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7일에 시행한 국회직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 (가책형) 입니다.
1. 다음 중 단군신화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것은?
① 『삼국유사』
② 『제왕운기』
③ 『응제시주』
④ 『동명왕편』
⑤ 『세종실록지리지』
정답: ④
* 단군신화를 수록한 책들
단군의 건국에 관한 우리측 기록은 삼국유사(일연), 제왕운기(이승휴), 세종실록지리지, 응제시주(권람), 동국통감(서거정), 동국여지승람(노사신) 등에 나타나고 있다.
중국 문헌 가운데 조선이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기록은 ‘관자’로서 기원전 7세기경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었고, ‘산해경’과 ‘전국책’ 등에 의하면 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 연(燕)의 동쪽에 존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 인용된 ‘위략’에는 기원전 4세기 후반 경 연나라와 분쟁이 일어나 고조선 측이 선제공격을 꾀하였다가 중단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④ 이규보의 동명왕편(1193)은 고구려 건국의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로서,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반영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였다
* 단군신화를 수록한 책들
단군의 건국에 관한 우리측 기록은 삼국유사(일연), 제왕운기(이승휴), 세종실록지리지, 응제시주(권람), 동국통감(서거정), 동국여지승람(노사신) 등에 나타나고 있다.
중국 문헌 가운데 조선이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기록은 ‘관자’로서 기원전 7세기경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었고, ‘산해경’과 ‘전국책’ 등에 의하면 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 연(燕)의 동쪽에 존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 인용된 ‘위략’에는 기원전 4세기 후반 경 연나라와 분쟁이 일어나 고조선 측이 선제공격을 꾀하였다가 중단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④ 이규보의 동명왕편(1193)은 고구려 건국의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로서,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반영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였다
2. 현재의 감사원과 유사한 기능을 했던 고려와 조선의 관청으로 옳게 짝지어진 것은?
고려 조선
① 중추원 중추부
② 비서성 승정원
③ 어사대 사헌부
④ 한림원 혜민국
⑤ 식목도감 선혜청
정답: ③
* 고려와 조선의 감찰 기관
고려의 어사대는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어사대의 관원은 중서문하성의 낭사(3품 이하)와 함께 대간으로 불렸다.
조선의 사헌부는 언론 3사의 한 구성원으로서 주로 백관을 규찰(감찰)하였고, 사간원과 함께 양사로서 대간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 외 기강.풍속 정립, 사법권, 경연의 기능도 갖었다. 수장은 대사헌(종 2품)이다.
따라서 어사대와 사헌부는 공통적으로 대간 기관이고, 대간은 비록 직위는 낮았지만,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과 잘못된 왕명을 시행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봉박, 관리의 임명과 법령의 개정이나 폐지 등에 동의하는 서경권을 가지고 있어 왕이나 고위 관리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제약하여 정치운영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다.
① 고려의 중추원은 군사기밀(2품 이상 추밀), 왕명출납(3품 이하 승선)을 담당하였고, 조선의 중추부는 서반의 종1품 아문으로 소임이 없는 문무 당상관을 우대하기 위한 관청이었다.
② 고려의 비서성은 경적(經籍)을 관장하고 제례 축문(祝文)을 작성하던 기관이었고, 조선의 승정원은 왕명출납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④ 고려의 한림원은 문한(文翰: 왕의 명령으로 글을 작성)을 담당한 기관이었고, 조선의 혜민국은 일종의 빈민 치료를 위한 약국이라고 볼 수 있다.
⑤ 고려의 식목도감은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위 관리들의 합좌한 임시기구로 법제와 격식을 담당한 기관이었고, 선혜청은 본래 조선 후기 대동법에 따른 재화(미,포,전)를 담당한 기관이었는데, 후일 기능이 확대되어 균역청의 업무와 정부 재정 지출에 관한 포괄적 업무를 담당하였다.
* 고려와 조선의 감찰 기관
고려의 어사대는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어사대의 관원은 중서문하성의 낭사(3품 이하)와 함께 대간으로 불렸다.
조선의 사헌부는 언론 3사의 한 구성원으로서 주로 백관을 규찰(감찰)하였고, 사간원과 함께 양사로서 대간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 외 기강.풍속 정립, 사법권, 경연의 기능도 갖었다. 수장은 대사헌(종 2품)이다.
따라서 어사대와 사헌부는 공통적으로 대간 기관이고, 대간은 비록 직위는 낮았지만,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과 잘못된 왕명을 시행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봉박, 관리의 임명과 법령의 개정이나 폐지 등에 동의하는 서경권을 가지고 있어 왕이나 고위 관리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제약하여 정치운영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다.
① 고려의 중추원은 군사기밀(2품 이상 추밀), 왕명출납(3품 이하 승선)을 담당하였고, 조선의 중추부는 서반의 종1품 아문으로 소임이 없는 문무 당상관을 우대하기 위한 관청이었다.
② 고려의 비서성은 경적(經籍)을 관장하고 제례 축문(祝文)을 작성하던 기관이었고, 조선의 승정원은 왕명출납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④ 고려의 한림원은 문한(文翰: 왕의 명령으로 글을 작성)을 담당한 기관이었고, 조선의 혜민국은 일종의 빈민 치료를 위한 약국이라고 볼 수 있다.
⑤ 고려의 식목도감은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위 관리들의 합좌한 임시기구로 법제와 격식을 담당한 기관이었고, 선혜청은 본래 조선 후기 대동법에 따른 재화(미,포,전)를 담당한 기관이었는데, 후일 기능이 확대되어 균역청의 업무와 정부 재정 지출에 관한 포괄적 업무를 담당하였다.
3. 다음은 어떤 책의 서문이다. 『이 책』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세조께서 옥쇄를 쥐고 나라를 중흥시키시니, 창업과 수성을 겸비하신 것이다. 일찌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중략)… 우리 조종의 심후하신 인덕과 크고 아름다운 규범이 훌륭한 전장(典章)에 퍼졌으니, …(중략)… 또 여러 번 내린 교지가 있어 법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리석고 둔한 관리들이 법을 받들어 시행함에 어두웠던 것은 진실로 그 목차와 조문이 너무 번잡하고 앞뒤가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이제 손익을 헤아리고 회통할 것을 산정하여 만대 성법을 만들고자 한다.”
- 서거정이 『이 책』을 올리면서 쓴 서문(序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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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국가 통치의 기본 규범을 확립한 『경국대전』이다.
③ 후대에 모범이 될 만한 역대 국왕의 행적을 기록한 『국조보감』이다.
④ 효자, 충신, 열녀 등의 사례를 뽑아서 만든 백성들의 윤리서인『삼강행실도』이다.
⑤ 중국 농사법에서 탈피하여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농법으로 편찬된 『농사직설』이다.
정답: ②
* 조선의 조종지법 경국대전
조선은 유교적 통치 규범을 성문화하기 위한 법전의 편찬에 힘써, 건국 초기 정도전의 조선경국전(1394), 경제문감(1395), 조준의 경제육전(1397) 등이 편찬되었으나, 통일적인 조종지법의 필요성을 느껴, 세조 때(1455)부터 경국대전이 편찬되기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되었다(1484년 완성, 1485년 반포, 서거정 서문 작성).
경국대전은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6전으로 구성된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후기까지 법률 체계의 골격을 이루었다. 이 법전의 편찬은 조선 초기에 정비된 유교적 통치 질서와 문물제도가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①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기 위하여 <국조오례의>가 편찬되어 성종때에 완성되었다(1474).
③ 국조보감: 조선 시대 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후대 왕들의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선정(善政)만을 모아 편찬한 편년체의 사서로서, 세조 때(1457)에 태조·태종·세종·문종 4조의 보감을 처음으로 완성하였다.
④ 삼강행실도: 세종(1418~1450) 때에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윤리와 의례에 관한 서적의 편찬 사업이 이루어져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붙여 윤리서인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다(1431~1434).
⑤ 세종(1418~1450) 때에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 농민의 실제 경험을 종합한 농사직설(1429)을 정초, 변호문 등을 시키어 편찬하였다.
* 조선의 조종지법 경국대전
조선은 유교적 통치 규범을 성문화하기 위한 법전의 편찬에 힘써, 건국 초기 정도전의 조선경국전(1394), 경제문감(1395), 조준의 경제육전(1397) 등이 편찬되었으나, 통일적인 조종지법의 필요성을 느껴, 세조 때(1455)부터 경국대전이 편찬되기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되었다(1484년 완성, 1485년 반포, 서거정 서문 작성).
경국대전은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6전으로 구성된 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후기까지 법률 체계의 골격을 이루었다. 이 법전의 편찬은 조선 초기에 정비된 유교적 통치 질서와 문물제도가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①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기 위하여 <국조오례의>가 편찬되어 성종때에 완성되었다(1474).
③ 국조보감: 조선 시대 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후대 왕들의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선정(善政)만을 모아 편찬한 편년체의 사서로서, 세조 때(1457)에 태조·태종·세종·문종 4조의 보감을 처음으로 완성하였다.
④ 삼강행실도: 세종(1418~1450) 때에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윤리와 의례에 관한 서적의 편찬 사업이 이루어져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붙여 윤리서인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다(1431~1434).
⑤ 세종(1418~1450) 때에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 농민의 실제 경험을 종합한 농사직설(1429)을 정초, 변호문 등을 시키어 편찬하였다.
4. (가) 시기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옳은 것은?
① 105인 사건으로 비밀결사 단체가 해체되었다.
② 경제적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③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④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봉오동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⑤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등이 제창되어 우리말과 글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정답: ①
* 1910~1919년 무단통치기의 역사적 사실
- 일제는 한일병합조약(1910.8)을 체결하고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였다(1910.9).
3.1운동 발발(1919.3.1)
① 비밀결사 애국계몽운동 조직 신민회는,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과 관련된 안악사건을 날조한 105인 사건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1911).
② 국민의 모금으로 나라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의 서상돈, 김광제 등의 주도하에 시작되어, 대한자강회 등의 각종 계몽 단체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의 언론 기관이 참여하는 가운데 서울에서 결성된 국채보상기성회(김성희, 유문상 등)를 중심으로 각계각층의 호응을 받으며 전국 및 해외로까지 확산되었다.
③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1879~1910)은 을사조약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④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봉오동에서 일본군 대대 병력과 맞서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150여명 사살).
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우리 민족을 전쟁으로 이끌기 위해서 일본과 동화시켜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하여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등이 제창하여, 우리말과 글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 1910~1919년 무단통치기의 역사적 사실
- 일제는 한일병합조약(1910.8)을 체결하고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였다(1910.9).
3.1운동 발발(1919.3.1)
① 비밀결사 애국계몽운동 조직 신민회는,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과 관련된 안악사건을 날조한 105인 사건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1911).
② 국민의 모금으로 나라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의 서상돈, 김광제 등의 주도하에 시작되어, 대한자강회 등의 각종 계몽 단체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의 언론 기관이 참여하는 가운데 서울에서 결성된 국채보상기성회(김성희, 유문상 등)를 중심으로 각계각층의 호응을 받으며 전국 및 해외로까지 확산되었다.
③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1879~1910)은 을사조약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④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봉오동에서 일본군 대대 병력과 맞서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150여명 사살).
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우리 민족을 전쟁으로 이끌기 위해서 일본과 동화시켜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하여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등이 제창하여, 우리말과 글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5. 독립협회에 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독립신문 창간 후 발족되었다.
② 황국협회와 협력하면서 개혁을 추구하였다.
③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④ 토론회 활동 이후 민중세력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⑤ 해산된 후 헌정연구회․대한자강회로 이념이 계승되었다.
정답: ②
* 독립협회(1896.7~1898.12)
아관 파천(1896.2)으로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광산, 삼림 등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도 심해졌다.
갑신정변(1884)의 주역 중 하나였던 서재필(1864~1951)은 정부의 지원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하여(1896.4) 서구의 자유민권 사상을 도입하였으며, 중추원 고문으로 독립협회(1896.7)를 설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1896.11~1897.11) 자주독립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러시아의 간섭과 이권 침탈이 심해지자 독립 협회는 자주 국권 확립을 촉구하는 구국 선언 상소문(1898.2)을 올리고, 종로에서 만민 공동회(1차: 1898.3)를 열어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군사 고문과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부산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하였으며 한·러 은행을 폐쇄하였다.
독립협회는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통하여 민중에게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을 고취시켜, 광범한 사회 계층의 지지를 받는 단체로 발전하였다(자강개혁). 또, 독립협회는 자주 국권(이권 수호), 자유 민권(신체의 자유, 의회 설립과 국민참정권 추진) 등을 달성하려는 정치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1898.10)를 결의하고 고종은 건의문을 받아들여 시행할 것을 약속하고 중추원을 의회식으로 개편하는 관제를 반포하였다(1898.11). 이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의회가 설립될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활동은 의회의 설립과 서구식 입헌 군주제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보수 세력과 대립하였다(공화제 모함). 독립협회는 보수 세력이 동원한 황국협회의 방해를 받았고, 결국 3년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1898.12).
⑤ 헌정 연구회(1905년 창설, 입헌군주제 표방)와 그 후신인 대한자강회(1906년 창설)는 모두 회의 입헌군주제 정체를 계승한 애국계몽운동단체들이다.
* 독립협회(1896.7~1898.12)
아관 파천(1896.2)으로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광산, 삼림 등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도 심해졌다.
갑신정변(1884)의 주역 중 하나였던 서재필(1864~1951)은 정부의 지원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하여(1896.4) 서구의 자유민권 사상을 도입하였으며, 중추원 고문으로 독립협회(1896.7)를 설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1896.11~1897.11) 자주독립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러시아의 간섭과 이권 침탈이 심해지자 독립 협회는 자주 국권 확립을 촉구하는 구국 선언 상소문(1898.2)을 올리고, 종로에서 만민 공동회(1차: 1898.3)를 열어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군사 고문과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부산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하였으며 한·러 은행을 폐쇄하였다.
독립협회는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통하여 민중에게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을 고취시켜, 광범한 사회 계층의 지지를 받는 단체로 발전하였다(자강개혁). 또, 독립협회는 자주 국권(이권 수호), 자유 민권(신체의 자유, 의회 설립과 국민참정권 추진) 등을 달성하려는 정치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1898.10)를 결의하고 고종은 건의문을 받아들여 시행할 것을 약속하고 중추원을 의회식으로 개편하는 관제를 반포하였다(1898.11). 이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의회가 설립될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활동은 의회의 설립과 서구식 입헌 군주제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보수 세력과 대립하였다(공화제 모함). 독립협회는 보수 세력이 동원한 황국협회의 방해를 받았고, 결국 3년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1898.12).
⑤ 헌정 연구회(1905년 창설, 입헌군주제 표방)와 그 후신인 대한자강회(1906년 창설)는 모두 회의 입헌군주제 정체를 계승한 애국계몽운동단체들이다.
6. 다음은 군사제도의 변화 과정에 대한 서술이다. 시기순으로 올바르게 배열한 것은?
ㄱ.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ㄴ. 30만 명의 광군이 조직되었다. ㄷ. 정규군 외에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을 두었다. ㄹ. 군사의 기동력을 높이기 위해 기병부대인 신기군이 설치되었다. ㅁ. 장기간 근무를 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상비군으로 삼수병이 편성되었다. |
② ㄴ-ㄷ-ㄹ-ㅁ-ㄱ
③ ㄴ-ㄹ-ㄷ-ㅁ-ㄱ
④ ㄹ-ㄴ-ㅁ-ㄷ-ㄱ
⑤ ㄹ-ㄷ-ㅁ-ㄴ-ㄱ
정답: ③
* 역대 군사 제도 변화
- 고려 정종(945~949) 때에 서경을 북진정책의 거점으로 삼고 거란 포로 출신 최광윤의 보고에 따라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한 광군 30만이 조직하였다(947).
- 12세기 초 부족의 통일을 이룬 여진족이 고려의 국경까지 남하하면서 고려군과 자주 충돌하였다. 고려는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숙종 때에 신기(기병).신보(보병).항마(승병)군으로 구성된 별무반(1104)을 편성한 다음,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다(1107).
- 조선 초기에는 정규군 외에 서리, 잡학인, 신량역천인, 노비 로 구성된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이 있었다.
- 임진왜란 때에 왜군을 물리치는 데 효과적인 편제와 군사 훈련 방식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1593). 훈련도감의 군병은 삼수병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장기간 근무를 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상비군으로서, 의무병이 아닌 직업 군인의 성격을 가진 군인이었다.
- 강화도 조약(1876) 이후 고종은 동도서기론의 입장에서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1880.12) 그 아래에 12사를 두어 외교.통상.재정.군사 등의 업무를 맡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력 강화를 위해 종래의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2군영으로 통합 개편하는 한편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신설하였다(1881). 그러나 별기군은 일본인 교관과 신식 서양무기로 조련을 받았으며, 구식 군대에 비해 피복과 급료가 아주 좋아 후일 임오군란의 원인이 되었다.
* 역대 군사 제도 변화
- 고려 정종(945~949) 때에 서경을 북진정책의 거점으로 삼고 거란 포로 출신 최광윤의 보고에 따라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한 광군 30만이 조직하였다(947).
- 12세기 초 부족의 통일을 이룬 여진족이 고려의 국경까지 남하하면서 고려군과 자주 충돌하였다. 고려는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숙종 때에 신기(기병).신보(보병).항마(승병)군으로 구성된 별무반(1104)을 편성한 다음,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다(1107).
- 조선 초기에는 정규군 외에 서리, 잡학인, 신량역천인, 노비 로 구성된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이 있었다.
- 임진왜란 때에 왜군을 물리치는 데 효과적인 편제와 군사 훈련 방식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1593). 훈련도감의 군병은 삼수병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장기간 근무를 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상비군으로서, 의무병이 아닌 직업 군인의 성격을 가진 군인이었다.
- 강화도 조약(1876) 이후 고종은 동도서기론의 입장에서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1880.12) 그 아래에 12사를 두어 외교.통상.재정.군사 등의 업무를 맡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력 강화를 위해 종래의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2군영으로 통합 개편하는 한편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신설하였다(1881). 그러나 별기군은 일본인 교관과 신식 서양무기로 조련을 받았으며, 구식 군대에 비해 피복과 급료가 아주 좋아 후일 임오군란의 원인이 되었다.
7. 다음의 기록과 관련 있는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최명길이 마침내 국서를 가지고 비국에 물러가 앉아 수정을 가하였는데, 김상헌이 밖에서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버리고 임금을 뵙기를 청하였다. |
②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이후, 시파와 벽파로 나뉘게 되었다.
③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고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다.
④ 일반 백성들의 공물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⑤ 인조가 항복하고 청나라에 사대하게 되었다.
정답: ⑤
* 병자호란(1636)
인조반정(1623)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또한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 평안도에 주둔하였던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1624)을일으켰으나 진압되자, 그 잔당들이 후금으로 피신하여 조선 침입을 종용하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특히, 정봉수는 철산의 용골산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형제관계의 화의와 조공과 국경에서의 관무역을 조건으로 철군하였다.
그 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군신 관계를 맺자며 다시 대군을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12).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항전하였으나, 청과 싸우자는 주전파(김상헌과 윤집.오달제.홍익한-삼학사)와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최명길 등)의 논쟁 속에 결국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3배 9고두: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땅에 찧음)를 맺었다.
그 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청)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후 효종 때에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복수설치: 復讐雪恥),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재조지은: 再造之恩) 청에 복수하자는 의식이 대두되어 북벌 운동이 준비되었다.
① 현종 때에 차자로 왕위를 계승한 효종과 효종비가 죽자 인조의 계비의 복상기간에 대해 서 인과 남인 사이에 2차례 예송 논쟁이 일어났다(기해-1659, 갑인-1674)
② 영조의 처분으로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이후(임오화변-1762), 집권 노론 세력은 사도세자에 대해 동정적인 시파와 원칙론을 고수한 벽파로 나뉘게 되었다.
③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보름만에 한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고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다.
④ 조선 후기에 공납의 폐단인 방납의 폐단을 해결하고 농민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공물을 현물 대신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는 대동법을 광해군 때에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하였다(1608).
* 병자호란(1636)
인조반정(1623)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또한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 평안도에 주둔하였던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1624)을일으켰으나 진압되자, 그 잔당들이 후금으로 피신하여 조선 침입을 종용하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특히, 정봉수는 철산의 용골산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형제관계의 화의와 조공과 국경에서의 관무역을 조건으로 철군하였다.
그 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군신 관계를 맺자며 다시 대군을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12).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항전하였으나, 청과 싸우자는 주전파(김상헌과 윤집.오달제.홍익한-삼학사)와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최명길 등)의 논쟁 속에 결국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3배 9고두: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땅에 찧음)를 맺었다.
그 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청)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후 효종 때에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복수설치: 復讐雪恥),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재조지은: 再造之恩) 청에 복수하자는 의식이 대두되어 북벌 운동이 준비되었다.
① 현종 때에 차자로 왕위를 계승한 효종과 효종비가 죽자 인조의 계비의 복상기간에 대해 서 인과 남인 사이에 2차례 예송 논쟁이 일어났다(기해-1659, 갑인-1674)
② 영조의 처분으로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이후(임오화변-1762), 집권 노론 세력은 사도세자에 대해 동정적인 시파와 원칙론을 고수한 벽파로 나뉘게 되었다.
③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보름만에 한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고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다.
④ 조선 후기에 공납의 폐단인 방납의 폐단을 해결하고 농민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공물을 현물 대신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는 대동법을 광해군 때에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하였다(1608).
8. 다음 사건들을 시기순으로 올바르게 배열한 것은?
ㄱ. 묘청의 난 ㄴ. 이시애의 난 ㄷ. 홍경래의 난 ㄹ. 만적의 난 |
② ㄱ-ㄹ-ㄷ-ㄴ
③ ㄴ-ㄹ-ㄱ-ㄷ
④ ㄷ-ㄹ-ㄴ-ㄱ
⑤ ㄹ-ㄱ-ㄴ-ㄷ
정답: ①
* 역대 반란의 연대기
- 고려 태조 이래의 북진정책이 이자겸 등의 개경파에 의해 좌절되고 금에 대해 사대를 취하자, 묘청 등 서경파 세력들은 서경으로 천도할 것과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며(칭제건원) 금국 정벌을 주장하며 난을 일으켰으나(1135),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파에 의해 진압되며 북진정책은 중단되었다.
-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은 사람이면 누구나 공경대부가 될 수 있다고(王侯將相 寧有種乎: 왕후장상이 어찌 따로 씨앗이 있겠느냐?) 주장하며 신분 차별에 항거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1198).
- 세조(1455~1468) 즉위 이후 중앙집권 정책 강화의 일환으로 함경도 지역의 토관과 유향소를 억제하자, 회령 부사 출신 호족 이시애는 지역감정을 이끌어내어 반란을 일으켰다(1467).
여진족을 끌어서까지 난을 일으켰으나, 강순, 어유소, 남이 등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 조선 후기 세도정치기(1800~1863)에 삼정의 문란과 서북 지역민에 대한 차별이 원인이 되어 홍경래의 난(1811)이 발생하였으나, 곧 진압되었다.
* 역대 반란의 연대기
- 고려 태조 이래의 북진정책이 이자겸 등의 개경파에 의해 좌절되고 금에 대해 사대를 취하자, 묘청 등 서경파 세력들은 서경으로 천도할 것과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며(칭제건원) 금국 정벌을 주장하며 난을 일으켰으나(1135),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파에 의해 진압되며 북진정책은 중단되었다.
-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은 사람이면 누구나 공경대부가 될 수 있다고(王侯將相 寧有種乎: 왕후장상이 어찌 따로 씨앗이 있겠느냐?) 주장하며 신분 차별에 항거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1198).
- 세조(1455~1468) 즉위 이후 중앙집권 정책 강화의 일환으로 함경도 지역의 토관과 유향소를 억제하자, 회령 부사 출신 호족 이시애는 지역감정을 이끌어내어 반란을 일으켰다(1467).
여진족을 끌어서까지 난을 일으켰으나, 강순, 어유소, 남이 등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 조선 후기 세도정치기(1800~1863)에 삼정의 문란과 서북 지역민에 대한 차별이 원인이 되어 홍경래의 난(1811)이 발생하였으나, 곧 진압되었다.
9. 다음 전문을 직접 포함하고 있는 것은?
남과 북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뜻에 따라 7·4 남북 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정치 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고 긴장 완화와 평화를 보장하며, 다각적인 교류·협력을 실현하여 민족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하며,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 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
② 12·13 남북 기본 합의서
③ 6·15 남북 공동선언
④ 10·4 남북 공동선언
⑤ 5·24 대북조치
정답: ②
* 남북 기본합의서(1991.12)
1990년대에 들어와 급격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남한의 적극적인 북방 외교 정책이 추진되었다. 남북한은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으며(1991.8),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 체육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곧이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었다(남북 기본합의서, 1991.12).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한 관계를 통일과정의 ‘잠정적 특수관계’라고 규정하고 한국과 북한이 당장 통일할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하여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군사적으로 침범하거나 파괴ㆍ전복하지 않으며, 교류ㆍ협력을 통해 민족동질성을 회복함으로써 단계적으로 통일을 이룩해 나가야 한다는 약속을 내외에 천명하고 있다. 또 남북화해 및 불가침, 교류와 협력에 관한 대책을 협의하고 이행하기 위한 기구로 화해공동위, 군사공동위, 경제공동위, 사회ㆍ문화 공동위를 운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울러 남북의 서로 긴밀한 연락과 협의를 위해 판문점에 연락 사무소를 설치와 군사당국자 간의 직통전화을 가설하기로 하였다.
① 박정희 정권인 1973년에는 ‘6·23 평화 통일 외교 정책 선언’을 발표하여 비적성 국가에 문호를 개방하고 북한에 상호 내정 불간섭과 유엔 동시 가입을 제안하였다.
③ 김대중 정권 때인 2000년 평양에서 정상회담이 이루어져 6·15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다(2000). 여기서 7.4 남북공동선언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간의 공통성이 있음을 인정하며 이전보다 더 교류와 협력에 합의하였다.
④ 노무현 정권은 김대중 정부의 통일 정책을 이어받아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어 6·15공동선언의 적극 구현을 선언하였다.
⑤ 이명작 정부는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을 북한의 소행으로 판단하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남북 간 교역을 전면 중단하는 5.24 대북조치를 취하였다.
* 남북 기본합의서(1991.12)
1990년대에 들어와 급격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남한의 적극적인 북방 외교 정책이 추진되었다. 남북한은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으며(1991.8),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 체육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곧이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었다(남북 기본합의서, 1991.12).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한 관계를 통일과정의 ‘잠정적 특수관계’라고 규정하고 한국과 북한이 당장 통일할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하여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군사적으로 침범하거나 파괴ㆍ전복하지 않으며, 교류ㆍ협력을 통해 민족동질성을 회복함으로써 단계적으로 통일을 이룩해 나가야 한다는 약속을 내외에 천명하고 있다. 또 남북화해 및 불가침, 교류와 협력에 관한 대책을 협의하고 이행하기 위한 기구로 화해공동위, 군사공동위, 경제공동위, 사회ㆍ문화 공동위를 운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울러 남북의 서로 긴밀한 연락과 협의를 위해 판문점에 연락 사무소를 설치와 군사당국자 간의 직통전화을 가설하기로 하였다.
① 박정희 정권인 1973년에는 ‘6·23 평화 통일 외교 정책 선언’을 발표하여 비적성 국가에 문호를 개방하고 북한에 상호 내정 불간섭과 유엔 동시 가입을 제안하였다.
③ 김대중 정권 때인 2000년 평양에서 정상회담이 이루어져 6·15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다(2000). 여기서 7.4 남북공동선언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간의 공통성이 있음을 인정하며 이전보다 더 교류와 협력에 합의하였다.
④ 노무현 정권은 김대중 정부의 통일 정책을 이어받아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어 6·15공동선언의 적극 구현을 선언하였다.
⑤ 이명작 정부는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을 북한의 소행으로 판단하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남북 간 교역을 전면 중단하는 5.24 대북조치를 취하였다.
10. 밑줄 친 ‘나’의 활동으로 옳은 것을 모두 고른 것은?
왜적이 항복한다 하였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나에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이다. 시안과 푸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여러 가지 비밀 무기를 주어 산둥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어 국내의 중요한 곳을 파괴하거나 점령한 뒤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
ㄱ. 한인애국단 조직 ㄴ. 신탁통치 반대 ㄷ. 남북협상 ㄹ. 제헌국회 설립 ㅁ.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 |
② ㄱ, ㄴ, ㄹ
③ ㄴ, ㄷ, ㄹ
④ ㄴ, ㄹ, ㅁ
⑤ ㄷ, ㄹ, ㅁ
정답: ①
* 김구(1876~1949)에 대하여
- 보기의 자료는 임정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예정보다 빨리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정진군을 통한 국내진공 작전이 무산됨을 안타까워 하는 장명이다.
㉠ 임정이 가장 어려울 때인 1920년대 후반 백범 김구는 침체된 분위기를 깨고자 한인애국단(1931)을 조직하여 이봉창(1932.1), 윤봉길(1932.4) 의거 등을 이끌어 내고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얻게 되었다.
㉡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에서 임시 민주정부의 수립, 미·소 공동위원회의 설치, 공동위원회와 임시정부는 최고 5년간의 신탁통치 협정을 만들 것 등을 결정되자, 신탁 통치에 반대한 우익과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 결정안에 찬성한 좌익이 대립하게 되었다. 김구와 임정의 한독당 세력은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해 반탁투쟁의 기선을 잡아, 1946년 1월 ‘비상정치회의 준비회’를 열자,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가세하여 2월에는 모든 우익 단체, 정당들의 연합전선인 ‘비상국민회의’가 발족되어 반탁운동을 진행하였다.
㉢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치르기로 하자, 분단을 우려한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 읍고함(1948.2)을 발표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김규식과 함께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 등과 평양에서 남북 지도자 회의를 개최하였지만 실패하였다(1948. 4.).
㉣, ㉤ 남북협상 실패 후 김구는 5.10 총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헌국회의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1948.9)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 김구(1876~1949)에 대하여
- 보기의 자료는 임정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예정보다 빨리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정진군을 통한 국내진공 작전이 무산됨을 안타까워 하는 장명이다.
㉠ 임정이 가장 어려울 때인 1920년대 후반 백범 김구는 침체된 분위기를 깨고자 한인애국단(1931)을 조직하여 이봉창(1932.1), 윤봉길(1932.4) 의거 등을 이끌어 내고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얻게 되었다.
㉡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에서 임시 민주정부의 수립, 미·소 공동위원회의 설치, 공동위원회와 임시정부는 최고 5년간의 신탁통치 협정을 만들 것 등을 결정되자, 신탁 통치에 반대한 우익과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 결정안에 찬성한 좌익이 대립하게 되었다. 김구와 임정의 한독당 세력은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해 반탁투쟁의 기선을 잡아, 1946년 1월 ‘비상정치회의 준비회’를 열자,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가세하여 2월에는 모든 우익 단체, 정당들의 연합전선인 ‘비상국민회의’가 발족되어 반탁운동을 진행하였다.
㉢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치르기로 하자, 분단을 우려한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 읍고함(1948.2)을 발표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김규식과 함께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 등과 평양에서 남북 지도자 회의를 개최하였지만 실패하였다(1948. 4.).
㉣, ㉤ 남북협상 실패 후 김구는 5.10 총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헌국회의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1948.9)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11. 다음은 삼국과 가야의 주요한 사건이다. 시기순으로 올바르게 배열한 것은?
ㄱ.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ㄴ. 백제 침류왕이 불교를 받아들였다. ㄷ. 신라 지증왕이 우산국을 정복하였다. ㄹ. 고령 지역에 있던 대가야가 멸망하였다. |
② ㄱ-ㄹ-ㄷ-ㄴ
③ ㄴ-ㄱ-ㄷ-ㄹ
④ ㄴ-ㄱ-ㄹ-ㄷ
⑤ ㄹ-ㄱ-ㄴ-ㄷ
정답: ④
* 삼국(가야 포함) 항쟁의 연대기
- 백제는 근초고왕(346~375) 대에 전성기를 이루고, 침류왕 때에(384) 중국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 공인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 5세기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룬 장수왕(413~491)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으로 옮기고(427), 남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 신라의 최전성기를 진흥왕(540~576)은 한강 전역을 차지하고, 북으로는 함경남도까지 진출하고, 남으로는 대가야를 정복하여 가야를 신라에 완전 흡수시키었다.
- 신라 지증왕(500~514)은 국호를 사로에서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503). 그리고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주.군제 실시, 소경 설치), 대외적으로는 이사부 장군을 시키어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다(512).
* 삼국(가야 포함) 항쟁의 연대기
- 백제는 근초고왕(346~375) 대에 전성기를 이루고, 침류왕 때에(384) 중국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 공인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 5세기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룬 장수왕(413~491)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으로 옮기고(427), 남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 신라의 최전성기를 진흥왕(540~576)은 한강 전역을 차지하고, 북으로는 함경남도까지 진출하고, 남으로는 대가야를 정복하여 가야를 신라에 완전 흡수시키었다.
- 신라 지증왕(500~514)은 국호를 사로에서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503). 그리고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주.군제 실시, 소경 설치), 대외적으로는 이사부 장군을 시키어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다(512).
12. 조선총독부의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 시기와 관련이 깊은 것은?
① 여자정신근로령을 통해 여성에 대한 강제동원이 이루어졌다.
②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황국신민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③ 조선의 식민지배를 위해 경부선을 건설하였다.
④ 신간회 설립을 허가하였다가 탄압하였다.
⑤ 태로 볼기를 때리는 태형령을 제정하였다.
정답: ⑤
*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일제는 한일병합 후 헌병 경찰 제도를 실시하여 현역 군인인 헌병 사령관을 중앙의 경찰 최고 책임자인 경무 총감으로 임명하고, 전국 곳곳에 헌병 분대와 파출소, 경찰서와 주재소 등을 두어 한국인을 감시 억압하였다. 전국 곳곳에 배치된 헌병과 경찰은 한국인의 모든 일상생활에 관여했으며, 즉결 처분권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태형 등의 형벌을 가할 수도 있었다. 특히 조선 태형령(1912~1920)은 조선인에게만 적용되는 야만적인 형벌이었다.
그 밖에도 한국인의 저항을 누르기 위해 일본군 2개 사단 병력이 전국 주요 도시에 배치되었다. 관리·교사들까지도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다녔다. 이는 폭력적이고 위압적인 무단 통치의 모습을 보여 준다.
① 일제는 말기에 여자 정신 근로령(1944)을 내려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② 일제는 1938년 3차 조선 교육령을 공포하고 황국신민화 교육(내선일체)을 강화하였다.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로, 고등보통학교를 중학교로 하고 학교명, 교육과정을 일본 본국 학교와 통일시켰다. 그러나 조선어를 선택으로 하고 한국사 대신 일본사를 공부하게 하였다.
③ 일제는 러·일 전쟁(1904~1905) 중 군사적 필요에 의해 경부선(1905)과 경의선(1906)을 부설하였다.
④ 일제는 1920년대 문화통치기에 부분적으로 한국인의 정치활동을 허용하여, 1927년 2월 좌우합작단체인 신간회(1927~1931)가 합법적으로 설립되었으나, 광주학생 항일운동의 진상을 알리기 위한 민중대회(1929.12) 사건 이후 적극 탄압하였다.
*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일제는 한일병합 후 헌병 경찰 제도를 실시하여 현역 군인인 헌병 사령관을 중앙의 경찰 최고 책임자인 경무 총감으로 임명하고, 전국 곳곳에 헌병 분대와 파출소, 경찰서와 주재소 등을 두어 한국인을 감시 억압하였다. 전국 곳곳에 배치된 헌병과 경찰은 한국인의 모든 일상생활에 관여했으며, 즉결 처분권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태형 등의 형벌을 가할 수도 있었다. 특히 조선 태형령(1912~1920)은 조선인에게만 적용되는 야만적인 형벌이었다.
그 밖에도 한국인의 저항을 누르기 위해 일본군 2개 사단 병력이 전국 주요 도시에 배치되었다. 관리·교사들까지도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다녔다. 이는 폭력적이고 위압적인 무단 통치의 모습을 보여 준다.
① 일제는 말기에 여자 정신 근로령(1944)을 내려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② 일제는 1938년 3차 조선 교육령을 공포하고 황국신민화 교육(내선일체)을 강화하였다.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로, 고등보통학교를 중학교로 하고 학교명, 교육과정을 일본 본국 학교와 통일시켰다. 그러나 조선어를 선택으로 하고 한국사 대신 일본사를 공부하게 하였다.
③ 일제는 러·일 전쟁(1904~1905) 중 군사적 필요에 의해 경부선(1905)과 경의선(1906)을 부설하였다.
④ 일제는 1920년대 문화통치기에 부분적으로 한국인의 정치활동을 허용하여, 1927년 2월 좌우합작단체인 신간회(1927~1931)가 합법적으로 설립되었으나, 광주학생 항일운동의 진상을 알리기 위한 민중대회(1929.12) 사건 이후 적극 탄압하였다.
13. 다음 지도의 유적들이 조성된 시기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 보 기 >
ㄱ. 민무늬 토기, 미송리식 토기 등을 사용하였다. ㄴ. 가락바퀴나 뼈바늘로 옷이나 그물을 만들었다. ㄷ. 굴, 홍합 등의 조개류를 먹었고, 때로는 깊은 곳에 사는 조개류를 따서 장식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ㄹ. 움집의 중앙에 화덕을 설치하고, 햇빛을 많이 받는 남쪽으로 출입문을 내었다. ㅁ. 나무로 만든 농기구로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가을에는 반달 돌칼로 이삭을 잘라 추수하였다. |
② ㄱ,ㄴ,ㄹ
③ ㄴ,ㄷ,ㄹ
④ ㄴ,ㄹ,ㅁ
⑤ ㄷ,ㄹ,ㅁ
정답: ③
* 신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
- 지도의 유적지가 주로 강가나 해안가인 것으로 통해 신석기 시대임을 알 수 있다.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한반도 전 지역에 고루 퍼져 있으며, 주로 큰 강 유역이나 해안 지역에서 발견된다. 연대가 가장 이른 곳이 제주도 고산리 유적이다.
신석기 시대 유적(서울 암사동, 부산 동삼동 등)에서 발굴된 유물에는 간석기와 낚시, 바늘 등의 뼈 도구가 있다. 그리고 빗살무늬토기(아가리가 넓고 밑이 뾰족)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보다 앞선 토기로 이른 민무늬 토기와 덧무늬 토기 등이 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서 뼈낚시, 그물 등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거나 굴, 홍합 등의 조개를 캐었고(껍데기는 가면이나 치레걸이 등의 장신구로 이용), 돌창, 돌화살 등으로 사냥을 하였다. 한편, 식물의 열매나 뿌리를 채취하여 먹는 생활을 하다가, 뒤에는 농사를 짓고 가축도 기르게 되었다.
황해도 봉산 지탑리와 평양 남경의 유적에서는 탄화된 좁쌀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 시대에 잡곡류를 경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돌괭이로 땅을 일구고 조, 피 등을 재배하여 돌낫, 뼈낫 등으로 추수를 하였으며, 돌갈판에 갈돌로 곡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었으며, 가락바퀴(방추차)로 실을 뽑고, 뼈바늘(골침)로 옷을 지어 입기도 하였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땅을 파고 그 위에 지붕을 씌운 원형의 움집에서 살았다(양양 오산리 유적이 유명). 움집의 중앙에는 불씨를 보관하거나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이 위치하였고 햇빛을 많이 받는 남쪽으로 출입문을 내었으며, 화덕이나 출입문 옆에는 저장 구덩을 만들어 식량이나 도구를 저장하였다. 집터의 규모는 4, 5명 정도의 한 가족이 살기에 알맞은 크기였다.
그리고 같은 핏줄의 씨족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나아가 몇 개의 씨족이 모여 부족을 이루었다. 즉, 이들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달리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사회에서는 경험이 많은 부족장이 농사, 사냥 등 생산 활동을 지휘하였다.
㉠, ㉣ 청동기 시대는 주로 민무늬 토기가 토기가 사용되었고, 고조선과 관련해서는 미송리식 토기가 사용되었다. 또한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농경과 목축은 청동기 시대에 더욱 발달하여 돌도끼나 홈자귀, 괭이 등의 간석기나, 나무로 만든 농기구로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가을에는 반달 돌칼로 이삭을 잘라 추수하는 등 농경을 더욱 발전시켰다.
* 신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
- 지도의 유적지가 주로 강가나 해안가인 것으로 통해 신석기 시대임을 알 수 있다.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한반도 전 지역에 고루 퍼져 있으며, 주로 큰 강 유역이나 해안 지역에서 발견된다. 연대가 가장 이른 곳이 제주도 고산리 유적이다.
신석기 시대 유적(서울 암사동, 부산 동삼동 등)에서 발굴된 유물에는 간석기와 낚시, 바늘 등의 뼈 도구가 있다. 그리고 빗살무늬토기(아가리가 넓고 밑이 뾰족)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보다 앞선 토기로 이른 민무늬 토기와 덧무늬 토기 등이 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서 뼈낚시, 그물 등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거나 굴, 홍합 등의 조개를 캐었고(껍데기는 가면이나 치레걸이 등의 장신구로 이용), 돌창, 돌화살 등으로 사냥을 하였다. 한편, 식물의 열매나 뿌리를 채취하여 먹는 생활을 하다가, 뒤에는 농사를 짓고 가축도 기르게 되었다.
황해도 봉산 지탑리와 평양 남경의 유적에서는 탄화된 좁쌀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 시대에 잡곡류를 경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돌괭이로 땅을 일구고 조, 피 등을 재배하여 돌낫, 뼈낫 등으로 추수를 하였으며, 돌갈판에 갈돌로 곡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었으며, 가락바퀴(방추차)로 실을 뽑고, 뼈바늘(골침)로 옷을 지어 입기도 하였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땅을 파고 그 위에 지붕을 씌운 원형의 움집에서 살았다(양양 오산리 유적이 유명). 움집의 중앙에는 불씨를 보관하거나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이 위치하였고 햇빛을 많이 받는 남쪽으로 출입문을 내었으며, 화덕이나 출입문 옆에는 저장 구덩을 만들어 식량이나 도구를 저장하였다. 집터의 규모는 4, 5명 정도의 한 가족이 살기에 알맞은 크기였다.
그리고 같은 핏줄의 씨족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나아가 몇 개의 씨족이 모여 부족을 이루었다. 즉, 이들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달리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사회에서는 경험이 많은 부족장이 농사, 사냥 등 생산 활동을 지휘하였다.
㉠, ㉣ 청동기 시대는 주로 민무늬 토기가 토기가 사용되었고, 고조선과 관련해서는 미송리식 토기가 사용되었다. 또한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농경과 목축은 청동기 시대에 더욱 발달하여 돌도끼나 홈자귀, 괭이 등의 간석기나, 나무로 만든 농기구로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가을에는 반달 돌칼로 이삭을 잘라 추수하는 등 농경을 더욱 발전시켰다.
14. 다음의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조세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갈밭마을 여인 울음도 서러워라. 현문(懸門) 향해 울부짖다 하늘보고 호소하네. 군인 남편 못 돌아옴은 있을 법도 한 일이나, 예부터 남절양(男絶陽)은 들어보지 못했노라.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3대의 이름이 군적에 실리다니.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려 해도 범 같은 문지기 버티어 있고, 이정(里正)이 호통하여 단벌 소만 끌려가네. 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안으로 뛰어들자, 붉은 피 자리에 낭자하구나.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은 죄로구나.’
-『목민심서』「애절양(哀絶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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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숙종∼영조 대에 걸쳐 다양한 양역변통론이 제기되었다.
③ 상층 양인 일부에게 선무군관(選武軍官)이라는 칭호를 주는 대신 군포를 부과하였다.
④ 토지 1결당 미곡 12두를 거두어 세입의 결손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⑤ 균역청에서 어세, 염세, 선세를 관할하게 하였다.
정답: ④
* 조선 후기 군역의 폐단
- 보기의 시는 군역의 문란을 비판한 정약용이 1803년에 지은 애절양(哀絶陽: 남자의 생식기를 자름을 슬퍼함)이라는 시이다.
- 조선 후기에 군역의 부담이 과중해지자 농민들은 군포계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군포를 부담하기도 하거나, 아니면 도망가거나 노비나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을 피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이것은 농민들이 군역 부과에 저항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숙종∼영조 대에 걸쳐 다양한 양역변통론이 제기되어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개혁 방안이 논의되고 마침내 균역법이 시행되었다(1750). 이제 농민들은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었다. 또한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키고,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란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주무 관청인 균역청은 어장세·선박세 등 잡세 수입으로 보충하게 하였다.
그러나 영조 이후 조선 후기의 수취 체제는 총액제에 의한 재정 운영이 일반화되어, 양역(군역)은 정총제로 전세는 비총제로, 환곡은 환총제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등 모든 부세가 공동납형태로 징수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재정은 총액제로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총액징수제로 인하여 인징(隣徵)·족징(族徵)이라 하여 도피자가 10년이 넘으면 면세하게 되어 있었으나 도망자의 납세분을 친척이나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서 강제로 징수하고, 황구첨정이라 하여 만 14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리고 그 세금을 착복하였으며, 백골징포라 하여 만 60세가 넘었거나 사망한 자에게 징수하는 등 군역의 폐단은 그치지 않았다.
* 조선 후기 군역의 폐단
- 보기의 시는 군역의 문란을 비판한 정약용이 1803년에 지은 애절양(哀絶陽: 남자의 생식기를 자름을 슬퍼함)이라는 시이다.
- 조선 후기에 군역의 부담이 과중해지자 농민들은 군포계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군포를 부담하기도 하거나, 아니면 도망가거나 노비나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을 피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이것은 농민들이 군역 부과에 저항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숙종∼영조 대에 걸쳐 다양한 양역변통론이 제기되어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개혁 방안이 논의되고 마침내 균역법이 시행되었다(1750). 이제 농민들은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었다. 또한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키고,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란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주무 관청인 균역청은 어장세·선박세 등 잡세 수입으로 보충하게 하였다.
그러나 영조 이후 조선 후기의 수취 체제는 총액제에 의한 재정 운영이 일반화되어, 양역(군역)은 정총제로 전세는 비총제로, 환곡은 환총제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등 모든 부세가 공동납형태로 징수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재정은 총액제로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총액징수제로 인하여 인징(隣徵)·족징(族徵)이라 하여 도피자가 10년이 넘으면 면세하게 되어 있었으나 도망자의 납세분을 친척이나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서 강제로 징수하고, 황구첨정이라 하여 만 14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리고 그 세금을 착복하였으며, 백골징포라 하여 만 60세가 넘었거나 사망한 자에게 징수하는 등 군역의 폐단은 그치지 않았다.
15. 고려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지방의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어 행정을 담당하였다.
② 중앙군은 2군 6위, 지방군은 주현군․주진군으로 편성되었다.
③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였으며, 발해 세자 대광현을 왕족으로 대우하였다.
④ 광종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였고, 개경을 황도(皇都)라 불렀으며,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⑤ 국가에 봉사하는 대가로 관료에게 수조권을 지급하는 전시과제도를 운영하였다.
정답: ①
* 고려 시대의 여러 통치 제도
① 고려의 지방의 행정 조직은 5도와 양계, 경기로 크게 나누고, 그 안에 3경, 4도호부, 8목을 비롯하여 군·현·진 등을 설치하였다. 이 중 5도는 상설 행정 기관이 없는 일반 행정 단위로서, 안찰사가 파견되어 도내의 지방을 순찰하였다. 도에는 주와 군·현이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중앙에서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것은 주군·주현과 진까지였다. 또한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더 많았고, 속현과 향·부곡·소 등 특수 행정구역은 주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조세나 공물의 징수와 노역 징발 등 실제적인 행정 사무는 향리가 담당하였다.
② 고려의 지방군은 국경 지방인 양계에 주둔하는 주진군과 5도의 일반 군현에 주둔하는 주현군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부대는 중앙군인 2군 6위의 군인들과는 달리 군인전이 지급되지는 않았다.
③ 고려 태조(918~943)는 926년 발해가 거란(요)에 의해 멸망당하여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많은 유민들이 몰려들자 이들을 받아들이며 후일 고구려.발해계도 포용하는 진정한 민족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④ 광종(949~975)은 수도였던 개경을 황도(皇都)로 높여 부르고, 서경을 제2의 수도로 승격시켜서도(西都)라 칭하였다. 고려는 초창기부터 군주가 자기 자신을 부르는 호칭은 짐(朕), 군주의 명령은 조서(詔書), 군주의 호칭은 폐하(陛下), 군주의 아들은 태자(太子)로 정하는 등 황제국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뿐만 아니라, 묘호와 연호(광덕.준풍)를 사용하며 내부적으로 황제국 체제를 갖추었다.
⑤ 고려 관직 복무와 직역에 대한 대가로 수조권을 지급하는 전시과 제도를 운영하였다. 이에 따라 문무 관리로부터 군인, 한인에 이르기까지 18등급으로 나누어 곡물을 수취할 수 있는 전지와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시지를 주었다.
* 고려 시대의 여러 통치 제도
① 고려의 지방의 행정 조직은 5도와 양계, 경기로 크게 나누고, 그 안에 3경, 4도호부, 8목을 비롯하여 군·현·진 등을 설치하였다. 이 중 5도는 상설 행정 기관이 없는 일반 행정 단위로서, 안찰사가 파견되어 도내의 지방을 순찰하였다. 도에는 주와 군·현이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중앙에서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것은 주군·주현과 진까지였다. 또한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더 많았고, 속현과 향·부곡·소 등 특수 행정구역은 주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조세나 공물의 징수와 노역 징발 등 실제적인 행정 사무는 향리가 담당하였다.
② 고려의 지방군은 국경 지방인 양계에 주둔하는 주진군과 5도의 일반 군현에 주둔하는 주현군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부대는 중앙군인 2군 6위의 군인들과는 달리 군인전이 지급되지는 않았다.
③ 고려 태조(918~943)는 926년 발해가 거란(요)에 의해 멸망당하여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많은 유민들이 몰려들자 이들을 받아들이며 후일 고구려.발해계도 포용하는 진정한 민족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④ 광종(949~975)은 수도였던 개경을 황도(皇都)로 높여 부르고, 서경을 제2의 수도로 승격시켜서도(西都)라 칭하였다. 고려는 초창기부터 군주가 자기 자신을 부르는 호칭은 짐(朕), 군주의 명령은 조서(詔書), 군주의 호칭은 폐하(陛下), 군주의 아들은 태자(太子)로 정하는 등 황제국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뿐만 아니라, 묘호와 연호(광덕.준풍)를 사용하며 내부적으로 황제국 체제를 갖추었다.
⑤ 고려 관직 복무와 직역에 대한 대가로 수조권을 지급하는 전시과 제도를 운영하였다. 이에 따라 문무 관리로부터 군인, 한인에 이르기까지 18등급으로 나누어 곡물을 수취할 수 있는 전지와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시지를 주었다.
16. 다음은 조선시대 사림세력의 분화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ㄱ)~
(ㄹ) 세력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선조 때에 이르러 사림학자들이 많이 배출되면서 사림사회에 갈등과 분화가 일어나 붕당이 형성되었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ㄱ) 세력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ㄴ) 세력으로 나뉘었다. 이후 (ㄱ) 세력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온건파인 (ㄷ) 세력과 급진파인 (ㄹ) 세력으로 다시 나뉘었다. |
② (ㄱ) 세력은 선비들의 수기(修己)에 역점을 두어 치자(治者)의 도덕성 제고를 중요하게 여겼다.
③ (ㄴ) 세력은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주장하며, 정권 유지를 도모하였다.
④ (ㄷ) 세력은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자의대비의 상복 문제를 놓고 사대부와 같은 예로 행해야 한다고 하여 신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⑤ (ㄹ) 세력은 대체로 조식과 서경덕 문인들이 주류를 이루며, 광해군을 지지하였다.
정답: ④
* 붕당정치의 전개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그 동안 향촌에서 세력기반을 다져 오던 사림 세력이 대거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며, 사림 세력은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명종 때 이후 정권에 참여해 온 기성 사림은 훈구.척신 정치에 대한 과감한 개혁에 소극적이었다. 반면에, 명종 때의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새롭게 정계에 등장한 신진 사림은 원칙에 더욱 철저하여 사림 정치의 실현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두 세력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김효원을 비롯한 신진 관료가 중심이 되어 동인이 형성되었고, 심의겸을 비롯한 기성관료가 중심이 되어 서인이 형성되었다.
붕당은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김효원과 심충겸)와 공론을 둘러싸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것에서 비롯되었다(1575).
선조 때에 경기의 서경덕 학파와 영남의 이황 학파(주리론, 도덕원리와 신분질서 중시, 선비의 수기치인 강조), 조식 학파(의를 강조, 많은 의병장 산출)가 동인을 형성하였으나, 기축옥사(1589~1591) 즉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연루된 동인이 서인 정철에 의해 큰 타격을 받았으나(호남 동인 몰락), 곧 정철을 광해군 세자 건저 문제로 탄핵시켜 서인 정권을 몰락시켰다(1591). 이 때 서인의 처벌 수위를 놓고서 이황의 학파는 남인(온건론)을 형성하고 서경덕과 조식의 학파는 북인(급진.강경론)으로 분화되었다.
한편 기호 지역의 이이 학파(주기론, 현실 개혁 중시)와 성혼 학파(후일 소론, 절충적 성격)가 서인을 형성하였다. 서인은 숙종 대에 이르러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놀고 노론(강경론)과 소론(온건론)으로 분화되었다.
광해군 때의 집권 세력이며 그를 지지한던 북인에 눌리던 서인들은 인조 반정(1623)을 주도하였으며,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고 2차례의 호란을 야기하였다.
특히 병자호란의 삼전도의 치욕적 항복은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1649~1659)으로 하여금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의 서인 세력들과 함께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서인 세력은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고, 5군영을 중심으로 정권 유지를 도모하는데 급급하였다.
현종 때에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예송(기해예송-1659, 갑인예송-1674)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때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놓고 신권을 강화하려는 서인(송시열, 송준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설(기해)과 9개월(갑인)설을 주장하였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남인(허목, 허적, 윤휴, 윤선도)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설(기해)과 1년설(갑인)을 각각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1차 기해예송 때에는 서인이, 2차 갑인예송 때에는 남인이 집권하였다.
* 붕당정치의 전개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그 동안 향촌에서 세력기반을 다져 오던 사림 세력이 대거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며, 사림 세력은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명종 때 이후 정권에 참여해 온 기성 사림은 훈구.척신 정치에 대한 과감한 개혁에 소극적이었다. 반면에, 명종 때의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새롭게 정계에 등장한 신진 사림은 원칙에 더욱 철저하여 사림 정치의 실현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두 세력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김효원을 비롯한 신진 관료가 중심이 되어 동인이 형성되었고, 심의겸을 비롯한 기성관료가 중심이 되어 서인이 형성되었다.
붕당은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김효원과 심충겸)와 공론을 둘러싸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것에서 비롯되었다(1575).
선조 때에 경기의 서경덕 학파와 영남의 이황 학파(주리론, 도덕원리와 신분질서 중시, 선비의 수기치인 강조), 조식 학파(의를 강조, 많은 의병장 산출)가 동인을 형성하였으나, 기축옥사(1589~1591) 즉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연루된 동인이 서인 정철에 의해 큰 타격을 받았으나(호남 동인 몰락), 곧 정철을 광해군 세자 건저 문제로 탄핵시켜 서인 정권을 몰락시켰다(1591). 이 때 서인의 처벌 수위를 놓고서 이황의 학파는 남인(온건론)을 형성하고 서경덕과 조식의 학파는 북인(급진.강경론)으로 분화되었다.
한편 기호 지역의 이이 학파(주기론, 현실 개혁 중시)와 성혼 학파(후일 소론, 절충적 성격)가 서인을 형성하였다. 서인은 숙종 대에 이르러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놀고 노론(강경론)과 소론(온건론)으로 분화되었다.
광해군 때의 집권 세력이며 그를 지지한던 북인에 눌리던 서인들은 인조 반정(1623)을 주도하였으며,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고 2차례의 호란을 야기하였다.
특히 병자호란의 삼전도의 치욕적 항복은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1649~1659)으로 하여금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의 서인 세력들과 함께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서인 세력은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고, 5군영을 중심으로 정권 유지를 도모하는데 급급하였다.
현종 때에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예송(기해예송-1659, 갑인예송-1674)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때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놓고 신권을 강화하려는 서인(송시열, 송준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어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1년설(기해)과 9개월(갑인)설을 주장하였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남인(허목, 허적, 윤휴, 윤선도)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3년설(기해)과 1년설(갑인)을 각각 주장하여 대립하였다. 1차 기해예송 때에는 서인이, 2차 갑인예송 때에는 남인이 집권하였다.
17. 다음과 같은 농사기술이 널리 보급되던 시기의 생활모습이 아닌 것은?
일반적으로 모내기법을 귀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김매기의 수고를 줄이는 것이 첫째이다. 두 땅의 힘으로 하나의 모를 서로 기르는 것이 둘째이다. 옛 흙을 떠나 새 흙으로 가서 고갱이를 씻어 내어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셋째이다. 어떤 사람은 모낸 모가 큰 가뭄을 만나면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된다 하여 모내기법을 위험한 방도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무릇 벼를 심는 논에는 물을 끌어들일 수 있는 하천이나 물을 댈 수 있는 저수지가 꼭 필요하다. 이러한 것이 없다면 벼논이 아니다. 벼논이 아닌 곳에서 가뭄을 우려한다면 어찌 유독 모내기법에 대해서만 그렇다고 하는가.
-『임원경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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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광작(廣作)이 성행하게 되었는데, 광작은 지주도 할 수 있고, 병작인도 할 수 있었다.
③ 새로운 지대 관행으로 일정 액수를 지대로 납부하는 도조법이 확산되어갔다.
④ 쌀의 상품화가 활발해지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증가하였다.
⑤ 병작지를 얻기 어려워진 농민들은 도시로 옮겨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었다.
정답: ①
* 이앙법이 유행한 조선 후기 경제상
조선 후기에는 농민들은 모내기법(이앙법)을 확대하였다. 기존의 직파법에 비해 모내기법은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을 덜 수 있게 되자,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였고(광작), 벼와 보리 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다. 지주, 자작농은 물론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하여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다. 이전보다 넓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된 광작 농업으로 농가의 소득이 늘어나 부농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앙법의 확산의 결과는 일부 농민이 소득을 증대시켜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토지를 잃고 몰락해 가는 농민도 증가하였다(소수의 부농과 대다수 농민의 몰락). 병작지를 얻기 어려워 농촌을 떠난 다수의 농민은 도시로 옮겨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었으며, 일부 농민은 광산이나 포구를 찾아 임노동자가 되었다.
또,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다.
특히, 쌀의 상품화가 활발하였다. 쌀은 이 시기에 이르러 그 수요가 크게 늘어나 장시에서 가장많이 거래되었다. 쌀의 수요가 늘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에 소작 농민은 좀 더 유리한 경작 조건을 얻어 내기 위하여 지주에게 대항하여 소작 쟁의를 벌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작권을 인정받아 지주가 함부로 소작지를 빼앗지 못하고, 정률제로 수확량의 반을 내던 소작료도(타조법) 일정 액수(정액제)를 곡물이나 화폐로 내도록 하는 변화가 나타났다(도조법).
① 고려 후기에는 이암이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1349)를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는 중국 밭농사 위주의 화북 농법을 위주여서 논농사 위주의 우리 실정에 다소 맞지 않았다.
* 이앙법이 유행한 조선 후기 경제상
조선 후기에는 농민들은 모내기법(이앙법)을 확대하였다. 기존의 직파법에 비해 모내기법은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을 덜 수 있게 되자,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였고(광작), 벼와 보리 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다. 지주, 자작농은 물론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하여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다. 이전보다 넓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된 광작 농업으로 농가의 소득이 늘어나 부농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앙법의 확산의 결과는 일부 농민이 소득을 증대시켜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토지를 잃고 몰락해 가는 농민도 증가하였다(소수의 부농과 대다수 농민의 몰락). 병작지를 얻기 어려워 농촌을 떠난 다수의 농민은 도시로 옮겨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었으며, 일부 농민은 광산이나 포구를 찾아 임노동자가 되었다.
또,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다.
특히, 쌀의 상품화가 활발하였다. 쌀은 이 시기에 이르러 그 수요가 크게 늘어나 장시에서 가장많이 거래되었다. 쌀의 수요가 늘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에 소작 농민은 좀 더 유리한 경작 조건을 얻어 내기 위하여 지주에게 대항하여 소작 쟁의를 벌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작권을 인정받아 지주가 함부로 소작지를 빼앗지 못하고, 정률제로 수확량의 반을 내던 소작료도(타조법) 일정 액수(정액제)를 곡물이나 화폐로 내도록 하는 변화가 나타났다(도조법).
① 고려 후기에는 이암이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1349)를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는 중국 밭농사 위주의 화북 농법을 위주여서 논농사 위주의 우리 실정에 다소 맞지 않았다.
18. 다음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역사서이다. 편찬 시기순으로 올바르게 배열한 것은?
ㄱ. '해동고승전' ㄴ. '삼국유사' ㄷ. '7대실록' ㄹ. '삼국사기' |
② ㄱ-ㄷ-ㄹ-ㄴ
③ ㄴ-ㄷ-ㄹ-ㄱ
④ ㄷ-ㄹ-ㄱ-ㄴ
⑤ ㄹ-ㄱ-ㄴ-ㄷ
정답: ④
* 고려 시대의 역사서
고려 시대에는 유학이 발달하고 유교적인 역사 서술 체계가 확립되어 많은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건국 초기부터 왕조실록을 편찬하였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다. 이에,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7대 실록을 현종 때 편찬하기 시작하여 덕종 때 완성하였다(황주량 편찬, 1013~1034). 그러나 고려 왕조의 실록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인종 때에는 김부식 등이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1145)를 편찬하였다.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로서, 고려 초에 씌여진 구삼국사(단군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져 온 역사 계승 의식으로 추정).를 기본으로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기전체로 서술하였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고구려 계승 의식을 뚜렷하게 표방하였으나, 중기에 이르러 신라 계승 의식이 강화되었는데, 삼국사기에는 신라 계승 의식이 더 많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려 후기에는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바탕으로 전통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 하려는 경향이 대두하였다. 이는 무신정변 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몽골 침략의 위기를 겪은 후에 나타난 변화였다.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 역사서로는 해동고승전, 동명왕편,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을 꼽을 수 있다.
각훈이 쓴 해동고승전(1215)은 삼국 시대의 승려 30여 명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현재 일부만 남아 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고구려 건국의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로서,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반영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였다.
충렬왕 때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1281)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는 등 우리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으며,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겨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1287)도 우리 나라의 역사를 단군에서부터 서술하면서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파악하는 자주성을 나타내었다.
* 고려 시대의 역사서
고려 시대에는 유학이 발달하고 유교적인 역사 서술 체계가 확립되어 많은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건국 초기부터 왕조실록을 편찬하였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다. 이에,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7대 실록을 현종 때 편찬하기 시작하여 덕종 때 완성하였다(황주량 편찬, 1013~1034). 그러나 고려 왕조의 실록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인종 때에는 김부식 등이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1145)를 편찬하였다.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로서, 고려 초에 씌여진 구삼국사(단군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져 온 역사 계승 의식으로 추정).를 기본으로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기전체로 서술하였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고구려 계승 의식을 뚜렷하게 표방하였으나, 중기에 이르러 신라 계승 의식이 강화되었는데, 삼국사기에는 신라 계승 의식이 더 많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려 후기에는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바탕으로 전통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 하려는 경향이 대두하였다. 이는 무신정변 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몽골 침략의 위기를 겪은 후에 나타난 변화였다.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 역사서로는 해동고승전, 동명왕편,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을 꼽을 수 있다.
각훈이 쓴 해동고승전(1215)은 삼국 시대의 승려 30여 명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현재 일부만 남아 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고구려 건국의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로서,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반영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였다.
충렬왕 때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1281)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는 등 우리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으며,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겨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1287)도 우리 나라의 역사를 단군에서부터 서술하면서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파악하는 자주성을 나타내었다.
19. 다음은 신간회에 대한 설명이다. (ㄱ)~(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신간회는 3․1운동 이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처음으로 민족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전국에 약 140여 개소의 지회를 두고, (ㄱ)약 4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자매 단체로 (ㄴ)근우회가 있었다. 신간회는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열었고, (ㄷ)강령을 마련하고, 노동쟁의와 소작쟁의, 동맹휴학 등을 지도했는데, (ㄹ)원산노동자총파업과 (ㅁ)광주학생운동을 지원한 것은 대표적 활동이었다. |
② (ㄴ) - 여성의 단결, 남녀평등, 여성 교육 확대, 여성 노동자 권익 옹호 등을 전개하였다.
③ (ㄷ) - 강령은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구함, 단결을 공고히 함,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이었다.
④ (ㄹ) - 일제 강점기 노동 운동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⑤ (ㅁ) -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맡겨라. 일본제국주의를 타파하라. 8시간 노동제를 채택하라.’는 내용의 전단을 뿌리며 만세를 불렀다.
정답: ⑤
* 신간회(1927~1931)에 대하여
1920년대 중반에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세력은 타협론자들의 자치 운동을 경계하며, 사회주의세력과 연대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치안유지법(1925)으로 탄압받는 사회주의 세력도 1926년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이에 호응하여 결국,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뛰어넘어 민족 협동 전선(민족 유일당)을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아 합법적 단체인 신간회가 창립되었고(1927.2, 초대 회장 이상재), 같은 성격의 여성 자매 단체로 근우회(1927~1931)가 설립되었다.
신간회는 3대 강령에서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를 주장하였는데 여기서 기회주의는 자치론을 주장하는 타협론자들을 말하며 이를 경계하였다.
신간회는 농민, 노동자, 상인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각계각층이 망라되어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착취 기관 철폐 등을 주장하였고, 사회 운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일제하 최대의 노동운동인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9)의 지원, 갑산 화전민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1929년에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사 결과를 발표할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
신간회는 민중대회 사건 후, 새 집행부의 투쟁 방법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대립이 생겨 해소되고 말았다(1931). 하지만, 신간회는 국내 민족 운동세력의 역량을 총결집시켰다.
② 여성 단체들은 신간회의 결성을 계기로 ‘민족적 처지의 탈피와 봉건 유제의 타파’를 주장하면서 민족 협동 전선체인 근우회를 출범시켰다(1927.5). 근우회는 기관지 ‘근우’를 발간하고 여성 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운동, 농민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강연회와 토론회 개최, 야학 설치 등을 통해 여성 계몽활동과 함께 여성 노동자의 권익 옹호에 앞장섰다. 그러나 1931년 신간회가 해산되면서 근우회도 해산되고 말았다.
⑤ 순종 인산일을 기회로 일어난 1926년의 6.10 만세운동은 학생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도 참여하여 "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맡겨라, 일본 제국주의를 타파하라. 8시간 노동제를 채택하라.’는 내용의 전단을 뿌리며 만세를 불렀다.
*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조선인 본위의 교육’, ‘조선 독립 만세’를 내건 시위 운동은 1929년 11월에 발발한 광주학생 항일운동이다.
* 신간회(1927~1931)에 대하여
1920년대 중반에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세력은 타협론자들의 자치 운동을 경계하며, 사회주의세력과 연대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치안유지법(1925)으로 탄압받는 사회주의 세력도 1926년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이에 호응하여 결국,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뛰어넘어 민족 협동 전선(민족 유일당)을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아 합법적 단체인 신간회가 창립되었고(1927.2, 초대 회장 이상재), 같은 성격의 여성 자매 단체로 근우회(1927~1931)가 설립되었다.
신간회는 3대 강령에서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를 주장하였는데 여기서 기회주의는 자치론을 주장하는 타협론자들을 말하며 이를 경계하였다.
신간회는 농민, 노동자, 상인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각계각층이 망라되어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착취 기관 철폐 등을 주장하였고, 사회 운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일제하 최대의 노동운동인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9)의 지원, 갑산 화전민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1929년에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사 결과를 발표할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
신간회는 민중대회 사건 후, 새 집행부의 투쟁 방법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대립이 생겨 해소되고 말았다(1931). 하지만, 신간회는 국내 민족 운동세력의 역량을 총결집시켰다.
② 여성 단체들은 신간회의 결성을 계기로 ‘민족적 처지의 탈피와 봉건 유제의 타파’를 주장하면서 민족 협동 전선체인 근우회를 출범시켰다(1927.5). 근우회는 기관지 ‘근우’를 발간하고 여성 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운동, 농민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강연회와 토론회 개최, 야학 설치 등을 통해 여성 계몽활동과 함께 여성 노동자의 권익 옹호에 앞장섰다. 그러나 1931년 신간회가 해산되면서 근우회도 해산되고 말았다.
⑤ 순종 인산일을 기회로 일어난 1926년의 6.10 만세운동은 학생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도 참여하여 "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맡겨라, 일본 제국주의를 타파하라. 8시간 노동제를 채택하라.’는 내용의 전단을 뿌리며 만세를 불렀다.
*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조선인 본위의 교육’, ‘조선 독립 만세’를 내건 시위 운동은 1929년 11월에 발발한 광주학생 항일운동이다.
20. 다음 설명은 고조선 이후 만주와 한반도에 등장한 여러 나라의 특징을 나타낸 것이다. (ㄱ)~(ㄹ)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ㄱ) 소녀가 10여 세가 되면 양가에서 서로 혼인할 것을 약속한 뒤, 소녀는 남자집에 보내졌다. 소녀가 장성하여 처녀가 되면 다시 본가로 돌려보낸다. 처녀집에서는 돈을 요구하고 그것이 지불된 뒤에야 처녀는 신랑집으로 가게 되었다. (ㄴ) 언어와 풍습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았다. 그 읍락은 산과 내[川]를 경계로 하여 구역이 나뉘어 있어 함부로 다른 구역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한다. 그리고 이를 어겼을 경우 곧 벌책을 가하여 생구(生口), 즉 노예와 소나 말로 보상하게 하였는데, 이를 일컬어 ‘책화(責禍)’라 하였다. (ㄷ) 이 나라에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우가·저가·구가와 대사자·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 가는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ㄹ) 이 나라에서는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해마다 씨뿌리기가 끝난 5월과 추수가 끝난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 때 낮이나 밤이나 술자리를 베풀고 축제를 벌였다. 춤출 때에는 수십 명이 줄을 서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추었다. |
② (ㄴ) - 정치와 제사가 분리된 제정분리 사회였으며, 천군이 소도라는 영역을 지배하였다.
③ (ㄷ) - 농사일이 모두 끝난 12월에 영고를 행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가무를 즐겼다.
④ (ㄹ) - 읍군과 삼로가 각각 자신의 부족을 다스렸다.
⑤ (ㄱ)∼(ㄹ) 모두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였다.
정답: ③
* 여러 초기국가들
㉠ 옥저: 알려진 제천행사가 없었으며, 장래에 혼인할 것을 약속하면, 여자가 어렸을 때에 남자 집에 가서 성장한 후에 남자가 예물을 치르고 혼인을 하는, 일종의 매매혼인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였다. 또, 목곽 입구에는 죽은 자의 양식으로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 동예: 동예는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농경, 어로 등 경제 생활이 윤택하였다.
특히, 명주와 삼베를 짜는 등 방직 기술이 발달하였다. 특산물로는 단궁이라는 활과 과하마, 반어피 등이 유명하였다. 동예에서는 매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폐쇄적인 씨족 사회의 전통이 매우 강하여 족외혼(族外婚)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각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책화라 하여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였다.
㉢ 부여: 가장 북쪽인 만주 지방에 자리하였던 부여에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부여의 풍속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이것은 수렵사회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추수가 끝난 12월에 열렸다. 이 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죄수를 풀어주기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 삼한: 다른 국가들이 제정일치(군장과 제사장이 일치) 국가 있는데 비해 삼한은 제정분리의 국가였다. 이는 신성 구역인 소도의 존재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천군이 주관하는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죄인이라도 도망을 하여 이 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제사장의 존재에서 고대 신앙의 변화와 제정의 분리를 엿볼 수 있다.
① 고구려의 혼인 풍습으로는 혼인을 정한 뒤 신부집 뒤꼍에 조그만 집을 짓고, 거기서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돌아가는 제도인 서옥제라는 풍속이 있었다.
④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는 변방에 치우쳐 있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각 읍락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이들은 큰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⑤ 초기국가들 중 고구려만이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는데 성공하였다.
* 여러 초기국가들
㉠ 옥저: 알려진 제천행사가 없었으며, 장래에 혼인할 것을 약속하면, 여자가 어렸을 때에 남자 집에 가서 성장한 후에 남자가 예물을 치르고 혼인을 하는, 일종의 매매혼인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였다. 또, 목곽 입구에는 죽은 자의 양식으로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 동예: 동예는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농경, 어로 등 경제 생활이 윤택하였다.
특히, 명주와 삼베를 짜는 등 방직 기술이 발달하였다. 특산물로는 단궁이라는 활과 과하마, 반어피 등이 유명하였다. 동예에서는 매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폐쇄적인 씨족 사회의 전통이 매우 강하여 족외혼(族外婚)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각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책화라 하여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였다.
㉢ 부여: 가장 북쪽인 만주 지방에 자리하였던 부여에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부여의 풍속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이것은 수렵사회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추수가 끝난 12월에 열렸다. 이 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죄수를 풀어주기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 삼한: 다른 국가들이 제정일치(군장과 제사장이 일치) 국가 있는데 비해 삼한은 제정분리의 국가였다. 이는 신성 구역인 소도의 존재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천군이 주관하는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죄인이라도 도망을 하여 이 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제사장의 존재에서 고대 신앙의 변화와 제정의 분리를 엿볼 수 있다.
① 고구려의 혼인 풍습으로는 혼인을 정한 뒤 신부집 뒤꼍에 조그만 집을 짓고, 거기서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돌아가는 제도인 서옥제라는 풍속이 있었다.
④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는 변방에 치우쳐 있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각 읍락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이들은 큰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⑤ 초기국가들 중 고구려만이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하는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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