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1일에 시행한 지방직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다음 유물이 만들어진 시대의 사회상으로 옳은 것은?
○ 충북 청주 산성동 출토 가락바퀴
○ 경남 통영 연대도 출토 치레걸이
○ 인천 옹진 소야도 출토 조개 껍데기 가면
○ 강원 양양 오산리 출토 사람 얼굴 조각상
① 한자의 전래로 붓이 사용되었다.
② 무덤은 일반적으로 고인돌이 사용되었다.
③ 조, 피 등을 재배하는 농경이 시작되었다.
④ 반량전, 오수전 등의 중국 화폐가 사용되었다.

정답: ③ / 난이도 하

가락바퀴는 신석기 시대의 직조 수공업을 보여주는 유물이고, 치레걸이·조개껍데기 가면·흙으로 만든 인물상 등은 신석기 시대의 예술활동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③ 신석기 시대에 최초로 농경이 시작되었는데, 주로 조와 피 등의 잡곡류를 재배하였다.

<문제해설>
①, ④ 초기 철기시대에 중국과의 교류 사실을 입증하는 유물이다.

② 고인돌, 돌널무덤, 돌무지 무덤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 양식이다.



정답 ③

제시된 유물은 모두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가락바퀴, 치레걸이, 조개 껍데기 가면 등을 통해 이를 추론할 수 있다. ①과 ④는 철기 시대에 대한 설명이고, ②는 청동기 시대에 대한 설명이다.

③ 신석기 시대 후기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다. 황해도 봉산 지탑리와 평양 남경의 유적에서는 탄화된 좁쌀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잡곡류를 경작하는 농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 시대에 조ㆍ피ㆍ수수와 같은 잡곡만 재배되었고, 청동기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벼농사 및 보리ㆍ콩의 재배가 시작되었다.

①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나온 붓은 당시에 이미 한반도 남단에서 한자를 쓰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②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고인돌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분포해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의 사유재산과 계급 사회의 발생을 보여 주는 유물이다. 무게가 수십 톤 이상인 덮개돌을 채석하여 운반하고 무덤까지 설치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이 가진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④ 철기와 함께 중국 화폐인 명도전, 오수전, 반량전 등이 출토되어 당시의 활발한 교역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2. 통일신라시대 민정문서(장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인구, 가호, 노비 및 소와 말의 증감까지 매년 작성하였다.
② 토지에는 연수유전답, 촌주위답, 내시령답이 포함되어 있다.
③ 사람은 남녀로 나누고, 연령을 기준으로 하여 6등급으로 구분하였다.
④ 호(戶)는 상상호(上上戶)에서 하하호(下下戶)까지 9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정답: ① / 난이도 하

민정문서에는 토지, 인구, 나무와 소와 말 등의 수와 증감을 기록한 문서로 통일신라시대에 국가가 각 촌락의 생산자원을 철저하게 관리하였음을 추정하게 해준다. 토지는 연수유전답, 촌주위답, 내시령답, 관모전답, 마전 등으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인구는 남녀로 구분함과 동시에 나이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하였고, 개별 호(戶)의 인구수에 따라 상상호~하하호의 9등급으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문제해설>
① 통일신라 시대에 서원경 부근의 4개 지역의 경제 상황을 보여주는 민정문서는 3년 마다 촌주가 작성하였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정답 ①

① 민정문서는 매년 작성한 것이 아니라 ‘3년’마다 촌주가 작성하였다. 민정문서는 각 촌의 호구수와 인구수, 토지 종류와 면적, 가축(소와 말), 유실수(뽕나무ㆍ잣나무ㆍ호두나무)의 수 등을 집계하였다.

② 민정문서에 의하면 토지는 답ㆍ전ㆍ마전 등 3종류가 있었는데, 마을에 관모답, 내시령답, 촌주위답 등의 관료전이 할당되고, 촌민에게는 ‘연수유답’이 지급(실제로는 개인이 기존에 갖고 있던 사유지를 법적으로 승인)되었다. 농민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연수유답을 소유ㆍ경작하는 대가로, 관모답ㆍ내시령답ㆍ마전ㆍ촌주위답 등을 경작하였다.

③ 인구는 남녀별과 연령별로 6등급으로 구분(노비도 포함)하였는데, 여자도 노동력 수취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④ 각 호(戶)는 ‘인정(人丁)의 다과’를 기준으로, 하하연(下下烟)에서 상상연(上上烟)까지 9등급으로 분류되었다.

▲ 통일 신라의 민정문서
작성목적 노동력과 생산자원의 철저한 편제ㆍ관리
작성자 촌주가 3년마다 작성
지역위치 서원경 주변의 4개 촌락
분류 호구는 인정(人丁)의 다과에 따라 9등급, 사람은 연령별ㆍ남녀별로 6등급
발견 장소와 시기 1933년 일본 동대사 정창원
토지의 종류 연수유답, 촌주위답, 마전, 내시령답, 관모전답
작성대상 인구수, 호구수, 토지면적과 유형, 소와 말, 뽕나무ㆍ호두나무ㆍ잣나무

3. 밑줄 친 ‘나’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는 도(道)를 구하는 데 뜻을 두어 덕이 높은 스승을 두루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진수대법사 문하에서 교관(敎觀)을 대강 배웠다. 법사께서는 강의하다가 쉬는 시간에도 늘 “관(觀)도 배우지 않을 수 없고, 경(經)도 배우지 않을 수 없다.”라고 제자들에게 훈시하였다. 내가 교관에 마음을 다 쏟는 까닭은 이 말에 깊이 감복하였기 때문이다.
①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②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강조하였다.
③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였다.
④ 정혜쌍수로 대표되는 결사운동을 일으켰다.

정답: ④ / 난이도 하

제시문은 고려 중기 승려인 의천의 강론을 정리한 「대각국사 문집」의 일부분이다. 제시문의 내용에서 ‘교관’이라는 내용을 통해 교관겸수를 강조한 의천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의천은 국청사에서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였고, 이론인 교학과 실천인 참선의 양면적인 수행을 강조하였으며,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문제해설>
④ 정혜쌍수와 돈오점수 및 수선사 결사운동은 고려 후기 무신집권기 시기의 승려인 지눌의 주장 및 활동이다.



정답 ④

주어진 자료에서 ‘나’는 고려 숙종 때 활약한 대각국사 의천을 말한다. 교관겸수(敎觀兼修)라는 용어를 통해 이를 추론할 수 있다.

④ 정혜쌍수와 관련된 신앙 결사운동을 전개한 인물은 ‘지눌’에 대한 설명이다. 무신 집권기 이후의 사회 변동을 거치면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세속성에 대한 반성으로, 새로운 종교 결사 운동이 일어났다. 지눌은 명리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를 비판하고,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수선사 결사 운동을 제창하였다.

① 의천은 흥왕사를 근거지로 삼아 화엄종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또한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과 통합하기 위해 천태종을 창시하고 국청사를 세웠다.

②③ 의천은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는 사상을 뒷받침하고자, 이론(교학)과 실천(선)을 아울러 강조하는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제창하였다. 반면 지눌은 조계종을 창시하여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하고자 하였다.

4. 다음 활동을 전개한 단체로 옳은 것은?
평양 대성학교와 정주 오산학교를 설립하였고 민족 자본을 일으키기 위해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세웠다. 또한 민중계몽을 위해 태극 서관을 운영하여 출판물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할 목적으로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였다.
① 보안회
② 신민회
③ 대한 자강회
④ 대한 광복회

정답: ② / 난이도 하

1907년에 창립된 신민회는 대성학교(평양, 안창호)와 오산학교(정주, 이승훈) 설립을 통한 교육 구국운동을 추진하였고, 태극서관 및 자기회사의 운영을 통한 경제 자립운동을 추진하였다. 또한 신민회는 다른 애국계몽운동 단체와는 다르게 장기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국외 독립운동 기지의 건설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서간도 삼원보에 한인촌인 신한민촌을 만들고, 자치단체로 경학사를 설치하였다.



정답 ②

제시된 자료는 신민회(1907~1911)에 대한 설명이다. 평양 대성학교와 정주 오산학교, 태극서관의 운영 등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② 신민회(1907) : 신민회는 안창호, 이승훈, 양기탁, 이동휘, 신채호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으며, 주로 서북지방의 기독교 신자, 지식인, 실업인, 교사와 학생들이 많이 가담하였다. 신민회는 국권의 회복과 공화정체의 국민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은 조직이었다. 이들은 국내에서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의 건설 등 군사적 실력 양성을 꾀하였다.

① 보안회(1904) : 독립협회가 해산된 후에 가장 먼저 조직된 정치 단체는 신기선, 송수만 등이 조직한 보안회였다.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이 우리나라의 황무지 개척권을 강요해 왔을 때, 보안회는 이에 반대하는 국민여론을 일으키는 데 앞장섰다. 결국, 일본은 황무지 개척권을 포기하였고, 보안회도 일본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었다.

③ 대한 자강회(1906) : 을사조약 이후 통감부에 의해 한국인의 정치 활동이 금지되자, 헌정 연구회의 중심 인물들은 새로이 대한 자강회를 조직하였다. 대한 자강회는 교육을 진작하고 산업을 일으켜 흥하게 하는 것이 자강의 방법이라 강조하였으며,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월보의 간행과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 7조약의 체결에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펴 나갔다.

④ 대한 광복회(1915~1918) : 풍기에서 조직한 대한 광복단(1913)을 개편하여 박상진(의병장 허위의 제자)과 김좌진이 1915년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국외에 독립군 기지와 사관학교 설립을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제 수송 차량 습격, 친일 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10년대 비밀 결사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5. 다음 글을 쓴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른바 3대 문제는 무엇인가. 첫째는 유교계의 정신이 오로지 제왕측에 있고, 인민 사회에 보급할 정신이 부족함이오, 둘째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천하를 변혁하려 하는 정신을 강구하지 않고, 내가 동몽(童蒙)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동몽이 나를 찾는다는 생각을 간직함이오, 셋째는 우리 대한의 유가에서 쉽고 정확한 법문을 구하지 아니하고 질질 끌고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공부만을 숭상함이다.
① ‘조선심’의 개념을 중시하고 한글을 그 결정체로 보았다.
② ‘5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글을 써서 민족 정신을 고취하였다.
③ 실천적인 새로운 유교 정신을 강조하는 유교구신론을 주장하였다.
④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며, 일제의 사찰령에 반대하였다.

정답: ③ / 난이도 하

제시문의 인물은 현재 유교계의 폐단을 3가지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지행합일의 실천성을 강조한 양명학 계열의 유학자였던 박은식의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임을 파악해야 한다.

<문제해설>
① 문일평은 조선심(朝鮮心)의 결정체는 민중을 위해 만든 훈민정음(한글)이고 세종에 의해 구체적으로 구현된 것으로 보았으며, 실학의 실사구시 정신은 조선심의 재현이라고 평가하였다.

② 정인보는 조선역사 연구의 근본을 ‘단군조 이래 5,000년간 맥맥히 흘러온 얼'에서 찾고 조선역사는 곧 한민족의 ‘얼의 역사’임을 강조했다.

④ 일제는 1911년 ‘사찰령’을 제정하여 사찰 재산의 처분이나 주지 임명까지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등 조선 불교를 통제하려 하였다. 이에 33인의 민족 대표중의 한 사람이었던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회(1921)를 조직하여 일본의 불교 통제에 맞서 저항하였다.



정답 ③

제시된 자료는 박은식이 지은 <유교구신론(1909)>의 내용이다.

③ 박은식은 <유교구신론>에서 유교를 구국의 정신적 지주로 삼되, 종래 유교(성리학)의 보수성을 탈피하고 지행합일의 양명학의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실천적인 유교정신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① 문일평은 세종과 실학자들의 민족 지향ㆍ실용 지향 정신을 높이 평가하며, 민족 문화의 근본으로 세종을 대표자로 하는 ‘조선심’ 또는 ‘조선사상(朝鮮思想)’을 강조하였다.

② 정인보는 <조선사연구>를 지어 ‘조선의 얼’을 민족 정신으로 강조하였다. 또한 <양명학연론>을 저술하는 등 양명학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다.

④ 불교에서도 일찍이 한용운이 <불교유신론>을 주장하여 민족 불교로서의 전통을 이어 갔으며, 3ㆍ1 운동에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다. 또한  한용운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 불교 유신회(1921)는 일제의 사찰령(1911)에 맞서 투쟁하며 불교계 정화에도 힘썼다.

6. (가)∼(다)는 고려시대 대외관계와 관련된 자료이다. 이를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윤관이 “신이 여진에게 패한 이유는 여진군은 기병인데 우리는 보병이라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아뢰었다.

(나) 서희가 소손녕에게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이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영토의 경계로 따진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이 모두 우리 경내에 있거늘 어찌 침식이라 하리요.”라고 주장하였다.

(다) 유승단이 “성곽을 버리며 종사를 버리고, 바다 가운데 있는 섬에 숨어 엎드려 구차히 세월을 보내면서, 변두리의 백성으로 하여금 장정은 칼날과 화살 끝에 다 없어지게 하고, 노약자들은 노예가 되게 함은 국가를 위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반대하였다.
① (가)→(나)→(다)
② (나)→(가)→(다)
③ (나)→(다)→(가)
④ (다)→(나)→(가)

정답: ② / 난이도 중

(가)는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윤관이 별무반의 설치를 주장하는 내용으로 고려 중기 숙종 때의 자료이다(1104년).

(나)는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안융진에서 거란 장수 소손녕의 주장을 반박하는 서희의 주장으로 고려 초기 성종 때의 자료이다(993년).

(다)는 몽고의 1차 침입 이후 무신 집권자 최우가 강화도로 천도할 것을 결정했을 때, 대몽화친론을 주장했던 유승단이 강화 천도를 반대하는 고려 후기 고종 때의 자료이다(1232년).



정답 ②

(나) 거란의 1차 침입(993년) : 당시 거란의 침략 의도가 고려와 송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데 있음을 것을 알아차린 서희는 소손녕과 안융진에서 외교담판을 벌였다. 담판에 나선 서희는 송과 단교하고 거란과 통교할 것을 약속하는 대신,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가) 별무반의 조직(1104) : 기병 중심의 여진족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고려는 숙종 때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을 편성하였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기병을 보강한 특수 부대라 볼 수 있다.

(다) 최우의 강화 천도(1232) :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는 몽골 침입에 대비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며 항전을 지속하였다. 또한 정부는 각지의 산성에 관리를 보내 백성들의 항전을 독려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강화 천도에 반대하는 상소가 끊이질 않았고, 군사적인 열세로 인해 별다른 효과도 보지 못하였다.

7. 조선 후기 예송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갑인예송에서 남인은 조대비가 9개월복의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② 기해예송은 서인의 주장대로 조대비가 효종을 위해 1년복을 입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③ 기해예송은 효종이 사망하자 조대비가 상복을 3년복으로 입을 것인가, 1년복으로 입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④ 갑인예송은 효종비가 사망하자 조대비가 상복을 1년복으로 입을 것인가, 9개월복으로 입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정답: ① / 난이도 중

예송논쟁은 17세기 중후반 현종 때 효종과 효종비의 사망으로 촉발된 자의대비(조대비)의 상복을 입는 복제 논쟁이었다. 남인과 서인이 주장했던 예론이 대립하였던 것으로, 당시 왕권 강화를 지향했던 남인과 신권 우위를 주장했던 서인의 충돌이기도 했다. 기해예송(효종의 사망시) 때 남인은 3년설을, 서인은 1년설을 주장하면서 대립하였고 서인의 1년설이 채택되었다. 갑인예송(효종비의 사망시) 때 남인은 1년설을, 서인은 9개월설을 주장하면서 대립하였고 남인의 1년설이 채택되었다.

<정답해설>
① 갑인예송 때 남인은 1년설(기년설)을 주장하였다.



정답 ①

① 갑인예송(1674, 현종 15년) 때에 서인은 9개월설을, 남인은 1년설을 주장하였다. 이때 남인의 1년설이 채택되어 남인이 새로이 집권하게 되었다.

② 기해예송(1659, 현종 1년)은 효종의 승하에 따른 조대비의 복상 기간이 문제가 되었다. 이때 정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의 1년설이 채택되어 서인이 계속 집권하게 되었다.

③④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은 효종과 효종비가 죽은 후, 새 어머니였던 인조의 계비(조대비)가 적장자에 준하는 상복을 입을 것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이다. 차남으로 왕위를 이은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이 있으며, 두 차례 심각한 정치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의 비교
구분 기해예송(1659, 현종 1년) 갑인예송(1674, 현종 15년)
배경 효종의 승하에 따른 조대비의 복상문제 효종 비의 죽음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문제
주장 서인은 1년설을, 남인은 3년설을 주장 서인은 9개월설을, 남인은 1년설을 주장
근거 서인은 왕사동례(국조오례의에 근거)를,
남인은 왕사부동례(의례의 왕례편에 근거)를 주장
채택 서인의 1년설이 채택 남인의 1년설이 채택
결과 서인이 계속 집권 남인이 집권(붕당간 연합정치는 지속)
의미 효종의 정통 불인정(신권 강화 목적) 효종의 정통 인정(왕권 강화 목적)

8. (가) 시기에 볼 수 있는 장면으로 적절한 것은?
이인좌의 난 - (가) - 규장각 설치
① 당백전으로 물건을 사는 농민
② 금난전권 폐지를 반기는 상인
③ 전(錢)으로 결작을 납부하는 지주
④ 경기도에 대동법 실시를 명하는 국왕

정답: ③ / 난이도 중

이인좌의 난은 영조 때 소론 강경파 이인좌가 경종 독살설을 제기하면서 일으킨 반란으로 영조 때의 사실이다(1728년). 규장각은 정조가 즉위한 다음날에 왕실도서관으로 설치되었다(1776년), 이후 정조 8년(1784년)에 학술 연구 및 정책 연구 기구로까지 확대되었다. 따라서 (가) 시기는 영조 초기부터 정조의 즉위까지의 시대가 된다. ③ 결작은 영조 때인 1750년에 실시된 균역법으로 부족한 군포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1결당 2두씩을 징수하는 것이므로 맞다.

<문제해설>
① 당백전은 흥선대원군 섭정기인 고종 때 경복궁의 중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된 화폐였다(1866년).

② 금난전권의 폐지는 정조 때 신해통공으로 법제화된 것이다(1791년).

④ 경기도에 시범적으로 대동법을 실시하였던 것은 광해군 때였다(1608년).



정답 ③

이인좌의 난은 1728년(영조 4년)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강경파가 연합해 권력탈취를 기도한 사건이다. 또한 정조는 즉위한 직후인 1776년에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학문 연구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이 문제는 영조 때 일어난 사건을 찾는 문제이다.

③ 영조는 군포의 수를 종전의 2필에서 1필로 경감하는 균역법(1750)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結作)>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화폐로도 수납)시켰다.

①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이는 그동안 실추되었던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조선 왕조의 정체성을 회복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복궁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기부금), 결두전(1결당 100문), 문세(통행료) 등을 강제로 징수하였고, 당백전을 발행하여 물가 폭등이 나타났다.

② 정조는 신해통공(1791)을 반포하여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을 철폐하였다. 결국 시전상인의 활동이 위축되고 사상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보장되었다. 그리하여 사상들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폈으며, 그들 중 일부는 도고로 성장하였다.

④ 광해군 때인 이원익과 한백겸의 주장으로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대동법(1608)을 시행하였다.

9. 다음 글을 쓴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제 이 도(圖)와 해설을 만들어 겨우 열 폭밖에 되지 않는 종이에 풀어 놓았습니다만, 이것을 생각하고 익혀서 평소에 조용히 혼자 계실 때에 공부하소서. 도(道)가 이룩되고 성인이 되는 요체와 근본을 바로잡아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사오니, 오직 전하께서는 이에 유의하시어 여러 번 반복하여 공부하소서.
①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② 방납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수미법을 주장하였다.
③ 노장 사상을 포용하고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하였다.
④ 성리학을 중심에 두면서도 양명학의 심성론을 인정하였다.

정답: ① / 난이도 중

제시문은 임금 스스로가 성리학의 기본적 요체(심성론과 수양론)를 터득하여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리학의 원리를 도해식으로 정리하여 이황이 선조에게 바친 「성학십도」의 일부이다. 이황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근거를 이(理)로서 설명하는 주리론을 강조하였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 성리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이기이원론, 예안 향약 주도, 성학십도, 주자서절요 등이 이황과 관계된 내용들이다.

<문제해설>
② 이이는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이황과는 달리 주기론을 주장하며, 수미법과 십만양병설 등을 주장하는 등 현실 사회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③ 노장 사상을 포용하면서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한 것은 조식이다.

④ 이황은 「전습록논변」을 저술하여 양명학을 비판하였던 인물이므로 틀린 설명이다. 성리학에 중심을 두면서도 양명학의 심성론을 인정하였던 초기 양명학자들로는 17세기에 활동하였던 조익, 장유, 최명길 등이다. 이러한 흐름은 18세기 초반 강화학파를 형성한 소론 학자였던 정제두로 이어진다.



정답 ①

제시된 사료는 퇴계 이황이 저술한 <성학십도>이다. 이황은 <성학십도>에서 왕과 신하는 같은 예가 적용될 수 없으며, 군주 스스로 성학을 깨우쳐 따를 것을 강조하였다.

① 이황의 성리학(주리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해져 근세 일본의 유학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정유재란(1598)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강항이 후지와라 등과 교유하였는데, 후지와라는 후에 일본 성리학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② 이이는 <서얼허통법>과 <노양처소생종모법>을 입안하였고, 10만 양병설과 대공 수미법 실시를 주장하였다. 이이는 형이하의 물질세계인 기(氣)를 개혁해야만 형이상의 관념세계인 이(理)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경험적 현실 세계를 중시하여 제도, 법령의 개혁을 강조하였다.

③ 조식은 성리학의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그는 노장 사상과 같은 다른 사상에 개방적이었으며, 학문의 실천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이러한 실천성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는 배경이 되었다.

④ 이황은 양명학의 경전인 <전습록>을 비판하는 <전습록변>을 저술하였다. 그는 양명학을 이단으로 간주하며, 이를 강하게 배척하였다.

10. 다음은 일제 강점기 국외 독립운동에 관한 사실들이다. 이를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지청천을 총사령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된 대한 광복군 정부가 수립되었다.

ㄷ.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을 비롯한 연합 부대는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ㄹ.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① ㄱ→ㄹ→ㄴ→ㄷ
② ㄴ→ㄷ→ㄹ→ㄱ
③ ㄷ→ㄴ→ㄹ→ㄱ
④ ㄹ→ㄷ→ㄱ→ㄴ

정답: ② / 난이도 중

ㄴ. 대한광복군 정부의 수립(1914)
→ ㄷ. 봉오동 전투(1920)
→ ㄹ. 조선혁명군의 영릉가 전투(1932)
→ ㄱ. 한국광복군의 창설(1940)



정답 ②

㉡ 대한 광복군 정부의 설립(1914) : 대한 광복군 정부는 권업회를 모체로 수립된 최초의 임시 정부였다(민간 정부의 단서).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약하였으며, 이상설이 정통령에, 이동휘가 부통령에 각각 임명되었다. 대한 광복군 정부는 러일 전쟁 발발 10주년, 연해주 이민 50주년을 맞아 반일 감정을 활용하여 조직하였다.

㉢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1920) : 일본군은 만주 독립군의 활동을 막기 위해 몇 개의 독립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봉오동을 습격해 왔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던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군무 도독부군, 대한 국민 회군 등이 연합하여 일본군을 물리쳤다.

㉣ 조선 혁명군의 영릉가 전투(1932) :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은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1932.3), 흥경성(1933.3)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 임시 정부의 한국 광복군 창설(1940) :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중경)에서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두고,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총사령관에 지청천이, 참모장에 이범석이 각각 취임하였으며,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11. 삼국시대 금석문 자료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호우총 출토 청동 호우의 존재를 통해 신라와 고구려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② 사택지적비를 통해 당시 백제가 도가(道家)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③ 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통해 신라가 동해안의 북쪽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④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를 통해 신라가 고구려에게 자신을 ‘동이(東夷)’라고 낮추어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정답: ④ / 난이도 상

④ 중원고구려비는 장수왕 때인 480년 무렵 건립된 고구려의 비석이다. 이 비석에는 신라를 ‘동이(東夷)’라 하고 신라왕을 ‘동이매금(東夷寐錦)’으로 지칭하며 의복을 하사하는 등의 기록이 보이고 있어 고구려인의 신라에 대한 우월의식 및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엿볼 수 있다. 신라가 자신을 ‘동이’라고 스스로 낮추어 불렀던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신라를 낮추어서 표현한 것이므로 틀린 설명이다(중원고구려비 건립의 주체는 고구려이임).

<문제해설>
① 호우명 그릇의 밑바닥에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은 광개토 대왕릉 비문에서 나오는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군사적 지원과 더 나아가 일정 기간 신라가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해 주는 유물로서 의미가 깊다.

② 백제 의자왕 시기에 건립된 ‘사택지적비’는 대좌평(大佐平)을 역임하였던 귀족 사택지적이 말년에 지난날의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면서 만든 것으로 도교(도가)적 색채관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③ 신라 법흥왕 시기에 건립된 울진 봉평 신라비는 과거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경상도 북부(동해안 북부) 지역에서 발생한 반역 사건을 처결하는 내용으로 율령의 반포 사실과 더불어 신라의 정복지 주민에 대한 통치 정책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정답 ④

④ 중원 고구려비는 신라가 자신을 ‘동이(東夷)’라고 낮춰 표현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낮춰 불렀다. 당시에 고구려는 자신을 천하의 중심인 중화(中華)로 생각하고, 신라를 포함한 주변 국가를 조공국(또는 오랑캐)과 같이 대하였다.

① 내물왕 때 신라 해안에 침입한 왜군의 세력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신라군을 돕던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호우명 그릇은 경주의 호우총에서 발굴된 것으로, 이 그릇 밑바닥에 “乙卯年 國岡上 廣開土地好太王 壺杅十(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보여 준다.

② 백제 의자왕 때 세워진 사택지적비 비문에는 귀족이었던 사택지적이 불당을 세운 내력을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여기에는 노장(도가) 사상이 세련된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다.

③ 울진 봉평비(524)는 법흥왕 때의 율령 반포를 보여주는 비문으로, 신라가 동해안 북쪽 으로 영토를 확장한 내용이 적혀 있으며, 아울러 노인법(奴人法)의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법흥왕을 매금왕으로 칭하고 있으며, 왕이 소속부의 명칭을 띠고 있어 6부가 왕권을 초월하여 독자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2. (가), (나)의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가)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도둑질을 하면 12배로 변상케 했다. 남녀 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 투기하는 것을 더욱 미워하여, 죽이고 나서 시체를 산 위에 버려서 썩게 했다. 친정에서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했다.

(나)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이를 천군이라 했다. 여러 국(國)에는 각각 소도라고 하는 별읍이 있었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 다른 지역에서 거기로 도망쳐 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않았다.
- 삼국지 -
<보 기>
ㄱ. (가)-왕 아래에는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가 있었다.
ㄴ. (가)-농사가 흉년이 들면 국왕을 바꾸거나 죽이기도 하였다.
ㄷ. (나)-제천 행사는 5월과 10월의 계절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ㄹ. (나)-동이(東夷) 지역에서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① ㄱ, ㄴ
② ㄱ, ㄹ
③ ㄴ, ㄷ
④ ㄷ, ㄹ

정답: ③ / 난이도 하

(가)는 1책 12법과 더불어 음란죄와 투기가 심한 부인을 처형하는 풍습이 있었던 부여와 관련된 자료이다.

(나)는 천군이라는 제사장이 소도를 다스리는 제정분리의 특징을 가진 삼한에 대한 설명이다.

ㄴ-부여에서는 흉년이 계속하여 들 경우 제가들이 국왕을 축출하거나 죽였다.

ㄷ-5월 수릿날과 10월 계절제의 제천행사는 삼한의 풍습이다.

<문제해설>
ㄱ-상가는 제가회의의 의장이고, 고추가는 상층의 대가들을 지칭하는(적통대인) 것으로 고구려의 관직명이다.

ㄹ-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라고 묘사된 것은 부여이다.



정답 ③

(가)는 ‘부여’에 대한 설명이고, (나)는 ‘삼한’에 대한 설명이다.

㉡ 부여는 왕권이 미약한 편이었다. 그리하여 가(加)들은 왕을 선출하거나 추대하기도 하였고, 흉년이 들거나 수해ㆍ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왕에게 그 책임을 묻기도 하였다.

㉢ 삼한에서는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 수릿날(단오로 발전)과 곡식을 거둬들이는 10월에 계절제(추수 감사절)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 고구려에는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 부여는 만주 길림에 있는 송화(쑹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구릉과 넓은 못이 많아서 동이 지역 가운데서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다. 토질은 오곡을 가꾸기에는 알맞지만 과일은 생산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체격이 매우 크고 성품이 강직 용맹하며 근엄하고 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노략질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3. 다음 중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① 신윤복의 미인도
② 안견의 몽유도원도
③ 정선의 인왕제색도
④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정답: ② / 난이도 중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세종 29년(1447) 4월 20일에 도원을 여행하는 꿈을 꾼 후 그 내용을 안견에게 명하여 그리게 한 것으로 3일만에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현재 일본의 덴리대학교(天理大學)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반출문화재이다. 해외유출 문화재라는 독특한 주제의 문제여서, 다소 당황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조선 태종 때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 지도도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일본 류쿄쿠 대학교).

<문제해설>
① 간송 미술관 소장,
③ 리움 미술관 소장,
④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답 ②

②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일본으로 유출되어, 현재 덴리[天理]대학 중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초 화원 출신인 안견은 역대 화가들의 기법을 체득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몽유도원도>는 신선이 산다는 이상세계를 낭만적으로 그린 것으로, 자연스러운 현실 세계와 환상적인 이상 세계를 능숙하게 처리하고 대각선적인 운동감을 활용하여 구현한 걸작이다.

① 신윤복은 섬세하고 세련된 화법을 구사하여 주로 도회지 양반의 풍류생활과 부녀자의 풍습, 남녀 사이의 애정 등을 감각적이고 해학적으로 묘사하였다. <미인도>, <단오풍정>, <여인도>, <월하정인>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미인도>는 서울 성북동의 간송 미술관(미술품 수집가인 전형필이 세운 최초의 민간 박물관)에 현재 소장되어 있다.

③ 진경 산수화를 개척한 정선은 서울 근교와 강원도의 명승지를 두루 답사하여 그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 정선은 대표작인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에서 바위산은 선으로 묘사하고, 흙산은 묵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인왕제색도>는 서울 한남동의 리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④ 조선 초 문인 화가인 강희안은 시적 정서가 흐르는 낭만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다. 그의 대표작인 <고사관수도>는 자연 속에 파묻혀 무념무상에 빠진 인간의 내면세계를 그린 것으로, 간결하고 과감한 필치로 인물의 내면세계를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고사관수도>는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4. 조선시대 의궤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왕실의 행사에 사용된 도구, 복식 등을 그림으로 남겨 놓았다.
② 이두와 차자(借字) 및 우리의 고유한 한자어(漢字語)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③ 왕실 혼례와 장례, 궁중의 잔치, 국왕의 행차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기록하였다.
④ 프랑스 국립도서관에는 신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어람용 의궤가 소장되어 있다.

정답: ④ / 난이도 중

조선시대 의궤는 왕실과 관청의 중대한 행사의 전말(행사 준비 과정, 절차, 참여 인원, 비용, 행사 관련 그림 등)  을 자세하게 기록한 기록물이다.

① 의궤는 행사에 사용된 도구, 복식, 행사 장면 등을 그림으로도 기록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② 의궤에는 차자(借字, 한자를 빌려와 우리말로 표기하는 것)의 대표적 형태인 이두식 표현도 포함되어 있어 국어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③ 의궤는 왕실의 혼장례, 궁중의 잔치, 행차, 중요 건물의 완성, 무기의 제작 등 다양한 국가적 행사의 전말을 후세에게 표준으로 남기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문제해설>
④ 의궤는 보통 국왕만이 열람할 수 있는 어람용 의궤와 일반 의궤(의정부 및 예부 등과 사고에 비치)로 구분된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서 고급 어람용 의궤 등 297책을 약탈하여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하다가, 2011년 5월 대한민국으로 5년 임대의 형식으로 반환되었다.



정답 ④

④ 프랑스는 신미양요(1871)가 아니라 ‘병인양요(1866)’ 때 강화도 외규장각에 있던 조선 왕조 의궤를 강제로 약탈하였다.

① 의궤는 조선시대 600여년에 걸쳐 왕실의 주요 행사, 즉 결혼식, 장례식, 연회, 사신영접 등 뿐 아니라, 건축물ㆍ왕릉의 조성과 왕실 문화 활동 등에 대한 기록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② 의궤는 이두(吏讀)ㆍ차자(借字)와 각종 제도어(制度語) 및 한국 한자어(漢字語)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 이 방면의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기도 한다.

③ 의궤는 유교적 원리에 입각한 국가 의례(길례, 가례, 빈례, 군례, 흉례)를 중심으로, 왕실 혼례와 장례, 궁중의 잔치, 국왕의 행차 등 국가 중요 행사를 정해진 격식에 의해 정리, 작성한 기록물이다.

15. 밑줄 친 ‘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의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 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①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다.
② 한국 민주당을 결성하여 미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③ 미국에서 귀국한 후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구성하였다.
④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정답: ① / 난이도 하

제시문은 1948년 2월 10일, 유엔소총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안의 결정이 임박한 상태에서(유엔소총회의 의결은 2월 26일) 김구가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성명서이다.

① 김구는 1948년 2월 초에 북측에 남북지도자 회담의 개최를 요구하였고, 그 해 3월 북측에서 이를 수락하여, 4월에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협상에 김규식과 더불어 참여하였다.

<문제해설>
② 송진우와 김성수, ③ 이승만, ④ 여운형에 대한 설명이다.



정답 ①

① 제시된 사료는 백범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2.)>의 일부이다. 따라서 밑줄 친 ‘나’는 ‘백범 김구’이다.

② 송진우와 김성수에 대한 설명. 송진우, 김성수 등은 건준 및 좌익 세력에 반대하며 임정봉대론을 내세우면서 ‘한국민주당(1945.9)’을 결성하였다. 또한 미군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점차 우익 진영의 대표 정당으로 성장하였다.

③ 이승만에 대한 설명. 미국에서 활약하던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하여, 좌ㆍ우익 정치 세력을 망라한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1945.10.16)를 결성하였다.

④ 여운형에 대한 설명.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는 광복 이후 최초로 조직한 정치단체로, 1945년 8월 15일 중도 우파의 여운형이 주도하여 결성하였다. 광복 직전에 있었던 조선 건국 동맹을 모체로 만들어졌으며, 위원장은 여운형이, 부위원장은 안재홍이 각각 맡았다.

▲ 광복 후 남한의 주요 인물과 조직
노선 인물 조직
우익 이승만 독립촉성중앙회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자유당
김성수 한국 민주당(한민당)
김 구 한국 독립당(한독당)
김규식 한독당 탈퇴 → 좌우합작위원회 참여 → 민족자주연맹
중도
우파
안재홍 조선 국민당(국민당)
중도
좌파
여운형 건국준비위원회 → 조선 인민당 → 좌우합작위원회 참여 → 근로인민당
좌익 박헌영 조선 공산당 →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백남운 남조선 신민당

16. (가), (나) 국왕의 재위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가) 대조영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나)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에서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렀다.
<보 기>
ㄱ. (가)-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ㄴ. (가)-장문휴가 수군을 이끌고 당(唐)의 산둥(山東) 지방을 공격하였다.
ㄷ. (나)-‘건흥’ 연호를 사용하고,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다.
ㄹ. (나)-당시 국왕을 ‘대왕’이라 표현한 정혜공주의 묘비가 만들어졌다.
① ㄱ, ㄴ
② ㄱ, ㄹ
③ ㄴ, ㄷ
④ ㄷ, ㄹ

정답: ③ / 난이도 중

(가) 8세기 초반 발해 무왕의 업적이다.
(나) 9세기 전반 발해 선왕의 업적이다.

ㄱ-무왕은 흑수말갈 문제 및 국왕의 동생인 대문예의 송환 문제로 당나라와 대립하다가 장문휴로 하여금 산둥(덩저우) 지방을 공격하게 하였다.

ㄴ-선왕의 연호는 건흥(무왕은 인안, 문왕은 대흥)이었고,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5경 15부 62주의 지방제도를 정비하였다.

<문제해설>
ㄱ-발해는 ‘동모산(고왕, 대조영)→중경(무왕이라는 설과 문왕이라는 설로 갈라짐)→상경(문왕)→동경(성왕)’의 순으로 천도하였으므로,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한 국왕은 성왕(5대왕, 대화여) 때의 일이다.

ㄹ-문왕의 둘째 딸이 정혜공주이고, 넷째 딸이 정효공주인데 정혜공주의 묘비에는 문왕을‘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이라고 지칭하는 표현이 나타난다.



정답 ③

(가)는 발해 ‘무왕’에 대한 설명이고, (나)는 발해 ‘선왕’에 대한 설명이다.
㉠과 ㉣은 발해의 문왕에 대한 내용이다.

㉡ 무왕(719~737)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였다. 그러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하여금 당의 산둥(山東) 지방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

㉢ 선왕(818~830)은 건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발해 최대의 영토를 획득하였다. 이때 확보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5경 15부 62주의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하였다.

㉠ 문왕(737~793)은 756년에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겼고, 785년에는 다시 동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는 발해의 국력이 점차 동쪽으로 신장되었음을 보여준다.

㉣ 굴식 돌방무덤인 정혜공주(문왕의 둘째 딸) 묘는 모줄임 천장구조가 고구려 고분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벽돌무덤인 정효공주(문왕의 넷째 딸) 묘는 무덤 윗부분이 탑의 양식으로 세워졌으며, 당의 영향을 받았다.

17. 다음에서 서술하고 있는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 인물을 중심으로 한 도적 무리는 조선 전기 도적 가운데 그 세력이 가장 컸으며, 명종 14년부터 명종 17년까지 주로 활동하였다. 이들이 거점으로 삼았던 지역은 백정들이 많이 사는 지역과 공물이 운송되며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농민들의 부담이 무거웠던 역촌(驛村) 지대 및 주변에 갈대밭이 많은 곳 등이었다. 이들은 이러한 곳을 거점으로 약탈․살인․방화를 서슴지 않았다.
① 광대 출신으로 승려 세력과 함께 봉기하여 서울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② 허균이 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정치의 부패상을 비판한 소설을 썼다.
③ 황해도를 중심으로 경기․강원․평안․함경도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④ 대동계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는 역성 혁명을 꿈꾸었다.

정답: ③ / 난이도 상

16세기 중후반 명종 때 문정왕후 및 그의 동생인 척신 윤원형(소윤)이 권력을 잡아 정치기강 및 수취질서가 문란해졌고, 이 결과 농민 몰락이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유망한 농민들 중에 도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오래 지속된 난은 1559년에서 1562년에 걸쳐 지속된 임꺽정의 난이었다. 이 난의 원인은 황해도 일대의 지역민이 공동으로 이용하였던 갈대밭을 권세가들이 개간을 구실로 소유권을 장악함으로써 야기되었다. 백정 출신의 임꺽정은 여러 패거리(상인, 대장장이, 노비, 사림, 아전 등)들을 규합하여 황해도 구월산 지역에서 부자 및 관리들의 재물을 털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의협활동을 했던 도적으로 유명하며, 점차로 경기·평안·강원도에 걸쳐 활동 무대를 확대하였다. 성호 이익은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임꺽정, 홍길동, 장길산을 꼽았다.

<문제해설>
① 조선 후기 숙종 때 광대 출신이었던 장길산은 승려 및 서얼들과 함께 봉기하여 정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② 홍길동은 연산군 시기에 활동했던 유명한 도적으로 허균이 훗날 홍길동전의 모델로 삼아 홍길동전을 저술하였다.

④ 조선 후기 선조 때 정여립은 선조의 미움을 받아 전라도 진안 지역으로 낙향하여 대동계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천하공물설(천하는 만인의 것)에 기반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 하였다. 이 사건을 발단이 되어 정여립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동인 강경파들이 1,000여명 정도 희생된 기축옥사가 발생한다.



정답 ③

제시된 자료의 인물은 16세기 명종 때 활약한 임꺽정이다. 성호 이익(李瀷)은 자신의 저서인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으로 홍길동과 임꺽정 그리고 장길산을 꼽았다.

③ 명종 대의 정치 혼란과 계속된 흉년으로 관리의 부패가 심해져 민심이 흉흉해지자, 임꺽정은 불평분자들을 규합하였다. 이후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의적 행각을 벌였다. 이들의 행각에 백성들이 호응하면서 관군의 토벌이 있을 경우 미리 정보를 알려주어 자신들의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은 주로 황해도를 중심으로 활약하였으나, 경기ㆍ강원ㆍ평안ㆍ함경도 지역에서도 의적 활동을 벌였다.

① 장길산(숙종) : 조선 숙종 때 황해도의 구월산(九月山)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활동한 도둑의 우두머리이다. 광대 출신인 장길산은 서얼, 승려 세력과 함께 봉기하여 거사를 도모하였다. 이는 17세기 이후 혼란한 사회 속에서 국가 하층민이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염원하는 욕망과 맥을 같이 한 사건이었다.

② 홍길동(연산군) : 홍길동은 연산군 시대에 서울 근처에서 활약하던 농민 무장대의 지도자였다. 토지를 잃고 지배층의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산속으로 피해 무장대의 일원이 되어 양반 지주나 관청을 습격하였다. 홍길동은 양반관리의 복장을 하고 무장한 많은 농민을 지휘해 여러 지역의 관청을 습격했다. 뒤에 그에 대한 이야기는 <홍길동전>으로 소설화되기도 하였다.

④ 정여립(선조) : 1589년 전주 출신의 정여립이 급진적인 일부 동인 세력과 연결하여 진안 죽도에 대동계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새 왕조를 세우려는 혁명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동인이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호남 지역은 반역의 향으로 낙인찍혀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사람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18. (가), (나)는 조선이 외국과 맺은 조약이다. 이와 관련한 설명 중 옳은 것은?
(가) ○ 조선국은 자주국으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연해 중에서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택하여 지정한다.

(나) 이 수륙 무역 장정은 중국이 속방(屬邦)을 우대하는 뜻에서 상정한 것이고, 각 대등 국가 간의 일체 동등한 혜택을 받는 예와는 다르다.
① (가)는 ‘운요호 사건’ 이후 체결된 것이다.
② (가)에는 일본 상인의 내지 통상권에 대한 허가가 규정되어 있다.
③ (나)는 갑신정변 이후 체결된 것이다.
④ (나)에는 천주교의 포교권 인정이 규정되어 있다.

정답: ① / 난이도 하

(가)는 1876년 2월에 체결된 조・일수호조규(자주국 규정, 3개항의 개항, 해안측량권, 치외법권 등을 규정)이다. (나)는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 8월월에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속방 규정, 내지통상권의 사실상 허용 등)이다.

① 일본은 1875년에 발생한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그 이듬해 1월 강화도를 점령한 후, 조선에 통상조약의 체결을 요구하였고, 이 결과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문제해설>
② 강화도 조약(정확히 표현하면 조・일수호조규부록)에서는 개항장의 10리 이내로 무역범위를 제한한 거류지 무역이 규정되어 있고, 내지 통상권이 사실상 허가가 된 것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규정되었다.

③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임오군란이 진압된 이후 체결된 것이고, 갑신정변 이후 체결된 것은 한성조약 및 텐진조약이다.

④ 천주교에 대한 포교의 자유가 규정된 것은 1886년에 체결된 조・불수호통상조약이다.



정답 ①

(가)는 강화도 조약(1876)에 대한 설명이고, (나)는 조청 상민 수륙 무역장정(1882)에 대한 설명이다.

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새로운 국가 체제를 마련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통상을 강요하기 위하여 ‘운요호 사건(1875)’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조선에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강요하였다. 이는 서양 열강이 군사력을 앞세워 아시아 국가들에 강요한 방식을 본뜬 것이었다.

② 조일 수호 조규 부록 속약(1882.8.)에서 일본 상인의 통상 허용 범위(간행이정)가 50리로 확대되었고, 이후 조일 통상 장정(1883.7)에서 최혜국 대우를 규정함으로써 완전한 내지통상이 가능해졌다.

③ 조청 상민 수륙 무역장정(1882)은 갑신정변이 아니라, ‘임오군란’ 결과 맺은 조약이다. 이 조약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과정 속에서 체결되었으며, 이 조약으로 청 상인의 경제적 침투가 본격화됨으로써 조선에서의 일본 상인과 청 상인간의 경쟁이 가속되었다.

④ 천주교 포교권이 인정된 것은 프랑스와 체결한 ‘조불 통상 조약(1886)’이다. 조약에 조선에서 프랑스 언어와 문자를 배우거나 가르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었는데, 프랑스는 이를 천주교 포교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19. 다음 선언을 지침으로 삼았던 애국 단체의 활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련한 꿈을 버리고 민중 직접 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조선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내쫓을지며, 강도 일본을 내쫓을지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내쫓을 방법이 없는 바이다.
① 이재명이 이완용을 습격해 중상을 입혔다.
② 나석주가 동양 척식 주식 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③ 장인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사살하였다.
④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 역에서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정답: ② / 난이도 중

제시문은 김원봉의 요청에 따라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으로 의열단이 추구하던 암살파괴운동의 논리와 이념적 지표를 당당히 천명한 것이었다(1923. 1). 대표적인 의열단의 의거로 박재혁(부산경찰서 투탄), 김익상(총독부 투탄), 김상옥(종로경찰서 투탄), 김지섭(일본 황궁에 투탄 시도), 나석주(식산은행과 동척에 투탄) 등을 꼽을 수 있다.

<문제해설>
① 이재명은 총리대신 이완용을 명동성당 부근에서 단도로 공격하였으나 중상만 입히고 실패하였다(1909. 12).

③ 장인환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역에서 친일적 미국인인 스티븐스를 저격하여 죽였다(1908. 3)

④ 단지동맹(斷指同盟)이라는 비밀결사 조직의 단원이었던 안중근은 한국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고 주장하였다(1909. 10).




정답 ②

제시된 자료는 의열단의 ‘조선 혁명 선언(1923.1)’의 일부분이다. 이 글은 신채호가 김원봉의 부탁을 받고 작성한 것으로, 의열단의 행동 강령과 독립 운동 방략이 담겨 있다.

② 나석주의 의거(1926.12) : 의열단의 일원인 나석주가 1926년 동양 척식 회사와 식산 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고 경찰과 시가전을 벌이다가 순국하였다.

① 이재명의 의거(1909.12) : 이재명은 서울에서 을사오적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2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③ 장인환ㆍ전명운의 의거(1908.3) : 대한 제국의 외교 고문이었던 스티븐스가 미국에 돌아와 일제 침략을 정당화하는 선전을 하자, 장인환과 전명운이 샌프란시스코 기차역에서 스티븐슨을 사살하였다.

④ 안중근의 의거 (1909.10) :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대한의군 참모 중장으로 일본군과 항쟁하던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에서 조산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였다.

▲ 의열단원의 활약
결성 김원봉(1919)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이 조직
활동 김익상(1921) 조선 총독부에 투탄
김상옥(1923) 종로경찰서에 투탄
김지섭(1924) 일본황궁에 투탄
나석주(1926)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투탄

20. 다음은 근대 개혁 방안에 관한 자료이다. 이를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내시부를 없애고 그 가운데서 재능있는 자가 있으면 뽑아 쓴다.
ㄴ.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모름지기 나누어 서로 뒤섞지 아니한다.
ㄷ. 대한국 대황제는 육해군을 통솔하고 편제를 정하며 계엄과 해엄을 명한다.
ㄹ. 재정은 모두 탁지부에서 전담하여 맡고, 예산과 결산은 인민에게 공포한다.
① ㄱ→ㄴ→ㄷ→ㄹ
② ㄱ→ㄴ→ㄹ→ㄷ
③ ㄴ→ㄱ→ㄷ→ㄹ
④ ㄴ→ㄱ→ㄹ→ㄷ

정답: ② / 난이도 중

    ㄱ-갑신정변 때의 폐정개혁안(1884)
→ ㄴ-2차 갑오개혁 때의 홍범 14조(1894)
→ ㄹ-독립협회측과 정부가 합의한 헌의 6조(1898)
→ ㄷ-대한제국의 대한국국제(1899)



정답 ②

㉠ 개화당의 갑신정변(1884) : 갑신정변에 성공한 개화당 정부는 14개조 정강을 발표하며,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한 개혁을 시행하였다. 여기에는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1차 갑오개혁(1894) : 1차 갑오개혁에서는 국정을 왕실 사무(궁내부)와 정부 사무(의정부)를 분리하여 왕권을 축소시켰다. 또한 의정부를 중앙 정치의 중추기관으로 만들어 입헌 군주제를 지향하였다.

㉣ 독립협회의 헌의6조(1898) : 독립협회가 주장한 헌의 6조(1898)에서 “어떤 세금을 막론하고 전국 재정은 모두 탁지부에서 관장하며, 예산ㆍ결산을 인민에게 공표할 것”을 규정하였다.

㉢ 대한제국의 대한국 국제(1899) : 1899년 8월 교정소(교전소를 개칭)에서 제정한 일종의 헌법으로, 대한제국이 전제 정치 국가이며, 황제권이 무한함을 강조하고, 입법권ㆍ행정권ㆍ사법권ㆍ외교권 등을 모두 황제의 대권으로 규정하였다. 황제권을 제약할 수 있는 의회 설립이나 참정권, 사법권에 대한 규정은 두지 않았으며, 이로써 민권사상이 크게 후퇴하였다.





문제 PDF 새탭에서 보기
문제 PDF 다운로드
문제 HWP 다운로드
정답 HWP 다운로드
정답 PDF 다운로드

댓글 쓰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