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26일에 시행한 국가직 7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다음 유물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색이 푸른데 사람들은 이를 비색(翡色)이라 한다. 근년에 들어와 제작이 공교해지고 광택이 더욱 아름다워졌다. 술병의 형태는 참외와 같은데, 위에는 작은 뚜껑이 있고 마치 연꽃에 엎드린 오리 모양이다. |
② 왕실과 관청 및 귀족들이 주로 사용하였다.
③ 송나라 사신 서긍이 그 아름다움을 극찬하였다.
④ 신라 말기 상감청자가 제작되면서 무늬가 한층 다양해졌다
정답 ④
해설 :
‘비색(翡色)’의 ‘술병’으로 사용된 것은 ‘고려청자’이다. 제시된 자료는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도경」 제26권 연례연의조에서 고려 청자를 극찬한 부분이다. 11세기에는 비취색의 순청자(순수청자)가 발달하였지만, 12세기에 들어 점차 ‘제작이 공교해지고, 광택이 더욱 아름다워졌다.’
④ 고려 청자의 독창적 상감기법이 발달한 시기는 신라 말기가 아니라 ‘12세기 중엽’이다.
① 고려 청자, 특히 상감청자의 주요 생산지는 전남 강진, 전북 부안, 강화도이다.
② 고려 청자의 사용자 계층은 왕실과 귀족층이었다. 도자기가 민간에까지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 청화백자가 많이 만들어질 때부터이다.
③ 송나라 사신 서긍은 12세기 인종 때 고려에 들어와 약 한 달간 고려를 기행하고 돌아가, 고려의 각종 풍속을 글로 남겼다. 그것이 곧 「고려도경」 이다.
정답 ④
☞ 제시문은 서긍의 『고려도경』의 내용으로, 11세기에 고려에서 유행했던 순수 청자에 대한 설명이다. 고려 청자의 ‘비색’이란 표현은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
④ 상감청자는 12세기 중엽에 유행하였다.
해설 :
‘비색(翡色)’의 ‘술병’으로 사용된 것은 ‘고려청자’이다. 제시된 자료는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도경」 제26권 연례연의조에서 고려 청자를 극찬한 부분이다. 11세기에는 비취색의 순청자(순수청자)가 발달하였지만, 12세기에 들어 점차 ‘제작이 공교해지고, 광택이 더욱 아름다워졌다.’
④ 고려 청자의 독창적 상감기법이 발달한 시기는 신라 말기가 아니라 ‘12세기 중엽’이다.
① 고려 청자, 특히 상감청자의 주요 생산지는 전남 강진, 전북 부안, 강화도이다.
② 고려 청자의 사용자 계층은 왕실과 귀족층이었다. 도자기가 민간에까지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 청화백자가 많이 만들어질 때부터이다.
③ 송나라 사신 서긍은 12세기 인종 때 고려에 들어와 약 한 달간 고려를 기행하고 돌아가, 고려의 각종 풍속을 글로 남겼다. 그것이 곧 「고려도경」 이다.
정답 ④
☞ 제시문은 서긍의 『고려도경』의 내용으로, 11세기에 고려에서 유행했던 순수 청자에 대한 설명이다. 고려 청자의 ‘비색’이란 표현은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
④ 상감청자는 12세기 중엽에 유행하였다.
2. 밑줄 친 ‘이것’의 내용으로 옳지 않은 것은?
짐은 평범한 가문 출신으로 분에 넘치게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재위 19년 만에 삼한을 통일하였고, 이제 왕위에 오른 지도 25년이 되었다. 몸이 이미 늙어지니, 후손들이 사사로운 인정과 욕심을 함부로 부려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게 할까 크게 걱정이 된다. 이에 이것을 지어 후대의 왕들에게 전하고자 하니, 바라건대 아침 저녁으로 펼쳐 보아 영원토록 귀감으로 삼을지어다. |
② 풍수 지리 사상을 존중하고 서경을 중시할 것
③ 간언을 따르고 참언을 멀리하여 신민의 지지를 얻을 것
④ 농민의 요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여 민심을 얻고 부국 안민을 이룰 것
정답 ①
해설 :
‘재위 19년 만에 삼한을 통일하였다’는 것은, 918년에 고려를 건국하고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였다는 의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왕위에 오른 지 25년째 되던 해는 즉위 말년이다. 태조는 ‘후대의 왕들에게’ 전하고자 ‘훈요십조’를 지었다. 훈요십조에서는 1) 숭불, 2) 풍수지리, 3) 애민(愛民) 등을 강조하였다.
① 고려 태조는 ‘연등회와 팔관회’를 ‘짐의 지극한 소원’이라고 하였다. 연등회와 팔관회의 성대한 개최를 원하였다는 의미이다.
정답 ①
☞ 제시문의 ‘이것’은 ‘훈요 10조’이다. 훈요 10조는 고려 태조가 942년(태조 25)에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몸소 지은 열 가지 유훈(遺訓)으로 태조가 죽을 무렵 박술희에게 전하여 후대의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① 태조는 훈요10조 중 제6조에 연등회와 팔관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후세의 간신이 신위(神位)와 의식 절차의 가감(加減)’하지 못하게 하라고 주장하였다.
※ “훈요 10조"
해설 :
‘재위 19년 만에 삼한을 통일하였다’는 것은, 918년에 고려를 건국하고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였다는 의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왕위에 오른 지 25년째 되던 해는 즉위 말년이다. 태조는 ‘후대의 왕들에게’ 전하고자 ‘훈요십조’를 지었다. 훈요십조에서는 1) 숭불, 2) 풍수지리, 3) 애민(愛民) 등을 강조하였다.
① 고려 태조는 ‘연등회와 팔관회’를 ‘짐의 지극한 소원’이라고 하였다. 연등회와 팔관회의 성대한 개최를 원하였다는 의미이다.
정답 ①
☞ 제시문의 ‘이것’은 ‘훈요 10조’이다. 훈요 10조는 고려 태조가 942년(태조 25)에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몸소 지은 열 가지 유훈(遺訓)으로 태조가 죽을 무렵 박술희에게 전하여 후대의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① 태조는 훈요10조 중 제6조에 연등회와 팔관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후세의 간신이 신위(神位)와 의식 절차의 가감(加減)’하지 못하게 하라고 주장하였다.
※ “훈요 10조"
1조 국가의 대업은 여러 부처의 호위를 받아야 하므로 선(禪)·교(敎) 사원을 개창한 것이니, 후세의 간신이 정권을 잡고 승려들의 간청에 따라 각기 사원을 경영, 쟁탈하지 못하게 하라. 2조 신설한 사원은 도선이 산수의 순(順)과 역(逆)을 점쳐놓은 데 따라 세운 것이다. 사원을 함부로 짓지 말라. 3조 왕위 계승은 맏아들로 함이 상례이지만, 만일 맏아들이 불초할 때에는 둘째 아들에게, 둘째 아들이 그러할 때에는 그 형제 중에서 중망을 받는 자에게 대통을 잇게 하라. 4조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당의 풍속을 숭상해 예악문물을 모두 거기에 좇고 있으나, 풍토와 인성(人性)이 다르므로 반드시 같이할 필요는 없다. 특히 거란은 금수의 나라이므로 풍속과 말이 다르니 의관 제도를 본받지 말라. 5조 나는 우리나라 산천의 신비력에 의해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였다. 서경의 수덕(水德)은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을 이루고 있어 길이 대업을 누릴 만한 곳이니, 사중(四仲:子·午·卯·酉가 있는 해)마다 순수(巡狩)하여 100일을 머물러 안녕(태평)을 이루게 하라. 6조 나의 소원은 연등과 팔관에 있는바, 연등은 부처를 제사하고, 팔관은 하늘과 5악(岳)·명산대천·용신(龍神) 등을 봉사하는 것이니, 후세의 간신이 신위(神位)와 의식 절차의 가감(加減)을 건의하지 못하게 하라. 7조 임금이 신민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나, 그 요는 간언(諫言)을 받아들이고 참소를 멀리하는 데 있으니, 간언을 좇으면 어진 임금이 되고, 참소가 비록 꿀과 같이 달지라도 이를 믿지 아니하면 참소는 그칠 것이다. 또, 백성을 부리되 때를 가려 하고 용역과 부세를 가벼이 하며 농사의 어려움을 안다면, 자연히 민심을 얻고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할 것이다. 8조 차현 이남, 금강 밖의 산형지세가 모두 본주(本主)를 배역(背逆)해 인심도 또한 그러하니, 저 아랫녘의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王侯)·국척(國戚)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혹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통합(후백제의 합병)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감행할 것이다. 9조 무릇 신료들의 녹봉은 나라의 대소에 따라 정할 것이고 함부로 증감해서는 안 된다. 10조 국가를 가진 자는 항상 무사한 때를 경계할 것이며, 널리 경사(經史)를 섭렵해 예를 거울로 삼아 현실을 경계하라. |
3. (가), (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그 나라 혼인 풍속은 여자 나이 10살이 되기 전에 혼인 약속을 한다. 신랑 집에서는 여자를 맞이하여 다 클 때까지 길러 아내로 삼는다. (나) 큰 세력을 가진 이는 스스로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한다. |
② (나)-철제 농기구를 사용하였고 벼농사를 지었다.
③ (가)-대가들이 각기 사자·조의·선인을 거느렸다.
④ (나)-도둑질한 자는 물건 값의 12배를 변상하게 하였다.
정답 ②
해설 :
(가) 옥저(민며느리제), (나) 삼한.
① 해마다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던 나라는 ‘동예’이다.
③ 사자·조의·선인은 ‘초기 고구려’의 관리 명칭이다.
④ 도둑질한 자는 물건 값의 12배를 변상하게 하는 1책 12법은 ‘부여’와 ‘초기 고구려’의 제도이다.
정답 ②
☞ (가)는 옥저의 민며느리제에 대한 기록이고, (나)는 삼한에 대한 기록이다. 삼한의 군장은 나라의 크기에 따라 대군장인 신지와 소군장인 읍차·부례 등이 있었으며,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경이 발달하였고 벼농사가 널리 행하여졌다.
① 무천은 동예의 제천행사이다.
③ 고구려는 부족장인 대가가 그 밑에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렸다.
④ 고구려와 부여에는 1책 12법이 존재하여 도둑질한 자는 물건 값의 12배를 변상하게 하였다.
해설 :
(가) 옥저(민며느리제), (나) 삼한.
① 해마다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던 나라는 ‘동예’이다.
③ 사자·조의·선인은 ‘초기 고구려’의 관리 명칭이다.
④ 도둑질한 자는 물건 값의 12배를 변상하게 하는 1책 12법은 ‘부여’와 ‘초기 고구려’의 제도이다.
정답 ②
☞ (가)는 옥저의 민며느리제에 대한 기록이고, (나)는 삼한에 대한 기록이다. 삼한의 군장은 나라의 크기에 따라 대군장인 신지와 소군장인 읍차·부례 등이 있었으며,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경이 발달하였고 벼농사가 널리 행하여졌다.
① 무천은 동예의 제천행사이다.
③ 고구려는 부족장인 대가가 그 밑에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렸다.
④ 고구려와 부여에는 1책 12법이 존재하여 도둑질한 자는 물건 값의 12배를 변상하게 하였다.
4. ㉠∼㉣에 해당하는 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고구려 ㉠ 왕 때 전진에서 승려 순도(順道)가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으며, 백제는 ㉡ 왕 때 동진에서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불교를 전하였다. 신라의 불교는 ㉢ 왕 때 고구려에서 온 승려 묵호자가 전하고 소지왕 때 다시 고구려에서 승려 아도가 전하였으나 ㉣ 왕 때 이차돈의 순교 후 비로소 공인되었다. |
②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남부여라 하였다.
③ ㉢-황룡사를 짓고 9층 목탑을 건립하였다.
④ ㉣-법령을 반포하고 상대등 제도를 설치하였다.
정답 ④
해설 :
㉠ 소수림왕, ㉡ 침류왕, ㉢ 눌지마립간, ㉣ 법흥왕.
① 평양 천도는 ‘장수왕’의 업적이다.
② 사비 천도는 ‘성왕’의 업적이다.
③ 황룡사는 ‘진흥왕’이 지었고, 황룡사 9층 목탑은 ‘선덕여왕’이 세웠다.
④ 법령(율령)을 반포하고, 상대등이라는 벼슬이라는 설치한 왕은 ‘법흥왕’이다.
정답 ④
☞ 제시문의 ㉠은 소수림왕, ㉡은 침류왕, ㉢은 눌지 마립간, ㉣은 법흥왕이다.
④ 법흥왕은 520년에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골품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상 대등을 설치하고 이찬 철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여 왕권 밑에 귀족 회의의 주재자를 설치함으로써 권력을 강화하였다.
① 고구려의 장수왕은 귀족 세력의 약화, 서해안 적극 진출, 남진 정책의 추진 등을 목적으로 427년에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② 백제 성왕은 538년 수도를 협소한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후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라 개칭하여 부여족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였다.
③ 황룡사는 진흥왕 시기인 553년에 완공되었고, 9층 목탑은 선덕여왕 시기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의 건의에 따라, 백제의 아비지를 데려와 외환을 진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완공하였다.
해설 :
㉠ 소수림왕, ㉡ 침류왕, ㉢ 눌지마립간, ㉣ 법흥왕.
① 평양 천도는 ‘장수왕’의 업적이다.
② 사비 천도는 ‘성왕’의 업적이다.
③ 황룡사는 ‘진흥왕’이 지었고, 황룡사 9층 목탑은 ‘선덕여왕’이 세웠다.
④ 법령(율령)을 반포하고, 상대등이라는 벼슬이라는 설치한 왕은 ‘법흥왕’이다.
정답 ④
☞ 제시문의 ㉠은 소수림왕, ㉡은 침류왕, ㉢은 눌지 마립간, ㉣은 법흥왕이다.
④ 법흥왕은 520년에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골품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상 대등을 설치하고 이찬 철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여 왕권 밑에 귀족 회의의 주재자를 설치함으로써 권력을 강화하였다.
① 고구려의 장수왕은 귀족 세력의 약화, 서해안 적극 진출, 남진 정책의 추진 등을 목적으로 427년에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② 백제 성왕은 538년 수도를 협소한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한 후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라 개칭하여 부여족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였다.
③ 황룡사는 진흥왕 시기인 553년에 완공되었고, 9층 목탑은 선덕여왕 시기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의 건의에 따라, 백제의 아비지를 데려와 외환을 진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완공하였다.
5. 밑줄 친 ‘그’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임금이 교지를 내렸다. “지금 그의 제자 김일손이 찬수한 사초 내에 부도덕한 말로 선왕의 일을 터무니없이 기록하였다. …(중략)… 성덕을 속이고 논평하여 김일손으로 하여금 역사에 거짓을 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② 길재의 학통을 잇고 세조 대에 정계에 나아갔다.
③ 제자들이 과거를 통해 주로 삼사 언관직에 진출하였다.
④ 국가의 여러 행사 규범을 담은 「국조오례의」 편찬에 관여하였다.
정답 ④
해설 :
사림파의 계보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김일손·정여창’으로 이어진다. 김일손이 제자라면, ‘그’는 김종직이다.
①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의 내용이 발단이 되어서, 무오사화(1498)가 일어났다.
② 김종직은 길재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이다. 김종직은 세조 때 문과(대과)에 급제하여 처음 벼슬에 나아갔다. 성종 때 대제학이 되어 그의 제자들을 대거 이끌었으므로,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은 성종 때로 보면 되겠지만, 김종직 개인이 첫 벼슬을 한 것이 언제인지를 묻는다면 그것은 ‘세조’ 때가 된다.
③ 김종직의 제자들은 주로 삼사 언관직에 진출하였다. 이것이 초기에 사림파가 진출하였던 통로였다.
④ 「국조오례의」 편찬에 관여한 대표적인 인물은 ‘신숙주’이다.
정답 ④
☞ 제시문의 ‘그’는 ‘김종직’이고, 제시문은 김일손이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것을 문제 삼아 일어난 무오사화에 관한 내용이다.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는 정몽주, 이색, 길재 등 여말 온건파 사대부의 후예로서 세조 대에 정계에 진출한 이후 지나친 부국강병책, 내수사를 통한 왕실의 부 축적, 훈구파의 무리한 재산 축적과 특권 강화 등을 비판하였다.
사림파는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인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으로서 훈구파의 일방적 비대를 막으려는 성종의 발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고, 주로 3사에서 언론, 문한을 담당하며 훈구파의 전횡을 견제하는 한편, 세조 이후 약화되었던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④ 『국조오례의(1474, 성종)』를 편찬한 신숙주, 정척 등은 대표적인 훈구 세력이다.
해설 :
사림파의 계보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김일손·정여창’으로 이어진다. 김일손이 제자라면, ‘그’는 김종직이다.
①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의 내용이 발단이 되어서, 무오사화(1498)가 일어났다.
② 김종직은 길재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이다. 김종직은 세조 때 문과(대과)에 급제하여 처음 벼슬에 나아갔다. 성종 때 대제학이 되어 그의 제자들을 대거 이끌었으므로,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은 성종 때로 보면 되겠지만, 김종직 개인이 첫 벼슬을 한 것이 언제인지를 묻는다면 그것은 ‘세조’ 때가 된다.
③ 김종직의 제자들은 주로 삼사 언관직에 진출하였다. 이것이 초기에 사림파가 진출하였던 통로였다.
④ 「국조오례의」 편찬에 관여한 대표적인 인물은 ‘신숙주’이다.
정답 ④
☞ 제시문의 ‘그’는 ‘김종직’이고, 제시문은 김일손이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것을 문제 삼아 일어난 무오사화에 관한 내용이다.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는 정몽주, 이색, 길재 등 여말 온건파 사대부의 후예로서 세조 대에 정계에 진출한 이후 지나친 부국강병책, 내수사를 통한 왕실의 부 축적, 훈구파의 무리한 재산 축적과 특권 강화 등을 비판하였다.
사림파는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인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으로서 훈구파의 일방적 비대를 막으려는 성종의 발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고, 주로 3사에서 언론, 문한을 담당하며 훈구파의 전횡을 견제하는 한편, 세조 이후 약화되었던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④ 『국조오례의(1474, 성종)』를 편찬한 신숙주, 정척 등은 대표적인 훈구 세력이다.
6. (가), (나)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 어른과 아이(父老子弟)와 공사천민(公私賤民)은 모두 이 격문을 들어라. 무릇 관서는 기자와 단군 시조의 옛터로, 훌륭한 인물이 넘친다. …(중략)… 그러나 조정에서 서토(西土)를 버림이 분토(糞土)나 다름없이 한다. (나) 금번 난민이 소동을 일으킨 것은 오로지 전 우병사 백낙신이 탐욕을 부려서 수탈하였기 때문입니다. 병영에서 포탈한 환곡과 전세 6만 냥을 집집마다 배정하여 억지로 받으려 하였습니다. |
② (나)-노비 문서의 소각과 탐관오리의 엄징을 요구하였다.
③ (가)-세도 정권과 특권 어용상인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였다.
④ (나)-조정은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세제 개혁을 약속하였다.
정답 ②
해설 :
노비 문서의 소각과 탐관오리의 엄징을 모두 요구한 것은 ‘동학농민운동(1894)’이다.
(가) ‘관서’와 ‘서토’의 사람들이 서북 지역 차별에 항거하여 일으킨 반란은 ‘홍경래의 난(1811)’이다.
① 홍경래의 난은 몰락한 양반과 중소 상인이 지휘부를 구성하고, 광산 노동자와 영세 농민이 함께 일으킨 반란으로, 반란 기간 중 금광 경영과 인삼 무역으로 자금을 마련하였다.
③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권의 탐학과 한양 중심의 어용상인만 유리하게 하려는 특권 상업체제에 불만을 가지고 일어났다.
(나) 탐관오리 백낙신에 대항하여 유계춘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났던 반란은 ‘임술농민봉기(1862)’이다.
④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세제 개혁을 약속했지만, 제대로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정답 ②
☞ 제시문의 (가)는 홍경래의 난(1811, 순조), (나)는 임술 농민 봉기(1862, 철종)에 대한 기록이다.
(가) 홍경래의 난은 서북민에 대한 차별에 불만을 품고 몰락 양반 홍경래의 지휘 아래 영세농민, 중소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일으킨 난이다. 당시 상인들은 봉기 준비 단계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군졸을 모으는 데 절대적인 성과를 올렸고, 난의 지도자들은 참위설을 내세웠으며 토호·관속을 향해 지역 차별과 정치적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나) 임술 농민 봉기는 삼정의 문란이 직접적 동기가 되어 일어났다. 정부는 회유책으로써 우선 선무사, 안핵사를 파견하여 농민들의 요구 조건을 수락하고, 말썽이 된 수령과 향리를 처벌한 후 이어 농민 항쟁의 주모자를 처형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또한 삼정의 개선을 위하여 진주 민란 이후 삼정이정청을 두어 구체적인 개선안을 마련토록 하였다.
② 동학 농민 운동(1894)의 폐정개혁안 12조의 내용이다.
※ “홍경래의 격문"
평서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와 자제와 공사천민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라. 무릇 관서는 성인 기자의 옛 터요 단군 시조의 옛 근거지로서 의관(衣冠 : 유교 문화를 생활화하는 사람)이 급제하고 문물이 아울러 발달한 곳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관서를 버림이 분토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한다. 서토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은 자 있겠는가. ……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열부군후에 알리노니, 절대로 동요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으로 남김없이 밟아 무찌르리니, 마땅히 속히 명을 받들어 거행함이 가하리라. 대원수. <순조실록>
해설 :
노비 문서의 소각과 탐관오리의 엄징을 모두 요구한 것은 ‘동학농민운동(1894)’이다.
(가) ‘관서’와 ‘서토’의 사람들이 서북 지역 차별에 항거하여 일으킨 반란은 ‘홍경래의 난(1811)’이다.
① 홍경래의 난은 몰락한 양반과 중소 상인이 지휘부를 구성하고, 광산 노동자와 영세 농민이 함께 일으킨 반란으로, 반란 기간 중 금광 경영과 인삼 무역으로 자금을 마련하였다.
③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권의 탐학과 한양 중심의 어용상인만 유리하게 하려는 특권 상업체제에 불만을 가지고 일어났다.
(나) 탐관오리 백낙신에 대항하여 유계춘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났던 반란은 ‘임술농민봉기(1862)’이다.
④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세제 개혁을 약속했지만, 제대로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정답 ②
☞ 제시문의 (가)는 홍경래의 난(1811, 순조), (나)는 임술 농민 봉기(1862, 철종)에 대한 기록이다.
(가) 홍경래의 난은 서북민에 대한 차별에 불만을 품고 몰락 양반 홍경래의 지휘 아래 영세농민, 중소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일으킨 난이다. 당시 상인들은 봉기 준비 단계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군졸을 모으는 데 절대적인 성과를 올렸고, 난의 지도자들은 참위설을 내세웠으며 토호·관속을 향해 지역 차별과 정치적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나) 임술 농민 봉기는 삼정의 문란이 직접적 동기가 되어 일어났다. 정부는 회유책으로써 우선 선무사, 안핵사를 파견하여 농민들의 요구 조건을 수락하고, 말썽이 된 수령과 향리를 처벌한 후 이어 농민 항쟁의 주모자를 처형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또한 삼정의 개선을 위하여 진주 민란 이후 삼정이정청을 두어 구체적인 개선안을 마련토록 하였다.
② 동학 농민 운동(1894)의 폐정개혁안 12조의 내용이다.
※ “홍경래의 격문"
평서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와 자제와 공사천민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라. 무릇 관서는 성인 기자의 옛 터요 단군 시조의 옛 근거지로서 의관(衣冠 : 유교 문화를 생활화하는 사람)이 급제하고 문물이 아울러 발달한 곳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관서를 버림이 분토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한다. 서토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은 자 있겠는가. ……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열부군후에 알리노니, 절대로 동요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으로 남김없이 밟아 무찌르리니, 마땅히 속히 명을 받들어 거행함이 가하리라. 대원수. <순조실록>
7. 다음 상소문을 올린 인물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저들의 욕심은 물화를 교역하는 데 있습니다. …(중략)…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서양 오랑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강화가 이루어지면 사악한 서적과 천주교가 다시 들어와 나쁜 기운이 온 나라를 덮게 될 것입니다. |
② 왕궁, 일본 공사관, 민씨 일족을 습격하고 대원군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③ 「조선책략」의 내용을 비난하고 이것을 가져온 김홍집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④ 「화서아언」에서 프랑스와의 통상을 반대하고 서양세력과 끝까지 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답 ①
해설 :
제시된 자료는 최익현의 척화의소(5불가소)이다. ‘왜인’과 ‘서양 오랑캐’를 모두 배척하는 ‘왜양일체론’이 나타난다.
① 최익현은 을사의병을 주도하였으며, 의병 활동 중 관군에게 체포되어 일본 대마도로 넘겨졌고, 대마도에서 단식 투쟁 중 순국하였다.
② 경복궁 중건, 만동묘 철폐, 사원 철폐 등의 문제를 들어 최익현은 흥선대원군 퇴진을 주장하였다.
③ ‘조선책략’의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한 ‘영남만인소’를 쓴 인물은 이만손이다.
④ ‘화서’는 이항로의 호이다. ‘화서아언(華西雅言)’에는 이항로의 ‘척화주전론’이 나타난다.
정답 ①
☞ 제시문은 최익현의 개항반대 상소문의 일부이다. 1870년대의 위정척사 사상을 대표하는 최익현은 강화도 조약의 체결로 인해 일본과의 수교가 재개되자, 왜양일체론을 담은 ‘오불가척화의소(五不可斥和議蔬)’를 올렸다. 이후 최익현은 1895년의 을미개혁 당시에는 단발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와 재소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1906년에는 전라도 태인에서 임병찬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다 붙잡혀 대마도로 유배되었는데, 유배 이후 “왜놈의 음식은 먹을 수 없다.”며 식음을 거부하다가 순국하였다.
② 임오군란(1882)에 대한 설명이다.
③ 1880년대에 이만손 등이 전개한 개화 반대 운동에 대한 설명이다.
④ 1860년대 통상 반대 운동을 전개한 이항로에 대한 설명이다.
※ “1870년대의 위정척사 사상-최익현의 개항 반대 상소"
지금 왜적과 강화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폐단이 있습니다.
첫째, 강화가 그들의 애걸에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가 족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지만, 우리가 약점이 있어서 강화를 서두르는 것이라면 주도권이 그들에게 있으므로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제어할 것이니, 그런 강화는 믿을 수 없습니다.
둘째, 우리의 물건은 한정이 있는데 저들의 요구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 일단 강화를 맺고 나면 저들의 욕심은 물화를 교역하는 데 있습니다. ……
셋째,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서양 오랑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강화가 이루어지면 사악한 서적과 천주교가 교역 속에 들어올 것입니다.
해설 :
제시된 자료는 최익현의 척화의소(5불가소)이다. ‘왜인’과 ‘서양 오랑캐’를 모두 배척하는 ‘왜양일체론’이 나타난다.
① 최익현은 을사의병을 주도하였으며, 의병 활동 중 관군에게 체포되어 일본 대마도로 넘겨졌고, 대마도에서 단식 투쟁 중 순국하였다.
② 경복궁 중건, 만동묘 철폐, 사원 철폐 등의 문제를 들어 최익현은 흥선대원군 퇴진을 주장하였다.
③ ‘조선책략’의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한 ‘영남만인소’를 쓴 인물은 이만손이다.
④ ‘화서’는 이항로의 호이다. ‘화서아언(華西雅言)’에는 이항로의 ‘척화주전론’이 나타난다.
정답 ①
☞ 제시문은 최익현의 개항반대 상소문의 일부이다. 1870년대의 위정척사 사상을 대표하는 최익현은 강화도 조약의 체결로 인해 일본과의 수교가 재개되자, 왜양일체론을 담은 ‘오불가척화의소(五不可斥和議蔬)’를 올렸다. 이후 최익현은 1895년의 을미개혁 당시에는 단발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와 재소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1906년에는 전라도 태인에서 임병찬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다 붙잡혀 대마도로 유배되었는데, 유배 이후 “왜놈의 음식은 먹을 수 없다.”며 식음을 거부하다가 순국하였다.
② 임오군란(1882)에 대한 설명이다.
③ 1880년대에 이만손 등이 전개한 개화 반대 운동에 대한 설명이다.
④ 1860년대 통상 반대 운동을 전개한 이항로에 대한 설명이다.
※ “1870년대의 위정척사 사상-최익현의 개항 반대 상소"
지금 왜적과 강화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폐단이 있습니다.
첫째, 강화가 그들의 애걸에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가 족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지만, 우리가 약점이 있어서 강화를 서두르는 것이라면 주도권이 그들에게 있으므로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제어할 것이니, 그런 강화는 믿을 수 없습니다.
둘째, 우리의 물건은 한정이 있는데 저들의 요구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 일단 강화를 맺고 나면 저들의 욕심은 물화를 교역하는 데 있습니다. ……
셋째,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서양 오랑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강화가 이루어지면 사악한 서적과 천주교가 교역 속에 들어올 것입니다.
<면암집>, 최익현
8. 조선총독부의 ‘문화 통치’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조선인의 협력을 부르짖는 국민총력운동을 전개하였다.
② 민족운동을 탄압하고자 치안유지법을 조선에도 적용하였다.
③ 조선인 계통의 신문인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발행을 허가하였다.
④ 친일파 양성을 겨냥하여 도 평의회와 부․면 협의회를 만들었다.
정답 ①
해설 :
문화통치라는 말은 1919년에 부임한 사이토 총독의 시정방침에서 유래하였다. 사이토 총독은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을 위하여 통치하겠다고 겉으로는 그럴듯한 표현을 썼지만, 어느 때보다도 더 교묘하게 친일파를 양성하였다. 문화통치는 1920년대를 의미하는 말이다.
① 국민총력운동은 국민정신총동원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되었다. 국민총력운동은 1940년대에 조선인을 전쟁터에 동원하려는 의도로 일제가 추진하였던 운동이다. 그러므로 문화통치와는 거리가 멀다.
② 치안유지법은 일본 내 사회주의자를 탄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이지만, 1925년에는 조선에서도 적용되었다.
③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20년에 창간되었다.
④ 도 평의회와 부․면 협의회를 만든 때는 1920년대이다.
정답 ①
☞ 조선총독부는 3·1 운동으로 거족적이고 단결된 저항이 일어나자 무단 통치의 한계를 절감하고, 1920년대에 문화 통치로 선회하였다. 명칭만으로는 탄압이 약화될 것으로 보이지만, 민족 기만 전술로써 문화 통치기로 오면서 경찰 인원이 증가하였고, 치안유지법 제정(1925)을 통해 탄압이 오히려 강화되었다. 또한 동아··조선일보 간행이 허용되었지만, 지나친 검열과 정간 등의 방법을 통해 탄압을 가하였고, 지방 행정의 자문 기관으로 도 평의회·면 협의회·학교 평의회를 설치하여 친일파 양성책 내지 민족 분열 정책을 전개하였다.
① 민족 말살 통치기(1930~1945)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일제는 중·일 전쟁(1937)이 확대되자,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후속으로 1940년부터 국민 총력 운동을 전개하였다.
해설 :
문화통치라는 말은 1919년에 부임한 사이토 총독의 시정방침에서 유래하였다. 사이토 총독은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을 위하여 통치하겠다고 겉으로는 그럴듯한 표현을 썼지만, 어느 때보다도 더 교묘하게 친일파를 양성하였다. 문화통치는 1920년대를 의미하는 말이다.
① 국민총력운동은 국민정신총동원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되었다. 국민총력운동은 1940년대에 조선인을 전쟁터에 동원하려는 의도로 일제가 추진하였던 운동이다. 그러므로 문화통치와는 거리가 멀다.
② 치안유지법은 일본 내 사회주의자를 탄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이지만, 1925년에는 조선에서도 적용되었다.
③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20년에 창간되었다.
④ 도 평의회와 부․면 협의회를 만든 때는 1920년대이다.
정답 ①
☞ 조선총독부는 3·1 운동으로 거족적이고 단결된 저항이 일어나자 무단 통치의 한계를 절감하고, 1920년대에 문화 통치로 선회하였다. 명칭만으로는 탄압이 약화될 것으로 보이지만, 민족 기만 전술로써 문화 통치기로 오면서 경찰 인원이 증가하였고, 치안유지법 제정(1925)을 통해 탄압이 오히려 강화되었다. 또한 동아··조선일보 간행이 허용되었지만, 지나친 검열과 정간 등의 방법을 통해 탄압을 가하였고, 지방 행정의 자문 기관으로 도 평의회·면 협의회·학교 평의회를 설치하여 친일파 양성책 내지 민족 분열 정책을 전개하였다.
① 민족 말살 통치기(1930~1945)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일제는 중·일 전쟁(1937)이 확대되자,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후속으로 1940년부터 국민 총력 운동을 전개하였다.
9. 다음 격문을 발표한 인물들이 추진했던 사실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우리는 비록 초야에 묻힌 백성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임금의 옷을 입고 사는 사람이라, 어찌 국가의 위망을 앉아서 보겠는가. 팔로(八路)가 마음을 합하고 억조창생(億兆蒼生)이 뜻을 모아 이제 의로운 깃발을 들어,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이다.
-호남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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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봉기군을 이끌고 황토현에서 관군과 교전하였다.
③ 고부읍을 점령하고 백산에서 농민군을 정비하였다.
④ 삼정의 문란을 비판하고 전운사를 혁파하려 하였다.
정답 ①
해설 :
‘초야에 묻힌 백성’이 ‘의로운 깃발’을 든 것은 동학농민운동(1894)이다. 황토현 전투와 백산 봉기는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 때 있었던 일이다. 세곡 운송을 하며 지나친 운임 징수로 농민들을 힘들게 했던 전운사를 혁파하려 한 것도 동학농민군의 요구였다.
① 사창제 실시와 양전 사업을 주장하고 시행한 인물은 흥선대원군이다.
정답 ①
☞ 제시문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군 제1차 봉기 격문(호남창의문)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봉기를 일으킨 농민군은 사발통문을 돌리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였다. 정부가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면서 사태가 진정되는 듯하였으나, 이용태가 사후 처리를 빌미로 농민들을 탄압하자, 동학 농민군 제1차 봉기가 일어났다. 농민군이 황토현·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북상하여 전주성까지 점령하자, 위기를 느낀 정부는 청군의 출병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톈진 조약을 구실로 하여 일본군까지 출병하였고, 농민군은 외국군 철수와 폐정 개혁 조건으로 정부와 전주 화약을 체결하였다. 농민군은 폐정개혁안을 집행하기 위해 농민의 자치 조직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①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이다.
해설 :
‘초야에 묻힌 백성’이 ‘의로운 깃발’을 든 것은 동학농민운동(1894)이다. 황토현 전투와 백산 봉기는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 때 있었던 일이다. 세곡 운송을 하며 지나친 운임 징수로 농민들을 힘들게 했던 전운사를 혁파하려 한 것도 동학농민군의 요구였다.
① 사창제 실시와 양전 사업을 주장하고 시행한 인물은 흥선대원군이다.
정답 ①
☞ 제시문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군 제1차 봉기 격문(호남창의문)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봉기를 일으킨 농민군은 사발통문을 돌리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였다. 정부가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면서 사태가 진정되는 듯하였으나, 이용태가 사후 처리를 빌미로 농민들을 탄압하자, 동학 농민군 제1차 봉기가 일어났다. 농민군이 황토현·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북상하여 전주성까지 점령하자, 위기를 느낀 정부는 청군의 출병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톈진 조약을 구실로 하여 일본군까지 출병하였고, 농민군은 외국군 철수와 폐정 개혁 조건으로 정부와 전주 화약을 체결하였다. 농민군은 폐정개혁안을 집행하기 위해 농민의 자치 조직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①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이다.
10. 밑줄 친 ‘합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제1조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
<보 기>
ㄱ. 남북의 정상이 만나서 약속한 것이다.ㄴ.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ㄷ. 군사 당국자 간의 직통 전화를 가설하기로 하였다. ㄹ. 남북 불가침을 위한 남북 군사공동위원회 설치를 명시하였다. |
② ㄱ, ㄹ
③ ㄴ, ㄷ
④ ㄷ, ㄹ
정답 ④
해설 :
남북의 관계를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아닌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보고,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한 통일과 관련한 공동 합의는 ‘남북기본합의서(1991)’이다. 남북기본 합의서에서는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을 강조한다. 불가침, 즉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합의의 구체적인 실천사항으로 제시된 것이 1) 군사 당국자 간의 직통 전화 가설, 2) 남북 군사공동위원회 설치이다.
ㄱ. 남북의 정상이 만나서 약속한 것은 6·15 남북 공동 선언(2000)과 10·4 선언(2007)이다.
ㄴ. 남북한이 함께 UN에 가입한 것은 1991년 9월이다. 남북기본 합의서는 같은 해 12월에 채택되었으므로, 남북기본 합의서는 UN 가입의 계기가 될 수는 없다.
정답 ④
☞ 제시문은 1991년 12월에 채택한 남북 기본 합의서의 내용이다. 남북한의 기본 관계에 관해 정부 간 공식 합의한 것으로, 제5차 고위급 회담(1991. 12, 서울)에서 채택, 서명되었고, 제6차 남북 고위급 회담(1992. 2, 평양)에서 확인, 발효되었다. 이 합의서에서 남한과 북한 정부는 남북 관계를 ‘잠정적 특수 관계’로 규정하고, 남북이 통일에 이르는 과도적 기간 중에 있다는 전제하에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 결과 1992년 3월 18일 이전에 정치, 군사, 교류·협력 등 3개 분과위원회를 각기 구성하였으며, 판문점에는 상호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남북 군사 공동 위원회 및 경제 교류·협력 위원회를 비롯한 부문별 공동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ㄱ. 남북 정상이 만나 체결한 것은 2000년 6·15 남북 공동 선언과 2007년 10·4 남북 공동 선언(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다.
ㄴ. 남북 고위급 회담의 결과 남북한은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별개의 의석으로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이는 1991년 9월의 일로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 이전의 일이다.
※ “남북 기본 합의서"
남과 북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뜻에 따라, 1972년에 채택된 7·4 남북 공동 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고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고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며, 다각적인 교류·협력을 실현하여 민족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하며,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한다. ……
해설 :
남북의 관계를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아닌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보고,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한 통일과 관련한 공동 합의는 ‘남북기본합의서(1991)’이다. 남북기본 합의서에서는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을 강조한다. 불가침, 즉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합의의 구체적인 실천사항으로 제시된 것이 1) 군사 당국자 간의 직통 전화 가설, 2) 남북 군사공동위원회 설치이다.
ㄱ. 남북의 정상이 만나서 약속한 것은 6·15 남북 공동 선언(2000)과 10·4 선언(2007)이다.
ㄴ. 남북한이 함께 UN에 가입한 것은 1991년 9월이다. 남북기본 합의서는 같은 해 12월에 채택되었으므로, 남북기본 합의서는 UN 가입의 계기가 될 수는 없다.
정답 ④
☞ 제시문은 1991년 12월에 채택한 남북 기본 합의서의 내용이다. 남북한의 기본 관계에 관해 정부 간 공식 합의한 것으로, 제5차 고위급 회담(1991. 12, 서울)에서 채택, 서명되었고, 제6차 남북 고위급 회담(1992. 2, 평양)에서 확인, 발효되었다. 이 합의서에서 남한과 북한 정부는 남북 관계를 ‘잠정적 특수 관계’로 규정하고, 남북이 통일에 이르는 과도적 기간 중에 있다는 전제하에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 결과 1992년 3월 18일 이전에 정치, 군사, 교류·협력 등 3개 분과위원회를 각기 구성하였으며, 판문점에는 상호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남북 군사 공동 위원회 및 경제 교류·협력 위원회를 비롯한 부문별 공동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ㄱ. 남북 정상이 만나 체결한 것은 2000년 6·15 남북 공동 선언과 2007년 10·4 남북 공동 선언(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다.
ㄴ. 남북 고위급 회담의 결과 남북한은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별개의 의석으로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이는 1991년 9월의 일로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 이전의 일이다.
※ “남북 기본 합의서"
남과 북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뜻에 따라, 1972년에 채택된 7·4 남북 공동 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고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고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며, 다각적인 교류·협력을 실현하여 민족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하며,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한다. ……
11. 밑줄 친 ‘사서’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국왕의 명령을 받아 편찬한 기전체 사서로 편찬 동기를 “학사대부(學士大夫)가 우리 역사를 알지 못하니 유감이다. 중국 사서는 우리나라 사실을 간략히 적었고 고기(古記)는 내용이 졸렬하므로 왕, 신하, 백성의 잘잘못을 가려 규범을 후세에 남기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연표 3권, 본기 28권, 지 9권, 열전 10권 등 총 50권으로 구성되었다. |
② 열전에는 김유신을 비롯한 신라인이 편중되었다.
③ 동명왕의 건국 설화를 5언시체로 재구성하여 서술하였다.
④ 민족 시조인 단군을 강조하고 발해에 대한 내용을 서술하였다.
정답 ②
해설 :
‘국왕의 명령을 받아 편찬’한 관찬 사서이며, 편찬 체제로 ‘기전체’를 채택하였으며, 본기 28권·열전 10권으로 구성된 역사서는 ‘삼국사기(1145)’이다. 제시된 자료는 김부식이 ‘감국사기’를 인종에게 바치며 올린 진(進)삼국사기표이다.
② 삼국사기는 신라 계승의식을 바탕으로, 신라를 중심으로 기술되었으므로, 열전에도 김유신 등 신라인의 비중이 높다.
① 민간설화와 신라의 향가를 수록한 역사서는 일연의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향가는 11수가 아니라 14수이다.
③ 동명왕의 건국 설화를 시로 표현한 역사서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다.
④ 단군이 강조되고 발해가 수록된 역사서는 이승휴의 ‘제왕운기’이다.
정답 ②
☞ 제시문은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이다. 김부식이 왕명에 따라 펴낸 역사서로, 신화적 세계관을 배척하였으며, <구삼국사>를 기본으로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신라·고구려·백제 세 나라의 역사를 기전체로 적었다. 삼국사기 열전은 10권 중에서 김유신 개인의 열전이 3권을 차지하며, 나머지 68인의 열전을 7권에 포함시키고 있다.
① 민간 설화와 신라의 향가가 수록되어 있는 것은 일연의 『삼국유사(1281)』이지만, 삼국유사에는 14수의 향가가 수록되어 있다.
③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제3권에 수록되어 있는 「동명왕편(1192)」에 대한 설명이다.
④ 이승휴의 『제왕운기(1287)』에 대한 설명이다.
해설 :
‘국왕의 명령을 받아 편찬’한 관찬 사서이며, 편찬 체제로 ‘기전체’를 채택하였으며, 본기 28권·열전 10권으로 구성된 역사서는 ‘삼국사기(1145)’이다. 제시된 자료는 김부식이 ‘감국사기’를 인종에게 바치며 올린 진(進)삼국사기표이다.
② 삼국사기는 신라 계승의식을 바탕으로, 신라를 중심으로 기술되었으므로, 열전에도 김유신 등 신라인의 비중이 높다.
① 민간설화와 신라의 향가를 수록한 역사서는 일연의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향가는 11수가 아니라 14수이다.
③ 동명왕의 건국 설화를 시로 표현한 역사서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다.
④ 단군이 강조되고 발해가 수록된 역사서는 이승휴의 ‘제왕운기’이다.
정답 ②
☞ 제시문은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이다. 김부식이 왕명에 따라 펴낸 역사서로, 신화적 세계관을 배척하였으며, <구삼국사>를 기본으로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신라·고구려·백제 세 나라의 역사를 기전체로 적었다. 삼국사기 열전은 10권 중에서 김유신 개인의 열전이 3권을 차지하며, 나머지 68인의 열전을 7권에 포함시키고 있다.
① 민간 설화와 신라의 향가가 수록되어 있는 것은 일연의 『삼국유사(1281)』이지만, 삼국유사에는 14수의 향가가 수록되어 있다.
③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제3권에 수록되어 있는 「동명왕편(1192)」에 대한 설명이다.
④ 이승휴의 『제왕운기(1287)』에 대한 설명이다.
12. 밑줄 친 ㉠과 ㉡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평화적 정부 이양을 실현토록 해야겠습니다. 오늘 이 시점에서 저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국민적 화해를 이룩하기 위하여는, ㉡ 대통령 직선제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② ㉡-사사오입 개헌으로 시작되었다.
③ ㉠-4·13 호헌 조치로 효력을 유지하였다.
④ ㉡-6·10 민주 항쟁의 결실이었다.
정답 ④
해설 :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1차 개헌(1952), 5차 개헌(1962), 9차 개헌(1987)이다. 이 중 ‘평화적 정부 이양’과 관련된 것은 9차 개헌이다. 제시된 자료는 9차 개헌을 약속한 6·29 민주화 선언(1987)이다. 이것은 6월 민주항쟁(6·10 민주항쟁)의 열매이다.
①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와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 원인이 되어 6월 민주항쟁(1987)이 일어났다. 그 결과 6·29 민주화 선언이 발표되었고, 곧이어 헌법 제9차 개정이 이루어졌다. 6·29 민주화 선언은 당시 여당(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한 것이지만, 아직은 전두환 정부 때이다.
② 사사오입 개헌은 제2차 개헌(1954)으로, 제9차 개헌과는 거리가 멀다.
③ 4·13 호헌 조치가 발단이 되어,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개헌이 이루어졌다. 4·13 호헌조치는 새 헌법의 원인이나 배경은 될 수 있겠지만, ‘효력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정답 ④
☞ 제시문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결과로 발표된 6·29 선언의 내용이다.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전두환 정권은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를 전면에 내세워 6월 29일, 직선제 개헌안에 의한 대통령 선거와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복권 및 시국 관련 사범의 석방, 국민기본권 신장, 언론자유의 창달, 지방 자치제의 실시와 대학의 자율화,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의 보장,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 등을 포함하는 시국 수습 방안 8개항을 6월 29일에 발표하였다.
①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9차 개헌은 전두환 정부 시기인 1987년 10월에 공포되었다.
②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루어진 2차 개헌(1954. 11)은 대통령 중임 제한을 철폐한 것이었다.
③ 4·13 호헌 조치는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내용을 담아 발표한 것으로, 6월 민주 항쟁의 발단이 된 사건이다.
※ “6·29 선언"
첫째,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하여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 이양을 실현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둘째,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어 국민의 올바른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셋째, 자유 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부인한 반국가 사범이나 살상·방화·파괴 등으로 국가를 흔들었던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시국 관련 사범들도 석방되어야 합니다.
넷째, 인간의 존엄성은 더욱 존중되어야 하며 국민 개개인의 기본적 인권은 최대한 신장되어야 합니다.
해설 :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1차 개헌(1952), 5차 개헌(1962), 9차 개헌(1987)이다. 이 중 ‘평화적 정부 이양’과 관련된 것은 9차 개헌이다. 제시된 자료는 9차 개헌을 약속한 6·29 민주화 선언(1987)이다. 이것은 6월 민주항쟁(6·10 민주항쟁)의 열매이다.
①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와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 원인이 되어 6월 민주항쟁(1987)이 일어났다. 그 결과 6·29 민주화 선언이 발표되었고, 곧이어 헌법 제9차 개정이 이루어졌다. 6·29 민주화 선언은 당시 여당(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한 것이지만, 아직은 전두환 정부 때이다.
② 사사오입 개헌은 제2차 개헌(1954)으로, 제9차 개헌과는 거리가 멀다.
③ 4·13 호헌 조치가 발단이 되어,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개헌이 이루어졌다. 4·13 호헌조치는 새 헌법의 원인이나 배경은 될 수 있겠지만, ‘효력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정답 ④
☞ 제시문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결과로 발표된 6·29 선언의 내용이다.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전두환 정권은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를 전면에 내세워 6월 29일, 직선제 개헌안에 의한 대통령 선거와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복권 및 시국 관련 사범의 석방, 국민기본권 신장, 언론자유의 창달, 지방 자치제의 실시와 대학의 자율화,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의 보장,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 등을 포함하는 시국 수습 방안 8개항을 6월 29일에 발표하였다.
①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9차 개헌은 전두환 정부 시기인 1987년 10월에 공포되었다.
②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루어진 2차 개헌(1954. 11)은 대통령 중임 제한을 철폐한 것이었다.
③ 4·13 호헌 조치는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내용을 담아 발표한 것으로, 6월 민주 항쟁의 발단이 된 사건이다.
※ “6·29 선언"
첫째,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하여 1988년 2월 평화적 정부 이양을 실현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둘째,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어 국민의 올바른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셋째, 자유 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부인한 반국가 사범이나 살상·방화·파괴 등으로 국가를 흔들었던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시국 관련 사범들도 석방되어야 합니다.
넷째, 인간의 존엄성은 더욱 존중되어야 하며 국민 개개인의 기본적 인권은 최대한 신장되어야 합니다.
13. (가), (나) 시대의 사회상과 유적이 바르게 연결된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가)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 뼈 도구와 뗀 석기를 가지고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나) 고인돌이 만들어지고 계급이 형성되는 한편 군장국가가 등장하였다. |
<보 기>
ㄱ. (가)-동굴 유적지로 덕천 승리산, 제천 점말, 청원 두루봉이 있다.ㄴ. (나)-금속을 다루는 전문 장인이 나타나고 사유 재산제도가 발달하였다. ㄷ. (가)-반달 돌칼과 구멍 뚫린 돌자귀를 만들어 농경에 활용하였다. ㄹ. (나)-서울 암사동과 황해도 봉산 지탑리가 주요 유적지이다. |
② ㄱ, ㄷ
③ ㄴ, ㄹ
④ ㄷ, ㄹ
정답 ①
해설 :
(가) 구석기, (나) 청동기.
ㄱ. 덕천 승리산(사람뼈), 제천 점말(사람 얼굴을 새긴 코뿔소 뼈), 청원 두루봉(흥수 아이)은 모두 구석기 유적지이다.
ㄴ. 금속을 다루는 전문 장인이 나타나고 사유 재산제도가 발달한 시기는 청동기 시대이다.
ㄷ. 반달 돌칼, 구멍 뚫린 돌자귀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다.
ㄹ. 서울 암사동(빗살무늬 토기)과 황해도 봉산 지탑리(탄화된 좁쌀)는 대표적인 신석기 유적이다.
정답 ①
☞ 제시문의 (가)는 구석기, (나)는 청동기 시대에 대한 내용이다.
ㄷ. 반달 돌칼과 돌자귀 등은 청동기 시대의 전형적인 유물이다. 신석기 시대 이후에 농경 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이 유물들은 신석기 시대 후기부터 나타나 청동기 시대에 흔히 쓰였다.
ㄹ. 서울 암사동과 봉산 지탑리 유적은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지이다. 서울 암사동 유적은 기원전 3000~4000년경의 신석기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집터가 남아 있는 곳으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밝혀진 신석기 시대 최대의 집단 취락터이다. 봉산 지탑리 유적에서는 피, 조로 보이는 탄화된 곡식과 돌보습, 돌낫 등의 신석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해설 :
(가) 구석기, (나) 청동기.
ㄱ. 덕천 승리산(사람뼈), 제천 점말(사람 얼굴을 새긴 코뿔소 뼈), 청원 두루봉(흥수 아이)은 모두 구석기 유적지이다.
ㄴ. 금속을 다루는 전문 장인이 나타나고 사유 재산제도가 발달한 시기는 청동기 시대이다.
ㄷ. 반달 돌칼, 구멍 뚫린 돌자귀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다.
ㄹ. 서울 암사동(빗살무늬 토기)과 황해도 봉산 지탑리(탄화된 좁쌀)는 대표적인 신석기 유적이다.
정답 ①
☞ 제시문의 (가)는 구석기, (나)는 청동기 시대에 대한 내용이다.
ㄷ. 반달 돌칼과 돌자귀 등은 청동기 시대의 전형적인 유물이다. 신석기 시대 이후에 농경 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이 유물들은 신석기 시대 후기부터 나타나 청동기 시대에 흔히 쓰였다.
ㄹ. 서울 암사동과 봉산 지탑리 유적은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지이다. 서울 암사동 유적은 기원전 3000~4000년경의 신석기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집터가 남아 있는 곳으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밝혀진 신석기 시대 최대의 집단 취락터이다. 봉산 지탑리 유적에서는 피, 조로 보이는 탄화된 곡식과 돌보습, 돌낫 등의 신석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14. 다음 자료에 나타난 정책이 시행된 원인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양역의 폐단이 심하여 백성들이 살 수 없을 지경이니 이제 군포를 영구히 1필로 감한다. 부족해진 재정은 어장과 선박에 대한 세금을 국가에서 거두고, 선무군관에게서 1필씩 거두어 보충하도록 한다. |
② 호포제가 실시되었지만 백성의 부담은 여전하였다.
③ 신해통공으로 상업 활동이 늘면서 군포 부과 대상이 줄었다.
④ 감영과 병영이 독자적으로 군포를 거두면서 군포 부담이 증가하였다.
정답 ④
해설 :
‘군포를 1필로’ 줄인 조치는 영조 때의 균역법이다. 이 문제는 균역법 시행의 ‘원인’ 또는 배경을 묻는 문제이다. 균역법은 1) 지방의 감영과 병영에서 이중삼중으로 군포를 부담시켜 군포의 부담이 가중되어 있었고, 2) 납속이나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어 면역자가 증가하자 군역의 재원이 감소되어 있었고, 3) 호포론·결포론 등의 양역변통론이 제기되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상태에서 취해진 조치이다.
① 군포를 줄여서 재정이 감소하자, 재정감소 보완책으로 결작, 선무군관포, 어장세, 염세, 선박세를 징수하였다. 결작은 균역법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균역법 시행의 ‘원인’은 아니다.
②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부담시키는 호포제는 흥선대원군 때 실시되었다.
③ 신해통공은 정조 때의 일이므로, 영조 때 사건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
정답 ④
☞ 제시문은 영조 26년(1750)에 실시한 균역법에 대한 내용이다. 당시 정부는 군포 부담의 증가로 인해 유망하는 농민이 증가하자, 양인 농민의 군포 부담을 반으로 줄이자는 감포론을 기반으로 한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① 균역법 실시의 결과에 해당한다. 결작세는 균역법의 실시로 인해 줄어든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로,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의 전결에 1결당 쌀 2두(또는 돈 5전)를 부과 징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점차 지주가 농민에게 결작 부담을 강요하여 군적 문란이 심해지자 농민 부담이 다시 가중되는 상황으로 변하였다.
② 호포제는 대원군이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시행한 제도이다.
③ 신해통공은 정조가 1791년에 좌의정 채제공의 주장에 의해 실시하였다.
해설 :
‘군포를 1필로’ 줄인 조치는 영조 때의 균역법이다. 이 문제는 균역법 시행의 ‘원인’ 또는 배경을 묻는 문제이다. 균역법은 1) 지방의 감영과 병영에서 이중삼중으로 군포를 부담시켜 군포의 부담이 가중되어 있었고, 2) 납속이나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어 면역자가 증가하자 군역의 재원이 감소되어 있었고, 3) 호포론·결포론 등의 양역변통론이 제기되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상태에서 취해진 조치이다.
① 군포를 줄여서 재정이 감소하자, 재정감소 보완책으로 결작, 선무군관포, 어장세, 염세, 선박세를 징수하였다. 결작은 균역법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균역법 시행의 ‘원인’은 아니다.
②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부담시키는 호포제는 흥선대원군 때 실시되었다.
③ 신해통공은 정조 때의 일이므로, 영조 때 사건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
정답 ④
☞ 제시문은 영조 26년(1750)에 실시한 균역법에 대한 내용이다. 당시 정부는 군포 부담의 증가로 인해 유망하는 농민이 증가하자, 양인 농민의 군포 부담을 반으로 줄이자는 감포론을 기반으로 한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① 균역법 실시의 결과에 해당한다. 결작세는 균역법의 실시로 인해 줄어든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로,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의 전결에 1결당 쌀 2두(또는 돈 5전)를 부과 징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점차 지주가 농민에게 결작 부담을 강요하여 군적 문란이 심해지자 농민 부담이 다시 가중되는 상황으로 변하였다.
② 호포제는 대원군이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시행한 제도이다.
③ 신해통공은 정조가 1791년에 좌의정 채제공의 주장에 의해 실시하였다.
15. 밑줄 친 ‘그’의 활동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그가 글을 올리기를 “이의민은 성품이 사납고 잔인하여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아랫사람을 능멸했습니다. … (중략) … 원컨대 폐하께서는 태조의 바른 법을 따라서 이를 행하여 빛나게 중흥하소서. 이에 삼가 열 가지 일을 조목별로 아룁니다.” |
<보 기>
ㄱ. 재조 대장경의 조판을 주도하였다.ㄴ. 순천의 수선사 결사 운동을 지원하였다. ㄷ. 금속 활자본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발문을 지었다. ㄹ. 문인 이규보를 발탁하여 그의 행정 능력을 활용하였다. |
② ㄱ, ㄷ
③ ㄴ, ㄹ
④ ㄷ, ㄹ
정답 ③
해설 :
이의민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는 인물은 이의민을 처단하고 최씨 정권을 수립한 ‘최충헌’이다. 최충헌은 명종에게 ‘열 가지 일’을 조목별로 아뢰었는데 이것이 봉사 10조(1196)이다. 최충헌과 최우(최이)를 구분하는 문제이다.
ㄱ. 재조 대장경(팔만대장경)의 조판은 강화 천도 후에 시작되었다(1236). 강화 천도 시기는 최우 집권기이다.
ㄷ. 최초의 금속 활자 인쇄본인 ‘상정고금예문’은 1234년에 인쇄되었다. 금속 활자본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1239년에 인쇄되었다. 그 발문을 지은 것은 최우이다.
ㄴ. 지눌의 수선사 결사 운동을 지원한 것은 최충헌이다. (최충헌은 1219년에 죽었고, 지눌은 1210년에 죽었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이다.)
ㄹ. 이규보는 ‘최씨 문객’이라 불릴 만큼 최충헌을 격찬하며, 최충헌 옆에서 그를 보좌했던 대표적인 문신이다.
정답 ③
☞ '그'는 최충헌이고, 제시문은 그가 올린 '봉사 10조'에 대한 기록이다.
ㄴ. 최충헌은 수선사 결사 운동을 지원하였고, 이후 수선사 결사 운동은 무신정권의 직접적 지원을 받으면서 중앙 정치세력과 연결되고 교단이 확장 발전함에 따라 보다 보수화 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ㄹ. 무신정권 이후 많은 문인들이 수난을 당하였으나, 최충헌 집권 이후에는 학문이 다시 진흥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최충헌은 이규보를 박탁하여 그의 행정 능력을 활용하였다.
ㄱ, ㄷ. 최충헌의 뒤를 이어 교정별감이 된 최우에 대한 설명이다.
해설 :
이의민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는 인물은 이의민을 처단하고 최씨 정권을 수립한 ‘최충헌’이다. 최충헌은 명종에게 ‘열 가지 일’을 조목별로 아뢰었는데 이것이 봉사 10조(1196)이다. 최충헌과 최우(최이)를 구분하는 문제이다.
ㄱ. 재조 대장경(팔만대장경)의 조판은 강화 천도 후에 시작되었다(1236). 강화 천도 시기는 최우 집권기이다.
ㄷ. 최초의 금속 활자 인쇄본인 ‘상정고금예문’은 1234년에 인쇄되었다. 금속 활자본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1239년에 인쇄되었다. 그 발문을 지은 것은 최우이다.
ㄴ. 지눌의 수선사 결사 운동을 지원한 것은 최충헌이다. (최충헌은 1219년에 죽었고, 지눌은 1210년에 죽었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이다.)
ㄹ. 이규보는 ‘최씨 문객’이라 불릴 만큼 최충헌을 격찬하며, 최충헌 옆에서 그를 보좌했던 대표적인 문신이다.
정답 ③
☞ '그'는 최충헌이고, 제시문은 그가 올린 '봉사 10조'에 대한 기록이다.
ㄴ. 최충헌은 수선사 결사 운동을 지원하였고, 이후 수선사 결사 운동은 무신정권의 직접적 지원을 받으면서 중앙 정치세력과 연결되고 교단이 확장 발전함에 따라 보다 보수화 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ㄹ. 무신정권 이후 많은 문인들이 수난을 당하였으나, 최충헌 집권 이후에는 학문이 다시 진흥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최충헌은 이규보를 박탁하여 그의 행정 능력을 활용하였다.
ㄱ, ㄷ. 최충헌의 뒤를 이어 교정별감이 된 최우에 대한 설명이다.
16. 다음 강령을 채택한 단체의 활동으로 옳지 않은 것은?
● 우리는 조선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해방의 실현을 도모한다. ● 우리는 전 민족의 총역량을 집중하여 민족적 대표 기관이 되기를 기한다. ● 우리는 일체의 개량주의 운동을 배척하여 전 민족의 현실적인 공동 이익을 위하여 투쟁한다. |
② 의무 교육제와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주장하였다.
③ 노동운동과 연계하여 최저 임금제를 요구하였다.
④ 여성의 법률상 및 사회적 차별을 없애자고 하였다.
정답 ②
해설 :
제시된 자료는 신간회 동경지회 강령(1927. 12)이다. 이때 발표된 ‘정책’에 포함된 내용이 무엇인지를 묻는 문제이다. ‘의무교육제’와 ‘고등교육기관 설립’은 포함되지 않는다.
정답 ②
☞ 제시문은 신간회(1927)의 강령이다. 비타협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통합하여 창립한 신간회는 노동쟁의, 소작 쟁의, 동맹 휴학 등의 대중 운동을 지도하였고,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청년·여성·형평 운동과도 조직적으로 연계하였고, 자매 단체로 근우회가 조직되었는데 여성의 단결, 남녀평등, 여성 교육 확대, 여성노동자 권익 옹호, 새생활 개선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을 때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 대회를 계획하기도 하였다.
② 1920년대에 조선교육회(조선교육협회)는 민족 역량 강화를 위해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면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해설 :
제시된 자료는 신간회 동경지회 강령(1927. 12)이다. 이때 발표된 ‘정책’에 포함된 내용이 무엇인지를 묻는 문제이다. ‘의무교육제’와 ‘고등교육기관 설립’은 포함되지 않는다.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 조선민족을 억압하는 일체 법령의 철폐 고문제 폐지 및 재판의 절대 공개 일본인 이민 반대 부당 납세 반대 산업정책의 조선인 본위 동척(東拓) 폐지 단결권·파업권·단체계약권의 확립 경작권의 확립 최고소작료의 공정(公定) 소작인의 노예적 부역폐지 소년 및 부인의 야업(夜業) 노동 및 위험작업의 금지 8시간 노동 실시 최저임금·최저봉급제의 실시 공장법·광업법·해원법(海員法)의 개정 민간 교육기관에 대한 허가제 폐지 일체 학교교육의 조선인 본위 일체 학교교육 용어의 조선어 사용 학생 생도의 연구자유 및 자치권의 확립 여자의 법률상 및 사회상의 차별 철폐 여자 인신매매의 금지 여자교육 및 직업의 일체 제한의 철폐 형평사원(衡平社員) 및 취업에 대한 일체 차별 반대 형무소에 있어서의 대우 개선, 독서통신의 자유 |
정답 ②
☞ 제시문은 신간회(1927)의 강령이다. 비타협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통합하여 창립한 신간회는 노동쟁의, 소작 쟁의, 동맹 휴학 등의 대중 운동을 지도하였고,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청년·여성·형평 운동과도 조직적으로 연계하였고, 자매 단체로 근우회가 조직되었는데 여성의 단결, 남녀평등, 여성 교육 확대, 여성노동자 권익 옹호, 새생활 개선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을 때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 대회를 계획하기도 하였다.
② 1920년대에 조선교육회(조선교육협회)는 민족 역량 강화를 위해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면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17. 다음 자료에 나타난 시기의 사회․경제적 상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당나라 소종 황제가 중흥을 이룰 때, 전쟁과 흉년이라는 두 가지 재앙이 서쪽에서 그치고 동쪽으로 오니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늘어 있었다.
-해인사 묘길상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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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왕실이 차지하는 농장은 장·처라 불리었는데 그 수는 360개나 되었다.
③ 성주 또는 장군이라 칭한 이들이 지방 행정을 장악하고 조세를 징수하였다.
④ 관료에게 관료전을 주고 녹읍을 폐지하는 대신 세조(歲租)를 차등 지급하였다.
정답 ③
해설 :
‘당나라’ 때 우리나라는 신라 중대 또는 신라 하대이다. 이 중 백성들이 굶고 죽는 것에 걸맞는 시기는 하대일 것이다. 더 정확하게 보면, 당나라 소종 황제는 888년에 즉위하였으므로 신라의 경우 진성여왕 때이다. ‘해인사’는 802년 신라 하대의 애장왕 때 건립되었다. 진성여왕 때 시무십여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최치원이 은둔해 버린 절도 ‘해인사’이다. 전체적으로 ‘신라 하대’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이 시기에는 스스로를 ‘성주 또는 장군’이라 칭하는 호족들이 지방 행정을 장악하고 농민들로부터 조세를 징수하였다.
① 나당전쟁은 삼국통일기에 있었다. 신라 중대의 초기를 말한다.
② 농장은 고려 시대의 대토지를 말한다. 특히 왕실히 차지한 농장은 장·처라고 불렀다.
④ 관료전을 주고 녹읍을 폐지한 시기는 신문왕 때, 즉 신라 중대이다.
정답 ③
☞ 「해인사 묘길상탑기」는 최치원이 글을 지었으며, 진성여왕 9년(895) 7월에 전란에서 사망한 원혼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삼층석탑을 세운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 글에서 설명하는 신라 하대에는 호족 세력이 성장하여 행정·군사권을 장악하였으며, 각 지역의 경제적 지배력을 행사하였고, 군 단위의 지방을 지배하였다.
① 신라 하대의 상황과 관련이 없다. 신라 하대의 혼란은 당의 침입 때문이 아니라, 신라 사회 내부의 모순이 주요 원인이다.
② 고려 시대에 해당하는 설명이다. 장·처는 경기·충청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였으며, 각 궁원, 내장택, 사원 등 왕실 재정과 사원 재정을 담당하였다.
④ 신라 중대에 대한 설명이다. 왕권의 전제화로 신문왕 7년(687)에 문무 관료전을 지급하고, 신문왕 9년(689)에 녹읍제를 폐지하여, 연봉 성격의 축년사조(逐年賜租)로 세조(歲租) 지급을 확립하였다.
해설 :
‘당나라’ 때 우리나라는 신라 중대 또는 신라 하대이다. 이 중 백성들이 굶고 죽는 것에 걸맞는 시기는 하대일 것이다. 더 정확하게 보면, 당나라 소종 황제는 888년에 즉위하였으므로 신라의 경우 진성여왕 때이다. ‘해인사’는 802년 신라 하대의 애장왕 때 건립되었다. 진성여왕 때 시무십여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최치원이 은둔해 버린 절도 ‘해인사’이다. 전체적으로 ‘신라 하대’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이 시기에는 스스로를 ‘성주 또는 장군’이라 칭하는 호족들이 지방 행정을 장악하고 농민들로부터 조세를 징수하였다.
① 나당전쟁은 삼국통일기에 있었다. 신라 중대의 초기를 말한다.
② 농장은 고려 시대의 대토지를 말한다. 특히 왕실히 차지한 농장은 장·처라고 불렀다.
④ 관료전을 주고 녹읍을 폐지한 시기는 신문왕 때, 즉 신라 중대이다.
정답 ③
☞ 「해인사 묘길상탑기」는 최치원이 글을 지었으며, 진성여왕 9년(895) 7월에 전란에서 사망한 원혼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삼층석탑을 세운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 글에서 설명하는 신라 하대에는 호족 세력이 성장하여 행정·군사권을 장악하였으며, 각 지역의 경제적 지배력을 행사하였고, 군 단위의 지방을 지배하였다.
① 신라 하대의 상황과 관련이 없다. 신라 하대의 혼란은 당의 침입 때문이 아니라, 신라 사회 내부의 모순이 주요 원인이다.
② 고려 시대에 해당하는 설명이다. 장·처는 경기·충청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였으며, 각 궁원, 내장택, 사원 등 왕실 재정과 사원 재정을 담당하였다.
④ 신라 중대에 대한 설명이다. 왕권의 전제화로 신문왕 7년(687)에 문무 관료전을 지급하고, 신문왕 9년(689)에 녹읍제를 폐지하여, 연봉 성격의 축년사조(逐年賜租)로 세조(歲租) 지급을 확립하였다.
18. 다음 법령을 만든 개화파 내각의 개혁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제1조 소학교는 아동의 신체 발달에 맞추어 인민 교육의 기초와 생활상 필요한 보통 지식과 기능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소학교는 관립 소학교·공립 소학교·사립 소학교 등의 3종이며, 관립 소학교는 정부 설립, 공립 소학교는 부(府) 혹은 군(郡) 설립, 사립 소학교는 사립 학교 설립과 관계된 것을 말한다.
-소학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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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기>
ㄱ. 건양이라는 연호를 제정하였다.ㄴ. 조·일 무역 규칙을 개정하였다. ㄷ. 서울에 친위대를, 지방에 진위대를 두었다. ㄹ. 단발령을 폐지하고 의정부를 다시 설치하였다. |
② ㄱ, ㄷ
③ ㄴ, ㄹ
④ ㄷ, ㄹ
정답 ②
해설 :
‘소학교’ 제도가 실시된 ‘개혁’은 을미개혁(1895)이다.
ㄱ. 을미개혁 때 태양력을 사용하며, 연호는 ‘건양’을 제정하였다.
ㄷ. 갑오 2차 개혁 때 왕실 호위를 하는 시위대가 설치되었고, 을미개혁 때 중앙군인 친위대와 지방군인 진위대가 설치되었다.
ㄴ. 조·일 무역 규칙(1876)이 개정된 것은 조·일 통상장정(1883)이다. 을미개혁보다 10년도 더 앞선 일이다.
ㄹ. 아관파천(1896)으로 을미개혁이 중단되었을 때, 단발령도 폐지되었다.
정답 ②
☞ 제시문은 을미개혁(1895) 당시 제정·공포한 '소학교령'의 내용이다.
ㄴ. 1876년 6월에 체결된 조·일 무역 규칙(조·일 통상 장정)은 1883년 7월에 개정되었다.
ㄹ. 을미개혁 때 단발령을 공포하여 상투를 자르게 하고 망건의 착용을 금지하였다. 아관파천(1896) 이후에 을미개혁에서 단행된 단발령을 비롯한 새로운 제도 대부분이 중지되었다.
※ “소학교령"
제1조 소학교는 아동의 신체 발달에 비추어 국민 교육의 기초와 그 생활상 필요한 보통지식과 기능을 가르침을 본지로 함.
제2조 소학교를 나누어 관립소학교·공립소학교·사립소학교의 3종으로 함. 관립소학교는 정부 설립이요, 공립소학교는 부 또는 군 설립이요, 사립소학교는 사립 설립에 관계한 자를 말함.
제3조 관립소학교에 필요한 경비는 국고에서 지변하고, 공립소학교에 필요한 경비는 부 또는 군에서 부담함.
제4조 사립소학교는 각 해당 관찰사의 인가를 거쳐 설치함. 사립소학교 인가에 관한 규정은 학부대신이 정함.
제5조 사립소학교 경비는 지방 이재 또는 국고에서 얼마를 보조할 수 있음.
해설 :
‘소학교’ 제도가 실시된 ‘개혁’은 을미개혁(1895)이다.
ㄱ. 을미개혁 때 태양력을 사용하며, 연호는 ‘건양’을 제정하였다.
ㄷ. 갑오 2차 개혁 때 왕실 호위를 하는 시위대가 설치되었고, 을미개혁 때 중앙군인 친위대와 지방군인 진위대가 설치되었다.
ㄴ. 조·일 무역 규칙(1876)이 개정된 것은 조·일 통상장정(1883)이다. 을미개혁보다 10년도 더 앞선 일이다.
ㄹ. 아관파천(1896)으로 을미개혁이 중단되었을 때, 단발령도 폐지되었다.
정답 ②
☞ 제시문은 을미개혁(1895) 당시 제정·공포한 '소학교령'의 내용이다.
ㄴ. 1876년 6월에 체결된 조·일 무역 규칙(조·일 통상 장정)은 1883년 7월에 개정되었다.
ㄹ. 을미개혁 때 단발령을 공포하여 상투를 자르게 하고 망건의 착용을 금지하였다. 아관파천(1896) 이후에 을미개혁에서 단행된 단발령을 비롯한 새로운 제도 대부분이 중지되었다.
※ “소학교령"
제1조 소학교는 아동의 신체 발달에 비추어 국민 교육의 기초와 그 생활상 필요한 보통지식과 기능을 가르침을 본지로 함.
제2조 소학교를 나누어 관립소학교·공립소학교·사립소학교의 3종으로 함. 관립소학교는 정부 설립이요, 공립소학교는 부 또는 군 설립이요, 사립소학교는 사립 설립에 관계한 자를 말함.
제3조 관립소학교에 필요한 경비는 국고에서 지변하고, 공립소학교에 필요한 경비는 부 또는 군에서 부담함.
제4조 사립소학교는 각 해당 관찰사의 인가를 거쳐 설치함. 사립소학교 인가에 관한 규정은 학부대신이 정함.
제5조 사립소학교 경비는 지방 이재 또는 국고에서 얼마를 보조할 수 있음.
‘관보’, 1895년 7월 22일
19. 다음 자료에 나타난 민족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 나라 빚 1,300만 원은 우리 대한의 존망에 관계한다. 갚으면 나라가 존재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 대세이다. -취지문- ●모집금 내역
-경무고문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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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서울에서는 국채보상기성회가 발족되었다.
③ 2,000만 조선인의 금연 및 금주 운동이 전개되었다.
④ 언론 기관인 대한매일신보사와 황성신문사가 지원하였다.
정답 ①
해설 :
‘나라 빚 1,300만원’을 갚자는 운동은 ‘국채보상운동(1907)’이다.
①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은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던 1907년에 맺어졌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한일 신협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국채보상운동은 ‘통감부의 방해’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해야 한다.
②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자 이 운동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서울에서 조직한 것이 ‘국채보상기성회’이다. 이것은 국채보상운동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국채보상기성회라는 조직의 소재지를 묻는 문제이다.
③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날 즈음의 인구는 2천만이었다. 조선인들이 금연·금주를 하고, 가락지를 빼면서 참여한 운동이 국채보상운동이다.
④ 대한매일신보사, 황성신문사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였다. 특히 대한매일신보사가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정답 ①
☞ 제시된 자료는 국채 보상 운동(1907)에 대한 내용이다. 1907년 대구 광문사(廣文社)에서 서상돈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서울에서 국채 보상 기성회가 설립되는 등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전국적으로 금연 운동이 전개되었고, 부인 단체와 여학생들도 의연금 모집에 적극 나섰다. 특히,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의 언론 기관이 참여하면서 전국적으로 모금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심지어 일본 유학생들도 담뱃값을 절약하여 보내기도 하였다. 그 결과 600여만 원을 모금하였다.
① 국채 보상 운동은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국채 보상 운동은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908년에 중단되었다.
※ “국채 보상 운동 관련 사료"
∙ 국채 보상 운동 취지서
지금 우리들은 정신을 새로이 하고 충의를 떨칠 때이니, 국채 1천 3백만 원은 우리 한 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입니다. 이것을 갚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이것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지금 국고에서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으며, 만일 나라에서 못 갚는다면 그 때는 이미 3천리 강토는 내 나라 내 민족의 소유가 못 될 것입니다. 국토가 한 번 없어진다면 다시는 찾을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베트남 등의 나라와 같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반 인민들은 의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이 국채를 모르겠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갚을 길이 있으니 수고롭지 않고 손해보지 않고 재물 모으는 방법이 있습니다.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금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에게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1천 3백만 원을 모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액수가 다 차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응당 자원해서 일원·십 원·백 원·천 원을 특별 출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해설 :
‘나라 빚 1,300만원’을 갚자는 운동은 ‘국채보상운동(1907)’이다.
①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은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던 1907년에 맺어졌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한일 신협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국채보상운동은 ‘통감부의 방해’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해야 한다.
②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자 이 운동에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서울에서 조직한 것이 ‘국채보상기성회’이다. 이것은 국채보상운동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국채보상기성회라는 조직의 소재지를 묻는 문제이다.
③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날 즈음의 인구는 2천만이었다. 조선인들이 금연·금주를 하고, 가락지를 빼면서 참여한 운동이 국채보상운동이다.
④ 대한매일신보사, 황성신문사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였다. 특히 대한매일신보사가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정답 ①
☞ 제시된 자료는 국채 보상 운동(1907)에 대한 내용이다. 1907년 대구 광문사(廣文社)에서 서상돈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서울에서 국채 보상 기성회가 설립되는 등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전국적으로 금연 운동이 전개되었고, 부인 단체와 여학생들도 의연금 모집에 적극 나섰다. 특히,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의 언론 기관이 참여하면서 전국적으로 모금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심지어 일본 유학생들도 담뱃값을 절약하여 보내기도 하였다. 그 결과 600여만 원을 모금하였다.
① 국채 보상 운동은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국채 보상 운동은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908년에 중단되었다.
※ “국채 보상 운동 관련 사료"
∙ 국채 보상 운동 취지서
지금 우리들은 정신을 새로이 하고 충의를 떨칠 때이니, 국채 1천 3백만 원은 우리 한 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입니다. 이것을 갚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이것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지금 국고에서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으며, 만일 나라에서 못 갚는다면 그 때는 이미 3천리 강토는 내 나라 내 민족의 소유가 못 될 것입니다. 국토가 한 번 없어진다면 다시는 찾을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베트남 등의 나라와 같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반 인민들은 의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이 국채를 모르겠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갚을 길이 있으니 수고롭지 않고 손해보지 않고 재물 모으는 방법이 있습니다.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금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에게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1천 3백만 원을 모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액수가 다 차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응당 자원해서 일원·십 원·백 원·천 원을 특별 출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1일
20. 조선시대 관계(官階)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관료의 품계는 정 1품에서 종 9품까지 18등급으로 하였다.
② 행수 제도를 마련하여 가능한 관직과 관계가 일치되도록 하였다.
③ 정 7품 이하는 참하관이라 하며, 목민관인 수령에 임용하였다.
④ 정 3품 통정대부 이상은 당상관이라 하며,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논의하였다.
정답 ③
해설 :
관계(官階)란 관리의 등급을 말한다.
③ 정 7품 이하는 참하관이라 한다. 종 6품 이상은 참상관이라 한다. 참상관이 되어야 목민관이 수령에 임명되었다.
① 조선시대 관료의 품계는 정 1품에서 종 9품까지 18등급으로 구성되었으며, 6품까지는 각 품이 상위, 하위로 나뉘어져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총 30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② 품계는 높은데 낮은 관직에 임명되는 경우 관직명 앞에 행(行)을 붙였다. 6조 판서는 정2품이 임명되는데, 만약 종1품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면 이땐 ‘행(行)이조판서’라고 한다. 반대로 품계는 낮은데 높은 관직에 임명되는 경우 관직명 앞에 수(守)를 붙였다. 이것을 행수(行守) 제도라고 한다. 이 제도는 관직과 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 그 일치하지 않음을 표시하려는 제도로, ‘관직과 관계가 일치하기를’ 바라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제도이다.
④ 정3품에서 당상관과 당하관이 나뉘어진다. 정3품 상위(통정대부) 이상은 당상관이라 하고, 정3품 하위(통훈대부) 이하는 당하관이라 한다. 당상관이 되어야 중앙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논의하고,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될 수 있었다.
정답 ③
☞ ① 조선 관료의 등급은 크게 1품에서 9품까지이며 각 품에는 정(正)과 종(從)의 구별이 있어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으로 되어 있었다.
② 행수 제도는 순자법 실시로 관직과 관계가 어긋나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실시한 제도로서, 이는 능력에 따라 폭넓은 인재를 등용하려는 보완책이었다. 관계는 높은데 관직이 낮은 경우[계고직비(階高織卑)]는 행(行)을, 관계가 낮은데 관직이 높은 경우[계비직고(階卑織高)]는 수(守)를 명기하여 관계와 관직의 상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행수제도에서의 관계 불일치에 따른 격차가 심화되자 이를 조정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어 성종 이후에는 관직과 품계의 일치를 꾀하려는 제한규정으로 정비되었다.
④ 당상관은 문관 중 정3품 상에 해당하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 무관 중 정3품 상의 지위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의 고급 관료를 일컬었다. 당상관은 고급 관료로서 인사권·포폄권(褒貶權)·군사권 등 여러 특권을 가지고 중요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지위였다.
③ 조선 시대에는 참상관(종6품 이상) 이상만이 지방 수령에 임용될 수 있었다.
해설 :
관계(官階)란 관리의 등급을 말한다.
③ 정 7품 이하는 참하관이라 한다. 종 6품 이상은 참상관이라 한다. 참상관이 되어야 목민관이 수령에 임명되었다.
① 조선시대 관료의 품계는 정 1품에서 종 9품까지 18등급으로 구성되었으며, 6품까지는 각 품이 상위, 하위로 나뉘어져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총 30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② 품계는 높은데 낮은 관직에 임명되는 경우 관직명 앞에 행(行)을 붙였다. 6조 판서는 정2품이 임명되는데, 만약 종1품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면 이땐 ‘행(行)이조판서’라고 한다. 반대로 품계는 낮은데 높은 관직에 임명되는 경우 관직명 앞에 수(守)를 붙였다. 이것을 행수(行守) 제도라고 한다. 이 제도는 관직과 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 그 일치하지 않음을 표시하려는 제도로, ‘관직과 관계가 일치하기를’ 바라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제도이다.
④ 정3품에서 당상관과 당하관이 나뉘어진다. 정3품 상위(통정대부) 이상은 당상관이라 하고, 정3품 하위(통훈대부) 이하는 당하관이라 한다. 당상관이 되어야 중앙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논의하고,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될 수 있었다.
정답 ③
☞ ① 조선 관료의 등급은 크게 1품에서 9품까지이며 각 품에는 정(正)과 종(從)의 구별이 있어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으로 되어 있었다.
② 행수 제도는 순자법 실시로 관직과 관계가 어긋나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실시한 제도로서, 이는 능력에 따라 폭넓은 인재를 등용하려는 보완책이었다. 관계는 높은데 관직이 낮은 경우[계고직비(階高織卑)]는 행(行)을, 관계가 낮은데 관직이 높은 경우[계비직고(階卑織高)]는 수(守)를 명기하여 관계와 관직의 상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행수제도에서의 관계 불일치에 따른 격차가 심화되자 이를 조정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어 성종 이후에는 관직과 품계의 일치를 꾀하려는 제한규정으로 정비되었다.
④ 당상관은 문관 중 정3품 상에 해당하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 무관 중 정3품 상의 지위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의 고급 관료를 일컬었다. 당상관은 고급 관료로서 인사권·포폄권(褒貶權)·군사권 등 여러 특권을 가지고 중요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지위였다.
③ 조선 시대에는 참상관(종6품 이상) 이상만이 지방 수령에 임용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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