적 발전 과정을 체계화한 귀중한 성과이다.
해설)
① 신채호는 1905년 무렵부터 국사 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1910년까지 각종의 영웅전과 더불어 근대 역사학의 기초를 다진 <독사신론>을 썼다. 그는 일제 강점으로 중국에 망명한 후에는 <조선사>,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저술하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자아성을 상실하고 사대주의의 노예성에 빠졌기 때문이라 했다. 그런데 사대주의 노예성은 고려 전기 '묘청의 난'에서 소위 국풍파(國風派)가 김부식 등 사대주의자들에게 패한 이후 활개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거의 고대사에 집중된 신채호의 역사 연구는 한국 고대사 연구의 기초를 다졌을 뿐만 아니라 민족 정신과 독립 사상을 높이는 데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② 박은식은 1915년 <한국통사(韓國痛史)> ,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등을 저술하여 일제의 국권 침탈 경위와 우리 민족의 피나는 독립 운동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그는 국가나 민족의 흥망은 민족 정신인 국혼(國魂)에 달려 있다고 보고, 나라가 망해도 역사가 담긴 국혼이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독립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같은 인식을 토대로 한 독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 일제는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④ 1930년대에는 신채호와 박은식의 역사 연구에 영향을 받아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등이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민족 정신과 민족의 얼을 지키는 일이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우리 민족을 보존하는 핵심이라 보고, 조선심, 조선말, 조선글, 조선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같은 조선학 운동은 역사 연구의 분야와 관심을 한국사 연구를 넘어 한국학 전반으로 확대시키며 발전해 갔다.
정답: ③
해설:
백남운의 사회경제사학은 인류역사의 보편적인 발전법칙을 한국사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한국사가 세계사와 같은 방향으로 단계적 발전을 하고 있다는(역사발전단계설) 것을 입증함으로써 식민사관(정체성론)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①, ④ 박은식
② 신채호
17. 다음 중 조선시대 성리학의 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정도전, 권근 등 관학파는 주례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② 이황을 계승한 남인들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에 관한 문제를 두고 호락논쟁을 벌였다.
③ 서경덕과 조식은 노장사상에 포용적이었다.
④ 소론 성리학자들은 양명학이나 노장사상 등을 수용하였다.
정답 ②
호락논쟁
17세기 말에 이황 학파와 이이 학파에서는 심성론에 관한 관심을 다시 기울이면서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라는 인물성동론과 인물성이론의 논쟁이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18세기에 들어와서는 이이 학파 내부에서 이러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호락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18세기 초 이이 학파 노론의 중심 인물이었던 권상하의 문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 계기가 되어 호락 논쟁이 시작되었다. 한원진은 인물성이론을 주장하고 이간은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는데 그들의 스승인 권상하가 인물성이론을 지지함으로써 충청도 지방의 노론은 인물성이론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서울 · 경기 지역의 노론인 김창흡 · 박필주 · 이재 등은 이간이 주장한 인물성동론에 동조하였다. 충청 지역의 인물성이론(이를 호론이라고 함)과 서울 · 경기 지역의 인물성동론(이를 낙론이라고 함)의 논쟁은 이후 100여 년 동안이나 전개되었는데 이를 호락 논쟁이라고 한다.
충청 지역의 호론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학문을 충실히 계승하여 성인과 범인, 사람과 짐승의 엄격한 구별을 강조함으로써 기존의 신분 제도와 지주 전호제를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서울 · 경기 지역의 낙론은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당시 성장하고 있던 일반민의 실체를 현실로 인정하고 노비 · 서얼의 문제에서도 개혁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후에 호론은 위정 척사 사상으로, 낙론은 북학 사상으로 이어졌다.
해설)
① 성리학은 고려 말의 개혁과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나, 이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신진 사대부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나타났다.
정도전, 권근 등 관학파로 불리는 이들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당 유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사상,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은 고려 시대부터 누적되어 온 대내외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왕조 교체에 따른 새로운 문물 제도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하였다.
③ 16세기 사림은 도덕성과 수신을 중시하였으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인간 심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서경덕과 이언적은 각각 조선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서경덕은 이보다는 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와 노장 사상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지녔다. 역시 노장 사상에 포용적이었던 조식은 학문의 실천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조식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학문 경향은 16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중요한 사상적 조류를 형성하였다.
④ 이이의 사상을 계승하고 주자 중심의 성리학을 절대시한 노론과는 달리, 소론은 절충적인 성격을 지닌 성혼의 사상을 계승하고 양명학과 노장 사상 등을 수용하는 등 성리학 이해에 탄력성을 보였다.
정답: ②
해설:
호락논쟁은 18세기에 송시열의 제자인 노론 내부의 논쟁으로서 호론과 낙론 사이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말한다. 이황을 계승한 남인들 중 일부는 실학의 중농학파를 형성하였다.
① 정도전, 권근 등 관학파는 [주례]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하여 중앙집권과 부국강병을 추진하였다.
③ 서경덕과 조식은 노장사상에 포용적이었기 때문에 주기설의 선구자 서경덕은 조식 학파인 북인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④ 소론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비록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리기도 하였지만, 양명학이나 노장사상 등도 수용하였다.
호락논쟁
17세기 말에 이황 학파와 이이 학파에서는 심성론에 관한 관심을 다시 기울이면서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라는 인물성동론과 인물성이론의 논쟁이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18세기에 들어와서는 이이 학파 내부에서 이러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호락 논쟁으로 전개되었다.
18세기 초 이이 학파 노론의 중심 인물이었던 권상하의 문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 계기가 되어 호락 논쟁이 시작되었다. 한원진은 인물성이론을 주장하고 이간은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는데 그들의 스승인 권상하가 인물성이론을 지지함으로써 충청도 지방의 노론은 인물성이론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서울 · 경기 지역의 노론인 김창흡 · 박필주 · 이재 등은 이간이 주장한 인물성동론에 동조하였다. 충청 지역의 인물성이론(이를 호론이라고 함)과 서울 · 경기 지역의 인물성동론(이를 낙론이라고 함)의 논쟁은 이후 100여 년 동안이나 전개되었는데 이를 호락 논쟁이라고 한다.
충청 지역의 호론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학문을 충실히 계승하여 성인과 범인, 사람과 짐승의 엄격한 구별을 강조함으로써 기존의 신분 제도와 지주 전호제를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서울 · 경기 지역의 낙론은 성인과 범인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당시 성장하고 있던 일반민의 실체를 현실로 인정하고 노비 · 서얼의 문제에서도 개혁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후에 호론은 위정 척사 사상으로, 낙론은 북학 사상으로 이어졌다.
해설)
① 성리학은 고려 말의 개혁과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나, 이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신진 사대부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나타났다.
정도전, 권근 등 관학파로 불리는 이들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당 유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사상,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은 고려 시대부터 누적되어 온 대내외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왕조 교체에 따른 새로운 문물 제도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하였다.
③ 16세기 사림은 도덕성과 수신을 중시하였으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인간 심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서경덕과 이언적은 각각 조선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서경덕은 이보다는 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와 노장 사상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지녔다. 역시 노장 사상에 포용적이었던 조식은 학문의 실천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조식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학문 경향은 16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중요한 사상적 조류를 형성하였다.
④ 이이의 사상을 계승하고 주자 중심의 성리학을 절대시한 노론과는 달리, 소론은 절충적인 성격을 지닌 성혼의 사상을 계승하고 양명학과 노장 사상 등을 수용하는 등 성리학 이해에 탄력성을 보였다.
정답: ②
해설:
호락논쟁은 18세기에 송시열의 제자인 노론 내부의 논쟁으로서 호론과 낙론 사이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말한다. 이황을 계승한 남인들 중 일부는 실학의 중농학파를 형성하였다.
① 정도전, 권근 등 관학파는 [주례]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하여 중앙집권과 부국강병을 추진하였다.
③ 서경덕과 조식은 노장사상에 포용적이었기 때문에 주기설의 선구자 서경덕은 조식 학파인 북인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④ 소론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비록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리기도 하였지만, 양명학이나 노장사상 등도 수용하였다.
18. 다음 보기의 왕과 업적이 시대 순으로 가장 적절하게 나열된 것은?
㉠ 근초고왕 때에는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 법흥왕은 병부의 설치, 율령의 반포, 공복의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 장수왕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는 등 세력을 넓혔다. ㉣ 신문왕은 9주 5소경 체제의 지방행정 조직을 완비하였고 녹읍을 폐지하였다. |
② ㉠㉢㉡㉣
③ ㉡㉠㉣㉢
④ ㉡㉠㉢㉣
정답 ②
㉠ 4c 근초고왕
㉡ 6c 법흥왕
㉢ 5c 장수왕
㉣ 통일 이후 7c 후반 신문왕
해설)
㉠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 백제는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또,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오늘날의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 황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정복 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백제는 수군을 정비하여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 고구려는 장수왕이 즉위한 지 15년 뒤인 427년에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장수왕(재위 413-491)의 재위 시절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매우 복잡하였다. 장수왕은 복잡한 중국 정세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영토 확장을 모색하고 국가의 안정을 꾀하였다. 양쯔강 북쪽의 북방 유목 민족이 북위에 의해 통일되자 고구려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 정식 외교관계를 가졌다. 그런 다음 남하를 시도하여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 신라는 내물왕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에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5세기 말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였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그리고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지방의 지배 세력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갔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의 설치, 율령의 반포, 공복의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 신문왕대는 태종무열왕대부터 시작된 신라의 중대왕실의 전제왕권이 확고하게 자리잡힌 시기이다. 지방의 통치제도에 있어서는 689년에 왕경(王京)을 지금의 대구인 달구벌(達丘伐)로 옮기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경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미 685년에 서원소경(西原小京:지금의 청주)과 남원소경(南原小京:지금의 남원)을 설치하고 진흥왕대에 설치된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중원소경(中原小京:지금의 충주)으로 고침으로써 5소경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설치하여온 군정적 성격이 강한 주(州)도 685년에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와 청주(菁州:지금의 진주)를 설치함으로써 삼국통일 후의 확대된 영역의 효과적 지배를 위한 9주제를 비로소 완성하였는데, 686년과 687년에는 여기에 따른 주·군·현의 정비가 있었다.
정답: ②
해설:
㉠ 4세기 근초고왕
㉡ 6세기 법흥왕
㉢ 5세기 장수왕
㉣ 통일이후 7세기 후반 신문왕
㉠ 4c 근초고왕
㉡ 6c 법흥왕
㉢ 5c 장수왕
㉣ 통일 이후 7c 후반 신문왕
해설)
㉠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 백제는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또,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오늘날의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 황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정복 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백제는 수군을 정비하여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 고구려는 장수왕이 즉위한 지 15년 뒤인 427년에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장수왕(재위 413-491)의 재위 시절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매우 복잡하였다. 장수왕은 복잡한 중국 정세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영토 확장을 모색하고 국가의 안정을 꾀하였다. 양쯔강 북쪽의 북방 유목 민족이 북위에 의해 통일되자 고구려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 정식 외교관계를 가졌다. 그런 다음 남하를 시도하여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 신라는 내물왕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에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5세기 말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였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그리고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지방의 지배 세력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갔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의 설치, 율령의 반포, 공복의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 신문왕대는 태종무열왕대부터 시작된 신라의 중대왕실의 전제왕권이 확고하게 자리잡힌 시기이다. 지방의 통치제도에 있어서는 689년에 왕경(王京)을 지금의 대구인 달구벌(達丘伐)로 옮기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경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미 685년에 서원소경(西原小京:지금의 청주)과 남원소경(南原小京:지금의 남원)을 설치하고 진흥왕대에 설치된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중원소경(中原小京:지금의 충주)으로 고침으로써 5소경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설치하여온 군정적 성격이 강한 주(州)도 685년에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와 청주(菁州:지금의 진주)를 설치함으로써 삼국통일 후의 확대된 영역의 효과적 지배를 위한 9주제를 비로소 완성하였는데, 686년과 687년에는 여기에 따른 주·군·현의 정비가 있었다.
정답: ②
해설:
㉠ 4세기 근초고왕
㉡ 6세기 법흥왕
㉢ 5세기 장수왕
㉣ 통일이후 7세기 후반 신문왕
19. 다음 보기의 강령을 내세운 단체의 활동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
② 국민대표기관으로서 임시의정원을 두고, 기관지 ࡔ독립신문ࡕ을 발간하였다.
③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봉오동에서 일본군 1개 대대를 격파하였다.
④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청산리에서 일본군 1200여명을 사살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정답 ①
신간회
1920년대 반일 민족운동 전선에는 두 가지의 큰 과제가 제기되었다. 하나는 일부 민족주의 세력이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완전 독립, 절대 독립의 길을 포기하고 일본 제국 내에서의 자치를 주장하는 이른바 '자치론'을 주장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운동이 크게 고조되면서 민족주의 운동 세력과 사회주의 운동 세력 사이에 분열이 커지게 된 것이다. 이같은 과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일제에 대항하여 민족의 해방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반일 민족운동 전선의 통일과 단결을 도모하려 한 노력이 신간회의 창립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참가한 세력은 절대 독립을 주장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었다.
지문은 창립시 신간회는 강령으로서, “(1)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2)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3)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배격함”을 채택하였다. 이는 신간회가 민중의 민족의식·사회의식으로 각성을 촉진하고, 민족운동세력을 결집하여, 타협적인 자치운동의 개벽하고 절대독립을 쟁취할 것을 궁극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간회는 광주 사태에 대하여 '진상 조사'라는 명목으로 적극적인 개입과 지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답: ①
해설:
상자 안은 신간회(1927년)의 3대 강령에 대한 설명이다. 신간회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민중대회’를 열어 독립의지를 고양시켰고 조사단을 파견하여 일제의 억압에 대항하였다.
② 대한민국 임시정부
③ 1920년 6월 북간도 봉오동전투
④ 1920년 10월 북간도 청산리전투
신간회
1920년대 반일 민족운동 전선에는 두 가지의 큰 과제가 제기되었다. 하나는 일부 민족주의 세력이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완전 독립, 절대 독립의 길을 포기하고 일본 제국 내에서의 자치를 주장하는 이른바 '자치론'을 주장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운동이 크게 고조되면서 민족주의 운동 세력과 사회주의 운동 세력 사이에 분열이 커지게 된 것이다. 이같은 과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일제에 대항하여 민족의 해방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반일 민족운동 전선의 통일과 단결을 도모하려 한 노력이 신간회의 창립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참가한 세력은 절대 독립을 주장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었다.
지문은 창립시 신간회는 강령으로서, “(1)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2)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3)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배격함”을 채택하였다. 이는 신간회가 민중의 민족의식·사회의식으로 각성을 촉진하고, 민족운동세력을 결집하여, 타협적인 자치운동의 개벽하고 절대독립을 쟁취할 것을 궁극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간회는 광주 사태에 대하여 '진상 조사'라는 명목으로 적극적인 개입과 지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답: ①
해설:
상자 안은 신간회(1927년)의 3대 강령에 대한 설명이다. 신간회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민중대회’를 열어 독립의지를 고양시켰고 조사단을 파견하여 일제의 억압에 대항하였다.
② 대한민국 임시정부
③ 1920년 6월 북간도 봉오동전투
④ 1920년 10월 북간도 청산리전투
20. 다음 중 유네스코에 등재된 우리나라의 세계문화유산은 모두 몇 개인가?
㉠ 석굴암 ㉡ 종묘 ㉢ 해인사 장경판전 ㉣ 수원 화성 ㉤ 경복궁 ㉥ 경주 역사유적지구 |
② 4개
③ 5개
④ 6개
정답 ③
경복궁은 등재되어 있지 않다. 창덕궁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해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 석굴암ㆍ불국사
석굴암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하기 시작하여 서기 774년인 신라 혜공왕 때 완공하였으며, 건립 당시의 명칭은 석불사로 칭하였다. 이 석굴은 신라시대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며,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경주 토함산 정상에 못 미친 깊숙한 곳에 동해를 향해 앉아 있는 석굴암은 완벽하고 빼어난 조각과 독창적 건축으로 전세계에 이름이 높다.
불국사는 석굴암과 같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서기 774년 신라 혜공왕때 완공하였다. 석굴암은 신라시대 전성기의 최고 걸작으로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유산이며, 불국사는 불교교리가 사찰 건축물을 통해 잘 형상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아시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불국사는 사적·명승 제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불국사내 주요 문화재로는 다보탑(국보 제20호), 석가탑(국보 제21호),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비로자나불(국보 제26호)등이 있으며, 불국사는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2. 종묘
종묘는 제왕을 기리는 유교사당의 표본으로서 16세기 이래로 원형이 보존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 의례공간이다. 종묘에서는 의례와 음악과 무용이 잘 조화된 전통의식과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제227호), 영녕전(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가 있으며,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3. 수원화성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4. 고인돌유적
고창, 화순, 강화의 선사유적들은 거대한 석조로 만들어진 2,000∼3,000년 전의 무덤과 장례의식 기념물로서 선사시대 문화가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당시의 기술과 사회현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고인돌 유적은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
6.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그리고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세계 불교경전 중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경전이며, 장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을 방지하고 온전한 보관을 위해 15세기경에 건축된 건축물로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서는 대장경판 81,258판(국보 제32호), 고려각판 2,725판(국보 제206호), 고려각판 110판(보물 제734호)이 있다. 이 중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7. 창덕궁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돈화문(보물 제383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전(국보 제225호), 대조전(보물 제816호), 구선원전(보물 제817호),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등이 지정되었다.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8. 경주역사유적지구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9. 조선왕릉
10.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정답: ③
해설:
㉤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흥선대원군 때 재건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정궁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조선시대 국왕은 주로 창덕궁에 거처하여 창덕궁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이다. 경복궁을 제외한 총 5개가 상기 문제의 정답이 된다.
경복궁은 등재되어 있지 않다. 창덕궁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해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 석굴암ㆍ불국사
석굴암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하기 시작하여 서기 774년인 신라 혜공왕 때 완공하였으며, 건립 당시의 명칭은 석불사로 칭하였다. 이 석굴은 신라시대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며,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경주 토함산 정상에 못 미친 깊숙한 곳에 동해를 향해 앉아 있는 석굴암은 완벽하고 빼어난 조각과 독창적 건축으로 전세계에 이름이 높다.
불국사는 석굴암과 같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서기 774년 신라 혜공왕때 완공하였다. 석굴암은 신라시대 전성기의 최고 걸작으로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유산이며, 불국사는 불교교리가 사찰 건축물을 통해 잘 형상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아시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불국사는 사적·명승 제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불국사내 주요 문화재로는 다보탑(국보 제20호), 석가탑(국보 제21호),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비로자나불(국보 제26호)등이 있으며, 불국사는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2. 종묘
종묘는 제왕을 기리는 유교사당의 표본으로서 16세기 이래로 원형이 보존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양식을 지닌 의례공간이다. 종묘에서는 의례와 음악과 무용이 잘 조화된 전통의식과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제227호), 영녕전(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가 있으며,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3. 수원화성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4. 고인돌유적
고창, 화순, 강화의 선사유적들은 거대한 석조로 만들어진 2,000∼3,000년 전의 무덤과 장례의식 기념물로서 선사시대 문화가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당시의 기술과 사회현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고인돌 유적은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
6.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그리고 고도로 정교한 인쇄술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세계 불교경전 중 가장 중요하고 완벽한 경전이며, 장경판전은 대장경의 부식을 방지하고 온전한 보관을 위해 15세기경에 건축된 건축물로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한 보존과학 소산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서는 대장경판 81,258판(국보 제32호), 고려각판 2,725판(국보 제206호), 고려각판 110판(보물 제734호)이 있다. 이 중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7. 창덕궁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돈화문(보물 제383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전(국보 제225호), 대조전(보물 제816호), 구선원전(보물 제817호),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등이 지정되었다.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8. 경주역사유적지구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9. 조선왕릉
10.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정답: ③
해설:
㉤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흥선대원군 때 재건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정궁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조선시대 국왕은 주로 창덕궁에 거처하여 창덕궁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이다. 경복궁을 제외한 총 5개가 상기 문제의 정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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