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 7일에 시행한 국가직 7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문 1】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한 설명 중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1893년 보은 집회는 교조신원의 수준을 뛰어 넘어 척왜양창의를 내세웠다.
② 동학의 중앙교단은 농민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③ 대원군을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④ 전라도 관찰사의 협조하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충주에 중앙기관으로 법소를 설치하고 각지에 도소를. 그 아래 포접을 정비하였고, 2차 농민전쟁에서 중앙교단인 북접과 남접이 합세하였다.
【문 2】 고려말 조선초의 법제와 관련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고려말, 정몽주가 대명률과 원의 지정조격을 참작하여 신률(新律)을 만들었다.
② 조선 태조 때의 「경제육전」은 우리 역사장 최초의 성문 통일 법전이다.
③ 「대명률」은 조선초기 형벌법의 보통법으로 사용되다가 「경국대전」 편찬과 함께 폐기되었다.
④ 「경국대전」은 우리 고유의 법을 성문화함으로써 외국법의 침투에 대해 방파제 역할을 했다.
경국대전 형전이 정비되었지만 내용이 소략하여 대명률에 의거하였다.
【문 3】 다음 기록과 관계있는 인물은?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한 다음, 김씨가 남방을 차지하고 대씨가 북방을 차지하고는 발해라 하였으나, 이것을 남북국이라 한다. 당연히 남북국을 다룬 역사책이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저 대씨가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어떤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이다. |
② 안정복
③ 유득공
④ 이긍익
사료는 유득공의 「발해고(1784)」에 수록된 발해 기사이다. 그는 실학자로 과거 만주를 차지한 발해사만을 다룬 역사서를 서술하였고,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문 4】 통일신라 집사부에 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왕권의 지배를 받은 행정부적 성격의 기구였다.
② 귀족들의 합의기구인 화백회의를 보완하는 기구였다.
③ 장관인 중시는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보다 중요시되는 경우가 있었다.
④ 17관등 가운데 제1관등인 이벌찬이 장관인 중시에 임명되었다.
집사부는 화백회의 및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집사부는 경덕왕 6년(747)에 시중으로 개칭되었다. 중시에 최초로 임명된 사람은 죽지였다. 중시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은 다른 중요 관부의 장관보다 낮았던 점(관등이 대아찬에서 이찬까지인 자로 임용되었다, 삼국사기 권 38), 집사부의 중요 임무가 기밀 사무의 관장이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중시는 귀족 전체의 통솔자보다 국왕의 행정적인 대변자였던 것 같다.
집사부는 경덕왕 6년(747)에 시중으로 개칭되었다. 중시에 최초로 임명된 사람은 죽지였다. 중시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은 다른 중요 관부의 장관보다 낮았던 점(관등이 대아찬에서 이찬까지인 자로 임용되었다, 삼국사기 권 38), 집사부의 중요 임무가 기밀 사무의 관장이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중시는 귀족 전체의 통솔자보다 국왕의 행정적인 대변자였던 것 같다.
【문 5】 조선초기의 대일(對日)외교에 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대마도 정벌은 왜구를 근절하고 통교체제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② 조선은 왜구를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시키기 위해 무역에 대한 제한 규정을 없앴다.
③ 조일외교는 중앙정부끼리의 적례관계교린과 대마도를 중심으로하는 기타세력과의 기미관계교린으로 정비되었다.
④ 조선은 대마도를 매개로 일본의 여러 통교자들을 통제하려는 정책을 수립했다.
대마도주와 체결한 계해약조(1443)에서 세견선과 세사미두, 그리고 3포에 거류할 왜인 수를 제한 하였다.
전근대한일관계사(한국방송통신대학) ― 일본․유구․여진․남만 등과 행한 교린관계가 같은 책봉국으로서 모두 대등하게 맺어진 것은 아니었다. 일본만 하더라도 일본국왕의 사절인가, 지방대․소세력의 사절인가에 따라 외교관계는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조선과 일본과의 교린체제는 크게 적례교린(敵禮交隣)과 기미교린(羈縻交隣)으로 나눌 수 있다. 적례교린은 적국항례(敵國抗禮), 즉 서로 필적할 만한 나라가 대등한 자격으로 교류한다는 뜻이다. 적례교린을 행한 것은 책봉을 받은 일본국왕과는 적례교린을 행하였다고 하지만 완전하게 동등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국서 가운데 통치자 호칭의 차이, 지속된 왜구에 두려움과 함께 차별적 인식, 사절에 대한 행례(行禮) 문제 등에서 그러하다. 즉 조선은 책봉체제 속에서 동아시아 질서를 세우고, 대일관계의 안정을 위해 표면적으로 적례교린을 행하였다. 막부장군의 사망․교체 때 사절을 보내 예를 표하는 우호관계상 적례교린이었다. 기미교린은 중국 한․송대에 행한 대흉노․거란정책과 비슷하다. 조선의 교린체제도 외이기미론에 바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입조하여 조선국왕에게 진상하고, 회례를 받는 형식을 취하는 등 상국의 규정을 지키도록 하였다. 일본 지방호족과는 조공적 의례, 즉 기미교린을 행하였다. 일본의 통교자들은 대부분 경제적 목적으로 도항하였지만 조선은 기미교린의 질서 속에서 외교의례와 조공무역을 하도록 하였다. 조선은 기미교린체제에 있는 일본 통교자들을 차츰 대마도주를 중심으로 통제해 나갔다.
전근대한일관계사(한국방송통신대학) ― 일본․유구․여진․남만 등과 행한 교린관계가 같은 책봉국으로서 모두 대등하게 맺어진 것은 아니었다. 일본만 하더라도 일본국왕의 사절인가, 지방대․소세력의 사절인가에 따라 외교관계는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조선과 일본과의 교린체제는 크게 적례교린(敵禮交隣)과 기미교린(羈縻交隣)으로 나눌 수 있다. 적례교린은 적국항례(敵國抗禮), 즉 서로 필적할 만한 나라가 대등한 자격으로 교류한다는 뜻이다. 적례교린을 행한 것은 책봉을 받은 일본국왕과는 적례교린을 행하였다고 하지만 완전하게 동등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국서 가운데 통치자 호칭의 차이, 지속된 왜구에 두려움과 함께 차별적 인식, 사절에 대한 행례(行禮) 문제 등에서 그러하다. 즉 조선은 책봉체제 속에서 동아시아 질서를 세우고, 대일관계의 안정을 위해 표면적으로 적례교린을 행하였다. 막부장군의 사망․교체 때 사절을 보내 예를 표하는 우호관계상 적례교린이었다. 기미교린은 중국 한․송대에 행한 대흉노․거란정책과 비슷하다. 조선의 교린체제도 외이기미론에 바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입조하여 조선국왕에게 진상하고, 회례를 받는 형식을 취하는 등 상국의 규정을 지키도록 하였다. 일본 지방호족과는 조공적 의례, 즉 기미교린을 행하였다. 일본의 통교자들은 대부분 경제적 목적으로 도항하였지만 조선은 기미교린의 질서 속에서 외교의례와 조공무역을 하도록 하였다. 조선은 기미교린체제에 있는 일본 통교자들을 차츰 대마도주를 중심으로 통제해 나갔다.
【문 6】 다음과 같은 주장이 제기된 때와 시기적으로 가장 가까운 역사상은?
“중국의 제도를 따르지 않을 수는 없지만 사방의 풍습이 각기 그 토성에 따르게되니 다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그 예악․시서의 가르침과 군신․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본받아 비루함을 고쳐야 되겠지만 그 밖의 거마․의복의 제도는 우리의 풍속대로 하여 사치함과 검소함을 알맞게 할 것이며 구태여 중국과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
② 12목의 설치
③ 서경천도운동
④ 성리학의 수용
사료는 「고려사절요」에 수록된 고려 성종 때 최승로가 올린 시무책 제11조이다. ①태조, ②성종, ③인종, ④충렬왕 시기이다.
【문 7】 고려시대의 가족제도와 여성의 지위에 대한 설명 중 가장 옳은 것은?
① 여성의 재가는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서얼에 대한 차별은 존재하였다.
② 혼인형태는 왕건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부다처제가 일반적이었다.
③ 딸을 제외한 자식들이 돌아가면서 부모의 제사를 받들었다.
④ 노비는 자녀들간에 균분상속하고 토지는 적장자가 단독으로 상속하였다.
고려시대 재산상속은 자녀간 균분상속이 일반적 학설이나 고려 전기 토지상속에서는 적장자 단독 상속설이 제기되어 있으며,① 서얼차별은 없었고, ② 일부일처제 원칙, ③ 윤행이라 하여 자녀가 돌아가며 제사를 맡았다.
서얼은 사족의 혈통을 받으면서도 모계가 정처가 아닌 첩이었기 때문에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된 존재였다. 서는 양첩의 자손을, 얼은 천첩의 자손을 뜻하는 것이다. 서얼차대가 관념적․법제적으로 강화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고려시대에 비첩 소생의 신분 귀속이 천자수모법에 따르게 됨으로써 차대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약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유학사상이 국가의 지도이념이 되고 사대부관료들에 의해 지배신분의 양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서얼에 대한 차대가 엄격해지게 되었다.
노비와 토지는 기본적 자녀 사이에 똑같이 상속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 민전 상속은 사적 토지소유여서 상속자와 피상속자 사이에 사사로이 결정되고 문계(文契)로 작성하였다. 그리고 자녀 사이에 균등하게 분배하는 것이 일반 관례였다. 다만 균분 원칙에 따라 나누더라도 차이가 생길 수 있으므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은 중자녀․서자녀에 대해 적자녀를 우선하고, 손아랫사람보다 손윗사람을 배려하여 배분하였다. 이것은 사유지 상속에 대한 보조 기능을 하는 법제였다. 다만 국가가 분급한 수조지는 원칙적으로 직역 봉사에 대한 대가여서, 민전 상속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 토지는 연립할 자손이 있으면 원칙적으로 대를 이어 배타적인 상속을 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 흔히 영업전이라 불렀다. 연립에서 우선 순위는 적자 - 적손 - 동모제(同母第) - 서손(庶孫) - 여손(女孫) 순서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수조지는 적장자가 단독 전수하였다.
서얼은 사족의 혈통을 받으면서도 모계가 정처가 아닌 첩이었기 때문에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된 존재였다. 서는 양첩의 자손을, 얼은 천첩의 자손을 뜻하는 것이다. 서얼차대가 관념적․법제적으로 강화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고려시대에 비첩 소생의 신분 귀속이 천자수모법에 따르게 됨으로써 차대되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약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유학사상이 국가의 지도이념이 되고 사대부관료들에 의해 지배신분의 양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서얼에 대한 차대가 엄격해지게 되었다.
노비와 토지는 기본적 자녀 사이에 똑같이 상속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 민전 상속은 사적 토지소유여서 상속자와 피상속자 사이에 사사로이 결정되고 문계(文契)로 작성하였다. 그리고 자녀 사이에 균등하게 분배하는 것이 일반 관례였다. 다만 균분 원칙에 따라 나누더라도 차이가 생길 수 있으므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은 중자녀․서자녀에 대해 적자녀를 우선하고, 손아랫사람보다 손윗사람을 배려하여 배분하였다. 이것은 사유지 상속에 대한 보조 기능을 하는 법제였다. 다만 국가가 분급한 수조지는 원칙적으로 직역 봉사에 대한 대가여서, 민전 상속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 토지는 연립할 자손이 있으면 원칙적으로 대를 이어 배타적인 상속을 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 흔히 영업전이라 불렀다. 연립에서 우선 순위는 적자 - 적손 - 동모제(同母第) - 서손(庶孫) - 여손(女孫) 순서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수조지는 적장자가 단독 전수하였다.
【문 8】 대한제국시기의 민중운동 가운데 하나인 활빈당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홍길동전」에서 이름을 딴 ‘가난한 사람을 살려내는 무리’라는 뜻을 지닌 의적이었다.
② 1900년 무렵 정부에 자신들이 요구하는 ‘대한사민논설 13조목’을 실천할 것을 천명하였다.
③ 반봉건․반침략 민족항쟁을 이념적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봉건사상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④ 영남지방에서 기의(起義)하여 충청도와 경기․강원 지방으로 파급되었다.
충청도 내포지방에서 일어나 경기․강원․충청 중부지방에서 영남․호남지방으로 파급되었다.
③ 한국사의 이해 - 활빈당은 이념적으로는 봉건사상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④ 한국근대사강의 - 활빈당은 이미 1886년경부터 소규모로 결성되어 일시적으로 활동한 예는 있으나,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에 들어와서이다. 그들은 단순한 화적행위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나날이 심화되어 가는 사회적 모순과 민족적 모순을 자각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기에 이르렀다. 또한 민란이나 농민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사회변혁 세력이 산 속으로 들어와 화적집단에 합류함으로써, 활빈당은 이념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것은 초보적이고 잠재해 있던 빈민층의 평등주의적 열망이 구체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1899년부터 충청남도 내포 주변지역(예산․홍성․보령․남포 등지)에서 출몰하기 시작해서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닿는 충청북도와 전라도 산간지역, 전라도의 평야지역과 경상도의 낙동강 하류지역에서 1900~1905년 사이에 주로 활동하였다.
③ 한국사의 이해 - 활빈당은 이념적으로는 봉건사상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④ 한국근대사강의 - 활빈당은 이미 1886년경부터 소규모로 결성되어 일시적으로 활동한 예는 있으나,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에 들어와서이다. 그들은 단순한 화적행위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나날이 심화되어 가는 사회적 모순과 민족적 모순을 자각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기에 이르렀다. 또한 민란이나 농민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사회변혁 세력이 산 속으로 들어와 화적집단에 합류함으로써, 활빈당은 이념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것은 초보적이고 잠재해 있던 빈민층의 평등주의적 열망이 구체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1899년부터 충청남도 내포 주변지역(예산․홍성․보령․남포 등지)에서 출몰하기 시작해서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닿는 충청북도와 전라도 산간지역, 전라도의 평야지역과 경상도의 낙동강 하류지역에서 1900~1905년 사이에 주로 활동하였다.
【문 9】 한민족의 성격과 동이문화권에 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한국인은 동이족의 주류로서 동호․예․맥․한 등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② 한국인의 조상은 한반도에서 청동기․민무늬토기를 사용하였던 주민들이 주류라 할 수 있다.
③ 언어상 알타이어를 쓰고 있었으며, 형질인류학상으로는 북몽골어종에 속하였다..
④ 동이문화권은 화하(華夏)문화권․남방문화권․북방문화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동이 문화권은 황하 중류의 화하문화권(華夏文化圈), 양자강 이남의 남방문화권(南方文化圈), 그리고 몽골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문화권(北方文化圈)과 그 특성을 달리하고 있다.
【문 10】 고려시대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설명 중 옳은 것은?
① 11세기에 고려의 독창적 기법인 상감법이 개발되어 자기에 활용되었다.
② 고려후기에 다포양식의 건물이 등장하여 조선시대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③ 고려후기의 서예는 굳세고 힘찬 구양순체가 유행했는데 이암이 대표적이었다.
④ 경기체가에는 주로 권문세족의 귀족적인 취향과 현실생활을 담은 작품들이 많았다.
① 12세기, ③조맹부체(송설체)유행, ④ 신진사대부의 문학이다.
국사편찬위원회대(윤용이) ― 순청자는 10세기 후반인 광종․성종년간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11세기에는 숙련을 거듭하여 12세기 전반에는 비색청자로서 완성되어 발전해 나간다. 상감청자는 12세기 후반인 의종년간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13․14세기에는 전성을 이루며 순청자를 대신하여 순청자에 대신하여 고려청자의 주류를 이루며 변천되어가다 조선시대 분청자의 모체를 이루게 된다.
국사편찬위원회대(윤용이) ― 순청자는 10세기 후반인 광종․성종년간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11세기에는 숙련을 거듭하여 12세기 전반에는 비색청자로서 완성되어 발전해 나간다. 상감청자는 12세기 후반인 의종년간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13․14세기에는 전성을 이루며 순청자를 대신하여 순청자에 대신하여 고려청자의 주류를 이루며 변천되어가다 조선시대 분청자의 모체를 이루게 된다.
【문 11】 무덤안에서 지석(誌石)이 부장 출토된 묘는?
① 천마총
② 무용총
③ 각저총
④ 무령왕릉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은 금관식과 지석(誌石)․석수(石獸)․토지매지권(土地買地券, 왕비지석의 후면으로 율령시행 입증)․청동제품․양(梁)나라 철전(오수전) 등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구조는 연화문의 벽돌로 만들어진 전축분(塼築墳)으로 당시 양나라를 비롯한 남조와 문화적 교류를 증명하고 있으며, 백제 금관의 모습과 아울러 현존 최고의 지석이 발견됨으로써 당대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문 12】 다음의 기록에 보이는 시대 상황과 가장 관계가 깊은 것은?
가을에 한 늙은 아전이 대궐에서 돌아와서 처와 자식에게 “요즘 이름있는 관리들이 모여서 하루종일 이야기를 하여도 나랏일에 대한 계획이나 백성을 위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다. 오로지 각 고을에서 보내오는 뇌물의 많고 적음과 좋고 나쁨만에 관심을 가지고, 어느 고을의 수령이 보낸 물건은 극히 정묘하고 또 어느 수령이 보낸 물건은 매우 넉넉하다고 말한다. 이름있는 관리들이 말하는 것이 이러하다면 지방에서 거둬들이는 것이 반드시 늘어날 것이다.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라고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려 마지 않았다. |
②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훈구세력이 대외무역과 방납 등을 통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였다.
③ 학연과 지연을 바탕으로 붕당이 생겨나 붕단간에 치열한 정권 다툼이 전개되었다.
④ 소수의 유력한 세도가문이 서로 연합하거나 인척관계로 얽혀 권력과 이권을 독점하였다.
사료는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심서」에 나타난 세도정치의 폐단에 대한 내용이다.
【문 13】 고려·조선시대 화폐유통에 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고려 숙종은 의천의 건의를 받아 처음으로 금속화폐를 주조하였다.
② 조선초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저화도 결제수단으로 규정되었다.
③ 상평통보의 보급은 조세의 금납화를 촉진하였다.
④ 동전이 활발하게 유통되기 이전에는 쌀과 포가 주요 결제 수단이었다.
고려 성종 때 철전인 건원중보를 주조하였다
【문 14】 조선 후기 사회상과 문학작품을 연결한 것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박씨전 - 축첩제도의 모순을 파악하고 현실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함.
② 토끼전 - 봉건군주의 향락과 탐욕을 신랄하게 비판함.
③ 두껍전 - 몰락사족과 평민부호층을 대비하여 조선후기 향촌사회의 세태를 풍자함.
④ 허생전 - 시장경제의 발달과 빈부격차의 심화, 새로운 삶의 유형을 묘사함.
「사씨남정기」의내용이고, 「박씨전」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극복한 여성을 다루었다.
국사편찬위원회(장효현) - 박씨전은 가공의 인물 박씨를 주인공으로 하여 실존 인물 이시백의 문인으로 설정한 후, 박씨가 탁월한 능력으로써 병자호란의 치욕을 설욕하는 내용으로 엮어져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장효현) - 박씨전은 가공의 인물 박씨를 주인공으로 하여 실존 인물 이시백의 문인으로 설정한 후, 박씨가 탁월한 능력으로써 병자호란의 치욕을 설욕하는 내용으로 엮어져 있다.
【문 15】 1940~1945년 국내외 독립운동의 상황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고 미군과의 합작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② 국내에서는 일제 전시수탈에 저항하면서 징병, 징용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③ 중국 연안을 중심으로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조선독립동맹을 조직하였다.
④ 연해주 지역에서 한인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부대들이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일제와 만주국 군대의 토벌작전으로 시베리아로 북상하여 국내진공작전은 없었다.
【문 16】 노비 신분에 대한 설명 중 가장 타당하지 않은 것은?
① 고조선의 8조법금에서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고 이를 면하고자 하면 50만의 돈을 내야 한다는 조항은 노비의 소유와 매매의 가능성을 말해준다.
② 통일신라의 재상가에 노동(奴僮)이 3천명이나 된다는 기록은 귀족의 사회경제적 지배가 크게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③ 고려초의 노비안검법의 실시와 조선초의 노비변정도감의 설치는 도망간 노비를 조사하여 주인에게 돌려주는 정책에 의한 것이다.
④ 1801년 내시노비(內寺奴婢)가 혁파되고, 1894년 공사노비제가 폐지되어 노비제의 역사가 종료되었다.
고려 광종때의 노비안검법과 조선 초의 노비변정도감을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를 양인으로 환원시키기 위함이다. 도망간 노비를 조사하는 것은 노비추쇄법이다
【문 17】 조선시대 양전사업에 대한 설명 중 옳은 것은?
① 조선시대의 양전은 20년마다 한 번씩 실시되었다.
② 토지의 경계를 확인하고 세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양전을 실시하였다.
③ 토지대장인 양안에는 토지의 소유자, 작인, 납세자가 나란히 기재되었다.
④ 토지면적의 단위는 경무법(頃畝法)에 의거하였다.
② 토지 결총, 토자 소유자와 경영자, 토지 등급 등 기록, ③ 소유자만 기록하는 것이 관례이나 경작인을 기재한 경우도 있었고, ④ 경무법은 고구려 제도이고 조선은 신라 이래의 결부법을 채택하였다.
7차고교 교사용지도서 ― 경국대전에는 모든 토지를 6등급으로 나누어 정전, 속전, 강등전, 강속전, 가경전, 화전으로 구분하여 20년마다 한 번씩 양전을 실시, 그 결과를 양안에 기록하며, 양전을 할 때는 균전사(均田使)를 파견하여 이를 감독하고, 수령․실무자의 위법사례를 적발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인력․경비 등이 막대하게 소요되는 대사업이라 규정대로는 실시하지 못하여 수십 년 혹은 백 년이 지난 뒤에 실시하기도 하여, 고려 말인 1391년(공양왕 3년) 전제개혁 때와 조선의 태종․세종 때에 전국적인 양전이 실시되었고, 성종 때 하삼도에 부분적으로 실시한 것과 임진왜란 이후 황폐화된 국토를 정리하기 위하여 지역별로 차례로 시행된 일이 있다.
뿌리깊은 한국사(김돈, 서울산업대 교수) - 양전 자체가 본래 대규모 사업으로 엄청난 인력과 비용이 들고, 이와 더불어 일반 농민의 피해가 크고, 양반 토호 등 대토지 소유자들의 이해관계에 얽혀 수십 년에서 100년 정도가 지나야 다시 시행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것도 전국적으로 한꺼번에 하지 못하고 특별히 문제가 있는 지방만 하는 게 상례였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영조대 이후 조선 말기의 양전 이전까지는 전정의 문란이 심한지역에서만 수시로 미봉적인 양전이 실시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농지의 경계, 소유권분쟁이 일어나는 등 토지문제가 심각하여지고 --------- 대대적인 양전계획을 세웠다.
7차고교 교사용지도서 ― 경국대전에는 모든 토지를 6등급으로 나누어 정전, 속전, 강등전, 강속전, 가경전, 화전으로 구분하여 20년마다 한 번씩 양전을 실시, 그 결과를 양안에 기록하며, 양전을 할 때는 균전사(均田使)를 파견하여 이를 감독하고, 수령․실무자의 위법사례를 적발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인력․경비 등이 막대하게 소요되는 대사업이라 규정대로는 실시하지 못하여 수십 년 혹은 백 년이 지난 뒤에 실시하기도 하여, 고려 말인 1391년(공양왕 3년) 전제개혁 때와 조선의 태종․세종 때에 전국적인 양전이 실시되었고, 성종 때 하삼도에 부분적으로 실시한 것과 임진왜란 이후 황폐화된 국토를 정리하기 위하여 지역별로 차례로 시행된 일이 있다.
뿌리깊은 한국사(김돈, 서울산업대 교수) - 양전 자체가 본래 대규모 사업으로 엄청난 인력과 비용이 들고, 이와 더불어 일반 농민의 피해가 크고, 양반 토호 등 대토지 소유자들의 이해관계에 얽혀 수십 년에서 100년 정도가 지나야 다시 시행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것도 전국적으로 한꺼번에 하지 못하고 특별히 문제가 있는 지방만 하는 게 상례였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영조대 이후 조선 말기의 양전 이전까지는 전정의 문란이 심한지역에서만 수시로 미봉적인 양전이 실시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농지의 경계, 소유권분쟁이 일어나는 등 토지문제가 심각하여지고 --------- 대대적인 양전계획을 세웠다.
【문 18】 고려시대의 신분제도의 대한 설명 중 옳은 것으로만 묶은 것은?
㉠ 양천교혼일 경우 천자수모법의 원칙에 따라 어머니쪽의 신분에 귀속되었다. ㉡ 노비들의 항쟁 결과 후기에는 신분제가 동요하여 노비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 ㉢ 말기에는 첨설직을 받아 지위를 상승시킨 유향품관이 널리 존재하였다. ㉣ 양인은 정호와 백정으로 나뉘어 국역 부담에 차등이 있었다. |
② ㉠㉢
③ ㉡㉣
④ ㉢㉣
㉠ 일천즉천법 적용, ㉡ 조선 후기의 상황이다.
【문 19】 식민지시기에 일어났던 형평운동에 관한 설명 중 가장 적절한 것은?
① 1910년대 총독부가 도량형 제도를 개혁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실시한 사회운동이다.
② 1920년대 여성단체가 남녀간의 사회적 차별을 폐지할 목적으로 일으킨 여성해방 운동이다.
③ 1920년대 경남 진주를 중심으로 백정들이 일으킨 신분차별을 타파하기 위한 사회 운동이다.
④ 1930년 청년학생들이 농민을 대상으로 전개한 사회계몽활동의 하나이다.
1923년 진주에서 백정해방운동으로 조선형평사가 창립되고 형평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일제의 압력과 해소론으로 1937년 5월 해체되었다.
【문 20】 1950년대에 실시된 선거에 대한 설명 중 옳은 것은?
① 1950년 5․30 선거에서는 민국당과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의 당선이 두드러졌다.
② 1952년 8․5 정부통령선거에서는 대통령선거에서 조봉암후보가 2위를 하였다.
③ 1956년 5․15 정부통령선거에서 신익희대통령후보가 서거하자 민주당은 조봉암 후보를 지지하였다.
④ 사사오입개헌으로 참의원이 신설되었으나, 이승만 정부에서는 민의원선거만 실시하였다.
① 여당․야당에 참패하고 무소속이 대거 당선, ③ 민주당의 보수연합세력은 조봉암을 견제, ④ 발췌개헌에서 참의원․민의원의 양원제가 채택 되었다.
①
한국현대사강의 ― 이승만 정권에게 정치위기도 도래했다. 이미 국회프락치사건을 통하여 남부협상세력을 제거시킨 바 있는 이승만이었지만, 그는 민주국민당을 비롯한 국회내의 반이승만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내각제 개헌 요구와 예산안 심의 거부로 이승만에게 압력을 가해왔고, 이에 대해 이승만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연기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으로 50년 5․30선거를 치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거 결과는 이승만의 패배와 총의석수의 2/3나 차지하게 된 무소속 온건중간파의 대승이었다. 요컨데 경제적 정치적 위기로 인하여 이승만 정권은 위기 타파의 돌파구를 어디에서든 찾아내야 하는 상황에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사의 이해 ― 이승만은 권력기반을 강화해 가면서 단정수립 과정에서 자신과 이해를 함께 했던 한민당 세력과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민국당)은 1950년 1월 국회에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여 이승만의 권력을 견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1950 5월 30일 제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국당 중진 대부분 낙선함으로써 이승만의 권력기반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③
우리 한국사(김당택, 전남대 역사학과 교수) - 민주당은 신익희에게 추모표를 던지라는 기이한 선거운동을 함으로써 조봉암을 방해했다. 그들 역시 보수세력으로 진보를 표방한 인물들에게는 자유당 못지 않게 냉담했던 것이다.
①
한국현대사강의 ― 이승만 정권에게 정치위기도 도래했다. 이미 국회프락치사건을 통하여 남부협상세력을 제거시킨 바 있는 이승만이었지만, 그는 민주국민당을 비롯한 국회내의 반이승만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내각제 개헌 요구와 예산안 심의 거부로 이승만에게 압력을 가해왔고, 이에 대해 이승만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연기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으로 50년 5․30선거를 치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거 결과는 이승만의 패배와 총의석수의 2/3나 차지하게 된 무소속 온건중간파의 대승이었다. 요컨데 경제적 정치적 위기로 인하여 이승만 정권은 위기 타파의 돌파구를 어디에서든 찾아내야 하는 상황에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사의 이해 ― 이승만은 권력기반을 강화해 가면서 단정수립 과정에서 자신과 이해를 함께 했던 한민당 세력과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민국당)은 1950년 1월 국회에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여 이승만의 권력을 견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1950 5월 30일 제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국당 중진 대부분 낙선함으로써 이승만의 권력기반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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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사(김당택, 전남대 역사학과 교수) - 민주당은 신익희에게 추모표를 던지라는 기이한 선거운동을 함으로써 조봉암을 방해했다. 그들 역시 보수세력으로 진보를 표방한 인물들에게는 자유당 못지 않게 냉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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