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2일에 시행한 국가직 7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다음 설명에 해당하는 토기는?
밑이 납작한 항아리 양쪽 옆으로 손잡이가 하나씩 달리고 목이 넓게 올라가서 다시 안으로 오므라들고, 표면에 집선(集線)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청천강 이북, 요령성과 길림성 일대에 분포한다. 이 토기는 고인돌, 거친무늬거울, 비파형동검과 함께 고조선의 특징적인 유물로 간주된다. |
② 미송리식 토기
③ 눌러찍기무늬 토기
④ 덧띠새김무늬 토기
2. 다음 교서가 발표된 시기의 정치 상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오늘날 사설(邪說)의 폐단을 바로 잡는 길은 더욱 정학(正學)을 밝히는 길밖에 없다.···(중략)··· 연전에 서학(西學) 서적을 구입해 온 이승훈은 어떤 속셈이든지 간에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전 현감 이승훈을 예산현으로 귀양을 보내고, 이외 시골 백성에게도 상줄 만한 백성은 상주어야 할 관서가 있어야 하니 묘당(廟堂)에서는 소관관서를 철저히 감독하라. ···(중략)··· 이렇게 교시한 뒤에도 다시 서학(西學)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어찌 정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척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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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화성이 완성되었고 노론 벽파와 시파, 남인간의 갈등이 커졌다.
③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환국정치가 이어지고 장길산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④ 근기(近畿) 지역에 거주하는 훈구세력은 실용적인 학문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 정답 : ②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정조 때의 교서이다. 신해박해로 윤지충은 처형되었으나 ‘이승훈은 귀양을 보냈다’는 것을 통해 비교적 정조 때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입장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순조가 즉위하여 노론 벽파가 득세하면서 이승훈은 이가환, 정약종, 주문모와 더불어 신유박해 때 사형 당하였다.
② 화성이 완성되었고 노론 벽파와 시파, 남인간의 갈등은 정조 때이다.
① 탕평 정치가 시작은 숙종 때 최초로 시행하였고 속대전은 영조 때 편찬되었다.
③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환국정치가 이어지고 장길산 농민군이 봉기한 것은 숙종 때이다.
④ 근기(近畿) 지역에 거주하는 훈구세력은 실용적인 학문 경향으로 과학 기술이 발달한 것은 조선 초기이다.
정답 : ②
정조 대에는 1791년 진산 사건(珍山事件)을 계기로 척사론이 정치적 쟁점으로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조는 1795년 ‘척사학교(斥邪學敎)’를 발표하여 그 동안 서학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여 발표하기도 하였다.
② 정조 대에는 수원 화성이 축조되었으며, 노론 벽파와 시파, 남인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① 속대전의 편찬은 영조 대의 사실이다.
③ 수차례에 걸친 환국은 숙종 대의 사실이고 장길산은 숙종 대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에서 일어난 도적 떼의 수괴로 알려져 있다.
④ 훈구세력은 조선 전기(15세기)의 집권 정치 세력이다.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정조 때의 교서이다. 신해박해로 윤지충은 처형되었으나 ‘이승훈은 귀양을 보냈다’는 것을 통해 비교적 정조 때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입장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순조가 즉위하여 노론 벽파가 득세하면서 이승훈은 이가환, 정약종, 주문모와 더불어 신유박해 때 사형 당하였다.
② 화성이 완성되었고 노론 벽파와 시파, 남인간의 갈등은 정조 때이다.
① 탕평 정치가 시작은 숙종 때 최초로 시행하였고 속대전은 영조 때 편찬되었다.
③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환국정치가 이어지고 장길산 농민군이 봉기한 것은 숙종 때이다.
④ 근기(近畿) 지역에 거주하는 훈구세력은 실용적인 학문 경향으로 과학 기술이 발달한 것은 조선 초기이다.
정답 : ②
정조 대에는 1791년 진산 사건(珍山事件)을 계기로 척사론이 정치적 쟁점으로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조는 1795년 ‘척사학교(斥邪學敎)’를 발표하여 그 동안 서학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여 발표하기도 하였다.
② 정조 대에는 수원 화성이 축조되었으며, 노론 벽파와 시파, 남인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① 속대전의 편찬은 영조 대의 사실이다.
③ 수차례에 걸친 환국은 숙종 대의 사실이고 장길산은 숙종 대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에서 일어난 도적 떼의 수괴로 알려져 있다.
④ 훈구세력은 조선 전기(15세기)의 집권 정치 세력이다.
3. 일제 말 조선총독부의 지배 정책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① 만주사변 이후 남면북양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 방직 자본가를 보호하였다.
② 중일전쟁 이후 새로운 미곡 증산을 위한 흥남질소 비료공장을 설립하였다
③ 태평양전쟁 이후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인 청년을 국내외로 동원하였다.
④ 침략전쟁에 필요한 근로보국대 동원, 놋그릇 공출 등 노동력과 물자의 수탈을 강화하였다.
● 정답 : ②
● 해설 :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성장한 일제 독점 자본은 1920년대부터 한국에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독점 자본들은 광업, 비료, 섬유 회사 등을 설립하고 우리나라의 공업 생산을 장악해 나갔다. 1926년 함경도의 부전강 수력발전소가 건립되고 그 전력을 이용하여 1927년 흥남에 조선 질소 비료 공장이 설립되었다. ② 중일 전쟁은 1937년으로 민족 말살 통치 시기이다.
정답 : ②
흥남 질소 비료 공장의 설립은 1927년의 사실로서 중일전쟁(1937) 이전의 사실이다.
① 만주사변(1931) 이후 세계대공황으로 원료의 수급이 어려워지자 조선을 원료 공급지화 하는 과정에서 남면북양 정책이 실시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 방직 자본가를 보호하였다.
③ 태평양 전쟁(1941) 이후 1944년에 일제에 의한 강제징병제가 실시되었다.
④ 1938년 국가총동원법 이후 인적 및 물적 자원에 대한 수탈이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근로보국대의 동원이나 놋 그릇 등 쇠붙이 공출제와 함께 강제 징용제 등 노동력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었다.
● 해설 :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성장한 일제 독점 자본은 1920년대부터 한국에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독점 자본들은 광업, 비료, 섬유 회사 등을 설립하고 우리나라의 공업 생산을 장악해 나갔다. 1926년 함경도의 부전강 수력발전소가 건립되고 그 전력을 이용하여 1927년 흥남에 조선 질소 비료 공장이 설립되었다. ② 중일 전쟁은 1937년으로 민족 말살 통치 시기이다.
정답 : ②
흥남 질소 비료 공장의 설립은 1927년의 사실로서 중일전쟁(1937) 이전의 사실이다.
① 만주사변(1931) 이후 세계대공황으로 원료의 수급이 어려워지자 조선을 원료 공급지화 하는 과정에서 남면북양 정책이 실시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 방직 자본가를 보호하였다.
③ 태평양 전쟁(1941) 이후 1944년에 일제에 의한 강제징병제가 실시되었다.
④ 1938년 국가총동원법 이후 인적 및 물적 자원에 대한 수탈이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근로보국대의 동원이나 놋 그릇 등 쇠붙이 공출제와 함께 강제 징용제 등 노동력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었다.
4. 다음과 같은 주장이 발표된 시기의 역사적 사실로 가장 적절한 것은?
우리가 지금 의(義)를 내세워 주장하는 것은 그 본의가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蒼生)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려는 것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 횡포한 강적(强賊) 무리를 구축(驅逐)하고자 함이다. 양반과 호강(豪强)에게서 고통 받는 민중들과 방백(方伯)과 수령 밑에서 굴욕을 받는 하급 관리들은 우리처럼 원한이 깊은 자이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에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소용없으리라.
-호남 창의대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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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급진 개화파가 문벌 폐지와 청에 대한 사대관계 청산을 촉구하였다.
③ 고종이 칭제건원의 요청을 수용하고 구본신참의 개혁 과제를 공포하였다.
④ 일본이 공사관 보호 명분으로 서울에 침입하고 서해 지역에서 청을 공격하였다
● 정답 : ④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발표된 전봉준의 격문으로 폐정개혁안 실천 시기에 청과 일본 군대가 들어와 청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① 러일 전쟁 무렵에 국외 중립을 선언(1904년)하였다.
② 갑신정변(1884년)의 내용이다.
③ 대한제국(1897년)에 대한 설명이다.
정답 : ④
제시된 사료는 동학농민전쟁(1894) 당시 전봉준의 격문이다.
④ 이 시기 일본은 일본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인천에 군대를 파병(1894. 5. 9)하고 경복궁을 점령(1894. 6. 21)하였으며, 풍도 앞바다의 청군을 공격함으로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1894. 6. 23)
① 대한제국의 영세 중립화 선언은 1904년 1월 21일의 사실로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시기의 사실이다.
② 급진 개화파가 문벌의 폐지와 청에 대한 사대관계 청산을 촉구한 것은 갑신정변 때 제시된 14개조의 개혁 정강의 내용이다.
③ 고종이 칭제건원을 선포하고 구본신참의 개혁과제를 공포한 것은 1897년 10월 대한제국과 관련된 내용이다.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발표된 전봉준의 격문으로 폐정개혁안 실천 시기에 청과 일본 군대가 들어와 청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① 러일 전쟁 무렵에 국외 중립을 선언(1904년)하였다.
② 갑신정변(1884년)의 내용이다.
③ 대한제국(1897년)에 대한 설명이다.
정답 : ④
제시된 사료는 동학농민전쟁(1894) 당시 전봉준의 격문이다.
④ 이 시기 일본은 일본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인천에 군대를 파병(1894. 5. 9)하고 경복궁을 점령(1894. 6. 21)하였으며, 풍도 앞바다의 청군을 공격함으로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1894. 6. 23)
① 대한제국의 영세 중립화 선언은 1904년 1월 21일의 사실로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시기의 사실이다.
② 급진 개화파가 문벌의 폐지와 청에 대한 사대관계 청산을 촉구한 것은 갑신정변 때 제시된 14개조의 개혁 정강의 내용이다.
③ 고종이 칭제건원을 선포하고 구본신참의 개혁과제를 공포한 것은 1897년 10월 대한제국과 관련된 내용이다.
5. 다음 선언문이 발표된 배경으로 옳은 것은?
우리는 피로 건립한 독립국과 정부가 이미 존재함을 다시 선언한다. 5천 년의 주권과 3천 만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자기의 정치 활동을 옹호하고 외래의 신탁 통치를 배격함에 있다. 우리의 혁혁한 혁명을 완성하자면 민족의 일치로써 최후까지 분투할 뿐이다. |
② 김구와 김규식이 참가한 남북지도자회의가 성과 없이 끝났다.
③ 중도 세력이 좌우 대립을 극복하기 위하여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였다.
④ 유엔 총회에서 유엔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 정답 : ①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김구, 이승만을 중심으로 신탁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위원회의 선언문이다.
①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소련·영국의 3국 외상회의(1945.12)에서는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의 설치, 최고 5년간의 한반도 신탁 통치 등을 결정하였다. 이를 둘러싸고 좌익과 우익은 격렬하게 대립하였으며,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었다. 이에 분단을 우려한 인사들의 좌우 합작 운동이 전개되었다.
정답 : ①
제시된 사료는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성명서로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 따라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에 반발하여 발표되었다.
② 김구와 김규식이 주도한 남북지도자회의는 1948년 4월 27일에서 31일 사이에 평양에서 열렸으며, ③ 중도 세력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위원회의 활동은 1946년 7월 이후의 사실이다.
④ 유엔 총회에서 유엔 감시 하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결정한 것은 1947년 11월의 사실이다.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김구, 이승만을 중심으로 신탁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위원회의 선언문이다.
①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소련·영국의 3국 외상회의(1945.12)에서는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의 설치, 최고 5년간의 한반도 신탁 통치 등을 결정하였다. 이를 둘러싸고 좌익과 우익은 격렬하게 대립하였으며,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었다. 이에 분단을 우려한 인사들의 좌우 합작 운동이 전개되었다.
정답 : ①
제시된 사료는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성명서로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 따라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에 반발하여 발표되었다.
② 김구와 김규식이 주도한 남북지도자회의는 1948년 4월 27일에서 31일 사이에 평양에서 열렸으며, ③ 중도 세력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위원회의 활동은 1946년 7월 이후의 사실이다.
④ 유엔 총회에서 유엔 감시 하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결정한 것은 1947년 11월의 사실이다.
6. 고려시대 농민의 생활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특정한 직역을 갖지 않은 농민은 조세와 공납, 국역의 부담을 졌다.
② 백정 농민 중에도 천역을 담당하는 계층이 있었는데 이들을 신량역천이라 하였다.
③ 특정한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의 본관지로 되돌아가게 하는 귀향형(歸鄕刑)에 처해졌다.
④ 군현별로 일정액을 할당하는 비총법(比摠法)이 실시되자 농민은 공동납으로 대응하였다.
● 정답 : ①
● 해설 :
① 자유로운 신분인 양민의 대다수는 농민들로서 이들은 백정이라고도 하였으며, 이들은 조세, 공납, 역이 부과되었으나 법제적으로는 과거 응시에 제약이 없었고 전지를 받는 군인으로 선발될 수도 있었다.
② 신량역천은 신분은 양인이나 천역을 담당하는 하층양민이며, 백정 농민은 직역이 없는 양민을 일컫는 것입니다.
③ 귀향형(歸鄕刑)은 농민이 아니라 관리가 죄를 저지르면 자신의 본관지로 내려 보내는 처벌이 있었다.
④ 조선 후기 영조 때 영정법에 기초하여 각도의 농지 총면적에 재해 면적을 삭감하고 수세의 총액을 할당해 전세를 징수하는 제도이다.
정답 : ①
① 고려시대 일반 농민을 지칭하던 ‘백정(白丁)’은 특정한 직역이 없었으며, 이에 따라 국가로부터 토지도 지급받지 못하였다. 고려시대 백정에게는 조세 ․ 공부 ․ 역이 부과되었다.
② 고려시대 신량역천인은 일반 농민 즉 백정(白丁)과는 구별되는 이들로, 상대적으로 천한 일을 하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 신량역천인으로는 어업에 종사하던 어간(魚干), 소금생산을 담당하던 염간(鹽干), 목축을 담당하던 목자간(牧者干), 철 ․ 구리 등을 채굴하던 철간(鐵干), 봉수 업무를 담당하던 봉화간(烽火干) 등이 있었다.
③ 고려시대 형벌 중 귀향형(歸鄕刑)은 일정 신분 이상의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의 본관지로 되돌아가게 하는 형벌이었으므로, 일반 농민이 받았던 형벌로는 옳지 않다.
④ 비총법(比摠法)은 조선 후기의 수취제도인 총액제 수취제도의 하나이다. 조선 후기 총액제의 형태로는 전세에 있어서 비총제, 군포에 있어서 군총제, 환곡에 있어서 환총제가 실시되었다.
● 해설 :
① 자유로운 신분인 양민의 대다수는 농민들로서 이들은 백정이라고도 하였으며, 이들은 조세, 공납, 역이 부과되었으나 법제적으로는 과거 응시에 제약이 없었고 전지를 받는 군인으로 선발될 수도 있었다.
② 신량역천은 신분은 양인이나 천역을 담당하는 하층양민이며, 백정 농민은 직역이 없는 양민을 일컫는 것입니다.
③ 귀향형(歸鄕刑)은 농민이 아니라 관리가 죄를 저지르면 자신의 본관지로 내려 보내는 처벌이 있었다.
④ 조선 후기 영조 때 영정법에 기초하여 각도의 농지 총면적에 재해 면적을 삭감하고 수세의 총액을 할당해 전세를 징수하는 제도이다.
정답 : ①
① 고려시대 일반 농민을 지칭하던 ‘백정(白丁)’은 특정한 직역이 없었으며, 이에 따라 국가로부터 토지도 지급받지 못하였다. 고려시대 백정에게는 조세 ․ 공부 ․ 역이 부과되었다.
② 고려시대 신량역천인은 일반 농민 즉 백정(白丁)과는 구별되는 이들로, 상대적으로 천한 일을 하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 신량역천인으로는 어업에 종사하던 어간(魚干), 소금생산을 담당하던 염간(鹽干), 목축을 담당하던 목자간(牧者干), 철 ․ 구리 등을 채굴하던 철간(鐵干), 봉수 업무를 담당하던 봉화간(烽火干) 등이 있었다.
③ 고려시대 형벌 중 귀향형(歸鄕刑)은 일정 신분 이상의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의 본관지로 되돌아가게 하는 형벌이었으므로, 일반 농민이 받았던 형벌로는 옳지 않다.
④ 비총법(比摠法)은 조선 후기의 수취제도인 총액제 수취제도의 하나이다. 조선 후기 총액제의 형태로는 전세에 있어서 비총제, 군포에 있어서 군총제, 환곡에 있어서 환총제가 실시되었다.
7. 조선 전기의 신분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공노비는 유외(流外)잡직으로 불리는 하급 기술관직을 가질 수 있었다.
② 서얼은 경국대전에 의해 문과 응시가 가능했지만 실제로는 제약을 받았다.
③ 지위가 높은 문무관원의 자손에게는 음서와 대가(代加) 등의 혜택이 주어졌다.
④ 국역노동이 끝난 공장(工匠)들은 시장을 상대로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판매하여 이득을 취하였다.
● 정답 : ②
● 해설 :
과거는 원칙상 양인 이상이면 가능하였으나 문과의 경우 탐관오리의 아들, 재가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에게는 응시를 제한하였다. 무과나 잡과의 경우는 제한이 없었으며, 서얼은 조선 후기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에 기용이 되기도 하였고 철종 때는 신해허통에 의해 문과 응시도 가능하였다.
정답 : ②
② 조선시대 서얼은 서얼차대법에 의해 문과 응시와 문반직 등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들은 주로 무과, 잡과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한품서용의 규제에 따라 최고 3품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다.
① 조선시대 공노비는 유외잡직(流外雜職)이라는 하급 기술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유외잡직은 공조, 교서관, 사섬서, 조지서, 사옹원, 사복시, 군기시, 장악원, 소격서, 액정서, 도화서 등에 소속되어 물품의 제조 등 노동력을 제공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던 직책을 말한다.
③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 관리의 후손, 3품 관원의 아들과 손자, 이조 ․ 병조 ․ 도총부 ․ 삼사 관원의 아들에게는 문음을 통한 관직 진출이 허용되었다. 또한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정3품 이상에게 별도로 부가된 품계를 아들, 동생, 사위, 조카 등에게 줄 수 있게 하였던 대가제(代加制)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④ 조선시대 관영수공업자들은 부역으로 동원되는 기간 외에는 사적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 수 있었다.
● 해설 :
과거는 원칙상 양인 이상이면 가능하였으나 문과의 경우 탐관오리의 아들, 재가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에게는 응시를 제한하였다. 무과나 잡과의 경우는 제한이 없었으며, 서얼은 조선 후기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에 기용이 되기도 하였고 철종 때는 신해허통에 의해 문과 응시도 가능하였다.
정답 : ②
② 조선시대 서얼은 서얼차대법에 의해 문과 응시와 문반직 등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들은 주로 무과, 잡과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한품서용의 규제에 따라 최고 3품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다.
① 조선시대 공노비는 유외잡직(流外雜職)이라는 하급 기술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유외잡직은 공조, 교서관, 사섬서, 조지서, 사옹원, 사복시, 군기시, 장악원, 소격서, 액정서, 도화서 등에 소속되어 물품의 제조 등 노동력을 제공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던 직책을 말한다.
③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 관리의 후손, 3품 관원의 아들과 손자, 이조 ․ 병조 ․ 도총부 ․ 삼사 관원의 아들에게는 문음을 통한 관직 진출이 허용되었다. 또한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정3품 이상에게 별도로 부가된 품계를 아들, 동생, 사위, 조카 등에게 줄 수 있게 하였던 대가제(代加制)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④ 조선시대 관영수공업자들은 부역으로 동원되는 기간 외에는 사적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 수 있었다.
8. 우리나라 도교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도교 진흥정책을 써서 불교사찰을 도관(道觀)으로 쓰기도 했다.
② 유학자 최치원은 도교와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 삼교를 회통한 사상가로 추앙받았다.
③ 고려 문종 때 복원궁이라는 도교 사원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도교를 보급하였다.
④ 조선 초기에는 소격서라는 관청을 두고 일월성신에 대한 제사로서 초제를 주관하게 했다.
● 정답 : ③
● 해설 :
도교는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며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번영도 기원하였기에 예종 때 도관(도교 사원)인 복원궁(福源宮)이 건립되어 하늘과 별들에 제사를 지냈다.
정답 : ③
③ 복원궁은 고려 예종 때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도교사원이다.
① 643년(보장왕 2) 당시의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의 건의로 당나라 태종으로부터 숙달(叔達) 등 도사 8인과 『도덕경』을 얻어와 도교를 국가의 종교로 유교 ․ 불교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처럼 적극적인 도교 진흥 정책을 썼던 연개소문은 불교사찰을 빼앗아 도교사원으로 쓰기도 하였다. (해동한국사 7급 446쪽)
② 최치원의 사상적 기본은 유학이었으나, 그는 유학자라고 자처하면서도 유교 외에 불교나 노장사상, 심지어는 풍수지리설까지도 아무 모순 없이 복합해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유교와 불교의 조화에 노력한 면이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을 비롯한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나타나 있다. 최치원은 1020년(현종 11) 현종에 의해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고, 다음 해에 문창후(文昌候)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④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복원궁, 신격전, 정사색, 소전색, 태청관, 태일전 등의 도교 사원을 태조 원년(1392) 소격전(昭格殿)으로 통합하였고, 세조 12년(1467)에는 다시 소격전을 소격서(昭格署)로 개편하여 일월성신에 대한 제사로서 도교 교육과 초제를 주관하게 하였다.
● 해설 :
도교는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며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번영도 기원하였기에 예종 때 도관(도교 사원)인 복원궁(福源宮)이 건립되어 하늘과 별들에 제사를 지냈다.
정답 : ③
③ 복원궁은 고려 예종 때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도교사원이다.
① 643년(보장왕 2) 당시의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의 건의로 당나라 태종으로부터 숙달(叔達) 등 도사 8인과 『도덕경』을 얻어와 도교를 국가의 종교로 유교 ․ 불교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처럼 적극적인 도교 진흥 정책을 썼던 연개소문은 불교사찰을 빼앗아 도교사원으로 쓰기도 하였다. (해동한국사 7급 446쪽)
② 최치원의 사상적 기본은 유학이었으나, 그는 유학자라고 자처하면서도 유교 외에 불교나 노장사상, 심지어는 풍수지리설까지도 아무 모순 없이 복합해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유교와 불교의 조화에 노력한 면이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을 비롯한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나타나 있다. 최치원은 1020년(현종 11) 현종에 의해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고, 다음 해에 문창후(文昌候)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④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복원궁, 신격전, 정사색, 소전색, 태청관, 태일전 등의 도교 사원을 태조 원년(1392) 소격전(昭格殿)으로 통합하였고, 세조 12년(1467)에는 다시 소격전을 소격서(昭格署)로 개편하여 일월성신에 대한 제사로서 도교 교육과 초제를 주관하게 하였다.
9. (가), (나)의 주장을 펼친 사람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가) 강도 일본이 우리의 생명을 초개(草芥)로 보아 을사 이후 13도의 의병이 있던 각 지방에서 일본 군대가 행한 폭행도 이루 다 적을 수 없거니와 ...(중략)... 우리는 일본의 강도정치 곧 이족(異族) 통제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 수단으로 우리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나) 슬프다! 나라와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속에서 다 죽게 되었구나. 구차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한 자는 도리어 살게 되나니 … (중략)… 죽음으로 임금의 은혜를 갚고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
<보 기>
㉠ (가) - 노령에서 항일 활동을 하였고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다.㉡ (가) - 의열단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고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 (나) -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이에 저항하여 자결하였다. ㉣ (나) -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고관을 죽였다. |
② ㉠, ㉣
③ ㉡, ㉢
④ ㉡, ㉣
● 정답 : ③
● 해설 :
(가)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1923년), (나) 을사조약(1905년) 당시 민영환의 유서입니다.
㉠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방문)를 사살(1909년)하고 뤼순 감옥에서 순국(1910년)하였다.
㉡ 윤봉길 의사는 한인 애국단 소속으로 홍코우 공원에서 일본 장성을 폭살(1932년)하였다.
정답 : ③
제시된 사료 (가)는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문이고 (나)는 을사조약 이후 민영환이 자결하면서 쓴 유서의 일부이다.
ㄴ. 신채호는 1923년 김원봉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문을 저술하여 의열단 활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1936년에 뤼순(여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ㄷ. 민영환은 을사조약에 반발하는 상소를 올리고 자결하였다.
ㄱ. 노령에서 항일운동을 하였고,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안중근이다.
ㄹ.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투탄 의거를 한 것은 윤봉길의 활동이다.
● 해설 :
(가)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1923년), (나) 을사조약(1905년) 당시 민영환의 유서입니다.
㉠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방문)를 사살(1909년)하고 뤼순 감옥에서 순국(1910년)하였다.
㉡ 윤봉길 의사는 한인 애국단 소속으로 홍코우 공원에서 일본 장성을 폭살(1932년)하였다.
정답 : ③
제시된 사료 (가)는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문이고 (나)는 을사조약 이후 민영환이 자결하면서 쓴 유서의 일부이다.
ㄴ. 신채호는 1923년 김원봉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문을 저술하여 의열단 활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1936년에 뤼순(여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ㄷ. 민영환은 을사조약에 반발하는 상소를 올리고 자결하였다.
ㄱ. 노령에서 항일운동을 하였고,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안중근이다.
ㄹ.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투탄 의거를 한 것은 윤봉길의 활동이다.
10. (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가) 이번 4월의 참사는 학생운동사상 최대 비극이요, 이 나라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중대 사태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우리 전국 대학교 교수들은 이 비상시국에 대처하여 양심의 호소를 하는 바이다. (나)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국민 관계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며, 선린관계 및 주권 상호존중 원칙에 입각한 양국 관계의 정상화를 상호 의망(意望)함을 고려하고, 양국의 공동 복지 및 공동 이익을 증진하고 국제평화 및 안전을 유지하는데 양국이… (중략)…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
<보 기>
㉠ 진보당 사건, 경향신문 폐간이 이어졌다.㉡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6․3 시위가 일어났다. ㉢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구성되어 군정이 실시되었다. ㉣ 부산정치파동으로 야당 국회의원이 정치적 공격을 받았다. |
② ㉡, ㉢
③ ㉡, ㉣
④ ㉢, ㉣
● 정답 : ②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가) 4·19 혁명 당시 대학 교수단의 시국 선언문(1960), (나) 한일 협정(한일 국교 정상화, 1965)이다.
㉠의 진보당 사건(1958년), 경향신문 폐간(1959년) ㉣의 부산 정치 파동(1952년)은 (가)이전인 1공화국의 사건이다.
정답 : ②
제시된 (가)는 1960년 4·19 혁명 때 발표된 대학 교수단의 시국 선언문(4. 25)이고, (나)는 1965년 한일협정문이다.
ㄴ.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일어난 6·3사태는 1964년의 사실이고,
ㄷ.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이후 혁명위원회가 개편된 기구로서 1961년의 사실이다.
ㄱ. 죽산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체포한 진보당 사건은 1958년의 사실이고, 경향신문의 폐간은 1959년의 일이다.
ㄹ. 부산 정치 파동은 1952년 5월의 사실로 이승만 재집권을 위한 목적에서 공비 토벌을 구실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땃벌떼, 백골단 등 폭력 조직을 조직하여 야당 국회의원들을 협박하였으며, 공산당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로 야당 국회의원 47명을 체포, 구속한 사건이다.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가) 4·19 혁명 당시 대학 교수단의 시국 선언문(1960), (나) 한일 협정(한일 국교 정상화, 1965)이다.
㉠의 진보당 사건(1958년), 경향신문 폐간(1959년) ㉣의 부산 정치 파동(1952년)은 (가)이전인 1공화국의 사건이다.
정답 : ②
제시된 (가)는 1960년 4·19 혁명 때 발표된 대학 교수단의 시국 선언문(4. 25)이고, (나)는 1965년 한일협정문이다.
ㄴ.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일어난 6·3사태는 1964년의 사실이고,
ㄷ.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이후 혁명위원회가 개편된 기구로서 1961년의 사실이다.
ㄱ. 죽산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체포한 진보당 사건은 1958년의 사실이고, 경향신문의 폐간은 1959년의 일이다.
ㄹ. 부산 정치 파동은 1952년 5월의 사실로 이승만 재집권을 위한 목적에서 공비 토벌을 구실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땃벌떼, 백골단 등 폭력 조직을 조직하여 야당 국회의원들을 협박하였으며, 공산당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로 야당 국회의원 47명을 체포, 구속한 사건이다.
11. 다음 괄호 안에 공통으로 들어갈 말로 옳은 것은?
서희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후계자이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을 국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경계를 가지고 말하면 귀국의 동경도 우리 국토 안에 들어와야 하는데 당신이 어떻게 침범했다고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또 압록강 안팎 역시 우리 경내인데 이제 ( )이 그 중간을 강점하고 있으면서 완악한 행위와 간사스러운 태도로서 교통을 차단했으므로 바다를 건너기보다도 왕래하기 곤란한 형편이니 국교가 통하지 못함은 ( )의 탓이다. … (후략)”라고 격앙된 기색으로 당당하게 논박하였다. |
② 여진
③ 돌궐
④ 몽골
● 정답 : ②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거란의 1차 침입(성종, 883년) 때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이다. 고려 다수의 신하들은 할지론(割地論)으로 전쟁을 막자는 주장을 하고 있었으나 서희는 "고려와 거란 양국의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라며 구실을 만들어, 여진으로 인해 거란과의 교통로가 막혀 있어 거란과의 교류가 어렵다고 주장하고 오히려 외교적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어내어 고려의 국경선이 압록강에 이르게 되었다.
정답: ②
제시된 사료는 거란의 1차 침입(고려 성종 12, 993) 때 서희가 거란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하는 과정에서 주장했던 내용이다. 서희는 고려가 거란과 통교하지 못함을 여진 때문이라고 하면서 “여진을 내쫓고 고려의 옛 땅을 돌려보내어 도로를 통하게 해주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으리오”라고 하며 당당하게 논박하였다.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거란의 1차 침입(성종, 883년) 때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이다. 고려 다수의 신하들은 할지론(割地論)으로 전쟁을 막자는 주장을 하고 있었으나 서희는 "고려와 거란 양국의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라며 구실을 만들어, 여진으로 인해 거란과의 교통로가 막혀 있어 거란과의 교류가 어렵다고 주장하고 오히려 외교적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어내어 고려의 국경선이 압록강에 이르게 되었다.
정답: ②
제시된 사료는 거란의 1차 침입(고려 성종 12, 993) 때 서희가 거란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하는 과정에서 주장했던 내용이다. 서희는 고려가 거란과 통교하지 못함을 여진 때문이라고 하면서 “여진을 내쫓고 고려의 옛 땅을 돌려보내어 도로를 통하게 해주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으리오”라고 하며 당당하게 논박하였다.
12. 발해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무왕 때에 돌궐, 일본 등과 외교관계를 맺어 당과 신라를 견제하였다.
② 문왕 때에 신라와의 상설 교통로를 설치하여 대립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③ 선왕 때에 대부분의 거란족을 복속시키고 요서지역으로 진출하였다.
④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 정답 : ③
● 해설 :
발해 선왕(宣王, 대인수)은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켰으며, 이후 요동 진출을 본격화하여 10세기 초에 거란이 이곳으로 진출하기까지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는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고 이에 맞추어 5경(京) 16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당시 당은 중흥시켜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
정답 : ③
선왕(대인수, 건흥 818~830) 때는 9세기 전반 발해의 중흥기로,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여 ‘해동성국’이라 부를 정도의 최대 판도를 마련하고, 지방 제도(5경 15부 62주)도 정비하였다.
● 해설 :
발해 선왕(宣王, 대인수)은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켰으며, 이후 요동 진출을 본격화하여 10세기 초에 거란이 이곳으로 진출하기까지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는 최대의 판도를 형성하였고 이에 맞추어 5경(京) 16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다. 당시 당은 중흥시켜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
정답 : ③
선왕(대인수, 건흥 818~830) 때는 9세기 전반 발해의 중흥기로,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여 ‘해동성국’이라 부를 정도의 최대 판도를 마련하고, 지방 제도(5경 15부 62주)도 정비하였다.
13. 다음과 같이 양반 사회를 비판한 실학자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양반이란 사족을 높여서 일컫는 말이다. 정선고을에 어떤 양반이 살고 있었는데, 어질고 책 읽기를 좋아하였다. 고을 군수가 부임할 적마다 방문하여 인사하였는데, 살림이 무척 가난하였다. 그래서 관가에서 내주는 환자를 타서 먹었는데 결국 큰 빚을 졌다. 그러자 마을 부자가 양반의 위세를 부러워해서 양반을 사겠노라 권유하니 그 양반은 기뻐서 승낙하였다. |
② ‘호질’을 통해 양반의 위선을 풍자하였다.
③ ‘과농소초’에서 농기구의 개량을 주장하였다.
④ ‘중용주해’에서 주자 학설 중심의 성리학을 비판하였다.
● 정답 : ④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연암 박지원의 한문 소설인 양반전 중의 일부로 당시의 무능한 양반과 부패한 관리들을 특유의 해학으로 예리하게 풍자 하였다.
④ ‘중용주해’는 조익의 저서이다.
① ‘한민명전의’에서 토지의 상한선을 설정하고 그 이상의 소유는 허락하지 않으면 토지가 균등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한전론을 주장하였다.
② ‘호질’을 통해 양반 계급의 허위적이고, 이중적인 도덕관을 통렬하게 풍자적으로 비판하였다.
③ ‘과농소초’는 농기구를 개량하고 농사 기술을 개선하며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영농 방법을 통해 농업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각종 대책을 제안했다.
정답 : ④
제시된 사료는 박지원의 『양반전』이다.
④ 『중용주해』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조익의 저술이다. 조익은 『중용주해』 등을 저술하여 효종에게 바쳤으며, 이는 주자의 장구(章句)를 크게 고친 것이었다.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연암 박지원의 한문 소설인 양반전 중의 일부로 당시의 무능한 양반과 부패한 관리들을 특유의 해학으로 예리하게 풍자 하였다.
④ ‘중용주해’는 조익의 저서이다.
① ‘한민명전의’에서 토지의 상한선을 설정하고 그 이상의 소유는 허락하지 않으면 토지가 균등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한전론을 주장하였다.
② ‘호질’을 통해 양반 계급의 허위적이고, 이중적인 도덕관을 통렬하게 풍자적으로 비판하였다.
③ ‘과농소초’는 농기구를 개량하고 농사 기술을 개선하며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영농 방법을 통해 농업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각종 대책을 제안했다.
정답 : ④
제시된 사료는 박지원의 『양반전』이다.
④ 『중용주해』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조익의 저술이다. 조익은 『중용주해』 등을 저술하여 효종에게 바쳤으며, 이는 주자의 장구(章句)를 크게 고친 것이었다.
14. 조선후기 가족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제사는 형제가 돌아가면서 지냈으며 책임을 분담하였다.
② 태어난 차례대로 족보에 기재하여 남녀 차별을 하지 않았다.
③ 입양제도가 확대되고 부계 위주의 족보가 적극적으로 편찬되었다.
④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하여 처가에서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정답 : ③
● 해설 :
고려에서 조선 중기까지는 조선 후기에 비해 여성의 지위가 높았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성리학적 의식과 예절이 발달하면서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가 발달하여 부계 중심의 족보가 편찬되고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양자를 입양하였다.
정답 : ③
③ 조선 후기 아들이 없는 집에서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대신 여기에는 이성불양(異姓不養)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또한 부계 위주의 가족 제도가 확립되어 부계 위주의 족보가 적극적으로 편찬되었다.
① 조선 후기의 제사는 반드시 큰 아들이 지내야 한다는 의식이 확산되었다. 윤회봉사는 조선 전기(15세기)까지의 가족제도의 형태이다.
② 조선 후기의 족보 기재는 출생 순이 아닌 남녀 순으로 하였다.
④ 남귀여가혼은 16세기 중반까지 존재하다가 조선 후기에는 친영제도가 정착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친영제도가 정착되어 혼인 후에 여자가 곧바로 남자 집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 해설 :
고려에서 조선 중기까지는 조선 후기에 비해 여성의 지위가 높았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성리학적 의식과 예절이 발달하면서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가 발달하여 부계 중심의 족보가 편찬되고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양자를 입양하였다.
구 분 | 고려~조선 전기(중기) | 조선 후기 |
가족의 범위 | 부계와 모계를 함께 고려 | 부계 위주 |
혼인 | • 왕실에서는 고려 전기까지 친족 간의 혼인 성행 • 남편이 결혼 후 처가에서 장기간 생활(남귀여가혼) |
친영제도 정착 |
재산 상속 | 자녀 균분 상속 | 장자 우대 상속, 자녀 차등 상속 |
제사 | 자녀들의 제사권 공유 | 적장자의 제사권 독점 |
가계 계승 | 아들이 없을 때 딸∙외손이 가계 계승, 족보에 모계 ∙ 사위도 기재 | 양자에 의한 가계 계승과 부계 이주의 족보 |
주거지 | 사위가 처가에 거주하기도 하고, 때로는 처가의 호적에 입적 | 동성 마을의 형성과 종중 형성 |
특 징 | 여성의 사회적 진출에는 제한이 있었으나 가정내 지위는 남성과 거의 대등 | 가부장적 종법 질서 구현, 적서 차별, 부계친족 중심, 친영 제도 확립 |
정답 : ③
③ 조선 후기 아들이 없는 집에서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대신 여기에는 이성불양(異姓不養)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또한 부계 위주의 가족 제도가 확립되어 부계 위주의 족보가 적극적으로 편찬되었다.
① 조선 후기의 제사는 반드시 큰 아들이 지내야 한다는 의식이 확산되었다. 윤회봉사는 조선 전기(15세기)까지의 가족제도의 형태이다.
② 조선 후기의 족보 기재는 출생 순이 아닌 남녀 순으로 하였다.
④ 남귀여가혼은 16세기 중반까지 존재하다가 조선 후기에는 친영제도가 정착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친영제도가 정착되어 혼인 후에 여자가 곧바로 남자 집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15. 통일신라시대 예술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석탑은 다각 다층탑이 많았고 석탑의 몸체를 받치는 받침이 보편화되었다.
② 건축이나 주종(鑄鐘)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나마(奈麻)와 같은 관등을 받았다.
③ 가야금 하나로 연주되던 시대에 비해 악기가 다양해지고 악기 편성이 풍부해졌다.
④ 굴식 돌방무덤이 발전하여 봉토로 호석으로 두르고 그 호석에는 12지 신상을 조각하였다.
● 정답 : ①
● 해설 :
신라 중대는 의식을 중시하는 교종의 영향으로 조형 미술이 발달하여 불국사 3층탑(석가탑)처럼 이중기단 위에 3층으로 쌓는 형식이 전형적인 통일 신라의 석탑 양식이 유행하였다. 신라 하대부터 점차 조형미는 쇠퇴하여 고려 시대의 석탑은 신라 양식을 일부 계승하면서 그 위에 독자적인 조형감각을 가미하여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특히 다각 다층탑이 많았고 안정감은 부족하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띠었고 석탑의 몸체를 받치는 받침이 보편화되었다.
정답 : ①
① 통일 신라는 이중기단에 3층탑이 보편적 형태였으며, 다층 다각의 탑과 석탑의 몸체를 받치는 받침이 있는 것은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② 주종(鑄鐘)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나마(奈麻)와 같은 관등을 받은 예로 성덕대왕 신종명을 들 수 있다. 이에 의하면 ‘대력(大曆) 6년(771) 신해년 12월 14일에 주종(鑄鐘) 대박사(大博士) 대나마(大奈麻) 박종일(朴從鎰)과 차박사(次博士) 나마(奈麻) 박빈나(朴賓奈)’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③ 신라 진흥왕 때에 대가야에서 항복한 우륵은 가야금 하나로 연주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이에 비해 악기가 다양해지고 악기 편성이 풍부해졌다.
④ 신라 통일 전 마립간 시기에는 돌무지 덧널무덤을 사용하였고, 통일 직전부터 굴식 돌방무덤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통일 신라 시기에는 굴식 돌방무덤이 발전하여 왕릉은 봉토로 호석으로 두르고 그 호석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형식이 유향하였다.
● 해설 :
신라 중대는 의식을 중시하는 교종의 영향으로 조형 미술이 발달하여 불국사 3층탑(석가탑)처럼 이중기단 위에 3층으로 쌓는 형식이 전형적인 통일 신라의 석탑 양식이 유행하였다. 신라 하대부터 점차 조형미는 쇠퇴하여 고려 시대의 석탑은 신라 양식을 일부 계승하면서 그 위에 독자적인 조형감각을 가미하여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특히 다각 다층탑이 많았고 안정감은 부족하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띠었고 석탑의 몸체를 받치는 받침이 보편화되었다.
정답 : ①
① 통일 신라는 이중기단에 3층탑이 보편적 형태였으며, 다층 다각의 탑과 석탑의 몸체를 받치는 받침이 있는 것은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② 주종(鑄鐘)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나마(奈麻)와 같은 관등을 받은 예로 성덕대왕 신종명을 들 수 있다. 이에 의하면 ‘대력(大曆) 6년(771) 신해년 12월 14일에 주종(鑄鐘) 대박사(大博士) 대나마(大奈麻) 박종일(朴從鎰)과 차박사(次博士) 나마(奈麻) 박빈나(朴賓奈)’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③ 신라 진흥왕 때에 대가야에서 항복한 우륵은 가야금 하나로 연주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이에 비해 악기가 다양해지고 악기 편성이 풍부해졌다.
④ 신라 통일 전 마립간 시기에는 돌무지 덧널무덤을 사용하였고, 통일 직전부터 굴식 돌방무덤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통일 신라 시기에는 굴식 돌방무덤이 발전하여 왕릉은 봉토로 호석으로 두르고 그 호석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형식이 유향하였다.
16. 다음과 같은 주장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만물이 생기고 나면 바르고 통한 기운을 받은 것이 사람이 되고, 편벽되고 막힌 기운을 받은 것이 물건이 된다. 물건은 편벽되고 막힌 기운을 받았기 때문에 이(理)의 전체를 받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기질을 따라 본성 역시 편벽되고 막히게 된다.…(중략)…사람만은 바르고 통한 기운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이 가장 영묘하여 건순과 오상의 덕을 모두 갖추었으니, 그 지극한 것을 확충하면 천지에 참여하여 만물을 화육하는 것을 돕는 것도 모두 우리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사람과 물건이 다른 점이다. |
② 이(理)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과학기술과 이용후생을 강조하는 북학의 배경이 되었다.
③ 화이론에 따라 중화와 오랑캐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로 보려는 배타적 입장이 깔려 있었다.
④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파와 왕실의 종친 그리고 서얼 출신 인사들 사이에서 가학으로 이어졌다.
● 정답 : ③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사람과 물건이 다른 점’이라는 문구를 통해 노론의 내부에서 벌어진 호락논쟁 중 호론의 인물성 이론에 대한 설명이다. 인물성 이론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는 것으로 이를 화이론(華夷論)으로 연결시켜 개항을 전후하여 위정척사 사상으로 전개되었다.
정답 : ③
제시된 사료는 충청도 노론 주기파인 ‘호론(湖論)’이 주장했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의 내용이다.
③ 호론의 주장은 화이론을 계승한 것으로, 이들의 사상은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여 보려는 배타적 입장을 띠고 있었으며, 이들의 사상은 이후 위정척사사상으로 연결되었다.
①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했던 ‘낙론(洛論)’의 사상은 19세기 최한기에게 영향을 주어 경험주의를 확립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② 호론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은 서로 다름을 주장하면서 기(氣)의 차별성을 강조하였다. 반면, 낙론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은 같음을 주장하면서 이(理)의 보편성을 강조하였다. 낙론의 사상은 화이론을 극복하는 북학 사상의 배경이 되었다.
④ 양명학에 대한 설명이다.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사람과 물건이 다른 점’이라는 문구를 통해 노론의 내부에서 벌어진 호락논쟁 중 호론의 인물성 이론에 대한 설명이다. 인물성 이론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는 것으로 이를 화이론(華夷論)으로 연결시켜 개항을 전후하여 위정척사 사상으로 전개되었다.
정답 : ③
제시된 사료는 충청도 노론 주기파인 ‘호론(湖論)’이 주장했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의 내용이다.
③ 호론의 주장은 화이론을 계승한 것으로, 이들의 사상은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여 보려는 배타적 입장을 띠고 있었으며, 이들의 사상은 이후 위정척사사상으로 연결되었다.
①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했던 ‘낙론(洛論)’의 사상은 19세기 최한기에게 영향을 주어 경험주의를 확립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② 호론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은 서로 다름을 주장하면서 기(氣)의 차별성을 강조하였다. 반면, 낙론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은 같음을 주장하면서 이(理)의 보편성을 강조하였다. 낙론의 사상은 화이론을 극복하는 북학 사상의 배경이 되었다.
④ 양명학에 대한 설명이다.
17. 밑줄 친 ‘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그는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 “일체 무애인은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라는 문구에서 그 이름을 따와서 무애라 하면 이내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많은 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왔으므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그의 법화는 컸던 것이다.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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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천태종을 통해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③ 화쟁의 논리에 따라 중관파의 부정론과 유식파의 긍정론을 다같이 비판하였다.
④ 자신의 행동을 진정으로 참회하는 법화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결사를 제창하였다.
● 정답 : ③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원효의 무애가로 불교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① 의상, ② 의천, ④ 요세
정답 : ③
제시문은 원효에 대한 설명이다.
원효는 ③ 화쟁의 논리에 따라 중관파의 부정론과 유식파의 긍정론을 모두 비판하면서 이 안에서 두 사상을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① 부석사를 창건하여 해동화엄종의 시조가 된 것은 의상,
② 천태종을 통해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한 것은 대각국사 의천,
④ 참회하는 법화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결사를 제창한 것은 원묘국사 요세이다.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원효의 무애가로 불교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① 의상, ② 의천, ④ 요세
정답 : ③
제시문은 원효에 대한 설명이다.
원효는 ③ 화쟁의 논리에 따라 중관파의 부정론과 유식파의 긍정론을 모두 비판하면서 이 안에서 두 사상을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① 부석사를 창건하여 해동화엄종의 시조가 된 것은 의상,
② 천태종을 통해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한 것은 대각국사 의천,
④ 참회하는 법화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결사를 제창한 것은 원묘국사 요세이다.
18. 다음 자료에 나타난 시기의 경제 상황으로 옳지 않은 것은?
이현(梨峴)과 칠패(七稗)는 모두 난전(亂廛)이다. 도고 행위는 물론 집방(執房)하여 매매하는 것이 어물전의 10배에 이르렀다. 또 이들은 누원점의 도고 최경윤, 이성노, 엄차기 등과 체결하여 동서 어물이 서울로 들어오는 것을 모두 사들여 쌓아두었다가 이현과 칠패에 보내서 난매(亂賣)하였다.
『각전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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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강경포, 원산포 지역이 새로운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③ 포구를 이용하여 경강상인이 선상(船商)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④ 중개무역을 하던 송상이 운송업, 조선업을 지배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 정답 : ④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조선 후기 난전인 사상의 성장과 관련된 내용이다.
④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을 설치하여 활동 기반을 강화하였는데, 주로 18세기 인삼을 재배 판매하였고 만상과 내상을 연결하여 대외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경강상인은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미곡이나 소금, 어물 등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고 선박의 건조 등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하여 활동 분야를 넓히기도 하였다.
정답 : ④
제시된 사료는 조선 후기 난전(亂廛)과 매점으로 인해 폐단을 야기했던 사상도고(私商都賈)에 대한 내용이다. 칠패나 이현 등지의 사상도고들은 자신들이 직접 생산지에 가서 상품을 구입하여 적치해 두고 가격을 독점적으로 형성시키거나, 혹은 상품이 운반되는 중로(中路)에 머물렀다가 그것을 매점(買占)하고 가격을 조종하기도 하였다.
④ 운송업과 조선업을 지배하면서 거상(巨商)으로 성장한 것은 경상(경강상인)이다.
① 조선 후기(17세기 이후) 사상도고의 활동은 시전상인층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시전상인들은 금난전권의 확대를 요구하는 등 정부 측에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②, ③ 18세기에 이르러 강경포, 원산포 등이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으며, 이러한 포구를 거점으로 선상 ․ 객주 ․ 여각 등이 활발한 상행위를 하였다. 운송업에 종사하다가 거상으로 성장한 경강상인은 대표적인 선상(船商)이었다.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조선 후기 난전인 사상의 성장과 관련된 내용이다.
④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을 설치하여 활동 기반을 강화하였는데, 주로 18세기 인삼을 재배 판매하였고 만상과 내상을 연결하여 대외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경강상인은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미곡이나 소금, 어물 등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고 선박의 건조 등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하여 활동 분야를 넓히기도 하였다.
정답 : ④
제시된 사료는 조선 후기 난전(亂廛)과 매점으로 인해 폐단을 야기했던 사상도고(私商都賈)에 대한 내용이다. 칠패나 이현 등지의 사상도고들은 자신들이 직접 생산지에 가서 상품을 구입하여 적치해 두고 가격을 독점적으로 형성시키거나, 혹은 상품이 운반되는 중로(中路)에 머물렀다가 그것을 매점(買占)하고 가격을 조종하기도 하였다.
④ 운송업과 조선업을 지배하면서 거상(巨商)으로 성장한 것은 경상(경강상인)이다.
① 조선 후기(17세기 이후) 사상도고의 활동은 시전상인층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시전상인들은 금난전권의 확대를 요구하는 등 정부 측에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②, ③ 18세기에 이르러 강경포, 원산포 등이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으며, 이러한 포구를 거점으로 선상 ․ 객주 ․ 여각 등이 활발한 상행위를 하였다. 운송업에 종사하다가 거상으로 성장한 경강상인은 대표적인 선상(船商)이었다.
19. (가), (나)사이의 농업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민족별 토지 소유 현황> (단위:명)
구분 | (가) 1921년 | (나) 1936년 | ||
한국인 | 일본인 | 한국인 | 일본인 | |
200정보 이상 | 66 | 169 | 49 | 181 |
100∼200정보 | 360 | 321 | 336 | 380 |
50∼100정보 | 1,650 | 519 | 1,571 | 749 |
20∼50정보 | 14,438 | 1,420 | 12,701 | 2,958 |
10∼20정보 | 29,646 | 1,544 | 30,332 | 3,504 |
1정보 이상 소계 | 1,125,604 | 18,060 | 1,073,177 | 41,986 |
② 미곡 배급제도의 시행으로 10∼20정보 구간 한국인 지주가 증가하였다.
③ 20정보 이상 일본인 지주의 증가는 상품 작물 개발과 밭농사 중심 경영 때문이었다.
④ 미곡의 수출 여건 악화와 일본인 위주 농정의 영향으로 1정보 이상 한국인 지주가 감소하였다.
● 정답 : ④
● 해설 :
일제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공업화 정책에 따른 부족한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1920년대부터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여 수리 조합 사업, 토지 개량 사업 등의 비용을 농민에게 전가하고 쌀 생산을 강요하는 등 논농사 중심의 농업 구조로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은 소작료가 점차 올라가고, 조합비·비료대 등을 부담하게 되어 그들의 생활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일제가 강제로 수탈해 간 미곡이 증산량보다 많아 식량 부족이 심화되었다. 한편 1930년대 농업 공황이 일본까지 영향을 미치자 쌀 가격의 하락과 미곡의 과잉문제가 더욱 첨예화 되어 일본 농민들의 반대 시위가 있었으며, 일본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시 중단하였다. 이로 인한 미곡의 수출이나 수탈 중단은 오히려 조선 지주나 농민의 몰락과 농민의 유민화를 가져왔다.
정답 : ④
제시된 표는 (가) 1921년에서 (나) 1936년까지의 농업 상황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1910년대 전개되었던 토지조사사업(1912∼1918)과 산미증식계획(1920∼1933)의 결과 일본인 지주의 수가 증가하였고, 조선인 지주의 경우에도 친일 지주의 비중이 점차 커지던 시기의 사실이다. 조선인 지주는 점차적으로 감소하게 되는데, 친일 지주를 제외한 나머지 지주들도 점차 몰락하면서 일본인 지주를 중심으로 한 농업의 비중이 점차 증가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④ 1931년 세계대공황과 1933년 농업공황으로 인해 산미증식계획이 중단되었고, 일본으로의 곡물 유출이 어려워지면서 조선 내 곡물 가격의 하락과 함께 조선인 지주가 대거 몰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① 전체 지주의 수가 (가)에서 (나)로 가면서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인 지주의 수는 이전에 비해 늘어났으며, 조선인 지주가 몰락하였다.
② 10∼20정보를 소유한 조선인 지주의 증가는 대지주의 몰락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유추되며 미곡배급제는 1941년 4월 필수물자통제령 이후의 사실이므로 1921년에서 1936년 사이의 사실과는 관련이 없다.
③ 일제 강점기에도 상품작물의 재배는 꾸준히 성장하였으나 일본인 지주가 성장한 원인으로 볼 수는 없으며, 이 시기 주된 농업은 밭농사가 아닌 벼농사였다.
● 해설 :
일제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공업화 정책에 따른 부족한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1920년대부터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여 수리 조합 사업, 토지 개량 사업 등의 비용을 농민에게 전가하고 쌀 생산을 강요하는 등 논농사 중심의 농업 구조로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은 소작료가 점차 올라가고, 조합비·비료대 등을 부담하게 되어 그들의 생활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일제가 강제로 수탈해 간 미곡이 증산량보다 많아 식량 부족이 심화되었다. 한편 1930년대 농업 공황이 일본까지 영향을 미치자 쌀 가격의 하락과 미곡의 과잉문제가 더욱 첨예화 되어 일본 농민들의 반대 시위가 있었으며, 일본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시 중단하였다. 이로 인한 미곡의 수출이나 수탈 중단은 오히려 조선 지주나 농민의 몰락과 농민의 유민화를 가져왔다.
정답 : ④
제시된 표는 (가) 1921년에서 (나) 1936년까지의 농업 상황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1910년대 전개되었던 토지조사사업(1912∼1918)과 산미증식계획(1920∼1933)의 결과 일본인 지주의 수가 증가하였고, 조선인 지주의 경우에도 친일 지주의 비중이 점차 커지던 시기의 사실이다. 조선인 지주는 점차적으로 감소하게 되는데, 친일 지주를 제외한 나머지 지주들도 점차 몰락하면서 일본인 지주를 중심으로 한 농업의 비중이 점차 증가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④ 1931년 세계대공황과 1933년 농업공황으로 인해 산미증식계획이 중단되었고, 일본으로의 곡물 유출이 어려워지면서 조선 내 곡물 가격의 하락과 함께 조선인 지주가 대거 몰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① 전체 지주의 수가 (가)에서 (나)로 가면서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인 지주의 수는 이전에 비해 늘어났으며, 조선인 지주가 몰락하였다.
② 10∼20정보를 소유한 조선인 지주의 증가는 대지주의 몰락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유추되며 미곡배급제는 1941년 4월 필수물자통제령 이후의 사실이므로 1921년에서 1936년 사이의 사실과는 관련이 없다.
③ 일제 강점기에도 상품작물의 재배는 꾸준히 성장하였으나 일본인 지주가 성장한 원인으로 볼 수는 없으며, 이 시기 주된 농업은 밭농사가 아닌 벼농사였다.
20. 다음 조약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o조선국은 부산 등 개항장에 일본인이 와서 통상을 하도록 허가한다.···(중략)···조선국 연해의 도서와 암초를 조사하지 않아 매우 위험하니 일본국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가한다.
-OOO조규-
o일본국 인민은 본국에서 현행되는 화폐들로 조선국 인민이 소유하고 있는 물자와 교환할 수 있다.
-OOO조규 부록-
|
<보 기>
㉠ 청을 의식하여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하였다.㉡ 개항장 밖 10리 까지 외국인의 왕래를 허가하였다. ㉢ 부산, 인천 ,원산에 이어 군산, 마산까지 개항하기로 하였다. ㉣ 초량에 전관거류지를 설치하고 수출입 물품에 5%관세를 부과하였다. |
② ㉠, ㉣
③ ㉡, ㉢
④ ㉢, ㉣
● 정답 : ①
● 해설 :
첫 번째 사료는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두 번째 지문은 강화도 조약의 부속 조약인 조일 수호 조규 부록이다. 강화도 조약에서는 일본의 침략 의도로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기 위하여 조선이 자주국 이라는 조항을 넣었고 조일 수호 조규 부록에서는 개항장에서 10리로 거류민 거주 지역을 정하였다.
㉢ 강화도 조약에서는 부산, 원산, 인천의 3개 항구만을 개항하였다.
㉣ 관세와 최혜국 대우 조항의 내용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이후인 1883년 개정된 조일 통상 장정에 규정하였다.
정답 : ①
제시된 사료는 1897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 제7관과 조일수호조규부록의 일부이다.
ㄱ. 강화도 조약 제1관에는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가 명기되어 있다.
ㄴ. 조일수호조규부록에는 일본인의 거류지를 개항장 밖 10리 까지로 제한하고 있다.
ㄷ. 강화도 조약 단계에서는 부산과 원산, 인천을 개항하기로 하였으며 군산과 마산의 개항은 1899년의 사실이다.
ㄹ. 강화도 조약 때에는 한일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초량 왜관 지역에 전관거류지를 설치한 것은 1877년의 사실이고, 수출입 상품에 대한 5% 관세를 부과한 것은 1883년 6월 새롭게 제결된 조일통상장정의 결과이다.
● 해설 :
첫 번째 사료는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두 번째 지문은 강화도 조약의 부속 조약인 조일 수호 조규 부록이다. 강화도 조약에서는 일본의 침략 의도로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기 위하여 조선이 자주국 이라는 조항을 넣었고 조일 수호 조규 부록에서는 개항장에서 10리로 거류민 거주 지역을 정하였다.
㉢ 강화도 조약에서는 부산, 원산, 인천의 3개 항구만을 개항하였다.
㉣ 관세와 최혜국 대우 조항의 내용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이후인 1883년 개정된 조일 통상 장정에 규정하였다.
정답 : ①
제시된 사료는 1897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 제7관과 조일수호조규부록의 일부이다.
ㄱ. 강화도 조약 제1관에는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가 명기되어 있다.
ㄴ. 조일수호조규부록에는 일본인의 거류지를 개항장 밖 10리 까지로 제한하고 있다.
ㄷ. 강화도 조약 단계에서는 부산과 원산, 인천을 개항하기로 하였으며 군산과 마산의 개항은 1899년의 사실이다.
ㄹ. 강화도 조약 때에는 한일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초량 왜관 지역에 전관거류지를 설치한 것은 1877년의 사실이고, 수출입 상품에 대한 5% 관세를 부과한 것은 1883년 6월 새롭게 제결된 조일통상장정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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