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7일에 시행한 지방직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 입니다.


문  1. ㉠ 국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 )에서는 백성들에게 금하는 법 8조가 있었다. 그것은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마다 50만 전을 내야 한다. 비록 용서를 받아 보통 백성이 되어도 사람들이 이를 부끄럽게 여겨 혼인을 하고자 해도 짝을 구할 수 없다.
① 옥저와 동예를 정복하였다.
② 족외혼과 책화의 풍습이 있었다.
③ 별도의 행정구역인 사출도가 있었다.
④ 중국의 한과 대립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정답: 4

자료는 고조선의 8조법이다

④ 고조선은 한과 남방의 진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독점 하며 성장했는데, 한의 동방침략 기지인 요동군까지 위협하게 되었다. 이에 한무제는 북방의 흉노와 위만조선이 연결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109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위만조선은 1년간 항전했으나 내분에 의해 우거왕이 암살되고 왕검성이 함락 당했다.

① 옥저와 동예는 고구려 태조왕에 의해 복속당했다
② 동예에 대한 설명이다
③ 부여에 대한 설명이다



8조법은 고조선의 법이다. 현재 3조목만 전해지고 있다.

④ 고조선은 전국 시기에는 연과 대결할 정도로 영토가 넒어졌으며, 한(漢)과도 대립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① 고구려는 56년(태조왕 4)에 동예와 옥저를 복속하였다. 또한 요동군과 현도군을 공격하는 한편 남쪽으로는 청천강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② 동예에는 족외혼과 책화의 풍습이 있었다. 족외혼은 같은 씨족끼리 혼인하지 않는 풍습으로 신석기 시대의 풍습이었으며 책화는 남의 부락을 침범할 경우 곡식이나 소·말로 배상하는 풍습을 말한다.

③ 부여에는 사출도가 있었는데, 사출도는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豬加), 구가(狗加)라고 불리는 부족장이 독자적으로 다스리는 행정구역을 말한다.

문  2. 다음 고구려에서 일어난 사건을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불교를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였다.
ㄴ. 고국원왕이 평양성전투에서 전사하였다.
ㄷ. 을파소를 등용하여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ㄹ. 한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다.
① ㄴ→ㄷ→ㄱ→ㄹ
② ㄴ→ㄷ→ㄹ→ㄱ
③ ㄷ→ㄴ→ㄱ→ㄹ
④ ㄷ→ㄴ→ㄹ→ㄱ

정답:3

㉢ 고구려 고국천왕(179~197) 때 을파소의 건의로 춘대추납의 진대법이 실시되었다

㉡ 고국원왕은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에 대항하여 평양성에서 싸우다 371년 전사했다

㉠ 소수림왕 때 전진의 순도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래하였다(372년)

㉣ 장수왕은 475년 백제를 공격하여 아차산성에서 개로왕을 죽이고 한성을 함락시켰다



ㄷ. 진대법은 194년(고국천왕 16)에 실시한 빈민 구제책으로 흉년에 곡식을 대여해주는 정책이다.

ㄴ. 고국원왕 때 전연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큰 피해를 입었고, 이어 백제 근초고왕의 침입으로 371년(고국원왕 41년)에 전사하였다.

ㄱ. 소수림왕은 373년(소수림왕 3)에 율령을 반포하였고, 즉위 직후인 372년(소수림왕 2)부터 전진(前秦)에서 온 불교 사절을 받아들이며 본격적으로 불교를 수용하였다.

ㄹ. 장수왕은 475년(장수왕 63)에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처형했다. 백제는 이에 따라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문  3. (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가)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켰다.

(나) 한강 유역을 빼앗고, 고령 지역의 대가야를 정복하였다. 북쪽으로는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① 백제 동성왕과 혼인 동맹을 맺었다.
②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③ 진골 귀족 세력의 반발로 녹읍이 부활되었다.
④ 병부를 설치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정답:4

(가)지증왕(500~514)에 대한 설명이다
(나)진흥왕(540~576)에 대한 설명이다

④ 법흥왕(514~540)은 병부를 설치하여 군사권을 장악하고 병권을 일원화 시키고자 했으며 율령을 반포하여 17관등 및 백관의 공복을 제정했다

① 소지왕(479~500) 때 백제 동성왕이 혼인을 청하여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내어 결혼동맹을 체결하였다(493년)

② 박,석,김의 3성 교립제에서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된 것은 내물왕(356~402) 때의 일이다

③ 경덕왕(742~765) 때 녹읍 폐지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로 녹읍이 부활되었다(757년)



(가)는 6세기 초 지증왕(500~514) 때의 일이다. 지증왕은 국호를 사로국에서 신라로 바꾸고(503), 왕의 칭호로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으며(503) 행정구역을 정비하였다.

(나)는 6세기 중엽 진흥왕(540~576) 때의 일이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개편하여 국가적 조직으로 삼았으며(576), 한강 유역을 확보하여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④ 지증왕과 진흥왕 사이에 통치하였던 왕은 법흥왕이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였고 골품제를 정비하였으며 공복을 제정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고(52) 병부를 설치하였다(516). 또한 불교를 공인하였으며(527) 금관가야를 정복하였다(532).

① 백제와 신라가 혼인동맹을 맺은 것은 493년(동성왕 15, 소지마립간 15)의 일이다.

②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된 것은 내물마립간(356~402) 이후의 일이다.

③ 녹읍이 부활된 것은 757년(경덕왕 16)의 일이다. 녹읍이 부활한 것은 이 시기부터 통일신라 중대의 왕권이 약화되었으며 진골 귀족들의 세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문  4. 1970년대 시행된 정책이 아닌 것은?
① 금융실명제의 실시
② 새마을운동의 추진
③ 통일벼의 전국적 보급
④ 수출 주도형 중화학 공업화

정답:1

① 금융실명제가 시행된 것은 김영삼정부 때 이다 (1993년)

② 박정희 정부는 낙후된 농촌사회의 소득을 올리고 생활환경을 개선하고자 1970년 부터 새마을운동을 실시했다

③ 1971년 농촌진흥청에서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이후 농가에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④ 70년대에는 울산·포항·창원·구미 등에 새로운 공업 단지를 조성하여 철강·기계·전자·석유화학 등 중화학 공업이 크게 발전 했다



1970년대 정책에 대해 묻고 있다.

② 새마을운동은 1970년부터 시작된 지역사회 개발운동으로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③ 통일벼는 1972년부터 보급되어 기존 벼보다 수확량이 40%정도 많아 벼의 자급에 큰 기여를 하였다.

④ 1960년대까지는 경공업 중심의 공업화를 실시한 것에 비하여 1970년대에는 수출 주도형 중화학 공업화를 실시하여 GDP가 급속히 성장하였다.

①금융실명제는 1993년에 실시된 정책이다.

문  5.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된 배경으로 옳지 않은 것은?
향회라는 것이 한 마을 사민(士民)의 공론에 따른 것이 아니고, 수령의 손 아래 놀아나는 좌수ㆍ별감들이 통문을 돌려 불러 모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 향회에서는 관의 비용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제멋대로 돈을 거두고 법을 만드니, 일의 원통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① 사족의 향촌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② 수령과 향리의 영향력이 약해졌다.
③ 향회는 수령의 부세 자문 기구로 전락하였다.
④ 양반 사족과 부농층이 향촌의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

정답:2

② 조선후기 향회가 약화되어 수령에 대한 견제 세력이 사실상 사라지게 되면서 수령과 향리의 자의적인 수탈이 가능해지는 등 수령과 향리의 영향력은 커졌다

① 조선후기 평민이나 천민들 중 재산을 모아 부농층으로 성장하기도 했지만 양반 가운데 토지를 잃고 몰락하여 전호가 되거나 심한 경우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생겨감에 따라, 향촌 사회 내부에서 양반들이 지녔던 권위도 점차 약해져갔다

③ 종래 양반의 이익을 대변하던 향회가 조선후기에는 자문 기구화 되어 수령이 세금 부과를 묻는 자문기구로 변화했다

④ 조선 후기 향청에 부유한 부농층이 참여하면서 향촌지배권을 두고 구향과 신향 간의 향전이 일어났다



자료에서 향회에서 사족들보다 수령과 관권의 영향력이 더 강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18세기 후반 이후의 일로, 부농의 성장으로 기존 지방 사족들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향촌 사회에서 향전(鄕戰)이 일어나고 그 틈을 타 관권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① 부농층은 부세 운영에 적극 협조하여 세력을 키워가고 상대적으로 재지사족들은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③ 관권과 결탁한 부농층이 향직 매매를 통해 향청·향회로 진출하며 향회의 주도권을 국가 권력이 장악하며 향회가 부세 자문기구로 전락하였다.

④ 양반 사족과 부농층은 향촌 사회의 지배권을 두고 향전(鄕戰)을 벌였으며, 결국 관권과 결탁한 부농층이 유리한 입장이 되었다.

② 수령과 향리는 새롭게 성장한 부농층과 결탁하여 향회를 장악하여 영향력을 강화시켜나갔다.

문  6. 8․15 광복 직후 일어난 역사적 사실로 옳은 것은?
① 여운형은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②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③ 조선어학회는 우리말 큰사전 편찬을 시작하였다.
④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다.

정답: 4

④ 광복 후 카이로 선언에서 천명한 한반도 독립에 대한 약속을 실천하고자 미국·영국·소련의 3국 외상이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협의하였다(1945.12.12)

① 조선건국동맹은 1944년 8월 국내에서 여운형과 안재홍이 좌·우 합작으로 조직되었으며,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발족되었다

② 조소앙이 제창한 정치·경제·교육의 삼균주의를 채택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1941년에 발표되었다

③ 조선어학회는 1929년부터 우리말 큰사전 편찬을 시도했다



광복 직후 역사적 사실에 대해 묻고 있다.
④ 모스크바 3상회의는 1945년 12월에 미국, 소련, 영국 대표들이 모여 한국의 신탁통치를 결의한 회의이다.

① 여운형이 1944년 8월, 비밀조직으로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②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은 1941년 발표되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새로운 민주주의 확립과 사회계급의 타파, 경제적 균등주의의 실현'을 주창하였다.

③ 조선어학회가 <조선말 큰사전>의 편찬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36년 이후의 일이다. 1947년 10월 제1권이 나왔으며, 표제가 <조선말 큰사전>에서 <큰사전>으로 바뀌었다. 조선어학회는 1947년 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문  7. 다음 사건으로 인하여 발생한 역사적 사실은?
심충겸이 장원 급제를 하자 전랑으로 천거하려고 하였다. 김효원이 “외척은 쓸 수 없다.” 하며 막으니, 심의겸이 “외척이 원흉의 문객보다는 낫지 않으냐.” 하였다. 이때 김효원 편을 드는 사람들은 “효원의 말은 공론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의겸이 사사로운 혐의로 좋은 선비를 배척하니 매우 옳지 못하다.” 하였다.
① 동인과 서인으로의 분화
② 남인과 북인으로의 분화
③ 노론과 소론으로의 분화
④ 서인과 남인 간의 예송논쟁

정답:1

① 이조전랑 문제로 인해 기성 사림의 신망을 받던 심의겸 중심의 서인과 신진사림의 지지를 받던 김효원을 지지하는 동인으로 붕당이 형성되었다

② 정여립 모반 사건과 세자 건저의 문제로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분화되었다

③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경신환국 이후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④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간의 예송논쟁이 발생했다



이조전랑 천거 문제와 척신 정치의 잔재 청산 방법을 둘러싸고 사림 간의 분화가 일어났고 이로 인하여 붕당이 분화되었다.

① 김효원의 집이 동쪽 건천동에 있어서 동인으로, 심의겸의 집은 정릉동에 있었으므로 각기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었다.

② 동인은 1591년(선조 24)정철의 처벌문제를 둘러싸고, 급진파는 북인으로 온건파는 남인으로 분화되었다.

③ 1682년(숙종 8) 남인 역모 조작 사건에 대한 입장 차이로 남인에게 강경한 입장을 취한 노론과, 남인에게 온건한 입장을 취한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④ 예송논쟁은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제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다.

문  8. 다음에서 설명하는 밑줄 친 ‘청(廳)’에 해당하는 것은?
영의정 이원익이 의논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이 각 사의 방납인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십 배, 몇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었는데, 기전(畿甸)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廳)을 설치하여 매년 봄․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당 매번 8말씩 거두어 본청(廳)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후략)…”
① 어영청
② 상평청
③ 선혜청
④ 균역청

정답:3

1608년 이원익·한백겸의 주장으로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③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중앙에는 선혜청, 지방에는 대동청을 설치하였다

① 오군영 중 하나인 어영청은 이괄의 난을 계기로 어영군으로 설치되었다가 효종이 북벌운동이 추진하면서 기능을 강화하여 어영청으로 승격되었다

② 상평청은 풍년 때 곡식을 사들이고 흉년 때 곡식을 싼값으로 팔아 물가를 조절하는 등의 일을 하였다.

④ 균역청은 균역법 시행과 관련된 일을 하는 관청이다



자료에서는 공물의 폐단을 처리하기 위해 쌀을 거둬서 국가적 차원에서 방납을 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해당 방법은 대동법이다.

③ 선혜청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공물 조달을 담당한 관청으로, 상납미를 관리하고 징수한 대동미를 공인들에게 공물가로 지급하고 물품을 거둬들여 각 궁방과 관청에 공급하는 일을 하였다.

① 어영청은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설치되었다.

② 상평청은 1457년(세조 3) 물가조절과 진휼 사업을 위해 설치된 관청이다.

④ 균역청은 균역법의 시행을 위해 1750년(영조 26)에 설치되었으나, 1753년(영조 29)에 선혜청에 통합되었다.

문  9. 다음은 조선 후기 집필된 역사서의 일부이다. 이 책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삼국사에서 신라를 으뜸으로 한 것은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했고, 뒤에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였으며, 또 고려는 신라를 계승하였으므로 편찬한 것이 모두 신라의 남은 문적(文籍)을 근거로 했기 때문이다. …(중략)… 고구려의 강대하고 현저함은 백제에 비할 바가 아니며, 신라가 차지한 땅은 남쪽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김씨는 신라사에 쓰여진 고구려 땅을 근거로 했을 뿐이다.
① 우리 역사의 독자적 정통론을 세워 이를 체계화하였다.
② 단군-부여-고구려의 흐름에 중점을 두어 만주 수복을 희구하였다.
③ 중국 및 일본의 자료를 망라한 기전체 사서로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혔다.
④ 여러 영역을 항목별로 나눈 백과사전적 서술로 문화 인식의 폭을 확대하였다.

정답:1

자료는 안정복의 『동사강목』이다

①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통일신라-고려로 이어지는 우리역사의 독자적 정통론을 내세웠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기초가 되기도 했다

②이종휘는 『동사』에서 단군-부여-고구려의 연결성을 존중하고, 고구려는 단군의 혈통이자 기자의 문화를 동시에 계승하였을 주장하였다 또한 단군 이래 우리영토였던 만주지방을 수복하여 영토적인 면에서도 대국으로 부상하고자 했다

③한치윤은 중국과 일본 등 외국의 서적까지 인용한 『해동역사』를 저술하여 민족사 인식의 폭 확대에 기여했다

④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400여종의 자료를 참고하여 조선시대 정치와 문화를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하였다



안정복의 『동사강목』(1778년, 정조2)의 일부이다. (명한국사 793쪽)

① 『동사강목』은 강목체로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서술하였으며, 독자적 정통론을 내세웠다. 안정복은 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문무왕-왕건으로 이어지는 삼한정통론을 주장하여 종전의 화이사관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② 이종휘는 『동사』(1780년대 저술, 1803 순조 3년 출간)를 저술하여 단군-부여-고구려 계통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었으며, 부여·예맥·비류·옥저 등이 모두 고조선의 후예로 간주하여 단군의 위상을 격상시키고자 했다. 또한 과거 우리 영토였던 만주를 수복하여 영토적인 면에서도 대국으로 부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③ 『해동역사』는 한치윤이 저술하였으며 1820년(순조 20)에 출간된 역사서이다. 기전체 서술로 중국과 일본의 자료를 모두 참고하여 저술된 역사서로 민족사 인식의 폭 확대에 기여하였다.

④ 이긍익이 1797년(정조 21)에 저술한 『연려실기술』은 실증적, 객관적으로 서술된 사서이다. 우리나라의 문화를 백과사전식으로 저술되었다.

문 10. 다음 취지서를 발표한 단체의 활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무릇 나라의 독립은 오직 자강(自强)의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자강의 방도를 강구하려 할 것 같으면 다른 곳에 있지 않고 교육을 진작하고 산업을 일으키는 데 있으니 무릇 교육이 일어나지 않으면 민지(民智)가 열리지 않고 산업이 일어나지 않으면 국부가 증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육과 산업의 발달이 곧 자강의 방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강력하게 규탄하였다.
② 고종의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③ 방직, 고무, 메리야스 공장을 육성하여 경제 자립을 이루자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④ 일본의 황무지 개간에 대한 대중적인 반대운동을 일으켜 이를 철회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정답:2

자료는 대한자강회 취지서의 내용이다

② 교육과 산업을 진흥시켜 독립의 기초를 만들 것을 목적으로 하여 조직된 대한 자강회는 고종황제의 퇴위 반대운동을 주도하다가 강제로 해체되었다

① 독립협회는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근대적 민중대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③ 1920년대 회사령이 철폐되고 신고제로 바뀌어 민족기업 설립이 증가되면서 물산 장려 운동이 일어났다

④ 보안회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해 농광회사와 연계하여 반대 운동을 벌여 이를 철회하는데 성공했다



자료의 글은 《대한 자강회 월보》에 실린 대한 자강회 취지서이다. (명한국사 98쪽)

② 대한 자강회는 헌정연구회를 계승한 단체로, 교육을 통해 국력을 증강시켜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주로 문화운동에 치중하였으며, 고종황제의 퇴위 반대 운동을 전개하고 일진회를 성토하다가 강제로 해산당하였다.

① 만민공동회(1898)는 독립협회에서 민중들을 대상으로 정기 개최한 토론회이다.

③ 민족 기업 설립 운동은 회사령 철폐 이후 경제적 자립을 이루기 위해 일어난 운동이다. 지주층이 쌀을 수출하여 마련한 자본으로 상인층과 합작하여 경성 방직 주식회사(김성수), 평양 메리야스 공장, 평양 고무신 공장(이병두) 등이 설립되었다.

④ 보안회(1904)는 보국안민을 내세우고, 대규모 민중집회를 열어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철회를 요구하였으며 이를 위해 농광회사를 조직하였다.

문 11. 다음에서 설명하는 인물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성은 김씨이다. 29세에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얼마 후 중국으로 가서 부처의 교화를 보고자 하여 원효(元曉)와 함께 구도의 길을 떠났다. …(중략)… 처음 양주에 머무를 때 주장(州將) 유지인이 초청하여 그를 관아에 머물게 하고 성대하게 대접하였다. 얼마 후 종남산 지상사에 가서 지엄(智儼)을 뵈었다.
-'삼국유사'-
①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하여 화엄사상을 정리하였다.
② 중국에서 풍수지리설을 들여와 지세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③ '십문화쟁론'을 지어 종파 간의 대립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④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역을 여행하고 돌아와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하였다.

정답: 1

자료는 의상대사에 대한 설명이다

① 원효와 의상은 함께 도당유학을 가려했으나 원효가 해골 물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도당 유학을 접게 되자 의상 혼자 당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의상은 유학에서 돌아와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하여 화엄사상을 정립하였으며 아미타신앙과 함께 관음신앙을 설파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② 신라 말 도선 등의 선종 승려들이 중국에서 유행한 풍수지리설을 전래했다

③ 원효에 대한 설명이다

④ 혜초에 대한 설명이다



의상은 현장의 뒤를 잇기 위해 당으로 유학을 다녀왔으며, 다녀온 후 화엄사상을 널리 퍼트려 사회 통합과 전제왕권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① 「화엄일승법계도」는 의상의 화엄사상을 압축하여 정리한 것으로 상호 의존성과 조화를 강조하였다.

② 신라 말의 승려 도선은 당에서 풍수지리설을 들여왔다.

③ 원효는 종파간의 융합을 위해 일심사상과 화쟁사상을 주장하고 『십문화쟁론』을 저술하였다.

④ 혜초는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와 중국에서 밀교를 배우고, 10여년동안 인도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여행하였으며 기행문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문 12. 밑줄 친 ‘북국(北國)’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원성왕 6년 3월 북국(北國)에 사신을 보내 빙문(聘問)하였다. …(중략)… 요동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북쪽 땅을 병합하고 신라와 서로 경계를 맞대었지만, 교빙한 일이 역사에 전하는 것이 없었다. 이때 와서 일길찬 백어(伯魚)를 보내 교빙하였다.
① 감찰 기관으로 중정대가 있었다.
② 최고 교육 기관으로 태학감을 두었다.
③ 중앙의 정치 조직으로 3성 6부를 두었다.
④ 지방의 행정 조직으로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정답:2

원성왕이 사신을 보낸 북국은 발해이다

② 발해의 중앙 최고 교육기관은 주자감이다

① 발해는 중정대를 두어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했다

③ 발해는 당의 3성 6부를 근간으로 정당성,선조성,중대성의 3성과 충·인·의·지·예·신부의 6부로 중앙관제를 조직하였다

④ 발해는 선왕 때 5경 15부 62주의 통치조직을 완비하였다



발해에 정치조직에 대해 묻고 있다.

① 발해에는 감찰 기관으로 중정대가 있었으며, 중정대에는 대중정과 소정 등 대관이 있었다.

③ 발해는 당의 3성 6부제를 수용하고 성과 부의 명칭과 역할을 변경하여 중앙 관제를 운영하였다.

④ 발해는 지방 행정 조직으로 5경 15부 62주를 두었다. 부에는 도독, 주에는 자사, 현에는 현승을 관리로 두어 책임자로 삼았다.

② 태학감은 신라 교육기관인 국학을 경덕왕 때 개칭한 이름이다.

문 13. 다음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왕은 중국에 36명의 승려를 파견하여 법안종을 배우도록 하였다. 또한 제관과 의통을 파견하여 천태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① 승과 제도를 시행하였다.
② 요세가 세운 백련사를 후원하였다.
③ 의천이 국청사를 창건하는 것을 후원하였다.
④ 거란과의 전쟁을 물리치기 위해 초조대장경을 조성하였다.

정답:1

광종은 제관과 의통을 남중국에 파견하였고, 중국에서 법안종을 배워온 혜거로 하여금 법안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했다

① 광종 때 숭불정책의 일환으로 승과 제도가 정비되어 시행되었다

② 백련사는 최씨무신정권의 후원을 받았다

③ 의천은 숙종 2년에 국청사가 완성되자 주지를 맡았으며 천태종을 창시했다

④ 현종 때 초조대장경이 제작되었다



광종은 교종통합과 교선의 조화에 관심이 있어서 제관과 의통을 남중국으로 파견하여 천태학을 수입하려 하였으며 법안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고 하였다.

① 광종은 승과제도를 실시하여 승려들도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 합격자에게는 법계(法階)와 토지가 지급되었다. 승과는 교종시와 선종시로 나뉘에서 행해졌으며, 예비 시험인 종선을 통과해야 본시험인 대선을 치를 수 있었다.

② 요세는 참회를 강조하는 법화신앙을 내세우는 백련결사를 제창하였다. 백련결사는 최씨 정권의 비호를 받았다.

③ 의천은 1089년(선종 6) 인예태후의 도움으로 천태종의 중심이 될 국청사 건립을 시도하였지만 화재로 중단되었다. 1096년에 숙종이 즉위한 후 다시 국청사 건립을 재개하여 1097년에 완공되어 본격적으로 국청사에서 천태학을 강론하였다.

④ 초조대장경은 불교의 힘으로 거란을 격퇴하고자 불교의 교리를 정리하여 펼쳐낸 대장경으로 1011년(현종 2)에 시작하여 1087년(선종 4)에 완성하였다.

문 14. 밑줄 친 ‘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는 송악산 아래의 자하동에 학당을 마련하여 낙성(樂聖), 대중(大中), 성명(誠明), 경업(敬業), 조도(造道), 솔성(率性), 진덕(進德), 대화(大和), 대빙(待聘) 등의 9재(齋)로 나누고 각각 전문 강좌를 개설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과거 보려는 자제들은 반드시 먼저 그의 학도로 입학하여 공부하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① 9경과 3사를 중심으로 교육하였다.
②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③ 유교 사상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아 시무 28조의 개혁안을 올렸다.
④ '소학'과 '주자가례'를 중시하고 권문세족과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정답:1

자료는 최충의 9재학당에 대한 설명이다

① 9재학당에서는 9경과 3사를 중심으로 과거 시험을 위한 교육이 실시되었다

② 김부식에 대한 설명이다

③ 성종 때 최승로는 시무28조의 개혁안을 건의했다

④ 신진사대부에 대한 설명이다



고려 중엽 9재학당을 설립하여 사학의 부흥을 이끈 사람은 최충이다.

① 9재학당은 학문이 우수하고 재주가 많은 자 중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자를 모아 9경과 3사를 학습하게 하였다.

②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1145년(인종 23)에 펴낸 기전체 역사서이다. 김부식은 고려 중기 대표적인 문벌 귀족 중 한 명으로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③ 시무 28조를 올린 사람은 최승로이다.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려 성종 시기 유교적 통치체제 정비에 큰 기여를 하였다.

④ 『소학』과 『주자가례』를 중시하고 권문세족과 불교의 폐단을 비판한 세력은 신진사대부이다. 이들의 학맥은 16세기 사림으로 이어졌다.

문 15. 다음 설명과 관련된 사건으로 옳은 것은?
1975년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는 이곳 도서관에서 조선시대 도서가 보관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목록을 정리하여 그 존재를 알렸다. 그 후 1990년대 초 한국 정부가 반환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2011년에 ‘5년마다 갱신이 가능한 대여 방식’으로 반환되었다.
① 어재연이 광성보에서 결사 항전하였다.
②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일어났다.
③ 프랑스가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하였다.
④ 조선이 처음으로 서양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정답:3

2011년에 반환된 외규장각의궤에 대한 설명으로 완전한 반환이 아닌 영구대여 방식으로 반환되었다, 타계하신 박병선 박사는 외규장각 뿐만아니라 프랑스에 있었던 직지의 행방도 우리나라에 알리셨다.

③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침입으로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가 약탈당했다

① 신미양요 때 어재연장군이 광성진과 갑곳에서 미국을 상대로 분전을 벌였으며, 이때 빼앗긴 어재연장군의 수자기는 2007년에 반환되었다

②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④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을 맺어 최초로 서양국가와 통교하였다



『직지심체요절』은 병인양요 때 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③ 병인양요는 병인박해 당시 프랑스 선교사 처형을 구실로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하여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빠르게 강화읍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여 진격을 막을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철수하며 강화도 행궁과 외규장각에서 도서와 군기물자, 금은보화를 약탈하였다.

① 어재연이 광성보에서 결사 항전한 것은 1871년 신미양요 때의 일이다.

②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강화도에 침략하여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④ 조선이 처음으로 서양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1882년 조·미 수호 통상조약이다.

문 16.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전주화약 이후 조선 정부는 청·일 군대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② 조선 정부는 농민들의 요구에 대응하여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였다.
③ 청․일전쟁 발발 직후에도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집강소가 운영되었다.
④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후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의 농민군이 연합하였다.

정답:2

세도정치에 의한 삼정의 문란으로 임술농민 봉기(1862)가 일어나자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암행어사를 파견했고 삼정 이정청을 설치했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문제이다.

② 삼정이정청은 임술농민봉기에 대한 대응으로 설치한 관청이다.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① 전주화약 이후 청·일 군대의 철수를 요청하였으나 일본군은 철수를 거부하였다.

③ 청일전쟁이 발발한 것이 1894년 6월 23일(음)이고, 집강소가 설치된 것이 1894년 6월으로 일자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7월 이후에도 지방에서 집강소가 설치되는 등 계속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④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이에 대응하여 전라도 농민군(남접)과 충청도 농민군(북접)이 연합하여 다시 1894년 9월에 재봉기 하였다.

문 17. 1920년대 산미 증식 계획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춘궁 퇴치․자력갱생 등을 내세웠다.
② 쌀․잡곡에 대한 배급제도와 공출제도가 실시되었다.
③ 소작농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소작조정령을 발표하였다.
④ 공업화로 인한 일본의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실시하였다.

정답:4

④ 세계 1차대전 중 일본 국내가 공업화 되면서 일본 농촌의 미곡 생산력이 감소하였다 이에 일본은 식량공급 문제를 해결하고자 산미증식계획(1920~1934)을 실시하였다

① 1932년 실시된 농촌진흥운동에 대한 설명이다

② 중일전쟁(1937)이후 물적 자원 수탈이 강화되며 배급제도와 공출제도가 실시되었다

③ 소작조정령은 1932년에 시행되었다



④ 일본 내부의 급격한 공업화로 농촌 인구가 감소되고 반대로 도시 인구가 증가하자 급격한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일본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조선에서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수탈을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게 되었다.

① 일제는 1930년대 농민 운동이 활발해지고 식민 지배체제에 위협이 되자 농촌 진흥 운동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저항을 불식시키고자 하였다. 춘궁퇴치와 자력갱생 등을 내걸고 농민들의 부채 정리와 경제력 향상을 도모하였지만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②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광범위한 물적, 인적 수탈을 자행하였으며 1939년부터 식량배급과 미곡 공출제를 실시하였다.

③ 1932년 일제는 소작쟁의를 억제하기 위해서 조선소작조정령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소작쟁의는 더 빈번해졌고 일제는 1934년 조선농지령을 제정하였다.

문 18. 다음 법이 공포된 이후 나타난 일제의 지배 정책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제4조 정부는 전시에 국가 총동원 상 필요할 때에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제국 신민을 징용하여 총동원 업무에 종사하게 할 수 있다.
① 마을에 애국반을 편성하여 일상생활을 통제하였다.
② 일본식 성과 이름으로 고치는 창씨개명을 시행하였다.
③ 여성에게 작업복인 ‘몸뻬’라는 바지의 착용을 강요하였다.
④ 토지 현황 파악을 위해 전국적으로 토지 소유권을 조사하였다.

정답:4

자료는 1938년 발표된 국가 총동원법의 내용이다

④ 일제는 토지 현황을 파악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확립한다는 토지조사사업(1912~1918)를 실시하여 전국적으로 토지 소유권을 조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지주가 증가했으며 식민지 지주제가 확립되었고, 경작권, 입회권 개간권 등의 소작농의 권리를 부정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다



국가총동원령은 1938년 제정된 법령이다. 국가의 필요에 따라서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할 수 있는 광범위한 통제권과 동원권을 명시하였다.

① 1940년 10월 국민 총력 조선 연맹을 조직하고 그 말단 조직으로 10호 단위로 애국반을 구성하여 개개인을 참가시켰다. 조선인은 이를 통해 생활 전반을 통제 받고 식민지 지배 체제에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② 1939년 창씨개명을 실시하였다. 만약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교 입학과 공문서 발급이 금지되었고 식량배급 등에서도 제외 당했다.

③ 일본은 몸빼를 보급하여 1944년부터는 몸빼를 입지 않은 여성들의 버스, 전차 승차나 관공서 출입까지 금지하였다.

④ 1912~1918년에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설명이다.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일제는 토지세를 통해 재정을 확보하려고 하였으며 신고하지 않은 토지를 약탈하였다.

문 19. 다음 괄호 안에 들어갈 사항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2000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역사 유적 지구는 남산 지구, 월성 지구, 대릉원 지구, 황룡사 지구, 산성 지구로 세분된다. 이 중에 남산 지구에 해당하는 문화유산으로는 (      ) 등이 있다.
<보  기>
ㄱ.계림  ㄴ.나정(蘿井)  ㄷ.포석정
ㄹ.분황사  ㅁ.첨성대  ㅂ.배리 석불 입상
① ㄱ, ㄴ, ㄷ
② ㄱ, ㄹ, ㅁ
③ ㄴ, ㄷ, ㅂ
④ ㄹ, ㅁ, ㅂ

정답:3

㉡ 남산지구
㉢ 남산지구
㉥ 남산지구
㉠ 월성지구
㉣ 황룡사지구
㉤ 월성지구



경주역사유적은 2000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경주 역사유적은 총 5개 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총 52개의 문화재가 지정되어 있다.

남산 지구는 나정, 포석정, 칠불암 마애석불과 배리 석불입상 등이 포함되어 있다.

월성 지구는 월성과 계림, 임해전지, 첨성대 등이 속해있다.

대능원 지구는 고분군 분포 지역으로 금관과 천마도 등이 출토되었다.

황룡사지구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다.

산성지구는 명활산성이 있다.

ㄱ. 계림은 월성지구에 속해있다.
ㄹ. 분황사는 황룡사지구에 속해있다.
ㅁ. 첨성대는 월성지구에 속해있다.

문 20. (가)~(다) 전시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고려사' 식화지-
<보  기>
ㄱ. (가)-관품과 함께 인품도 고려되었다.
ㄴ. (나)-한외과가 소멸되었다.
ㄷ. (다)-승인과 지리업에게 별사전이 지급되었다.
ㄹ. (가)~(다)-경기 8현에 한하여 지급되었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ㄷ, ㄹ

정답:2

(가)시정 전시과
(나)개정 전시과
(다)경정 전시과

㉠ 시정 전시과는 관직의 높고 낮음과 함께 인품을 반영하였다

㉢ 경정 전시과에서는 지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승려들을 상대로 6등급으로 나뉜 별사전이 지급되었다

㉡ 한외과는 경정전시과 때 폐지되었다

㉣ 시정전시과와 개정전시과는 전국의 토지를 대상으로 지급되었으며, 전시과 제도가 붕괴되면서 지급된 녹과전이 경기 지방에 한하여 지급되었다



ㄱ. 시정전시과에서는 관품과 인품을 모두 고려하여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였다.

ㄷ. 별사전은 승리와 풍수지리업자에게 지급된 토지이며 사후 반납하여야 했다.

ㄴ. 한외과가 소멸된 것은 경정전시과 때이다.

ㄹ. 경기 8현의 토지를 지급한 것은 녹과전으로, 1271년(원종 12) 전시과의 붕괴로 생계가 어려운 관원들을 위해서 녹봉의 부족분을 보충하여 지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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