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2일에 시행한 서울시 7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설계두의 표현이다. 이 글을 통하여 설계두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멀리 중국에 가서 훌륭한 지략을 발휘하고 비상한 공을 세워 영화를 누리며, 높은 관직에 어울리는 칼을 차고 천자 곁에 출입하기를 원한다. |
② 신라 골품제의 모순
③ 신라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
④ 신라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
⑤ 신라의 화랑제도
정답: ② 골품제도를 비판한 대표적인 기사이다.
2. 고려시대에 통용된 화폐를 사용된 시기 순으로 옳게 나열한 것은?
① 건원중보 - 삼한통보 - 은병 - 지원보초
② 건원중보 - 삼한통보 - 지원보초 - 은병
③ 삼한통보 - 건원중보 - 은병 - 지원보초
④ 삼한통보 - 지원보초 - 건원중보 - 은병
⑤ 은병 - 건원중보 - 삼한통보 - 지원보초
정답: ① 건원중보는 최초의 화폐로 이해되는 화폐이고, 지원보초(至元寶鈔)는 원나라 지폐이다. 보초(寶鈔)는 어음 내지는 지폐성격의 화폐를 말한다.
지원보초(至元寶鈔), 중통보초(中統寶鈔) | |
내용 | • 원나라 지폐 • 고려말기에 국내에서 통용됨 |
의미 | • 원은 이를 고려에 사용하도록 함. 이를 통해 고려의 동전·은병, 쌀·베 등의 교환 수단을 억제하고 고려경제를 원에 편입시키고자 함. • 원이 쇠퇴할 즈음 보초의 가치도 하락하여 이를 보유하고 있던 사람들(관리, 상인 부호들)이 큰 손해를 입음 • ⇨ 이 보초를 본받아 14c 후반에 지폐인 저화(楮貨)가 발행됨 |
원 화폐: 중통보초(좌), 지원보초(우)
3. 왕건이 후백제를 상대로 펼쳤던 전투를 나열한 것이다. 시기 순으로 옳게 배열한 것은?
ㄱ. 나주 공략 ㄴ. 고창 전투 ㄷ. 공산 전투 ㄹ. 일리천 전투 |
② ㄱ - ㄷ - ㄴ - ㄹ
③ ㄴ - ㄷ - ㄹ - ㄱ
④ ㄷ - ㄴ - ㄹ - ㄱ
⑤ ㄷ - ㄹ - ㄱ - ㄴ
정답: ② 나주(금성)점령(궁예시기) → 대구 공산전투 왕건의 대패(927; 아직까지는 후백제의 강세가 이어짐) → 고창(안동)전투 승리(930) 이후 반전 → 선산 일리천 전투로 후삼국 통일(936)
4. 고려의 교육 및 과거 제도에 관한 설명에서 빈 칸에 적절하지 않은 것은?
성종 때 개경에 대학에 해당하는 국자감과 도서관인 ( ㄱ )을 세우고 서경에도 ( ㄴ )이라는 도서관을 설치했다. 숙종은 국자감에 ( ㄷ )라는 출판소를 설치했다. 예종은 왕궁 안에 ( ㄹ )과 청연각이라는 도서관 겸 학문 연구소를 설치했는데, 이는 세종 때의 집현전이나 정조 때의 규장각과 비슷한 것이었다. 인종 때 ( ㅁ )와 같은 역사책이 편찬되었다. |
② ㄴ : 수서원
③ 서적포
④ ㄹ : 장서각
⑤ ㅁ : 삼국사기
정답: ④ 장서각은 일제시대 조선왕조의 고문서를 보관하기 위해 설립한 도서관이다. 이왕직도서관(李王職圖書館)이라고도 불렸다.
- 예종대 설치한 도서관 겸 학문연구기구는 청연각·보문각 이다.
- 비서성과 수서원이 헷갈려서는 안된다. 수업시간에 늘 말씀을 드렸다. 행정관청에도 위계가 있다고, 성-원-부-사의 급이 있다
- 예종대 설치한 도서관 겸 학문연구기구는 청연각·보문각 이다.
- 비서성과 수서원이 헷갈려서는 안된다. 수업시간에 늘 말씀을 드렸다. 행정관청에도 위계가 있다고, 성-원-부-사의 급이 있다
5. 고려시대 불교의 관제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왕사·국사로 임명 받은 승려는 의례상 국왕보다 상위에 위치하였다.
② 승과는 교종과 선종을 나누어 시행하였고, 합격자에 승계로 대덕을 수여하였다.
③ 고위직 승계는 교종의 경우 수좌·승통으로 선종의 경우 선사·대선사로 구분되었다.
④ 불교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승록사는 승려의 인사를 담당하였다.
⑤ 왕사는 국왕과 밀접한 연결을 갖고 기우제를 주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정답: ④ 승록사는 인사업무를 제외한 불교관제를 담당하였다. 인사업무는 유학자나 승려나 모두 일반 관료체계 내에서 담당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의 불교 기우의식 : 기우도량(祈雨道場)>
행사 | • 왕이 왕사에게 거행토록 하는 경우와 사원에 명령하여 기우도량을 설치하게 하는 방법이 있었다. 이때 장소는 특정 사찰 혹은 왕궁이 되고, 가뭄이 심한 경우는 전국의 모든 사찰에 기우제를 지내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
내용 | • <대운윤청우경>(大雲輪請雨經)과 <용왕운우경>(龍王雲雨經) 등을 외우면서 비를 기원하는 것으로 용왕도량 혹은 운우도량이라고도 했다. • 또 <인왕경> 등의 호국경전도량과 반야도량, 나한재 등 여러 형태에 의해 행해졌다. |
※ 물론 도교의식과 무속신앙의식도 있었다. ※ 특히 기우의식 당시 국왕은 정전(正殿)을 피하고 음식을 줄였으며, 죄수를 풀어주기도 했다. |
6. 고조선에 대한 사실을 가장 먼저 기록한 책은?
① 관자(管子)
② 사기(史記)
③ 한서(漢書)
④ 함허자(涵虛子)
⑤ 삼국유사(三國遺事)
정답: ① 이를 통해 적어도 BC 7c에는 고조선이 확실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고 누누이 말씀드렸다. 고조선의 연대기의 상한을 알려주는 몇 안 되는 자료이다.
※ 물론 관자의 서술시기 자체를 BC 7c 보다 뒷 시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 물론 관자의 서술시기 자체를 BC 7c 보다 뒷 시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7. 삼국의 통치 제도에 관한 설명에서 아래의 빈 칸에 들어갈 말로 옳지 않은 것은?
삼국은 각각 지방 행정 단위를 두고 장관을 파견했다. 고구려의 5부에는 ( ㄱ ), 백제의 5방에는 방령, 신라의 주에는 ( ㄴ )을 파견했다. 삼국의 지방 행정 조직은 군사 조직이었는데, 신라의 경우 진골 출신의 장군들이 지휘하는 ( ㄷ )이 국방의 핵심을 맡았다. 그 밖에 모병(募兵)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직업 군인들이 있어 이를 ( ㄹ )이라고 불렀다. 청소년으로 이루어진 군사 단체를 조직·양성 했는데 고구려의 ( ㅁ ), 백제의 수사, 신라의 화랑이 대표적이다. |
② ㄴ : 군주
③ ㄷ : 6정
④ ㄹ : 서당
⑤ ㅁ : 선비
정답: ① 사자는 원칙상 중앙관제하의 관등이다(“조부를 거두어 들이는 사람”의 의미로, 행정적 관료출신이 관등으로 편제된 것. 각 부족장이 별도로 사자를 거느렸다는 개념과는 구별)
1)
- 왕경 5부 : 2c 고국천왕 대에 혈연적 전통을 강하게 갖는 5부[5나부]에서 →행정적 성격의 방위부로 변화되었다.
- 지방 5부 : 전국을 내·동·서·남·북의 5부로 나누었다 → 각 부에는 대성(大城)이 있어 지방장관인 욕살이 그곳에 머물면서 다스렸다. 각 부에는 여러 성들이 있어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장관인 처려근지 혹은 도사라 불리는 성주가 다스렸다.
2) 한성시대에는 전국을 5부로 구획했고, 이후 웅진시대에 지방에 22담로가 설치되었다. 사비시대에 이르러서 왕경에 5부가, 지방에 주요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5방이 설치되었다(전국에 동방(충남 은진), 서방(충남 대흥), 남방(전북 남원 or 전남 나주), 북방(공주), 중방(전북 고부)의 5방을 두어 다스림). 각 방(方) 마다에는 방성(方城)을 두었다. 방 아래에는 군이, 군 아래에는 성이 있었다.
3) 5주: 실직주(최초,삼척;지증왕) →사벌주(상주) →신주(新州;북한산주,한강) →비사벌주(하주) →비열홀주
<삼국의 지방제도>
고구려 | 백제 | 신라 | |
왕경 | 5부(욕살)1) | 5부 | 6부 |
지방 | 5부(욕살褥薩) : 전국을 5부로 나누어 통치 - 대성(욕살) → 소성(처려근지/도사) → 촌 |
5방(방령方領;전국에 5방설치)2) → 군(군장郡將) → 성(도사) |
5주(군주軍主)3) → 군(당주) → 성ㆍ촌(도사) |
* 3경 평양성, 국내성(통구;집안), 한성(황해도 재령) |
* 22담로(웅진시대) ┌ 지방 중심지에 설치한 특수행정구역 →지방통제 보여줌 └ 왕자, 왕족들을 파견해 다스림 |
* 2소경(사신仕臣) 아시촌소경(최초,함안;지증왕) →2소경: 국원소경(충주,진흥왕), 북소경(강릉,선덕여왕) |
1)
- 왕경 5부 : 2c 고국천왕 대에 혈연적 전통을 강하게 갖는 5부[5나부]에서 →행정적 성격의 방위부로 변화되었다.
- 지방 5부 : 전국을 내·동·서·남·북의 5부로 나누었다 → 각 부에는 대성(大城)이 있어 지방장관인 욕살이 그곳에 머물면서 다스렸다. 각 부에는 여러 성들이 있어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장관인 처려근지 혹은 도사라 불리는 성주가 다스렸다.
2) 한성시대에는 전국을 5부로 구획했고, 이후 웅진시대에 지방에 22담로가 설치되었다. 사비시대에 이르러서 왕경에 5부가, 지방에 주요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5방이 설치되었다(전국에 동방(충남 은진), 서방(충남 대흥), 남방(전북 남원 or 전남 나주), 북방(공주), 중방(전북 고부)의 5방을 두어 다스림). 각 방(方) 마다에는 방성(方城)을 두었다. 방 아래에는 군이, 군 아래에는 성이 있었다.
3) 5주: 실직주(최초,삼척;지증왕) →사벌주(상주) →신주(新州;북한산주,한강) →비사벌주(하주) →비열홀주
8. 한성시대 백제의 수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왕성 내부에 주요 인물의 무덤을 조성하였고, 밖에는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생산하는 공방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② 남성에 해당하는 몽촌토성과 북성에 해당하는 풍납토성으로 구성된 남·북성 체제였다.
③ 왕궁·관청·사찰 등 특수 시설을 포함하여 일반 민가에 이르기까지 기와가 보편적으로 사 용되고 있었다.
④ 도성을 방어하는 나성을 갖추고 있었으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바깥으로 동심원을 그리 면서 방어용 성곽이 만들어졌다.
⑤ 왕성 안에서 사방으로 도로가 만들어졌으며, 남쪽 성문은 한강과 연결되어 시장이 형성 되었다.
정답: ② 풍납토성이 북성(평시성), 몽촌토성이 남성(방어성)인 남북성 체제로 이루어졌다.
① 풍납토성 서남쪽으로 고분군이 존재한다(방이동 고분군, 석촌동 고분군, 가락동 고분군)
③ 기와는 3국이 공히 왕궁 내지는 관부급에서만 사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풍납토성에서는 많은 양의 기와 출토 → but, 비교적 큰 규모의 주거지에서 출토 → 즉, 일부 특수한 고관주택(주거지), 궁궐·관아·제사시설(건물지)과 같은 건물에 사용했을 것)2)
④ 나성을 갖춘 것은 사비시대 도성의 특징이다.
⑤ 한성은 풍납토성이든 몽촌토성이든 나중에 사비도성에서 실시된 5부 5항제도라든가 고구려와 신라의 조방제(條坊制)·방리제(坊里制)처럼 정연한 도시구획은 기대할 수 없었다. 특히 바둑판처럼 도시를 구획하는 조방제는 백제가 나성을 쌓은 사비시대에도 실시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육조(六朝) : 중국에서 한(漢)이 멸망(BC 206~AD 220)하고 수가 통일(589~618)하기 까지 중국 남부지역에 등장한 6개의 왕조를 일컫는다. 삼국시대(위·촉·오) 오(吳: 222~280) → 동진(東晋: 317~420) → 위진남북조(439-589) 시기 남조인 송(宋: 420~479)-제(齊: 479~502)-량(梁: 502~557)-진(陳: 557~589)을 말한다.
2) 이는 기와를 왕궁이나, 관청, 사찰 등 특수한 시설에 한정적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는 기록과도 유사성을 보인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 권33 잡지 옥사(屋舍)조에 보면, ‘진골은 방의 길이와 넓이를 24자를 넘지 못하며, 당기와를 얹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또 <구당서> 동이열전 고려(고구려)편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산계곡을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모두 풀로 지붕을 인다. 그러나 불사나 신묘, 그리고 왕궁과 관부는 기와를 사용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대체로 3국이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본다. 이를 통해 백제도 왕궁에서만 기와를 얹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① 풍납토성 서남쪽으로 고분군이 존재한다(방이동 고분군, 석촌동 고분군, 가락동 고분군)
③ 기와는 3국이 공히 왕궁 내지는 관부급에서만 사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풍납토성에서는 많은 양의 기와 출토 → but, 비교적 큰 규모의 주거지에서 출토 → 즉, 일부 특수한 고관주택(주거지), 궁궐·관아·제사시설(건물지)과 같은 건물에 사용했을 것)2)
④ 나성을 갖춘 것은 사비시대 도성의 특징이다.
⑤ 한성은 풍납토성이든 몽촌토성이든 나중에 사비도성에서 실시된 5부 5항제도라든가 고구려와 신라의 조방제(條坊制)·방리제(坊里制)처럼 정연한 도시구획은 기대할 수 없었다. 특히 바둑판처럼 도시를 구획하는 조방제는 백제가 나성을 쌓은 사비시대에도 실시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제의 도성: 한성시대>
[ 한 성 ] | ||
풍납토성(북성) | 몽촌토성(남성, 몽촌산성) | |
· 양성체제 : 남북성 체제 → 먼저 한강유역에 풍납토성(하남위례성)을 쌓고, 어느 정도 체제 정비 후 배후산성으로 몽촌산성 축조함 → 풍납토성이 왕을 중심으로 한 일상적인 거주 기능에 초점을 맞춘 거성(居城: 왕이 평상시에 거주하는 왕성)이라면, 몽촌토성은 군사적인 방어성으로 추정 |
||
특 징 |
• 왕성, 평지성 • 먼저 축조됨(BC1c~5c 유물 출토) |
• 산성, 군사적 방어성 *구릉지 산성: 자연구릉에 일부 판축성토 • 이후 축조(3c~5c말 축조예상) |
발 굴 유 물 |
• 왕궁 또는 종묘·사직 등과 관련된 중요 건물 존재(토성 중앙부) - 대형건물지(16m이상), 제사유구(수백점 이상의 토기류·말뼈 등 출토), 수십기 대형집자리 발견 - 수백점의 와당, 전돌, 토제관 등 발굴 (일반민가에서는 사용할 수 없던 특수한 유물 →풍납토성의 위상을 보여줌) • 십여점의 중국제 도자기편, 가야계 토기들 출토 → 전기의 활발한 대외교류를 보여줌 |
• 성내에 궁궐·관아 등 건물지 X →성 내부의 면적이 협소한 데다 평탄한 곳 역시 많지 않아 공간활용도 ↓ • 왕성추정 유물보다, 군사적 성격이 강한 유구와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됨 • 중국 서진시대(265-316)의 회유전문도기(灰釉錢紋陶器)편 (→풍납토성의 축조연대를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자료!!: 3c까지 소급 가능) • 백제의 대외교류 활발 ┌ 서진 회유전문토기편과 육조(六朝) 청자편이 수습됨: 중국과의 교류 ├ 원통형토기: 일본과의 교류 └ 고구려식 백제토기(고구려의 영향) |
2) 이는 기와를 왕궁이나, 관청, 사찰 등 특수한 시설에 한정적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는 기록과도 유사성을 보인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 권33 잡지 옥사(屋舍)조에 보면, ‘진골은 방의 길이와 넓이를 24자를 넘지 못하며, 당기와를 얹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또 <구당서> 동이열전 고려(고구려)편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산계곡을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모두 풀로 지붕을 인다. 그러나 불사나 신묘, 그리고 왕궁과 관부는 기와를 사용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대체로 3국이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본다. 이를 통해 백제도 왕궁에서만 기와를 얹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9. 한성시대 백제의 대외 교역에 대한 서술로 옳은 것은?
① 중국으로 향하는 항로 중 가장 많이 이용된 항로는 한반도의 서남부 지역을 출발하여 중 국의 강소성·절강성을 목적지로 하는 노선이었다.
② 백제의 일본행 항로는 한반도의 경기도 지역에서 출발하여 일본의 큐슈 서북부 지방을 목적지로 하는 항로였다.
③ 백제 지역에서 출토되는 서진(西晉)의 전문도기와 동진(東晋)의 청자는 중국과의 활발한 대외무역이 전개되었음을 알려준다.
④ 바다를 바라보는 위치에 만들어진 태안 마애삼존불은 항해의 안전을 지켜준다는 믿음에 따라 관음보살을 부처의 좌우에 배치하고 있다.
⑤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은 중국의 도가 사상의 영향으로 해신에게 드리는 제사가 진행되 던 곳으로 6세기 무렵에는 공헌용 금속유물을 놓고 제사를 행했다.
정답: ③ 한성시대 출토 유물로 서진 회유전문토기편과 육조(六朝) 청자편이 수습된다. 이를 통해 당대 이미 백제와 중국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① 한성시대 백제의 중국과의 교섭은 근초고왕 대 비롯된다(동진과의 교섭. ※고이왕 대의 서진과의 교섭은 마한이름으로 교역). 이 시기의 중국과의 교섭은 서해직항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당항성(한강하류)~백령도~산둥반도로 이어지는 서해를 가로지르는 항로였다. 서해직항로의 개척으로 백제는 이전의 고구려연안을 따라 이동하는 위험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또한 백제의 산둥·요서지역 진출로 나타나기도 했다.
④ 태안 마애삼존불은 보살상이 중앙에 부처가 양 좌우에 위치하는 특이한 구조를 띠고 있다. 출제가능한 문화재 정리해서 카페에 올린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미리 나와버렸다.
⑤ 부안 죽막동 금속유물은 한성시대 이후인 5c 후반~6c 전반 유물로 추정하고 있다.
※ 백제의 서해직항로 ⇨ 고려의 북로(개성-예성항~산둥반도 덩저우-카이펑[개봉]),
백제의 남로 ⇨ 고려의 남로(개성-예성항~밍저우[or 취안저우(복건성 泉州)])와 유사
※ 수 : 삼국은 수 건국직후 경쟁적으로 사신을 파견
→ 수는 3국 견제와 등거리 외교로 나옴(3국왕 각각 책봉)
→ 서해직항로 신라가 주도권 장악(신라의 적극적 외교, 백제는 약화)
※ 당 : 이때는 신라가 고구려도 제치고 압도적으로 많은 조공횟수 기록
→ 수나라 까지는 고구려가 외교적 경쟁에 우위를 점했으나, 판도가 바뀜
① 한성시대 백제의 중국과의 교섭은 근초고왕 대 비롯된다(동진과의 교섭. ※고이왕 대의 서진과의 교섭은 마한이름으로 교역). 이 시기의 중국과의 교섭은 서해직항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당항성(한강하류)~백령도~산둥반도로 이어지는 서해를 가로지르는 항로였다. 서해직항로의 개척으로 백제는 이전의 고구려연안을 따라 이동하는 위험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또한 백제의 산둥·요서지역 진출로 나타나기도 했다.
④ 태안 마애삼존불은 보살상이 중앙에 부처가 양 좌우에 위치하는 특이한 구조를 띠고 있다. 출제가능한 문화재 정리해서 카페에 올린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미리 나와버렸다.
⑤ 부안 죽막동 금속유물은 한성시대 이후인 5c 후반~6c 전반 유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왕국의 편년>
한 성 시 대 |
• 온조~개로왕(475: 장수왕의 한성함락) : 5c 중반까지 | |
성곽 | • 풍납토성(북성)+몽촌토성(남성) | |
왕조사 | • 발전기┏ 고이왕(234-286; 체제기틀) ┗ 근초고왕(346-375; 전성기) : 해상패권장악, 영토확장 ⇨ 이 시기 활발한 대외관계를 보여 줌 |
|
대외관계 | • 중국항로: 서해직항로의 개척 ⇨ 당항성(한강하류)~백령도/초도~산둥반도 ┌이전의 고구려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위험을 벗어남 └산둥반도, 요서진출의 계기가 됨 • 서진의 회유전문토기편과 육조(六朝)의 청자편 출토 → 이 시기 이미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줌 |
|
웅 진 시 대 |
• 문주왕(475)~무령왕/성왕(538). 64년간 도읍 | |
성곽 | • 도성(공주시내)+공산성 | |
왕조사 | • 중흥 기틀 : 무령왕(501-523,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언”) | |
대외관계 | • 남조국가에 적극적인 친선을 꾀함 • 서해남부사단항로인 남로(南路)의 개척(5c말 이후 개척~장보고) ⇨ 회진포(영산강하구)-흑산도~주산열도-밍조우(절강성 明州; 현 寧波)-항조우(杭州: 여기서부터는 운하 이용) * 강소성은 남경을 수도로 한 성으로, 절강성 바로 위에 위치해 밍조우에 도착한 배가 운하를 타고 이동한다. |
|
사 비 시 대 |
• 성왕16년(538)~의자왕(660) | |
성곽 | • 사비도성 : 도성+부소산성+나성(羅城) | |
왕조사 | • 중흥·발전기 : 성왕(523-554), 무왕-의자왕 | |
대외관계 | • 이 시기 서해직항로는 신라에게 빼앗김 →신라가 활용 |
백제의 남로 ⇨ 고려의 남로(개성-예성항~밍저우[or 취안저우(복건성 泉州)])와 유사
※ 수 : 삼국은 수 건국직후 경쟁적으로 사신을 파견
→ 수는 3국 견제와 등거리 외교로 나옴(3국왕 각각 책봉)
→ 서해직항로 신라가 주도권 장악(신라의 적극적 외교, 백제는 약화)
※ 당 : 이때는 신라가 고구려도 제치고 압도적으로 많은 조공횟수 기록
→ 수나라 까지는 고구려가 외교적 경쟁에 우위를 점했으나, 판도가 바뀜
10. <구당서>의 기록이다. 빈 칸 ㉠, ㉡에 들어갈 단어로 옳게 연결된 것은?
발해 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 ㉠ )의 별종이다. ( ㉠ )이(가) 망하자, 대조영은 그 무리를 이끌고 영주로 이사하였다. …… 대조영은 드디어 그 무리를 이끌고 동쪽 계루의 옛 땅으로 들어가 ( ㉡ )을 거점으로 하여 성을 쌓고 거주하였다. |
② ㉠ - 고조선, ㉡ - 동모산
③ ㉠ - 고구려, ㉡ - 동모산
④ ㉠ - 고구려, ㉡ - 장백산
⑤ ㉠ - 고조선, ㉡ - 송화강
정답: ③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이 다르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입장도 알아두기 바란다(=고려시대의 일반적인 발해사 인식)
11. 조선시대 후기에는 실학의 발달과 함께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의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우리의 역사, 지리, 국어 등을 연구하는 국학이 발전하였다. 국학자와 그의 업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이익은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의 체계화를 통하여 민족에 대한 주체 적 자각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② 이긍익은 조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하여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였다.
③ 이중환은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 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
④ 한치윤은 중국 및 일본의 자료를 참고하여 해동역사를 편찬하여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 히는 데 이바지하였다.
⑤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을 지어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정답: ③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지방까지 확대시킨 대표적인 인물은 이종휘, 유득공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영조27, 1751)를 서술하여 조선 8도(평안, 함경, 황해, 강원, 경상, 전라, 충청, 경기)의 지세와 인심, 풍속 등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고대사 연구시야의 확대>
• 한백겸 : 역사지리의 연구를 통해 고대사 인식의 폭을 넓히려 했던 선구적 인물 → 그러나, 남과 북의 이원적 역사인식을 보여 줌 → 정약용에 이어짐 • 안정복 - 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삼국(무통)-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의 체계화를 통해 고대사를 체계적으로 인식 시도. 그러나 정통론에 입각한(이익의 삼한정통론의 영향) 고대사의 체계화 작업은 오히려 대의명분과 포폄을 강조함으로써 역사인식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 옴. • 이종휘 <동사> • 유득공 - <21도 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고대사를 이해하려 함 - <발해고> : 위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연구를 주목하게 함. 따라서 유득공은 발해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이를 한국사의 체계 안에 포함시켜야 함을 주장함(‘남북국시기’ 표현) ⇨ 이는 김정호의 <대동지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이어진다. |
12.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에 대한 서술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제1차 한·일 협약으로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두어 한국 내정 을 간섭했다.
② 제2차 한·일 협약으로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③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장관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였다.
④ 기유각서로 한국의 사법권을 박탈했다.
⑤ 간도 협약으로 일본은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했다.
정답: ③ 차관정치이다. 러일전쟁 이후의 대한제국 연구사는 아직도 침탈과 저항의 관점에서만 논해지고 있는 편이다(아직까지는 대체로 이 구조로 공부하면 된다).
<대한제국시기 일본의 국권침탈사>
1904 | 1905 | 1907 | 이후 |
※ 러일전쟁 · 한일의정서: 공수동맹 |
※전후처리:미→영→소 →‘을사조약’ |
※ 헤이그밀사사건 →고종퇴위 →이완용내각성립(내각의 권한 크게 강화) | |
• 한일협정서(1차):고문정치 →고문 파견해 정치간섭 |
• ‘을사보호조약’(2차) → 외교권 박탈 |
•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3차) : 차관정치 → 행정권 장악 |
• 기유각서: 사법권박탈(1909) • 경찰권 박탈(1910) • ‘한일합방’(1910) |
13. 6·25 전쟁(1950~53)의 전개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발생한 순서대로 옳게 나열한 것은?
ㄱ. 중공군 참전 ㄴ. 스탈린 사망 ㄷ. 정전회담 개시 ㄹ. 인천상륙작전 ㅁ. 미 대통령 선거, 아이젠하워 당선 |
② ㄹ - ㄱ - ㄷ - ㅁ - ㄴ
③ ㄴ - ㄷ - ㄹ - ㅁ - ㄱ
④ ㅁ - ㄹ - ㄱ - ㄴ - ㄷ
⑤ ㅁ - ㄹ - ㄴ - ㄱ - ㄷ
정답: ②
- 한국전쟁 중에 맥아더가 해임되고, 이후 미국에서 대선(1952.11)이 벌어졌다. 맥아더의 이른바 ‘고자문제’와 더불어 수업시간 중에 언급했던 내용이다(당시 맥아더가 대선후보로까지 거론되기도 했었다. ‘고자’는 안된다고 당시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고). 당시 미국대선은 누구를 후보로 내든 공화당이 이긴다고 예상하고 있던 때였다. 이때 공화당은 전쟁영웅을 대선후보로 지목했는데, 그 중 하나가 서부전선의 영웅 아이젠하워고, 또 하나가 태평양전쟁의 영웅 맥아더였다. 그러나 맥아더의 고집스런 태도로 인해 맥아더는 곧 대상에서 제외됐다.
- 스탈린은 정전회담 전에 사망했다(1953.3). 미국에 아이젠하워 정권이 들어서고,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휴전회담은 급물살을 탔고, 이어 7월에 휴전회담이 마무리되었다.
- 한국전쟁 중에 맥아더가 해임되고, 이후 미국에서 대선(1952.11)이 벌어졌다. 맥아더의 이른바 ‘고자문제’와 더불어 수업시간 중에 언급했던 내용이다(당시 맥아더가 대선후보로까지 거론되기도 했었다. ‘고자’는 안된다고 당시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고). 당시 미국대선은 누구를 후보로 내든 공화당이 이긴다고 예상하고 있던 때였다. 이때 공화당은 전쟁영웅을 대선후보로 지목했는데, 그 중 하나가 서부전선의 영웅 아이젠하워고, 또 하나가 태평양전쟁의 영웅 맥아더였다. 그러나 맥아더의 고집스런 태도로 인해 맥아더는 곧 대상에서 제외됐다.
- 스탈린은 정전회담 전에 사망했다(1953.3). 미국에 아이젠하워 정권이 들어서고,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휴전회담은 급물살을 탔고, 이어 7월에 휴전회담이 마무리되었다.
14. 해방 이후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설명이다. 연결이 옳지 않은 것은?
① 1945년도 12월 모스크바의 3국 외상회의 -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을 결정
② 미·소 공동 위원회 - 정당과 사회단체 선정 문제 등으로 결렬
③ 5·10 총선거 - 제헌국회의 구성
④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 -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친일파 처벌 좌절
⑤ 6·25 전쟁 발발 - 유엔총회에서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
정답: ⑤ 유엔총회가 아니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정.
- 유엔은 유례없이 빠르게 대응. 불과 하루만에 유엔안보리를 소집해 ‘침략격퇴와 지원 제공’에 관한 결의안 채택함(소련의 불참으로 결의안 채택에 반대도 없게 됨).
⇨ 유엔군 사령부 창설(1950.7.7, 도쿄. 사령관 맥아더) : 미8군 사령부(지상군, 사령관 워커), 미 극동해군사령부, 미 극동공군사령부 등
· 미소의 분할점령
┌소련진주(8월):간접통치 →정부형태가 빨리 나옴
└미군진주(9.8):직접통치 →모든형태의 정부 부정
· 해방정국의 형성
· 해외운동가들의 귀국
1946 :
· 모스크바삼상회의(1945.12)
┏미국안: 신탁통치
┗소련안: 임시정부 수립→미소공위 실시&남북 제정당·사회단체와 협의
• 찬반탁 정국의 형성
• 미소공위 대비
┏남한┌미군정
┃ └좌파
┗북한
• 미국 태도: 미소협조정책
┏좌우합작파 지지
┗┌이승만지지 X
└좌파지지 X(본격 대립)
1947 :
· 트루먼 독트린 (1947.3)
• 미국: 미소협조정책 포기
• 한반도문제 유엔이관 (1947.11)
1948 :
· 유엔한국위원단의 활동 → 유엔소총회 결정
•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운동 : ‘4김회담 제의’
→평양방문(연석회의, 지도자회의)
• 제주도 4·3사건
• 5·10선거(단독선거)
• 정부구성 → 최초의 입법안이 반민족행위자 처벌법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 미·영·프·소·대만의 5개 상임이사국과 6개 비상임 이사국으로 구성됨
- 유엔은 유례없이 빠르게 대응. 불과 하루만에 유엔안보리를 소집해 ‘침략격퇴와 지원 제공’에 관한 결의안 채택함(소련의 불참으로 결의안 채택에 반대도 없게 됨).
⇨ 유엔군 사령부 창설(1950.7.7, 도쿄. 사령관 맥아더) : 미8군 사령부(지상군, 사령관 워커), 미 극동해군사령부, 미 극동공군사령부 등
<해방공간의 정세>
1945 :
· 미소의 분할점령
┌소련진주(8월):간접통치 →정부형태가 빨리 나옴
└미군진주(9.8):직접통치 →모든형태의 정부 부정
· 해방정국의 형성
· 해외운동가들의 귀국
1946 :
· 모스크바삼상회의(1945.12)
┏미국안: 신탁통치
┗소련안: 임시정부 수립→미소공위 실시&남북 제정당·사회단체와 협의
• 찬반탁 정국의 형성
• 미소공위 대비
┏남한┌미군정
┃ └좌파
┗북한
• 미국 태도: 미소협조정책
┏좌우합작파 지지
┗┌이승만지지 X
└좌파지지 X(본격 대립)
1947 :
· 트루먼 독트린 (1947.3)
• 미국: 미소협조정책 포기
• 한반도문제 유엔이관 (1947.11)
1948 :
· 유엔한국위원단의 활동 → 유엔소총회 결정
•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운동 : ‘4김회담 제의’
→평양방문(연석회의, 지도자회의)
• 제주도 4·3사건
• 5·10선거(단독선거)
• 정부구성 → 최초의 입법안이 반민족행위자 처벌법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 미·영·프·소·대만의 5개 상임이사국과 6개 비상임 이사국으로 구성됨
15.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 과정의 순서로 옳은 것은?
(시작일과 준공일을 적시하지 않은 채로 출제됨)
경부고속도로, 울산 정유공장, 마산 수출자유지역, 포항제철 |
정답. 울산 정유공장(1963.3 착공~1964년 초 준공) → 마산 수출자유지역(1970.1월 <수출자유지역설치법>공포, 4월 ‘마산수출자유지역관리청’ 개청), 경부고속도로(1968.2 기공~1970.7.7 완공), 포항제철(1970.4 기공~1973년 준공)
16. 조선초기의 문학과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금오신화 : 평양, 개성, 경주 등에서 펼쳐지는 남녀 간의 애정을 주제로 함
② 용비어천가 : 세종이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여 지은 것
③ 월인천강지곡 : 정인지 등이 왕조의 창업 과정을 찬미한 것
④ 관동별곡 : 송대의 문학의 영향을 받은 성리학자 안축(安軸)의 대표작
⑤ 연주시격 : 정도전이 당·송 시대 시의 정수를 모아 편찬한 것
정답: ①
- 금오신화 : <만복사저포기>(남원 노총각의 귀신환생과의 사랑)·<이생규장전>(개성 남녀 부부의 사랑)·<취유부벽정기>(송도 인물이 평양에 가서 기자조선 딸을 통해 망국사연을 들음)·<남염부주지>(경주 인물과 염라대왕의 대화)·<용궁부연록>(송도 인물의 용궁체험과 삶의 무상) 등 5편이 전하는 한문 단편소설작품집이다.
- 정철의 가사 :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4편
- 연주시격 : 7언절구로 된 당시(唐詩)를 원대(元代)에 추려 모은 중국의 시집으로, 조선에서 많이 읽혔다. 이에 대해서는 성종대 언해하여 간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1) ‘月印千江之曲’ : 부처가 백억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 교화를 베푸는 것이 마치 달이 천 강에 비친 것과 같다는 뜻. 달은 하나이지만 강에 비친 모습이 수없이 많다는 것은 부처에도 해당하고 중생에도 해당한다는 비유.
2) 석가의 일대기를 한문으로 엮은 <석가보>(釋迦譜)를 기초로 해서 <석보상절>(釋譜詳節)이라 함
- 금오신화 : <만복사저포기>(남원 노총각의 귀신환생과의 사랑)·<이생규장전>(개성 남녀 부부의 사랑)·<취유부벽정기>(송도 인물이 평양에 가서 기자조선 딸을 통해 망국사연을 들음)·<남염부주지>(경주 인물과 염라대왕의 대화)·<용궁부연록>(송도 인물의 용궁체험과 삶의 무상) 등 5편이 전하는 한문 단편소설작품집이다.
- 정철의 가사 :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4편
- 연주시격 : 7언절구로 된 당시(唐詩)를 원대(元代)에 추려 모은 중국의 시집으로, 조선에서 많이 읽혔다. 이에 대해서는 성종대 언해하여 간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용비어천가 | 월인천강지곡1) |
• 악장(樂章) 문학(우리말 노래) +서사시 형식 • 훈민정음을 처음으로 사용한 문학작품(월인천강지곡이 보다 진전된 형태) • 비슷한 시기에 창작 • 공덕 찬양 : 창업시조 6대 행적 찬양 vs 석가의 전생을 통해 부처를 찬양 |
|
• 왕조서사시 : 건국시조들을 찬양하고, 조선왕조의 창건을 합리화하는 노래(세종27→29년 완성) → 곡은 <여민락>이라 함 ⇨ 삼국, 고려시대의 건국신화 표방을 재현함 • 국가적인 사업으로 편찬(국가적인 이념확산) : 정인지, 권제, 안지 등이 지음 |
• 불교서사시 : 세종28년(1446) 소헌왕후 심씨가 세상을 떠나자,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 수양대군 통해 <석보상절>2)을 국문으로 마련하게 함 →왕 29년 <석보상절>이 완성되자, 그것을 참고로 왕 스스로 <월인천강지곡>을 지음 ⇨ 후일 이 둘을 합본해 <월인석보>로 전함 • 왕이 개인이나 가족의 신앙따라 되도록 드러내지 않고 창작(왕실 가족들의 위안) |
1) ‘月印千江之曲’ : 부처가 백억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 교화를 베푸는 것이 마치 달이 천 강에 비친 것과 같다는 뜻. 달은 하나이지만 강에 비친 모습이 수없이 많다는 것은 부처에도 해당하고 중생에도 해당한다는 비유.
2) 석가의 일대기를 한문으로 엮은 <석가보>(釋迦譜)를 기초로 해서 <석보상절>(釋譜詳節)이라 함
17. 임진왜란 동안 조선군이 왜군을 물리친 전투를 나열한 것이다 시기 순으로 옳게 배열한 것은?
ㄱ. 진주대첩 ㄴ. 명량대첩 ㄷ. 한산대첩 ㄹ. 행주대첩 |
② ㄱ - ㄹ - ㄷ - ㄴ
③ ㄷ - ㄱ - ㄹ - ㄴ
④ ㄷ - ㄹ - ㄱ - ㄴ
⑤ ㄹ - ㄷ - ㄴ - ㄱ
정답: ③ 임진왜란 전쟁발발(1592.4.13: 개국후 200년뒤)
왜란 (1592-3) |
• 육군의 패전(2개월만에 전국토 함락위기) 부산성(정발 전사), 동래성(송상헌 전사) 함락 →신립의 패배(4.28. 충주 탄금대, 신립 자결) →선조 피난&한성점령(5.2) →평양함락(6.13) →함경도까지 진출(6.17) • 수군의 승리(일본 육·수군/보급선의 연결 좌절) 옥포(5.7) →사천(5.29) →한산도대첩(7.8: 일본의 서해상 진출 좌절, 전라도 곡창지대 보존, 전주사고본 보존) • 의병의 활동과 조선군의 승리 조헌·영규의 금산전투(8월) →1차 진주대첩(1592.10. 진주목사 김시민+의병장 곽재우) →행주대첩(1593.2. 권율) →2차 진주혈전(6월, 일본군의 보복, 나주의병 김천일 전사) →일본군의 철수 시작(8월) →선조 한성복귀(10월) • 명군의 참전: 평양성 탈환(1593.1) →벽제관전투 패배 |
정유재란 (1597-8) |
※도요토미 명과의 화의조건에 반발하여 조선 재침을 결정 • 정유재란 발발(1597.1) →이순신 투옥 →원균의 칠전량 패배(7월) • 명량해전(9월, 진도 울돌목) →도요토미 유언, 일본군 철군시작(1598.9) →노량해전(1598.11) |
18. 조선시대 관직 중 당상관에 해당하는 자리가 아닌 것은?
① 승정원 승지
② 사헌부 대사헌
③ 한성부 판윤
④ 예문관 대제학
⑤ 이조 전랑
정답: ⑤ 당상관(堂上官)이란 말 그대로 당위에 서서 정치를 논할 수 있는 계층을 말한다. 이는 고려와 구분되는 조선조의 특징적인 관제로서 언젠가는 꼭 출제될 문제라고 이미 2009년 강의에서 지적하고 문제로 출제하였다.
● 전랑(銓郞) : ‘전(銓)’이란 인사를 뜻하고, ‘랑(郎)’이란 5품이하의 관리를 칭한다. 즉 전랑이란 “인사를 담당하는 5품이하의 관리”란 뜻이다. 누누이 얘기한 말이다. 한국사는 한자의 원뜻만 풀이할 줄 알아도 풀 수 있는 문제가 꽤 된다. 이 문제가 단적인 예이다.
- 이조전랑직은 조선조 나타난 특이한 정치현상이다. ‘사림정치사’와 ‘붕당정치사’를 포괄하는 조선정치의 중요한 특징이므로 잘 기억해야 한다. 중종대 사림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이른바 ‘전랑권’을 형성시켰다. 이후 이 자리는 분당의 원인이 되고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붕당타파의 기치를 내걸고 탕평책을 실시했던 영조·정조기에 폐지됐다.
● 전랑(銓郞) : ‘전(銓)’이란 인사를 뜻하고, ‘랑(郎)’이란 5품이하의 관리를 칭한다. 즉 전랑이란 “인사를 담당하는 5품이하의 관리”란 뜻이다. 누누이 얘기한 말이다. 한국사는 한자의 원뜻만 풀이할 줄 알아도 풀 수 있는 문제가 꽤 된다. 이 문제가 단적인 예이다.
- 이조전랑직은 조선조 나타난 특이한 정치현상이다. ‘사림정치사’와 ‘붕당정치사’를 포괄하는 조선정치의 중요한 특징이므로 잘 기억해야 한다. 중종대 사림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이른바 ‘전랑권’을 형성시켰다. 이후 이 자리는 분당의 원인이 되고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붕당타파의 기치를 내걸고 탕평책을 실시했던 영조·정조기에 폐지됐다.
중종 | 선조 | 영조~정조 |
· 사림의 진출기 · 전랑권의 형성 |
· 붕당타파의 시기 · 전랑권의 폐지 |
|
· 사림의 진출·성장을 도움 · 막강한 인사권을 지님 →판서도 관여 못함 |
· 동서분당의 원인이 됨 →붕당정치가 격화되고, 붕당정치의 주요인이 됨 |
· 영조대 먼저 폐지 →정조대 완전히 폐지됨 |
19. 조선의 관리 선발에 관한 다음의 용어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선거(選擧) : 고시(고시)제도와 천거(천거) 제도를 합쳐 일컬음
② 취재(취재) : 하급관리나 하급 기술관원 시험
③ 관광(관광) : 과거를 보러가는 것
④ 홍패(홍패) : 관직에 천거된 인재에게 주는 증서
⑤ 경과(慶科) :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시행하는 시험
정답: ④ 과거합격자에게 주는 합격증서이다. 크게 홍패와 백패가 있는데 왕이 친전하는 문무과에만 홍패를 수여한다[전시(殿試)가 있는 시험]. 그리고 왕이 친전하는 시험에는 어보가 찍힌다는 것도 기억해두자. 암기법은 몇 가지 특징만 잘 익힌다면 의외로 간단하다.
<과거 합격증서>
문·무과
|
잡과, 소과(생진과)
|
· 왕이 친전 : 초시-복시-전시의 3층제 · 홍패 수여 · 어보가 찍힘 |
· 왕 친전 X : 초시-복시의 2단계 · 백패 수여 |
20. 실학자의 주요 저서를 오래된 순서대로 옳게 나열한 것은?
ㄱ. 정약용의 <목민심서> ㄴ. 박지원의 <열하일기> ㄷ. 이수광의 <지봉유설> ㄹ. 유형원의 <반계수록> |
정답: 이수광 <지봉유설>(광해군) → 유형원 <반계수록>(현종; 영조대 왕명으로 간행되기도 함) → 박지원 <열하일기>(정조) → 정약용 <목민심서>
이수광 <지봉유설> | · 광해군대 활동 · 왕족으로 관직에 대한 욕심을 뒤로한 채 주체성에 입각한 문화백과사전을 저술 · 개방적이고 유연한 태도로 타 사상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태도(양명학, 불교, 도교에 개방적 →성리학 탄력적 수용) · 외국의 문물에 대해서도 호기심있는 접근 :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구라파국 지도>를 처음 소개하였고, “외국”조에서 외국을 소개하였는데 동남아, 아라비아, 유럽(포루투칼·영국의 군함 등에 큰 관심보임)까지 소개 · 그 외에 동·식물·곤충에 대한 언급까지 그야말로 백과사전이었다. |
유형원 | · 현종대 활동 : 유형원의 활동시기를 잘 알아두어야 한다. →이를 통해 시기뿐 아니라 유형원 사상의 특질을 알 수 있다(다른 이에 비해 신분적 한계가 있다는 것). |
박지원 | · 정조대 활동 · 홍대용, 박제가 등 교류.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밤새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김. |
정약용 | · 정조대 정치활동가(화성축조). · 실학의 집대성 · 정약용의 저술 : 대부분 순조대 신유박해로 유배간 이후 저술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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