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 11일에 시행한 국가직 7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법전이 편찬된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된 것은?
①경국대전-대전통편-속대전-대전회통
②조선경국전-경국대전-경제육전-대전통편
③경제육전-경국대전-대전통편-속대전
④경국대전-속대전-대전통편-대전회통
☞정답 : ④
조선경국전(태조) → 경제육전(속육전, 태조~태종) → 경국대전(세조~성종) → 속대전(영조) → 대전통편(정조) → 대전회통(고종) → 육전 조례(고종)
조선경국전(태조) → 경제육전(속육전, 태조~태종) → 경국대전(세조~성종) → 속대전(영조) → 대전통편(정조) → 대전회통(고종) → 육전 조례(고종)
■정답 : ④
해설 :
① 성종-정조-영조-고종,
② 태조-성종-태조-정조,
③ 태조-성종-정조-영조,
④ 성종-영조-정조-고종
해설 :
① 성종-정조-영조-고종,
② 태조-성종-태조-정조,
③ 태조-성종-정조-영조,
④ 성종-영조-정조-고종
2. 각 인물과 그 서적이 바르게 연결된 것은?
①박은식-한국독립운동지혈사
②문일평-조선사회경제사
③백남운-조선사회사독본
④안재홍-조선문명사
☞정답 :①
2) 문일평- 한미오십년사 / 조선사회경제사는 백남운
3) 조선사회사독본-이청원, 일제시기 사회경제사학자, 백남운과 견해를 달리한 학자. 고려를 노예제로 봄
4) 조선문명사는 안확. 안확은 이 책을 통해 우리 역사에서의 자치제에 주목함.
2) 문일평- 한미오십년사 / 조선사회경제사는 백남운
3) 조선사회사독본-이청원, 일제시기 사회경제사학자, 백남운과 견해를 달리한 학자. 고려를 노예제로 봄
4) 조선문명사는 안확. 안확은 이 책을 통해 우리 역사에서의 자치제에 주목함.
■정답 : ①
해설 :
②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
③ 이청원의 「조선사회사독본」,
④ 안확의 「조선문명사」이다.
해설 :
②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
③ 이청원의 「조선사회사독본」,
④ 안확의 「조선문명사」이다.
3. 명성황후 시해후 등장한 내각에서 시행한 조치는?
①홍범14조 제정
②과부의 재가허용
③단발령과 양복착용
④의정부 제도의 복구
☞정답 :③ 민비 시해후 정권을 장악한 일본은 다시 김홍집을 앞세워 갑오개혁을 마무리 하고자 하였다. 이를 을미개혁이라고 한다.
1)3)은 민비시해 전단계,
4) 대한제국의 광무개혁단계
1)3)은 민비시해 전단계,
4) 대한제국의 광무개혁단계
■정답 : ③
해설 : 문제는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을 묻고 있는데 ①·② 갑오개혁의 내용, ④ 광무개혁의 내용이다.
해설 : 문제는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을 묻고 있는데 ①·② 갑오개혁의 내용, ④ 광무개혁의 내용이다.
4. 후삼국 시대에서 고려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의 순서로 옳은 것은?
ㄱ.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추대되어 고려를 세웠다. ㄴ. 고려와 후백제의 군사적 균형이 고려로 기운 것은 고창전투부터이다. ㄷ. 견훤은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살해했다. ㄹ.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였다. |
② ㄱ-ㄷ-ㄴ-ㄹ
③ ㄱ-ㄷ-ㄹ-ㄴ
④ ㄷ-ㄱ-ㄴ-ㄹ
☞정답 : ②
ㄱ 왕건의 고려 건국 918년
ㄷ 견훤의 경애왕 살해 - 927년
ㄴ 고창전투 930년
ㄹ 신라의 항복 935년
ㄱ 왕건의 고려 건국 918년
ㄷ 견훤의 경애왕 살해 - 927년
ㄴ 고창전투 930년
ㄹ 신라의 항복 935년
■정답 : ②
해설 :
ㄱ. 918년,
ㄴ. 930년,
ㄷ. 927년,
ㄹ. 935년의 역사적 사실이다.
해설 :
ㄱ. 918년,
ㄴ. 930년,
ㄷ. 927년,
ㄹ. 935년의 역사적 사실이다.
5. 후삼국 시대의 일로 옳은 것을 고르라.
ㄱ. 후삼국시기에 유학 지식인들이 선종을 이해하고 포용하여 유불 통합을 시도하였다. ㄴ. 견훤은 골품제에서 벗어나 광평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였다. ㄷ. 궁예는 국호를 대동방국을 뜻하는 마진으로 정하면서 수도를 송악으로 하였다. ㄹ. 왕건은 궁예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계승을 표방, 국호를 고려로 하였다. |
② ㄴ, ㄹ
③ ㄷ, ㄹ
④ ㄱ, ㄴ
궁예는 영토가 확장되고 국가기반이 다져지자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태봉으로 바꾸고,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였다.
궁예는 국정을 총괄하는 광평성을 비롯한 여러 관서를 설치하고 9관등제를 실시하였다.
궁예는 국정을 총괄하는 광평성을 비롯한 여러 관서를 설치하고 9관등제를 실시하였다.
☞정답 : ①
광평성은 궁예가 설치한 기구 - 마진 또한 궁예가 표방한 국호
광평성은 궁예가 설치한 기구 - 마진 또한 궁예가 표방한 국호
■정답 : ①
해설 :
ㄱ. 최치원 등 유학자들이 사상의 복합화 시도,
ㄴ. 견훤이 아니라 궁예이고,
ㄷ. 송악이 아니라 철원이고,
ㄹ. 고구려의 후계자 뜻으로 고려라 하였다.
해설 :
ㄱ. 최치원 등 유학자들이 사상의 복합화 시도,
ㄴ. 견훤이 아니라 궁예이고,
ㄷ. 송악이 아니라 철원이고,
ㄹ. 고구려의 후계자 뜻으로 고려라 하였다.
6. 조선시대 백과사전적 저술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
①이수광의 지봉유설은 여러 차례에 거쳐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견문을 토대로 저술하여 우리나라에 관한 것은 물론 중국, 일본, 유럽의 내용까지 소개하고 있다.
②이익의 성호사설은 천지, 만물, 인사, 경사, 시문의 5개 분야에 걸쳐 설명한 것이다.
③오주연문장전산고는 이규경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역사, 천문, 지리, 의학, 농업, 광업, 화폐에 관한 항목들을 변증설이라는 형식을 취하여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해설하고 있다.
④동국문헌비고는 홍봉한에 의해 편찬되어 중국의 역사, 풍속, 제도 등을 소개하였다.
⑻ 백과사전의 편찬
① 조선 후기에는 실학이 발달하고 문화 인식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백과사전류의 저서가 많이 편찬되었다.
② 이 방면의 효시가 된 책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며, 그 뒤를 이어 18∼19세기에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이 나왔다.
③ 또한 영․정조 때는 국가적 사업으로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되었다.
④ 이 책은 우리나라의 역대 문물을 정리한 한국학 백과사전으로서 가치가 있다.
① 조선 후기에는 실학이 발달하고 문화 인식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백과사전류의 저서가 많이 편찬되었다.
② 이 방면의 효시가 된 책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며, 그 뒤를 이어 18∼19세기에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이 나왔다.
③ 또한 영․정조 때는 국가적 사업으로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되었다.
④ 이 책은 우리나라의 역대 문물을 정리한 한국학 백과사전으로서 가치가 있다.
☞정답 : ④
동국문헌비고는 중국의 문헌통고의 예에 따라 조선의 문물제도를 분류 정리한 백과사전의 성격을 지닌 것.
동국문헌비고는 중국의 문헌통고의 예에 따라 조선의 문물제도를 분류 정리한 백과사전의 성격을 지닌 것.
■정답 : ④
해설 : ④ 우리나라의 정치·경제·문화·지리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국학 백과사전이다.
해설 : ④ 우리나라의 정치·경제·문화·지리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국학 백과사전이다.
7. 신진사대부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대부분 신분적으로 향리, 경제적으로는 중소 지주출신이었다.
②신진사대부는 음서제도를 통해 주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③통일신라 말기에 활동한 호족처럼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④고려 말 신흥무인세력과 결탁하여 새로운 왕조개창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의 충돌 : 신진사대부들은 주로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하였다.
☞정답 : ② 신진사대부는 주로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정답 : ②
해설 : ② 음서는 권문세족들이 선호하였고, 신진사대부들은 과거·군공 등 본인의 능력으로 진출하였다.
해설 : ② 음서는 권문세족들이 선호하였고, 신진사대부들은 과거·군공 등 본인의 능력으로 진출하였다.
8. 정조가 1789년에 지은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에 나타난 그의 정치관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재상권의 강화
②왕도정치의 부정
③붕당정치의 회복
④군주권의 강화
실질적으로는 정조의 정치관이 준론탕평과 같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시시비비를 엄격히 가리는 것과 초계문신제를 시행한 것을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재위 21년째인 1797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서 백성을 만천에 비유하고, 그 위에 하나씩 담겨 비치는 명월을 ‘태극이요, 군주인 나’라고 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닿는 지공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라는 것을 정리해 보였다.
· 정조의 왕권강화
① 궁극적으로 붕당을 없애고자 했던 정조는 각 붕당의 입장을 떠나 의리와 명분에 합치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중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② 또한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③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재위 21년째인 1797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서 백성을 만천에 비유하고, 그 위에 하나씩 담겨 비치는 명월을 ‘태극이요, 군주인 나’라고 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닿는 지공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라는 것을 정리해 보였다.
· 정조의 왕권강화
① 궁극적으로 붕당을 없애고자 했던 정조는 각 붕당의 입장을 떠나 의리와 명분에 합치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중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② 또한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③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정답 : ④
정조가 만년에 지은 이 글의 의미는 공중에 뜬 밝은 달이 지상의 모든 시내를 비추듯, 태극이라는 정점에 선 자신의 정치가 모든 백성들에게 고루 퍼져 나간다는 것이다. 즉 정조는 국왕이라는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학계와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백성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대동사회를 이루고자 하였다.
정조가 만년에 지은 이 글의 의미는 공중에 뜬 밝은 달이 지상의 모든 시내를 비추듯, 태극이라는 정점에 선 자신의 정치가 모든 백성들에게 고루 퍼져 나간다는 것이다. 즉 정조는 국왕이라는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학계와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백성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대동사회를 이루고자 하였다.
■정답 : ④
해설 : ④ 정조는 초월적 군주로 군림해 스승으로 신하를 가르치며(수많은 강을 비추는 달과 같은 임금), 정치운영의 명분은 국왕이 결정한다는 군주권 강화를 시도하였다.
해설 : ④ 정조는 초월적 군주로 군림해 스승으로 신하를 가르치며(수많은 강을 비추는 달과 같은 임금), 정치운영의 명분은 국왕이 결정한다는 군주권 강화를 시도하였다.
9. 다음 고려시대 기구 중에서 그 연결이 틀린 것은?
①어사대-관리에 대한 감찰, 탄핵기구였다.
②삼사-고려의 삼사는 간쟁, 언론기관이었다.
③중방-상장군과 대장군의 최고 군사회의 기구였다.
④추부 - 왕명출납과 군사기밀을 담당하였다.
삼사 : 곡식과 화폐의 출납만을 담당
고려는 상서성의 호조와 삼사가 재정의 업무를 분담하는 독특한 형태임.
조선의 삼사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으로 언론 기구로 서경의 권한이 있음.
고려는 상서성의 호조와 삼사가 재정의 업무를 분담하는 독특한 형태임.
조선의 삼사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으로 언론 기구로 서경의 권한이 있음.
☞정답 : ②
고려 삼사는 곡식과 화폐의 출납을 담당하는 기구, 즉 재정관련기구임
고려 삼사는 곡식과 화폐의 출납을 담당하는 기구, 즉 재정관련기구임
■정답 : ②
해설 : ② 고려시대의 삼사는 재정부서로 전곡의 출납·회계를 맡았고, 조선시대의 삼사가 간쟁·언론·감찰 등을 담당하였다.
해설 : ② 고려시대의 삼사는 재정부서로 전곡의 출납·회계를 맡았고, 조선시대의 삼사가 간쟁·언론·감찰 등을 담당하였다.
10. 1972년에 있었던 8.3조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국가방위를 위한 비상사태의 선포였다
②사채를 동결시킨 긴급명령으로 주로 대기업이 혜택을 받았다
③외국인 투자기업에서 노동운동을 통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④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한 새로운 외자관리조치였다
1950년 4월 3일 농지 개혁 실시
1953년 2월 15일 제1차 화폐 개혁
1962년 6월 10일 제2차 화폐 개혁
1962~1966년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천
1965년 6월 27일 한․일 협정 조인
1967~1971년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천
1970년 7월 7일 경부 고속 국도 개통
1972~1976년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천
1972년 8월 3일 경제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 명령(8․3 기업 사채 동결 조치)
1973년 10월 6일 제1차 석유 파동(아랍산유 6개국 원유가 인상)
1977~1981년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천
1977년 12월 22일 수출 100억 달러 달성
1979년 6월 28일 제2차 석유 파동(석유 수출 기구 원유가 평균 59% 인상)
1985년 9월 25일 농축산물 수입 개방 반대 시위
1993년 8월 12일 금융 실명제 실시
1993년 12월 9일 쌀 개방 관련 담화
1995년 1월 1일 세계 무역 기구(WTO) 체제 출범
1995년 10월 28일 수출 1000억 달러 돌파
1996년 10월 11일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회원국 가입
1997년 1월 23일 한보 철강 부도, 이후 대기업들의 연쇄 부도
1997년 11월 21일 국제 통화 기금(IMF)에 구제 금융 공식 요청
2001년 8월 23일 국제 통화 기금의 관리 체제에서 탈피(외환 위기 극복)
2001년 11월 14일 세계 무역 기구(WTO) 뉴라운드 출범
1953년 2월 15일 제1차 화폐 개혁
1962년 6월 10일 제2차 화폐 개혁
1962~1966년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천
1965년 6월 27일 한․일 협정 조인
1967~1971년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천
1970년 7월 7일 경부 고속 국도 개통
1972~1976년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천
1972년 8월 3일 경제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 명령(8․3 기업 사채 동결 조치)
1973년 10월 6일 제1차 석유 파동(아랍산유 6개국 원유가 인상)
1977~1981년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천
1977년 12월 22일 수출 100억 달러 달성
1979년 6월 28일 제2차 석유 파동(석유 수출 기구 원유가 평균 59% 인상)
1985년 9월 25일 농축산물 수입 개방 반대 시위
1993년 8월 12일 금융 실명제 실시
1993년 12월 9일 쌀 개방 관련 담화
1995년 1월 1일 세계 무역 기구(WTO) 체제 출범
1995년 10월 28일 수출 1000억 달러 돌파
1996년 10월 11일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회원국 가입
1997년 1월 23일 한보 철강 부도, 이후 대기업들의 연쇄 부도
1997년 11월 21일 국제 통화 기금(IMF)에 구제 금융 공식 요청
2001년 8월 23일 국제 통화 기금의 관리 체제에서 탈피(외환 위기 극복)
2001년 11월 14일 세계 무역 기구(WTO) 뉴라운드 출범
■정답 : ②
해설 : ②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위한 긴급명령으로 1972년 8월 3일부터 1981년 7월 20일까지 집행된 조치로 경제 부문의 유신쿠데타로 독점대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하여 중산층과 서민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해설 : ②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위한 긴급명령으로 1972년 8월 3일부터 1981년 7월 20일까지 집행된 조치로 경제 부문의 유신쿠데타로 독점대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하여 중산층과 서민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1. 한국의 신석기 문화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신석기 시대의 토기는 빗살무늬토기가 대표적이다
②신석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지는 굴포리, 석장리, 전곡리, 미사리 등이다
③신석기 시대의 주거유적은 대부분 야산에 위치하였으며, 초기부터 농경과 목축을 위주로 생활하였다
④신석기 시대는 석기제작기술의 발달로 반달돌칼이 널리 사용되었다.
☞정답 : ①
2) 웅기 굴포리 공주 석장리 연천 전곡리 등은 구석기시기 유물이 발견된 지역이며. 하남 미사리는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된 신석기시기의 유물이다.
2) 웅기 굴포리 공주 석장리 연천 전곡리 등은 구석기시기 유물이 발견된 지역이며. 하남 미사리는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된 신석기시기의 유물이다.
■정답 : ①
해설 : ② 굴포리·석장리·전곡리 등은 구석기 시대의 유적지이고, ③ 신석기 시대의 거주지는 강가·바닷가 등의 수변생활, ④ 반달돌칼은 신석기 시대 말기에 나타나 청동기 시대에 와서 널리 사용되었다.
해설 : ② 굴포리·석장리·전곡리 등은 구석기 시대의 유적지이고, ③ 신석기 시대의 거주지는 강가·바닷가 등의 수변생활, ④ 반달돌칼은 신석기 시대 말기에 나타나 청동기 시대에 와서 널리 사용되었다.
12. 다음 비문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사항은?
광개토대왕비 중원고구려비 단양적성비 진흥왕순수비 |
②정복활동 내용
③중앙집권화 정책
④해상무역활동
① 호태왕비라고도 하며 414년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과 업적을 기념하는 것이다.
② 423년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충주시에 있으며 한반도 지역의 영토 확장 사업을 기록한 비석이다.
④ 신라 진흥왕이 확장한 영토를 직접 돌아보고 세운 비석으로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등에 있다.
② 423년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충주시에 있으며 한반도 지역의 영토 확장 사업을 기록한 비석이다.
④ 신라 진흥왕이 확장한 영토를 직접 돌아보고 세운 비석으로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등에 있다.
☞정답 : 2
광개토대왕비와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 영토확장과정에서, 단양적성비와 진흥왕순수비는 신라 진흥왕의 영토확장 과정에서 세워진 것이다.
■정답 : ②
해설 : ② <보기>의 비문들은 정복군주인 광개토대왕·장수왕·진흥왕 등의 척경비로 정복 활동을 수록하고 있다.
13. 다음의 인물과 관련된 내용은 어느 시대를 전후한 것인가?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
②중일전쟁
③만주사변 직후 전승식
④태평양전쟁
◆ 한인 애국단의 의거
① 상하이에서의 국민 대표 회의 이래 민족 운동계의 분열과 대립은 점차 심화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항일 독립 운동의 기지로 자리잡고 있던 만주가 일제에 점령되자 우리 민족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와 같은 난국을 타개하고 우리 민족의 사기를 높일 획기적 방안이 있어야 함을 절감하였다.
② 이에 임시정부의 중심 인물인 김구는 강력한 항일 의거 단체인 한인 애국단을 결성하여 한국인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주고, 일제에게는 공포감을 조성하며 전 세계를 경악시킬 거사를 계획하였다.
③ 그 첫 번째 거사가 이봉창에 의한 일본 국왕 폭살 기도 사건이었다(1932. 1). 김구의 지령을 받은 이봉창은 단신으로 일본 도쿄에 가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본 국왕이 탄 마차를 향해 일본 왕궁 부근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국왕 폭살은 실패하였다. 이 의거는 대륙 침략에 나선 일제에게 한민족의 항일 의지를 보여 준 것이며 일본에게는 경종을 울려준 것이었다.
☞ 상하이 사변의 계기를 제공한다.
④ 일본 국왕 폭살에 실패한 한인 애국단은 두 번째 거사를 준비하였다.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상하이 점령에 성공한 일본군이 이곳 훙커우 공원에서 전승 축하식을 거행하자 김구는 윤봉길을 보내어 식장을 폭파하게 하였다.
⑤ 식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윤봉길은 단상 위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고위 장성과 고관들을 살상하였다. 이 의거는 국내외에 큰 반응을 일으켰으며 우리 민족의 의기를 드높였다. 특히 우리 독립 운동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중국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 독립 운동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 장제스정부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된다.1931년 만보산 사건으로 악화된 중국과 조선인 사이의 갈등이 완화된다.
※상하이 사변
상하이의 중국 신문들이 일제히 이봉창의 의거를 보도하면서 “일본 국왕이 불행히도 명중되지 않았다”(日皇不幸不中)라고 표현하자, 이에 분격한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해 상하이 사변이 일어났다.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의 1억 인구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내었다”고 감탄하면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지원을 강화하였다.
① 상하이에서의 국민 대표 회의 이래 민족 운동계의 분열과 대립은 점차 심화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항일 독립 운동의 기지로 자리잡고 있던 만주가 일제에 점령되자 우리 민족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와 같은 난국을 타개하고 우리 민족의 사기를 높일 획기적 방안이 있어야 함을 절감하였다.
② 이에 임시정부의 중심 인물인 김구는 강력한 항일 의거 단체인 한인 애국단을 결성하여 한국인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주고, 일제에게는 공포감을 조성하며 전 세계를 경악시킬 거사를 계획하였다.
③ 그 첫 번째 거사가 이봉창에 의한 일본 국왕 폭살 기도 사건이었다(1932. 1). 김구의 지령을 받은 이봉창은 단신으로 일본 도쿄에 가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본 국왕이 탄 마차를 향해 일본 왕궁 부근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국왕 폭살은 실패하였다. 이 의거는 대륙 침략에 나선 일제에게 한민족의 항일 의지를 보여 준 것이며 일본에게는 경종을 울려준 것이었다.
☞ 상하이 사변의 계기를 제공한다.
④ 일본 국왕 폭살에 실패한 한인 애국단은 두 번째 거사를 준비하였다.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상하이 점령에 성공한 일본군이 이곳 훙커우 공원에서 전승 축하식을 거행하자 김구는 윤봉길을 보내어 식장을 폭파하게 하였다.
⑤ 식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윤봉길은 단상 위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고위 장성과 고관들을 살상하였다. 이 의거는 국내외에 큰 반응을 일으켰으며 우리 민족의 의기를 드높였다. 특히 우리 독립 운동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중국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 독립 운동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 장제스정부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된다.1931년 만보산 사건으로 악화된 중국과 조선인 사이의 갈등이 완화된다.
※상하이 사변
상하이의 중국 신문들이 일제히 이봉창의 의거를 보도하면서 “일본 국왕이 불행히도 명중되지 않았다”(日皇不幸不中)라고 표현하자, 이에 분격한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해 상하이 사변이 일어났다.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의 1억 인구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내었다”고 감탄하면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지원을 강화하였다.
☞정답 : ③
윤봉길의사가 의거 전 발표한 선언문의 일부이다. 윤봉길의사는 1932년 상해 홍구공원의 폭탄테러를 통해 조선인의 기개를 떨쳤으며 이로 인해 한중 연합군이 결성되기도 하였다.
윤봉길의사가 의거 전 발표한 선언문의 일부이다. 윤봉길의사는 1932년 상해 홍구공원의 폭탄테러를 통해 조선인의 기개를 떨쳤으며 이로 인해 한중 연합군이 결성되기도 하였다.
■정답 : ③
해설 : 사료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커우공원 거사를 앞둔 윤봉길 의사(1908~1932)의 선서문이다.
① 1919년, ② 1937년, ③ 1932년이다.
해설 : 사료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커우공원 거사를 앞둔 윤봉길 의사(1908~1932)의 선서문이다.
① 1919년, ② 1937년, ③ 1932년이다.
14. 1897년 성립한 대한제국에 대한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복궁으로 환궁함과 함께 국내외에 독립을 선포하면서 등장하였다.
②같은 시기에 성립한 독립협회와 초기부터 상호대립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③갑오개혁에서 나타났던 외세의존적인 한계를 비판하는 가운데 구본신참의 맥락에서 자주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④국민 참정권과 의회개설을 통한 독립국가체제수립을 추구하였다.
◆ 대한제국의 성립
①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1897년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뒤 조선 정부는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국왕을 황제라 칭하여 독립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 대한제국은 자주 독립을 바라는 국민 여론과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균형 하에서 성립되었다.
② 대한제국의 집권층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는 이른바 구본신참(舊本新參)을 시정 방향으로 정하였다. 그들은 갑오․을미개혁이 너무 급진적이었다고 판단하여 전통적인 제도에 새로운 제도를 가미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 황제권의 무한함과 온건한 개혁을 표방하였다.
③ 광무 정권은 정치면에서 전제 황권 강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광무 정권은 입헌 군주제와 의회 설립을 추구하던 독립협회의 정치 개혁 운동을 탄압하였다. 나아가 광무 정권은 일종의 헌법으로 제정한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에서, 대한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 정치임과 황제권의 무한함을 강조하고 군대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외교권 등을 황제의 대권으로 규정하였다(1899). 이것은 황제의 전제권을 더욱 강화한 것이었다.
④ 광무 정권은 경제면에서 양전 사업과 상공업 진흥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양전 사업은 종래 문제가 되어 온 전정을 개혁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양전 사업에 의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라 할 수 있는 지계가 일부 지역에 발급되었다. 또한 상공업 진흥 정책에 의하여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으며, 근대 과학 기술을 응용한 생산 시설이 들어서게 되었다.
☞ 지계(地契):토지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
⑤ 교육면에서는 상공업 진흥 정책에 따라 실업 교육이 강조되었고, 외국에 유학생들이 파견되어 근대 산업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으며, 각종 실업 학교와 기술 교육 기관도 설립되었다. 한편 교통, 통신, 전기, 의료 등 각 분야에 걸친 근대적 시설이 확충되어 갔다.
※대한제국의 양전 사업
이 사업은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확립시키는 것 이외에도 전정의 문란을 시정하고 각종 숨은 토지를 찾아내어 국가의 재정 수입을 늘리며, 합리적 조세를 부과하여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갑오개혁 : 개국기원 연호
을미개혁 : 건양 연호
대한제국 : 광무 연호
순종 : 융희 연호
①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1897년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뒤 조선 정부는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국왕을 황제라 칭하여 독립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 대한제국은 자주 독립을 바라는 국민 여론과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균형 하에서 성립되었다.
② 대한제국의 집권층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는 이른바 구본신참(舊本新參)을 시정 방향으로 정하였다. 그들은 갑오․을미개혁이 너무 급진적이었다고 판단하여 전통적인 제도에 새로운 제도를 가미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 황제권의 무한함과 온건한 개혁을 표방하였다.
③ 광무 정권은 정치면에서 전제 황권 강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광무 정권은 입헌 군주제와 의회 설립을 추구하던 독립협회의 정치 개혁 운동을 탄압하였다. 나아가 광무 정권은 일종의 헌법으로 제정한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에서, 대한제국의 정치는 만세 불변의 전제 정치임과 황제권의 무한함을 강조하고 군대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외교권 등을 황제의 대권으로 규정하였다(1899). 이것은 황제의 전제권을 더욱 강화한 것이었다.
④ 광무 정권은 경제면에서 양전 사업과 상공업 진흥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양전 사업은 종래 문제가 되어 온 전정을 개혁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양전 사업에 의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라 할 수 있는 지계가 일부 지역에 발급되었다. 또한 상공업 진흥 정책에 의하여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으며, 근대 과학 기술을 응용한 생산 시설이 들어서게 되었다.
☞ 지계(地契):토지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
⑤ 교육면에서는 상공업 진흥 정책에 따라 실업 교육이 강조되었고, 외국에 유학생들이 파견되어 근대 산업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으며, 각종 실업 학교와 기술 교육 기관도 설립되었다. 한편 교통, 통신, 전기, 의료 등 각 분야에 걸친 근대적 시설이 확충되어 갔다.
※대한제국의 양전 사업
이 사업은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확립시키는 것 이외에도 전정의 문란을 시정하고 각종 숨은 토지를 찾아내어 국가의 재정 수입을 늘리며, 합리적 조세를 부과하여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갑오개혁 : 개국기원 연호
을미개혁 : 건양 연호
대한제국 : 광무 연호
순종 : 융희 연호
☞정답 :③
1) 고종은 환궁의 여론이 고조되자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러시아 공사관 건너편에 있던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2) 독립협회는 1896년에 성립되었으며, 이는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친목단체였다. 초기에는 정부의 관료도 참여, 정부도 재정적 후원을 전개함.
4) 독립협회와 헌의 6조에 합의하여 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기로 하였으나 친러파의 방해 등으로 국민참정권과 의회개설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 고종은 환궁의 여론이 고조되자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러시아 공사관 건너편에 있던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2) 독립협회는 1896년에 성립되었으며, 이는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친목단체였다. 초기에는 정부의 관료도 참여, 정부도 재정적 후원을 전개함.
4) 독립협회와 헌의 6조에 합의하여 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기로 하였으나 친러파의 방해 등으로 국민참정권과 의회개설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답 : ③
해설 : ①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 ② 구본신참의 원칙아래 서재필·이상재 등이 참여, ④ 황제권 강화와 자위군대 강화에 급급하였다.
해설 : ①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 ② 구본신참의 원칙아래 서재필·이상재 등이 참여, ④ 황제권 강화와 자위군대 강화에 급급하였다.
15. 다음 중 조선시대의 편찬된 역사서적은?
①동국통감
②해동고승전
③편년통록
④천추금경록
☞
편년통록 : 고려 의종대에 김홍관이 편찬.
해동고승전 : 고려 고종대 각훈이 편찬한 것,
천추금경록 : 고려 충렬왕대에 정가신이 편찬한 것, 전해지지 않는다.
편년통록 : 고려 의종대에 김홍관이 편찬.
해동고승전 : 고려 고종대 각훈이 편찬한 것,
천추금경록 : 고려 충렬왕대에 정가신이 편찬한 것, 전해지지 않는다.
■정답 : ①
해설 :
편년통록 - 고려 의종
동국통감 - 조선 성종
해동 고승전 - 고려 고종
천추금경록 - 고려 충렬왕
해설 :
편년통록 - 고려 의종
동국통감 - 조선 성종
해동 고승전 - 고려 고종
천추금경록 - 고려 충렬왕
16. 고려시대 토지제도 중 옳은 것을 모두 고르면?
가. 수조권을 기초로 국가·지배층과 소토지 소유 농민 사이에 전주전객제가 형성되었다. 나. 전시과제도를 실시하여 관료들에게 경기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지급하였다. 다. 개경환도 후에 현직 관료의 녹봉을 충당하기 위하여 녹과전제도를 시행하였다. 라. 문종 때 시행된 경정전시과에서는 인품이라는 막연한 기준을 지양하고 관직에 따라 토지를 분급하였다. |
②가, 다
③나, 라
④다, 라
☞문제 복원이 약간 미비함
나 - 전시과제도를 통해 관료들에게 5도의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다 - 녹과전 제도는 강화도로 천도한 후 현직관료의 녹봉을 충당하기 위해 실시. 이러한 제도가 개경으로 환도한 후에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경기 8현의 토지에 대해 녹과전제도가 실시되었다.
라 - 문종대는 현직자 만을 대상으로 지급, 전체 지급대상과 액수는 감소, 그러나 무반의 대우는 개선됨
나 - 전시과제도를 통해 관료들에게 5도의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다 - 녹과전 제도는 강화도로 천도한 후 현직관료의 녹봉을 충당하기 위해 실시. 이러한 제도가 개경으로 환도한 후에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경기 8현의 토지에 대해 녹과전제도가 실시되었다.
라 - 문종대는 현직자 만을 대상으로 지급, 전체 지급대상과 액수는 감소, 그러나 무반의 대우는 개선됨
■정답 : ②
해설 : 나. 경기토지는 과전법의 내용이고 전주전객제에서는 수조권을 지급한 것이고, 라. 개정전시과(목종, 998)에서 18품계로 나누어 차등 지급하였다.
해설 : 나. 경기토지는 과전법의 내용이고 전주전객제에서는 수조권을 지급한 것이고, 라. 개정전시과(목종, 998)에서 18품계로 나누어 차등 지급하였다.
17. 고려시대 불교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왕건은 개경에 수많은 절을 세웠다.
②지눌의 수선사는 무신정권의 경제적 지원과 보호를 거부하였다.
③팔만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조판하였다.
④의천이 해동천태종을 창시하였다.
1.지눌은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는 조계종을 창시한다.
2.조계종은 고려 무신정권의 정책적 지원을 얻어 성장하며 후에 재조대장경을 제작한다.
2.조계종은 고려 무신정권의 정책적 지원을 얻어 성장하며 후에 재조대장경을 제작한다.
☞정답 : ②
지눌은 최충헌의 후원을 받는 가운데 조계종을 개창하고 선교의 통합을 완성하였다.
지눌은 최충헌의 후원을 받는 가운데 조계종을 개창하고 선교의 통합을 완성하였다.
■정답 : ②
해설 : ② 최씨 무신정권은 자신들의 독재정치와 마찰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아 정책적으로 조계종의 수선사(정혜결사) 후원하였다.
해설 : ② 최씨 무신정권은 자신들의 독재정치와 마찰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아 정책적으로 조계종의 수선사(정혜결사) 후원하였다.
18. 다음 글에서 제시된 내용과 관련된 사건을 일어난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국모가 섬 오랑캐의 해를 입었으니 하늘과 땅이 바뀌었고, 임금이 단발의 모욕을 받았으니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ㄴ.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정부대신이라는 자는 자기네의 영리만을 생각하고 위협에 눌려서 스스로 머뭇거리고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었다. ㄷ. 그가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 양국을 격리시키므로 주살한 것이다....... 이런 거사는 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다. ㄹ. 비록 우리가 초야의 유민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먹고 임금의 옷을 입는 자로서 국가의 위망을 좌시할 수는 없다. 나라의 위태로움을 어찌 앉아서 보겠는가? |
② ㄹ-ㄴ-ㄱ-ㄷ
③ ㄴ-ㄷ-ㄱ-ㄹ
④ ㄱ-ㄹ-ㄷ-ㄴ
유인석의 격문 요지
국모의 원통함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데 참혹한 일은 더욱 심해져서 군부(君父)가 머리를 깎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의관을 찢기고도 또 이런 망극한 흉화를 당하매 천지가 뒤집히고 우리의 이성을 보전할 길이 없구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요지
지난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후작이 한국에 왔을 때, 우리 인민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이 서로 돕고 의지할 것을 주선한다고 자처하던 사람이니, 반드시 우리나라 독립을 부식하는 방법을 권고하리라”하고, 시골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모두 환영하였는데, 천하의 일에는 헤아리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뜻밖에 5조약은 어디서부터 나왔는가? 아!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우리 정부 대신이란 자들이 영달과 이득을 바라고 위협에 겁을 먹고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어, 4천 년의 강토와 5백년의 종묘 사직을 남에게 바치고, 2천만 생령으로 하여금 모두 다른 사람의 노예노릇을 하게 하였으니,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우리 2천만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 논설(요약 인용)
※안중근 의사의 최후 진술 요지
나는 4천년 우리 조국을 위하여 동양 대국의 평화를 위하여 우리 국민의 권리를 유린하며 우리 동양의 평화를 교린하는 간사한 적을 죽였으니 나의 목적은 이와 같이 정대한지라 고로 내가 국민의 의무로 살신성인하고자 함이다. (중략)
▶추가자료
공경 이하 방백 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함은 생각지 않고 오로지 자기 배를 불리고 집안을 윤택하게 하려는 계책에만 생각이 기운다. 인물 등용의 문을 재화를 낳는 문으로 보아 과거 시험장은 모두 장사하는 저잣거리가 되었다. 많은 재화는 국고에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개인의 창고에 들어가며, 국가의 채무가 누적되어도 그것을 청산하려고 하지 않는다. 교만, 사치, 음란이 그치지 않아 전국이 어육*이 되고 만민이 도탄에 빠져 있다. 수령의 탐학이 있는 바, 어찌 백성이 곤궁치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쇠약해지면 나라 역시 쇠잔한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지 않고 서울밖에 좋은 집을 마련하여 자기만 온전할 것을 도모하고 오로지 벼슬과 녹만 훔치려 하니 이 어찌 도리라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우리가 초야의 유민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먹고 임금의 옷을 입는 자로서 국가의 위망을 좌시할 수 없다.
전국의 백성이 한마음이 되고 억조창생이 상의하여 지금 의로운 깃발을 올리니,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세를 삼는다. 금일의 상황이 비록 놀랄 만한 일이지만 결코 두려워 동요함 없이 각자의 업에 안심하고 종사하게 함으로써 다 함께 평화로운 나날을 축하하며 성군의 교화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노라.
자료 : <동학 농민군의 창의문>중에서
국모의 원통함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데 참혹한 일은 더욱 심해져서 군부(君父)가 머리를 깎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의관을 찢기고도 또 이런 망극한 흉화를 당하매 천지가 뒤집히고 우리의 이성을 보전할 길이 없구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요지
지난번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후작이 한국에 왔을 때, 우리 인민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이 서로 돕고 의지할 것을 주선한다고 자처하던 사람이니, 반드시 우리나라 독립을 부식하는 방법을 권고하리라”하고, 시골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모두 환영하였는데, 천하의 일에는 헤아리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뜻밖에 5조약은 어디서부터 나왔는가? 아!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우리 정부 대신이란 자들이 영달과 이득을 바라고 위협에 겁을 먹고 벌벌 떨면서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어, 4천 년의 강토와 5백년의 종묘 사직을 남에게 바치고, 2천만 생령으로 하여금 모두 다른 사람의 노예노릇을 하게 하였으니,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우리 2천만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 논설(요약 인용)
※안중근 의사의 최후 진술 요지
나는 4천년 우리 조국을 위하여 동양 대국의 평화를 위하여 우리 국민의 권리를 유린하며 우리 동양의 평화를 교린하는 간사한 적을 죽였으니 나의 목적은 이와 같이 정대한지라 고로 내가 국민의 의무로 살신성인하고자 함이다. (중략)
▶추가자료
공경 이하 방백 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함은 생각지 않고 오로지 자기 배를 불리고 집안을 윤택하게 하려는 계책에만 생각이 기운다. 인물 등용의 문을 재화를 낳는 문으로 보아 과거 시험장은 모두 장사하는 저잣거리가 되었다. 많은 재화는 국고에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개인의 창고에 들어가며, 국가의 채무가 누적되어도 그것을 청산하려고 하지 않는다. 교만, 사치, 음란이 그치지 않아 전국이 어육*이 되고 만민이 도탄에 빠져 있다. 수령의 탐학이 있는 바, 어찌 백성이 곤궁치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쇠약해지면 나라 역시 쇠잔한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지 않고 서울밖에 좋은 집을 마련하여 자기만 온전할 것을 도모하고 오로지 벼슬과 녹만 훔치려 하니 이 어찌 도리라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우리가 초야의 유민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먹고 임금의 옷을 입는 자로서 국가의 위망을 좌시할 수 없다.
전국의 백성이 한마음이 되고 억조창생이 상의하여 지금 의로운 깃발을 올리니,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세를 삼는다. 금일의 상황이 비록 놀랄 만한 일이지만 결코 두려워 동요함 없이 각자의 업에 안심하고 종사하게 함으로써 다 함께 평화로운 나날을 축하하며 성군의 교화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노라.
자료 : <동학 농민군의 창의문>중에서
☞정답 : ①
ㄱ - 민비시해사건과 을미사변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의병관련 기록 1895
ㄴ -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1905
ㄷ -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1909
ㄹ - 동학농민전쟁 창의문 중의 일부 1894년
ㄱ - 민비시해사건과 을미사변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의병관련 기록 1895
ㄴ -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1905
ㄷ -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1909
ㄹ - 동학농민전쟁 창의문 중의 일부 1894년
■정답 : ①
해설 : 사료는 ㄱ. 민용호의 「광동창의록」(1895.8), ㄴ.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1905.11), ㄷ. 안중근의 「최후진술」(1910.2), ㄹ. 동학농민군의 「무장창의문」(1894.3)이다.
해설 : 사료는 ㄱ. 민용호의 「광동창의록」(1895.8), ㄴ.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1905.11), ㄷ. 안중근의 「최후진술」(1910.2), ㄹ. 동학농민군의 「무장창의문」(1894.3)이다.
19. 다음의 식민지 지배정책에 관련된 설명으로 맞는 것은?
(제17조) 임시토지조사국은 토지대장 및 지도를 작성하고 토지의 조사 및 측량에 대해 사정으로 확정한 사항 또는 재결을 거친 사항을 이에 등록한다. |
②보안회를 결성하고 황무지 개간에 반대하는 구국 민중 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요구를 철회하게 하였다.
③역둔토, 궁방전 등과 동중 혹은 문중의 공유지는 신고주가 없어서 일제 측에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④농민운동이 단순한 소작쟁의를 넘어 적색농민 조합을 조직하고 투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한국인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재조사하면 소유권이 불분명한 많은 토지를 약탈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토지 국유제를 내세워 조선시대에 왕실과 각 관아가 수조권을 가지고 있던 각종 토지, 마을과 문중들의 토지 그리고 약간의 투자만으로 경작지로 이용할 수 있는 황무지나 미개간지 등을 국유지로 편입시켜 총독부 소유로 하였다.
☞정답 : ③ 보기 지문은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과 관련된 것
1) 대한제국시기에 시행된 광무양전지계사업은 경작권이 아니라 근대적인 소유권의 확립을 목적으로 한 것
2) 보안회의 활동은 1904년의 일이다.
4) 적색농민조합은 193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과정에서 등장한 대중조직이다.
1) 대한제국시기에 시행된 광무양전지계사업은 경작권이 아니라 근대적인 소유권의 확립을 목적으로 한 것
2) 보안회의 활동은 1904년의 일이다.
4) 적색농민조합은 193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과정에서 등장한 대중조직이다.
■정답 : ③
해설 : 사료는 일제시대의 토지조사령(1912년)이다 .
① 농민의 경작권 박탈, ② 보안회는 한말 1904년에 조직, ④ 1930년대의 항일운동이다.
해설 : 사료는 일제시대의 토지조사령(1912년)이다 .
① 농민의 경작권 박탈, ② 보안회는 한말 1904년에 조직, ④ 1930년대의 항일운동이다.
20. 조선시대의 서원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중종 때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시작이다.
②교육적 성격인 서당의 기능에 선현을 봉사하는 사당의 기능이 합쳐진 것이다.
③국가로부터 토지의 노비를 받는 관학 기관이었다.
④서원은 지방문화의 발전과 확대에 기여하였다.
① 조선은 고려의 교육제도를 이어받아 서울에 국립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두었는데 이는 최고 학부의 구실을 하였고, 중등 교육 기관으로는 중앙의 사학과 지방의 향교가 있었다.
② 또한 사립 교육 기관으로 서원과 서당 등이 있었다.
③ 이들은 계통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각각 독립된 교육 기관이었다.
② 또한 사립 교육 기관으로 서원과 서당 등이 있었다.
③ 이들은 계통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각각 독립된 교육 기관이었다.
☞정답 : ③
서원은 관학이 아니고 사학이다. 서원 건립초기에는 지방관의 주도와 정부의 협조하에 전개되었다. 정부로부터 토지 노비 서적 등을 지급 받았던 서원이 사액서원이다. 지방에서 사림세력이 성장하면서 서원도 증가하였고, 이를 통해 학문을 연구, 학파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붕당정치의 발달기에는 붕당의 여론을 주도하는 기구가 되기도 하였다.
서원은 관학이 아니고 사학이다. 서원 건립초기에는 지방관의 주도와 정부의 협조하에 전개되었다. 정부로부터 토지 노비 서적 등을 지급 받았던 서원이 사액서원이다. 지방에서 사림세력이 성장하면서 서원도 증가하였고, 이를 통해 학문을 연구, 학파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붕당정치의 발달기에는 붕당의 여론을 주도하는 기구가 되기도 하였다.
■정답 : ③
해설 : ③ 서원은 국왕의 사액에 의해 토지·노비·서적 등이 하사되었으나, 관학이 아니라 사설교육기관인 사학(私學)이다.
해설 : ③ 서원은 국왕의 사액에 의해 토지·노비·서적 등이 하사되었으나, 관학이 아니라 사설교육기관인 사학(私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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