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29일에 시행한 경상북도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다음 내용과 관련된 시기 상황으로 옳은것은?
원성왕이 즉위하니 위는 중신으로 내물왕계 12세손이었다. ....처음에 혜공왕 말년 반신들이 제멋대로 날뛰자 선덕이 상대등으로 있으면 서 임금 측근의 나쁜 우리를 제거하자고 부르짖자 경신이 참여하여 난을 평정한 공이 있으므로 선덕이 즉위하면서 경신은 상대등이 되었다. |
② 왕위 계승자는 성골에서 진골로 변화했다고 볼수있어
③ 선덕왕의 즉위는 무열계의 몰락을 의미하는거야
④ 이로 인해 왕권 강화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왕권강화가 이루어졌어
정답 3번
보기 지문은 신라 하대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즉 혜공왕의 몰락과 선덕왕의 즉위는 무열계 왕족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 시기 왕위쟁탈전은 내물계와 무열계간, 내물계 내부의 갈등으로 전개되었다.
2. 경국대전에 기록된 관찰사와 수령에 관한 내용을 보면 관찰사의 임무는 수령에 대한 감 시와 순찰이다. 그렇다면 보기 중 수령의 임무에 해당하지 않는것은 무엇인가?
① 호구수를 늘려 국가의 조세수입 증대
② 치안유지와 주민의 교화
③ 반역자 색출과 처형
④ 학교증설과 교육장려
정답 3번
반역자의 색출과 처형은 중앙정부의 몫이다. 즉 의금부에서 반역죄 모반죄에 해당하는 범죄를 다스리며, 사형을 결정할 때는 왕과 의정부 3사 대신이 함께 모여 결정하였다.
지방관의 주요업무인 수령7사는 다음과 같다.
농상성 農桑盛 : 농사철에 맞추어 씨를 뿌릴 것
학교흥 學校興 : 유생을 모아 유교 경전의 뜻을 가르치고 제술(한문학)을 시 험하여 유학과 문학에 정진하도록 할 것
사송간 詞訟簡 : 법을 잘 지키어 백성에게 올바름을 보여 줄 것
간활식 奸猾息 : 용모를 잘 관찰하여 간사스럽고 교활한 사람을 찾아 내어 이 를 없앨 것- 향리의 부정 방지.
군정수 軍政修 : 때에 맞추어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단기를 엄히 밝힐 것
호구증 戶口增 : 백성들을 편안하게 일하면서 살 수 있게 함으로써, 스스로 사 람들이 모여들게 할 것
부역균 賦役均 : 부역 동원시 차별하지 말고 공평․균등하게 부과할 것
그러나 수령이 수행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령 7사의 이행과 함께 지방의 조세와 공물을 효과적으로 징수하고 이를 상납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효과적인 민정과 국가의 운영에 재정적인 문제가 반드시 수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역자의 색출과 처형은 중앙정부의 몫이다. 즉 의금부에서 반역죄 모반죄에 해당하는 범죄를 다스리며, 사형을 결정할 때는 왕과 의정부 3사 대신이 함께 모여 결정하였다.
지방관의 주요업무인 수령7사는 다음과 같다.
농상성 農桑盛 : 농사철에 맞추어 씨를 뿌릴 것
학교흥 學校興 : 유생을 모아 유교 경전의 뜻을 가르치고 제술(한문학)을 시 험하여 유학과 문학에 정진하도록 할 것
사송간 詞訟簡 : 법을 잘 지키어 백성에게 올바름을 보여 줄 것
간활식 奸猾息 : 용모를 잘 관찰하여 간사스럽고 교활한 사람을 찾아 내어 이 를 없앨 것- 향리의 부정 방지.
군정수 軍政修 : 때에 맞추어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단기를 엄히 밝힐 것
호구증 戶口增 : 백성들을 편안하게 일하면서 살 수 있게 함으로써, 스스로 사 람들이 모여들게 할 것
부역균 賦役均 : 부역 동원시 차별하지 말고 공평․균등하게 부과할 것
그러나 수령이 수행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령 7사의 이행과 함께 지방의 조세와 공물을 효과적으로 징수하고 이를 상납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효과적인 민정과 국가의 운영에 재정적인 문제가 반드시 수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다음 성리학자들의 설명중 옳은 것은?
① 서경덕- 이(理)보다 기(氣)중심으로 불교와 노장사상에 포용적이었다.
② 이 황- 현명한 신하가 성학을 군주에게 가르쳐야한다는 성학집요를 저술하였다
③ 이 이- 임진왜란 이후 일본 성리학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④ 조 식- 북인으로 척화론과 의리명분론을 주장하였다.
정답 1 번
2) 성학집요는 이이의 저서
3) 임난후 일본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준 것은 이황의 성리학
4) 조식의 제자들이 북인이었으나 척화론이 아니고 실리적 외교를 펼쳤다.
2) 성학집요는 이이의 저서
3) 임난후 일본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준 것은 이황의 성리학
4) 조식의 제자들이 북인이었으나 척화론이 아니고 실리적 외교를 펼쳤다.
4. (가)와 (나)에서 제기된 혼인제도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가) 처음 말로 혼인을 정하고, 다음에 여자의 집 대옥(大屋) 뒤에 소옥(小屋)을 지어 서옥이라 부른다. 저녁에 사위가 여자집에 와서 문 밖에서 자기의 이름을 알리고 무릎을 끓고 절하면서 여자와 잘 것을 세 번 원하면 여자의 부모는 이것을 듣고 소옥에서 잘 것을 허락한다. 남자는 다음날 떠날 때 전백을 놓고 간다. 여자는 자녀를 낳고 자녀가 성장한 뒤에야 남자의 집에 살러간다. (나) 장차 며느리가 될 여자 아이를 데려다 키워서 성인이 되면 남자쪽에서 물품으로 대가를 치르고 혼례를 올라던 매매혼 제도가 있다. |
② 자급자족의 경제였다.
③ 군장국가에서 연맹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의 일이다.
④ 원시 모계사회의 씨족적 전?을 이은 것이다
정답 4번
가는 고구려의 데릴사위제, 나는 옥저의 민며느리제
가는 고구려의 데릴사위제, 나는 옥저의 민며느리제
5.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증거가 아닌 것은?
① 지배층이 고씨와 대씨 등 고구려 계통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② 발해가 왜에 보내는 문서에 고려국왕을 자처하였다.
③ 상경에 주작대로를 건설했고 3성 6부 제도를 도입하였다.
④ 무덤양식이 굴식돌방무덤이고 온돌장치를 사용하였다.
정답 3번
상경의 주작대로와 3성 6부체제는 당의 영향을 받은 요소이다.
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왕족의 성씨가 고구려 왕족의 성씨였던 ‘대’씨를 사용하였던 점과 일본에 보낸 국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건축 구조에서 온돌 장치등과 무덤의 구조, 기와 벽돌 석등 등의 요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상경의 주작대로와 3성 6부체제는 당의 영향을 받은 요소이다.
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왕족의 성씨가 고구려 왕족의 성씨였던 ‘대’씨를 사용하였던 점과 일본에 보낸 국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건축 구조에서 온돌 장치등과 무덤의 구조, 기와 벽돌 석등 등의 요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6. 다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하여 한국정부에 용빙하고,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 의견을 물어 시행할 것, 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하여 외부에 용빙하고 외교에 관한 요무(要務)는 일체 그 의견을 물어 시행할 것, 한국정부는 외국과의 조약체결, 기타 중요한 외교안건, 즉 외국인에 대한 특권양여와 계약 등의 처리에 관하여는 미리 일본정부와 협의할 것 이다 |
② 을사조약
③ 한일 신협약
④ 제1차 한일협약
정답 4번
보기 지문은 1차한일협약의 주요 내용이다.
<참고> [1·차 한일협약]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개전하는 동시에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요하고, 그해 5월 일본각의에서는 한국식민지화의 기본방침인 '대한방침'과 '대한시설강령'을 결정했다. 이 방침은 식민지화를 위한 대한정책의 확립인 동시에 실천방안이었다. 이어서 러일전쟁이 일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8월 22일 한일의정서 제1조에 규정한 '내정개선'이라는 구실하에 '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를 외부대신서리 윤치호와 일본공사 하야시 간에 체결하게 했다.
협정서의 내용은
① 한국정부는 대일본정부가 추진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삼아 재무에 관한 사항은 모두 그의 의견에 따를 것,
② 한국정부는 대일본정부가 추진하는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하여 외부(外部)에 용빙하여 외교에 관한 주요업무를 일체 그 의견에 따를 것,
③ 한국정부는 외국과의 조약체결과 기타 중요한 외교안건, 즉 외국인에 관한 특권양여와 계약등사의 처리에 관해서는 미리 대일본정부와 협의할 것 등이다.
일본은 이 협정에 의해 그들 대장성 주세국장 메가다 수타로[目賀田種太郞]를 재정고문에, 또 20여 년 간 일본정부에 고용되어 충성을 바친 미국인 스티븐스를 외교고문에 임명하여 한국의 외교와 재정을 감독·정리한다는 명목으로 외교권과 재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일본은 2명의 고문용빙을 전후하여 하등 계약의 근거도 없이 자진 초청한다는 형식을 빌려서 각 부에도 모두 이와 대동소이한 고문을 차례로 두게 했다. 또한 주한 일본공사관부무관 육군중좌 노즈[野津鎭武]가 군부고문으로 임명되어 군대해산의 일을 담당했으며, 일본경시청 경시 마루야마[丸山重俊]가 경무고문으로 임명되어 경찰을 장악했고, 궁내부에는 한국에서 참령을 지낸 가토[加藤增雄]가 궁내부고문으로 취임하여 궁내부를 감독했다. 뿐만 아니라 학부에까지도 도쿄[東京] 고등사범학교 교수 시데하라[幣原垣]를 학부참여관이라는 명칭으로 취임시켜 식민지교육의 체계를 잡게 했다. 이들 고문 밑에는 이와 같은 일을 보조하기 위해 각 고문마다 보조관으로 10~100명의 일본인이 딸려왔다. 이로써 이른바 고문정치체제를 확립하여 대한시설강령 등 식민지화 방안을 공동으로 추진하게 했다
보기 지문은 1차한일협약의 주요 내용이다.
<참고> [1·차 한일협약]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개전하는 동시에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요하고, 그해 5월 일본각의에서는 한국식민지화의 기본방침인 '대한방침'과 '대한시설강령'을 결정했다. 이 방침은 식민지화를 위한 대한정책의 확립인 동시에 실천방안이었다. 이어서 러일전쟁이 일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8월 22일 한일의정서 제1조에 규정한 '내정개선'이라는 구실하에 '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를 외부대신서리 윤치호와 일본공사 하야시 간에 체결하게 했다.
협정서의 내용은
① 한국정부는 대일본정부가 추진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삼아 재무에 관한 사항은 모두 그의 의견에 따를 것,
② 한국정부는 대일본정부가 추진하는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하여 외부(外部)에 용빙하여 외교에 관한 주요업무를 일체 그 의견에 따를 것,
③ 한국정부는 외국과의 조약체결과 기타 중요한 외교안건, 즉 외국인에 관한 특권양여와 계약등사의 처리에 관해서는 미리 대일본정부와 협의할 것 등이다.
일본은 이 협정에 의해 그들 대장성 주세국장 메가다 수타로[目賀田種太郞]를 재정고문에, 또 20여 년 간 일본정부에 고용되어 충성을 바친 미국인 스티븐스를 외교고문에 임명하여 한국의 외교와 재정을 감독·정리한다는 명목으로 외교권과 재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일본은 2명의 고문용빙을 전후하여 하등 계약의 근거도 없이 자진 초청한다는 형식을 빌려서 각 부에도 모두 이와 대동소이한 고문을 차례로 두게 했다. 또한 주한 일본공사관부무관 육군중좌 노즈[野津鎭武]가 군부고문으로 임명되어 군대해산의 일을 담당했으며, 일본경시청 경시 마루야마[丸山重俊]가 경무고문으로 임명되어 경찰을 장악했고, 궁내부에는 한국에서 참령을 지낸 가토[加藤增雄]가 궁내부고문으로 취임하여 궁내부를 감독했다. 뿐만 아니라 학부에까지도 도쿄[東京] 고등사범학교 교수 시데하라[幣原垣]를 학부참여관이라는 명칭으로 취임시켜 식민지교육의 체계를 잡게 했다. 이들 고문 밑에는 이와 같은 일을 보조하기 위해 각 고문마다 보조관으로 10~100명의 일본인이 딸려왔다. 이로써 이른바 고문정치체제를 확립하여 대한시설강령 등 식민지화 방안을 공동으로 추진하게 했다
7. 다음과 같은 신라의 발전기반이 된 농업 기술에 해당 하는 것은?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으며 대외적으로 우산국을 복속하였다. 이어 연통제도(?)를 정비하고 율령반포가 이루어졌으며 금관가야를 정복하였다 |
② 타조법이 시행되었다.
③ 가축의 배설물을 거름으로 사용하였다.
④ 철제 농기구 사용과 우경이 확대화되었다.
정답 4번
지증왕 이후 농경이 발전되는 가운데 철제농기구의 사용 권장과 우경이 장려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신라는 비약적 발전을 한 결과 백제 고구려를 물리치고 한강유역을 점령하였다.
1) 모내기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조선후기
2) 타조법은 사회발전의 배경은 아니다
3) 가축의 배설물을 거름으로 사용한 시기는 고려.
지증왕 이후 농경이 발전되는 가운데 철제농기구의 사용 권장과 우경이 장려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신라는 비약적 발전을 한 결과 백제 고구려를 물리치고 한강유역을 점령하였다.
1) 모내기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조선후기
2) 타조법은 사회발전의 배경은 아니다
3) 가축의 배설물을 거름으로 사용한 시기는 고려.
8. 다음은 동아일보(2001.6.22)에 실린 김충식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내용의 글이다. 이 글의 내용 중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라는 북한의 의도와 일치하지 않는 것은?
금강산을 오르는 길목에도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는 구호가 적혀 있다. 그 처절한 외침에서 대원군 시절의(斥和), 외세배격을 떠올린다. 세계가 흘러가는 방향, 남들이 걷는 보편의 길, 그것을 뿌리치고 유독 ‘우리식’ ‘북조선식’ ‘항일유격대식’의 국가로 남자는 절규. 정녕 그 구호는 사회주의 낙원을 창출하고 있는가. 망국의 전야, 대원군이 외치던 소리는 그랬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서양 오랑캐와 화친한다면 나라를 파는 것이요, 그들의 위협에 굴복해 교역을 허락한다면 나라는 망하는 것이다’ ‘서양 오랑캐의 침범에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이야 말로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일본 메이지(明治의)정권의 선택과는 반대였다. |
② 주체사상의 구현
③ 개방 정책으로 인한 주민의 동요 차단
④ 북핵 문제에 대처한 6자 회담 대비
정답 4번
우리식 사회주의는 북한의 체제유지를 위한 것이다.
우리식 사회주의는 북한의 체제유지를 위한 것이다.
9. 조선후기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에 대한 설명이 옳지 않은 것은?
① 경강상인은 운송업과 선박의 건조 등을 담당하였다.
② 청으로부터 수입한 것은 은, 구리, 황, 후추였다.
③ 장시에는 보부상이 주로 생활필수품을 조달하였다.
④ 조선이 청과 일본 사이에서 중계무역도 하였다.
정답 2번
은 구리 황 후추는 일본에서 도입된 것이다.
1) 경강 연안의 주요 교통 수단인 진선(津船)의 개수(改修)와 신조(新造)를 경강의 선재 도고인(船材都賈人)들이 담당하였고, 조정에서 필요한 선박까지도 경강인들이 건조해 조달했던 점을 본다면, 그들에 의한 조선 사업은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경강인들이 그들의 발달된 조선술과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조선업 분야에 진출하기 시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단순한 독점·매점 상업에서 나아가 자본을 재투자해나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민족대백과사전)
4) 조선은 일본에서 은을 도입하여 청에 수출하는 중계무역도 전개하였다.
은 구리 황 후추는 일본에서 도입된 것이다.
1) 경강 연안의 주요 교통 수단인 진선(津船)의 개수(改修)와 신조(新造)를 경강의 선재 도고인(船材都賈人)들이 담당하였고, 조정에서 필요한 선박까지도 경강인들이 건조해 조달했던 점을 본다면, 그들에 의한 조선 사업은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경강인들이 그들의 발달된 조선술과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조선업 분야에 진출하기 시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단순한 독점·매점 상업에서 나아가 자본을 재투자해나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민족대백과사전)
4) 조선은 일본에서 은을 도입하여 청에 수출하는 중계무역도 전개하였다.
10. 다음 중 도교 사상과 거리가 가장 먼 것은?
①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신도
② 백제의 금동 대향로
③ 고려의 상정고금예문
④ 조선의 소격서
정답 3번
이는 고려 인종 때 최윤의(崔允儀) 등 17명이 왕명으로 고금의 예의를 수집, 고증해 50권으로 엮은 전례서(典禮書)이다.
이는 고려 인종 때 최윤의(崔允儀) 등 17명이 왕명으로 고금의 예의를 수집, 고증해 50권으로 엮은 전례서(典禮書)이다.
11. 다음과 같은 문학이 발달하게 된 배경으로 가장 적당한 것은?
사설시조 작가모름 두꺼비 파리를 물고 두엄 위에 치달아 앉아 건넌산 바라보니 백송골이 떠 있거늘 가슴이 끔찍하여 풀떡 뛰어 내닫다가 두엄 아래 자빠졌구나. 아차, 나라고 할지라도 피멍들 뻔하였도다. |
② 탕평책의 실시
③ 서민 경제력의 향상
④ 조세제도의 개편
정답 3번
보기의 시조는 작자미상의 사설시조이다. 이는 숙종대 이후 영정조 시대로 보고 있다. 보기의 사설시조에서는 두꺼비 백송 파리 등을 의인화 하여 인간사회를 풍자한 것이다.
보기의 시조는 작자미상의 사설시조이다. 이는 숙종대 이후 영정조 시대로 보고 있다. 보기의 사설시조에서는 두꺼비 백송 파리 등을 의인화 하여 인간사회를 풍자한 것이다.
12. 다음 자료는 안동 권씨 성화보에 나오는 족보의 의미에 관한 내용이다. 체계적인 틀을 갖춘 대동보(大同譜)에는 족보일반의 의의와 그 일족의 근원과 내력 등을 일족 가운데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기록한 서문(序文)아 권두(卷頭)에 있다. 그 다음에 족보에 기록되는 사항이 아닌 것은?
내가 생각건데 옛날에는 종법이 있어 대수(代數)의 차례가 잡히고 적자와 소자의 자손이 구별 지어져 영원히 알 수 있었다. 종법이 없어지고서는 족보가 생겨났는데 무릇 족보를 만듦에 있어 반드시 그 근본을 거슬러 어디서부터 나왔는가를 따지고 그 이유를 자세히 적어 그 계통을 밝히고 친함과 친하지 아니함을 구별하게 된다. 이로써 종족간의 의리를 두터이 하고 윤리를 바르게 할 수 있었다. |
② 시조나 중시조의 사전(史傳)을 기록한 문장
③ 시조의 분묘도(墳墓圖)와 시조 발상지에 해당하는 향리 지도
④ 계보표와 기재된 사람의 자녀 입양관계, 적서의 구별 및 남녀의 구별
정답 1번
재산과 노비와 관련된 것은 호적에 기록
족보의 구성요소는 아래 설명을 참조 (한민족대백과사전)
(1) 서(序)와 발(跋) 서는 족보의 권두에 실린 서문이며, 족보일반의 의의, 동족의 연원·내력, 족보편성의 차례 등을 기술한다.
(2) 기(記) 또는 지(誌) 시조 또는 중시조(中始祖)의 사전(史傳)을 기재한 것으로 현조(顯祖)의 전기·묘지(墓誌)·제문·행장·언행록·연보 등을 기록한다. 또한 시조전설, 득성사적(得姓事績), 향관(鄕貫), 지명의 연혁, 분파의 내력 등을 자세히 기록하기도 한다.
(3) 도표 시조의 분묘도(墳墓圖) 시조 발상지에 해당하는 향리의 지도, 종사(宗祠)의 약도 등이다. 선조의 화상 같은 것은 별로 없다.
(4) 편수자 명기(名記) 대개는 족보의 편수를 담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한다. 어떤 파보에는 거기에 참여한 다른 파의 유사(有司)도 기입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명예를 표창하는 동시에 기록의 정확을 기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5) 계보표 : 시조부터 시작하여 세대순으로 종계(縱系)를 이루고, 그 지면이 끝나면 다음 면으로 옮아간다. 이때 매면마다 표시(예를 들어 천자문의 한 자씩을 차례로 기입)를 하여 대조에 편리하게 한다.
각각의 사람에 대하여는 그 이름·자호·시호·생졸(生卒) 연월일·관직·봉호(封號)·과방(科榜)·훈업(勳業)·덕행·충효·정표(旌表)·문장·저술 등 일체의 신분관계를 기입한다.
특히 이름은 반드시 관명(冠名)을 기입하는데, 그 세계 (世系)와 배항(排行)에는 종횡으로 일정한 원칙에 의한다. 자녀에 관하여서는 특히 후계의 유무, 출계(出系) 또는 입양(入養, 親生子는 ‘子00’, 양자는 ‘繼00’라고 적는다), 적서(嫡庶)의 별(서자를 수록하지 않는 경우가 많음), 남녀의 별(여자는 이름을 적지 않고 사위의 성명을 기입함) 등을 명백히 한다. 또 왕후 또는 부마가 되면 특히 이를 명기한다.
분묘의 표시, 그 소재지, 묘지(墓誌), 비문 등을 표시하고, 특히 시조의 묘지를 선영(先瑩) 또는 선산(先山)이라고 칭한다.
재산과 노비와 관련된 것은 호적에 기록
족보의 구성요소는 아래 설명을 참조 (한민족대백과사전)
(1) 서(序)와 발(跋) 서는 족보의 권두에 실린 서문이며, 족보일반의 의의, 동족의 연원·내력, 족보편성의 차례 등을 기술한다.
(2) 기(記) 또는 지(誌) 시조 또는 중시조(中始祖)의 사전(史傳)을 기재한 것으로 현조(顯祖)의 전기·묘지(墓誌)·제문·행장·언행록·연보 등을 기록한다. 또한 시조전설, 득성사적(得姓事績), 향관(鄕貫), 지명의 연혁, 분파의 내력 등을 자세히 기록하기도 한다.
(3) 도표 시조의 분묘도(墳墓圖) 시조 발상지에 해당하는 향리의 지도, 종사(宗祠)의 약도 등이다. 선조의 화상 같은 것은 별로 없다.
(4) 편수자 명기(名記) 대개는 족보의 편수를 담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한다. 어떤 파보에는 거기에 참여한 다른 파의 유사(有司)도 기입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명예를 표창하는 동시에 기록의 정확을 기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5) 계보표 : 시조부터 시작하여 세대순으로 종계(縱系)를 이루고, 그 지면이 끝나면 다음 면으로 옮아간다. 이때 매면마다 표시(예를 들어 천자문의 한 자씩을 차례로 기입)를 하여 대조에 편리하게 한다.
각각의 사람에 대하여는 그 이름·자호·시호·생졸(生卒) 연월일·관직·봉호(封號)·과방(科榜)·훈업(勳業)·덕행·충효·정표(旌表)·문장·저술 등 일체의 신분관계를 기입한다.
특히 이름은 반드시 관명(冠名)을 기입하는데, 그 세계 (世系)와 배항(排行)에는 종횡으로 일정한 원칙에 의한다. 자녀에 관하여서는 특히 후계의 유무, 출계(出系) 또는 입양(入養, 親生子는 ‘子00’, 양자는 ‘繼00’라고 적는다), 적서(嫡庶)의 별(서자를 수록하지 않는 경우가 많음), 남녀의 별(여자는 이름을 적지 않고 사위의 성명을 기입함) 등을 명백히 한다. 또 왕후 또는 부마가 되면 특히 이를 명기한다.
분묘의 표시, 그 소재지, 묘지(墓誌), 비문 등을 표시하고, 특히 시조의 묘지를 선영(先瑩) 또는 선산(先山)이라고 칭한다.
13. 다음은 고려시대의 어느 특수집단의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의 신분에 대한 설명으 로 옳지 않은 것은?
*(명종6년) 공주 명학소 사람 망이, 망소이 등이 무리를 불러 모아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 스스로 일컫고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명종6년 6월) 망이의 고향인 명학소를 승격하여 충순현으로 삼았다. |
② 신분은 양민이지만 일반 군현민보다 더 많은 역(役)을 부담하였다.
③ 거주하는 곳도 소속 집단 내로 제한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 되었다.
④ 농업에 종사하면서 일정량의 신공을 바쳤으며, 매매, 양도, 증여의 대상이 되었다.
정답 4번
향 부곡 소의 주민들은 법제상 양인이었으나 집단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즉 일반 양인 농민이었던 백정에 비해 더 많은 역을 부담하였으며 과거 응시 등에서도 차별되었다.
매매 양도 증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노비였다.
향 부곡 소의 주민들은 법제상 양인이었으나 집단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즉 일반 양인 농민이었던 백정에 비해 더 많은 역을 부담하였으며 과거 응시 등에서도 차별되었다.
매매 양도 증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노비였다.
14. 다음의 글은 <북학의>에서 발췌한 글이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실학자들의 주장하는 바가 아닌 것은?
재물은 대체로 샘과 같다. 퍼내면 차고, 버려두면 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비단 옷을 입지 않아서 나라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게 되면 여공이 쇠퇴하고, 쭈그러진 그릇을 싫어하지 않고 기교를 숭상하지 않아서 공장(工匠)이 도야(陶冶:기술을 익힘) 하는 일이 업게 되면 기예가 망하게 되며, 농사가 황폐해져서 그 법을 잃게 되므로, 사농공상의 사민이 모두 곤궁하여 서로 구제할 수 없게 된다. |
② 수레와 선박의 이용과 화폐의 필요성 강조
③ 영농 방법 혁신을 통한 생산력 증대
④ 청과의 통상을 강화하여 상공업 육성
정답 1번
토지의 분배를 통한 자영농 육성은 중농학파 즉 경세치용학파의 주장이다. 북학파들은 이용후생 즉 경제적 측면에서 모든 산업을 육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대외 통상을 강조하였다.
토지의 분배를 통한 자영농 육성은 중농학파 즉 경세치용학파의 주장이다. 북학파들은 이용후생 즉 경제적 측면에서 모든 산업을 육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대외 통상을 강조하였다.
15. 조선의 통치구조와 정치활동을 설명한 내용이 옳은 것은?
① 태조-왕자의 난을 통하여 개국공신 세력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② 태종-의정부 서사제로 정치체제를 바꿔 왕권을 강화하였다.
③ 세종-경국대전의 편찬을 완성 반포하여 조선의 통치 방향을 제시하였다.
④ 성종-홍문관을 두었으며 경연제도를 통하여 정책을 토론 심의하였다.
답변 4번
1) 태종
2) 태종은 의정부서사제를 중단하고 6조직계제를 실시하였다.
3) 성종
1) 태종
2) 태종은 의정부서사제를 중단하고 6조직계제를 실시하였다.
3) 성종
16. 다음 글의 밑줄 친 ‘이 학자’의 학파로 구성된 붕당에 대하여 옳게 설명한 것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통해 인쇄술과 도자기 기술 등 많은 문화가 전파되었다. 이때 이 학자의 성리학이 일본에 전해져 일본 성리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理)와 기(氣)의 역할이 다르다는 이 학자의 견해에 주목하면서 이 학자의 학문을 깊이 신봉하였다. 일본 학자들은 이 학자를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로 여기며 ‘동방의 주자’로 불리기도 하였다. |
② 17세기 후반, 전통 성리학임을 자처하며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 는 예론을 펼쳤다.
③ 18세기 중반, 사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여 정국을 주도하였다.
④ 18세기 후반, 국왕에 의해 일부가 중용되어 왕권을 강화하는데 기여하였다.
정답 4번
보기 지문에 해당하는 학자는 이황이며, 당파는 남인들이다. 이들 남인들은 숙종대 갑술환국을 계기로 서인 노론에 의해 타격을 입고 지방으로 낙향하거나 서울 부근에 정착하게 된다. 이들을 근기남인이라 한다.
정조는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근기남인이었던 정약용이나 채제공등을 등용하기도 하였다.
1) 북인
2) 서인
3) 노론
보기 지문에 해당하는 학자는 이황이며, 당파는 남인들이다. 이들 남인들은 숙종대 갑술환국을 계기로 서인 노론에 의해 타격을 입고 지방으로 낙향하거나 서울 부근에 정착하게 된다. 이들을 근기남인이라 한다.
정조는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근기남인이었던 정약용이나 채제공등을 등용하기도 하였다.
1) 북인
2) 서인
3) 노론
17. 근현대의 정치 변동에 관한 내용이다. 시대 순으로 나열한 것은?
(가) 인신 매매 행위의 금지, 조혼 금지 (나) 양전 사업 실시, 지계 발급 (다) 통리기무아문을 두어 개혁 추진 (라) 폐정 개혁 12조 건의 |
② (나)-(가)-(라)-(다)
③ (다)-(라)-(가)-(나)
④ (라)-(다)-(나)-(가)
정답 3번
(가) 인신 매매 행위의 금지, 조혼 금지- 갑오개혁 군국기무처 1894년 7월 -12월
(나) 양전 사업 실시, 지계 발급 -대한제국 광무개혁 1898년
(다) 통리기무아문을 두어 개혁 추진 -민씨정권의 개화정책 1880년
(라) 폐정 개혁 12조 건의 - 동학농민전쟁(운동) 1894년 6월 (전주화약)
(가) 인신 매매 행위의 금지, 조혼 금지- 갑오개혁 군국기무처 1894년 7월 -12월
(나) 양전 사업 실시, 지계 발급 -대한제국 광무개혁 1898년
(다) 통리기무아문을 두어 개혁 추진 -민씨정권의 개화정책 1880년
(라) 폐정 개혁 12조 건의 - 동학농민전쟁(운동) 1894년 6월 (전주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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